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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1.01.06  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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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곡 600여 곡의 판권을 음악기업에 넘긴 밥 딜런의 삶과 음악세계

밥 딜런(1941~ )이 지난 60년간 창작한 자신의 노래 600여 곡의 판권을 세계 최대 음악기업인 유니버설뮤직에 넘겼다. 세부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미국 언론은 판권 가액이 2억∼4억 달러(약 2150억∼4300억 원)에 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딜런이 작곡한 노래 가치는 비틀스에 맞먹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딜런은 1962년 데뷔 앨범 이후 정규 앨범 39장을 냈는데 1억 25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밥 딜런의 삶과 음악세계를 알아본다.

노랫말은 그 자체가 시… 그는 시를 노래한 최초의 가수

20대 시절의 밥 딜런은 대중음악에 위대한 언어의 숨결을 불어넣은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었다. 인종차별과 전쟁 반대 등 정치적이고 사회성 짙은 음악을 끊임없이 발표해 ‘저항의 아이콘’으로도 불렸다. 하지만 그는 훗날 “반체제를 이끄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고자 했던 적이 없다”며 자신을 향한 미신적 숭배들이 영혼을 가두고 메스껍게 만들었다고 토로했다.
밥 딜런은 미국 미네소타주 덜루스의 시골 마을에서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피아노 연주, 그림 그리기, 시 쓰기, 영화 보기를 즐겼다. 특히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 같은 반(反)영웅을 꿈꿨다.
고교 시절 꿈은 로큰롤러였다. 그러나 1959년 미네소타대에 입학했을 때 학생들 사이에 조용히 퍼지고 있는 포크송을 접하면서 로큰롤에서 포크송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포크송은 1959년 7월 제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을 통해 조앤 바에즈(1941~ )가 데뷔하고, ‘현대 포크송의 창시자이자 사회운동가’로 칭송받는 피트 시거(1919~2014)가 인종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며 부른 노래가 다양한 계층의 지지를 받으면서 시대를 풍미했다.
딜런은 1961년 대학을 중퇴하고 무작정 뉴욕으로 가 ‘미국 보헤미안들의 성지’인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클럽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 무렵 본명인 로버트 앨런 짐머만을 웨일스의 방랑시인 딜런 토머스의 이름에서 따 밥 딜런으로 바꾸었다.
딜런은 금세 그리니치 빌리지 분위기에 동화되어 저항가요를 만들고, 피트 시거가 창간한 등사판 잡지에 노래를 발표했다. 어려서부터 시를 써온 그의 노랫말은 그 자체가 시였고, 그는 시를 노래한 최초의 가수가 되었다. 헐렁한 가죽 모자를 눌러쓴 채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부르는 그에게 뉴욕타임스가 ‘노래하는 시인’이라고 격찬했다. 이런 그를 눈여겨본 이가 있었으니 유명 음반 제작자 존 하몬드였다. 딜런은 그의 도움으로 1962년 3월 1집 앨법 ‘Bob Dylan’으로 데뷔했다.

‘Blowing In the Wind’, 반전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곡으로 부각돼

1960년대는 격동기였다.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 변화를 향한 열정과 좌절이 응축된 시기였다. 미국도 흑인들의 공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이라는 역사상 가장 뜨거운 시기를 관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딜런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저항의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1963년 5월 발표한 2번째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에 수록된 ‘Blowing In the Wind(바람만이 아는 대답)’은 반전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곡으로 부각되었다. 노래는 조앤 바에즈의 ‘도나도나’와 더불어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반대하는 노래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고 곧 빌보드 팝 차트 2위까지 올랐다.
딜런은 바에즈 등과 함께 1963년 8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로 유명한 워싱턴대행진에도 참가해 수십만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딜런은 점점 저항과 반전 음악의 기수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그는 “나는 단지 음악가일 뿐”이라며 그런 분위기를 거부했다. 그때의 심경을 훗날 토로했는데 “나는 누군가가 개들에게 던진 한 점의 고기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2004년)에서는 “가족을 지키고 먹여 살리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잘난 체하는 인간들이 나를 ‘대변자’니, 심지어 ‘시대의 양심’이니, 언론에 떠들며 사람들을 속였다”고 했다.

“세계의 시곗바늘이 돌고 세월이 흐르듯 나도 변한다!”

