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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불운한 정치인 박헌영에 대한 재평가는 후대의 몫이자 역사의 몫”

기사승인 2021.08.04  15:4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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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사회주의자 이정 박헌영(1900~1956)은 오랜 기간 남한에서 ‘빨갱이’, 북한에서 ‘종파분자’ 혹은 ‘미제 간첩’이었다. 두 체제 어디에도 박헌영이 딛고설 공간은 없었다. 그러나 지난 2004년 <이정 박헌영 전집>의 출간을 계기로 남북한 양측에서 모두 버림받은 박헌영을 재조명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황태일 기자 hti@

당시 9권에 달하는 <이정 박헌영 전집>을 출간했던 이는 바로 박헌영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만기사의 주지스님인 원경 대종사다. 박헌영 선생이 월북하기 전인 1941년, 두 번째 부인 정순년씨가 낳은 아들인 원경 대종사는 송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0년 용화사에서 사미계, 1963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0년 용화선원에서 수선 안거한 이래제방선원에서 참선수행한 그는 제10대 중앙종회의원, 흥왕사, 청룡사, 신륵사 주지 등을 역임했으며, 2014년 만장일치로 원로의원에 선출된 데 이어 지난 2015년 종단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독립운동가이자 당대 최고의 사회주의자 박헌영 선생
최근 이정기념사업회는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사상적 차이로 비운의 삶을 살다간 박헌영 선생의 생애를 조명하는 만화전집 <무너진 하늘>을 출간했다. 민족주의자요, 독립 운동가이자 당대 최고의 공산주의 사상가이며 혁명가였던 이정 박헌영 선생은 역사 속 비운의 인물이다.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태어난 박헌영 선생은 1919년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서 1921년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에 입당, 그해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년 1월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고, 4월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하여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1925년 4월 18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이때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여 그 책임비서가 되었다. 대통령 선호도에서 1위를 기록할 만큼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던 박헌영 선생은 미국 군용기를 타고 귀국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민족통일 문제를 놓고 회담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의 즉각 숙청에 반대하며 독립국가 수립을 뒤로 미루자고 했고 박헌영은 친일파 숙청 문제는 잠시도 미룰 수 없는 민족의 엄숙한 명령이라고 반박했으나 결국 물거품이 되자 1946년 당시 나이 47세로 북으로 올라갔다. 북한에서도 김일성과 1,2인자를 다툴 만큼 영향력을 끼쳤던 그는 1946년 12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을 조선공산당에 흡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였으며 초대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지지 등 공산주의 활동을 지휘하다가,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48년 9월 남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을 지닌 채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4월 남·북노동당이 합쳐 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인 김일성의 밑으로 지위가 전락하였다. 그 후 군사위원회 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위에 있었으나 1953년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8월 3일 체포되었다. 그후 평안북도 철산(鐵山)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6년 7월 19일 반당·종파분자·간첩방조·정부 전복음모 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당했다. 이 사건을 두고 이런 저런 추측은 많았지만 대체로 김일성의 대대적인 정적 숙청작업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됐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타당성을 얻고 있다.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 바쳤지만
사상적 차이로 비운의 삶을 살다간
박헌영 선생의 생애 조명하는 만화전집 출간

▲ 원경 대종사가 아버지를 만난 것은 불과 여섯 차례. 그가 아버지인 박헌영 선생의 모습을 기억하는 첫 만남은 1945년 과천에서 이순금 여사(김삼룡 부인)와 함께 했을 때다

원경 대종사가 기획한 <무너진 하늘>은 지난 2017년 발간된 총 6권짜리 <만화 박헌영>의 후속작으로 조국 광복 이후부터 월북하기까지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책에서 박헌영 선생은 친일 부역자 청산을 과제로 남로당 활동을 이어가지만 미국과 소련, 좌익과 우익의 거듭된 대립으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원경 대종사는 “근현대사 속 부친의 활동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화 전집을 기획했다”면서 “(박한영 선생에 대한) 평전도 나오긴 했지만 학자들이나 필요한 책이 돼서 일반인들한테는 거리가 멀어졌다. 일그러진 우리 슬픈 역사를 (이해하기 쉽게)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선택한 것이 만화다”고 출간 배경을 밝혔다. 이번 책의 출간을 위해 원경 대종사는 학자들과 함께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해 미국과 모스크바의 문서기록보존소를 찾아다니며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료를 수집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왔다. 원경 대종사는 “고종사촌 형이자 선친과 독립 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 어린시절 저의 학문과 무술 지도를 돌보던 한산스님과 약속이기도 했다.”면서 “좋은 세상이 오면 남과 북에서 버림받은 박헌영 선생의 행적에 관련된 자료 수집을 하라던 한산스님의 부탁을 시행하기가 쉽지가 않았다”고 말한다. 원경 대종사는 1985년 당시 변호사였던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역사문제 연구소 창립에도 참여한데 이어 이사장도 역임했다. 박헌영 선생의 일대기를 정리한 것은 물론, 매권 500페이지에 달하는 만화 전집을 그려내기까지 10여 년의 시간이 더 소요됐다. 이러한 노력 끝에 세상에 빛을 본 <무너진 하늘>은 픽션을 최대한 자제하고 사료와 여러 인물의 진술에 입각해 사실적인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경 대종사는 “산 자의 그리움이 족쇄가 돼 시작한 일은 전집 작업 11년, 만화 작업 14년, 도합 25년의 사반세기 세월을 보내고서야 온전한 박헌영의 기록으로 남게 됐다”면서 “책을 읽지 않는 세태에 근현대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역사기록으로 이 만화책이 쓰임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당부했다.