▲ 밥 딜런

1964년 밥 딜런은 음악적으로 방황했다. 어쿠스틱 기타 연주와 노래에 심각한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 중 자동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스의 노래를 듣고 새로운 음악의 출현에 충격을 받았다. 딜런은 1965년 7월 25일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가해 어쿠스틱 기타 대신 전기기타로 ‘Like a Rolling Stone’ 등 3곡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포크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록의 상업성과 타협했다”, “포크 음악의 배신자” 등 온갖 야유가 터져나왔다. 당시 포크 가수들이 전기기타로 연주한다는 것은 곧 세속적 상업주의를 의미했다. 딜런은 “세계의 시곗바늘이 돌고 세월이 흐르듯 나도 변한다!”라는 말로 심경을 대신했다. 그런데 당시 야유에 대해서는 “부실한 앰프 때문에 딜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너무 짧은 공연에 항의한 것” 등의 증언도 있다.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든 딜런은 비틀스를 지켜보며 통기타와 하모니카만으로는 포크 음악을 발전시키기는커녕 명맥마저 지킬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전기기타를 들었으나 세상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었고 그날 이후 ‘포크 록’은 만개했다. 특히 ‘Like a Rolling Stone’은 빌보트 차트 2위, 영국 차트 4위를 기록했다. 이 곡이 수록된 6번째 앨범 ‘Highway 61 Revisited’는 페스티벌 한 달 후 발매되어 미국에서 3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러나 딜런은 1966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몇 년간 칩거하다가 어느 날 컨트리뮤직과 스탠더드 팝송을 들고 나왔다. 새롭고 젊은 음악의 기수였던 그가 가장 고루한 장르의 음악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당시 포크가 일종의 반문화의 표상이었다면 컨트리는 적어도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반동적인 문화의 상징이었다.
딜런은 연예인의 화려한 생활과 동떨어진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극성팬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여러 번 이사를 다니고 음악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가장 큰 업적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내 아이들 여섯을 잘 키웠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딜런은 한국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물결이 형성되는 데에도 밑거름을 뿌렸다. 군사독재정권 하의 1970년대 한대수를 비롯 김민기 양희은 등이 통기타 선율에 꽉 막힌 청춘의 설움과 저항의 메시지를 담았던 것도 딜런의 영향이었다.

美 ‘롤링 스톤’지, ‘Like a Rolling Stone’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로 선정

딜런은 1970년대 후반에는 다소 이단적인 기독교 원리주의에 심취해 몇 년 동안 복음성가만을 불렀다. 그 시절 딜런은 예루살렘 성전터와 황금돔이 바라보이는 감람산을 방문해 무릎을 꿇고 깊은 묵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1년 세상으로 귀환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긴 슬럼프에 빠졌다가 1994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통해 복귀했다.
딜런은 198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1988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999년에는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에 선정되었다. 2000년에는 영화 ‘원더 보이스’의 주제곡 ‘Things Have Changed’로 아카데미상 음악상을, 2008년에는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공로로 퓰리처상 특별을 받았다. 2004년에는 미국의 음악잡지 ‘롤링 스톤’에 의해 ‘역대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2위(1위는 비틀스)로, 노래 ‘Like a Rolling Stone’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로 선정되었다. 2012년 미국 대통령 자유의 메달, 2013년 프랑스 레지옹도뇌르를 수훈했다.
2006년 발표한 ‘Modern Times’ 앨범은 그래미상 2개 부문을 수상하고, ‘롤링 스톤’이 선정한 ‘올해의 앨범’이 되었다. 딜런 개인으로는 그 노래로 30년만에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르고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현존하는 최고령 아티스트로 기록되었다.
이런 그를 주위에서 지속적으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했다. 그러나 그의 수상 가능성을 몽상에 가까운 일로 치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2016년 마침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위대한 미국 가요의 전통 속에 새로운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대중가수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1901년 노벨상이 생긴 후 115년 만에 처음이었다.
딜런은 수상은 받아들이면서도 '선약'을 핑계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노벨상 역사에서 시상식에 불참한 경우는 딱 셋 뿐이었다. 그의 노벨상 수상에 모두가 놀라워하면서도 세론은 양분되었다. 딜런에게 축하를 보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순수 문학가 대신 가수인 딜런을 수상자로 낙점한 스웨덴 한림원의 급진적인 결정을 비판하는 이들도 많았다.


염상섭 소설 ‘삼대’ 발표 90년… 당대 중산층 생활의 이면과 젊은 지식인의 초상을 서울 토박이의 언어 감각으로 묘사한 작품

염상섭(1897~1963)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서울 중산층의 풍속, 의식, 토박이 서울말씨를 창작의 텃밭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당대 서울 중류 계층의 삶을 생생히 포착한 생활 어휘들로 가득하다. “순수 국어의 보고”, “근대적 생활 감각의 언어”로 불리는 이유다. 그가 쓴 장편 17편, 단편 160편, 평론 100편, 수필 30편 등이 우리 근대문학의 뼈대를 세웠다는 게 평론가들의 중평이다. 그래서 붙여진 수식어가 “남북을 통튼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화신”이다.

남북을 통튼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염상섭은 서울에서 태어나 1912년 보성중학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친 후 1918년 4월 게이오대에 입학했으나 그해 10월 자퇴했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오사카의 한 공원에서 거사를 준비했으나 전날 밤 체포되어 3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염상섭은 1920년 4월 창간한 동아일보 창간 기자로 입사했으나 2개월만에 그만두고 7월 25일 문예동인지 ‘폐허’ 창간호를 발행했다. 이후 염상섭은 학교생활이 그러했듯 툭하면 신문사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염상섭은 1920년 10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 일본어와 작문을 가르치면서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1921년 5월 탈고했다. 1921년 7월 오산학교를 사직하고 경성으로 올라와 1921년 8월부터 10월까지 ‘개벽’지에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연재했다.
장기를 빼앗기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은 손발 묶인 지식인들을 형상화한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문단에 화제를 뿌렸다. 한국 근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호평이 쏟아졌다. ‘표본실…’은 당시 조선 문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새로운 양식의 소설이었다.
염상섭은 최남선이 발간한 주간지 ‘동명’의 창간(1922.9)을 준비하면서 ‘묘지’를 발표(1922.7)했다가 1924년 3월 ‘동명’의 후신으로 창간된 시대일보 사회부장이 되자 ‘묘지’를 ‘만세전’으로 제목을 바꿔 4월부터 시대일보에 연재했다. ‘만세전’에서 그는 주인공을 통해 일본의 무자비한 횡포, 조선의 변하지 않는 의식과 낡은 관념을 질타했다.
1929년 9월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입사해 장편소설 ‘광분’(1929.10~1930.8)을 연재하고 ‘신생’지에 단편 ‘출분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했다. ‘광분’에서는 통속적인 애정을 묘사하면서 광주학생의거 등 시국 관련 이야기를 교묘하게 끌어들였다. ‘출분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김동인의 아픈 상처를 건드려 이후 김동인과 불편한 관계의 원인을 제공했다.

‘한국 근대소설의 새로운 장 열었다’ 호평 쏟아져

▲ 염상섭

염상섭은 조선일보에 재직 중이던 1931년 1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1930년대 서울의 보수적인 중산층 집안인 조씨 일가의 몰락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삼대(三代)’를 연재했다. ‘삼대’는 1920~1930년대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3대에 걸친 갈등을 통해 당시 식민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대한제국 말에서부터 식민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소설은 유교 전통사회의 껍질을 깨고 근대사회로 이행해 가던 당대 중산층 생활의 이면과 젊은 지식인의 다양한 초상을 서울 토박이의 언어 감각으로 구체적이고도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염상섭은 1935년 5월 매일신보 부장으로 입사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였기 때문에 문인들이 기자로 활동하거나 작품 기고를 꺼리는 곳이었다. 염상섭도 매일신보 경력을 부끄러워했다. 결국 1936년 3월 매일신보를 그만두고 만주 장춘으로 건너가 만선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근무했다. 이 때부터 해방 때까지는 창작 활동을 중단했다.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그곳에 머물다가 10월 신의주에 도착, 8개월을 머무른 뒤 1946년 6월 38선을 내려와 서울에 정착했다. 1946년 10월부터 9개월간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후에는 전업작가로 돌아서 해방 직후 문단에 처음 나온 장편소설 ‘효풍’(1948.1~11)을 자유신문에 연재하고 ‘만세전’(1948.10)과 ‘삼대’(1948.11)를 책으로 출판했다. 6·25가 발발했을 때는 해군 정훈장교로 근무하다가 휴전협정 후인 1953년 8월 중령으로 예편했다.
염상섭은 술에 취해 걸음걸이가 바르지 못하다고 친구들이 ‘횡보’라고 별명을 붙여주었을 정도로 애주가였다. 남이 권유하면 일부러 딴짓을 해 ‘횡보’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염상섭은 주걸로 통했다. 주사와 기벽도 심했다. 만취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시비 거는 것은 예사였다. 1963년 3월 14일 직장암으로 사망하기 직전에도 부인이 청주를 숟가락에 떠 입에 넣어 주었다고 한다. 만년에 솟기 시작한 이마 위의 혹은 그를 떠올리게 하는 명물이 되었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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