군사정권 시절 고통으로 점철됐던 나날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근현대사가 순탄치 않았던 것처럼 원경 대종사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공산주의라는 말이 금기였던 시절의 삶은 고통의 점철이었다. 원경 대종사는 “남들처럼 아버지 품에서 얘기를 들으며 살지 못했다”며 “독립운동 하다가 수없이 감옥에 들어가시고, 나와서 또 독립운동을 하시려고 곳곳에 조직을 만들며 활동하시던 중에 제가 태어났다. 저에게는 어릴 적 두 번 정도 품에 안긴 기억만 남아 있다”라고 말한다. 그가 열 살 남짓 되었을 때부터는 그의 주변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박헌영 선생이 미군 체포령에 쫓겨 월북한 뒤 원경 대종사를 돌봐준 사람들이 하나둘씩 체포됐던 것. 원종 대종사는 “자전거에 저를 태워 동국대학교, 남산 등의 장충동 일대를 구경시켜주며 찐빵을 사주었던 김삼룡(사회주의 운동가), 만날 때마다 귀여워 해주었던 이주하(사회주의 운동가) 아저씨가 6.25 한국전쟁 직후 사형 당했다”면서 “화엄사에서 제 머리를 삭발해주었던 동월스님은 지리산에서 내려오다 경찰에 잡혀 유치장에 있던 저를 구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빨치산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말하더니, 해방 후엔 아버지는 죄인이고 무서운 사람이니 아들이라 말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대체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 사람들은 왜 나를 살리려고 하고, 끝내 비극의 죽음을 맞는가!”라며 “청암사, 해인사를 거쳐 예산 대련사에 머물던 1958년 12월15일 한산스님이 찾아와 제사상을 차렸는데, ‘박헌영 영가’라 쓰인 위패를 보고 그때 처음 아버지는 어떤 분인지 여쭤보았다”고 덧붙였다. 그 이후 원경 대종사는 선친 제사를 모셔왔다. 사형언도일인 12월15일이면 어김없이 홀로 법당에 들어가 영가축원을 했다. 한 해도 거르지 않았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박헌영 선생의 사형 집행일이 7월 19일로 밝혀진 후에는 제사 날짜를 바꾸었다. 현재 위패는 평택 만기사와 인천 용화사에 봉안되어 있다.

“대체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
사람들은 왜 나를 살리려고 하고, 끝내 비극의 죽음을 맞는가!”

▲ 원경 대종사는 학자들과 함께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해 미국과 모스크바의 문서기록보존소를 찾아다니며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료를 수집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왔다.

원경 대종사가 아버지를 만난 것은 불과 여섯 차례. 그가 아버지인 박헌영 선생의 모습을 기억하는 첫 만남은 1945년 과천에서 이순금 여사(김삼룡 부인)와 함께 했을 때다. 그 후 장충동과 예지동 사이 곡물가게에서 활동했는데 그곳이 김삼룡 선생의 아지트였다. 어릴 때부터 영특함을 보인 원경 대종사를, 박헌영 선생의 옛 동료들은 혹시나 화를 입을까 염려해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겨우 열 삿 남짓 소년이 보투(보급투쟁)에 함께 나가곤 했는데 항상 부싯돌과 말린 쑥 잎을 지니고 다녔다. 그러나 김삼룡 선생의 아지트가 경찰에 의해 적발되면서 그곳 사람들도 검거되었고 이때부터 원경 대종사는 한산 스님에게 맡겨졌다. 그는 “이때부터 유랑인생이 시작되었다. 병삼, 유동, 세원, 현준, 일우, 명초, 성진, 혁, 원경 등 이름만 14개가 말해주듯 가는 곳마다 신분을 숨겨야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전쟁 중 지리산에서 생활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운명의 혹독함을 몸으로 느껴야 했던 원경 대종사는 군사정권 시절에도 부득이하게 박헌영 선생의 친자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재판을 통해 ‘박병삼’이라는 본명을 회복한 지도 몇 해 되지 않는다. 신분이 들통 나면 안 된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아야 했기에 호적조차 없던 그는 자신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군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적이 없으니 군대도 갈 수 없었다. 이에 친구의 신분으로 해군특수부대에 지원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지문을 사용해 주민등록을 하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체검사를 받고 친구의 이름으로 해군 72기가 됐던 원경 대종사는 그곳에서 UDT지원병을 모집할 때 기왕이면 특수부대에 가고 싶어 UDT가 됐다. 하지만 거짓 인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중에 친구 이름으로 대리 입대한 사실이 발각됐던 것. 그는 일이 더 크게 터지기 전에 솔직하게 인정하고 도망 나왔다. 하지만 의지할 곳 하나 없던 그가 결국 도착한 곳은 부처님의 품이었다. 나와서 어디 의지할 곳도 없으니 다시 부처님 품으로 돌아왔다”라고 덧붙였다.

세상 향한 원망을 불경 공부와 수행으로 승화
“이제 홀가분하다. 북에서도, 남에서도 버림받은 시대의 불운한 정치인 박헌영에 대한 재평가는 저의 몫이 아니라 후대의 몫이자 역사의 몫이다. 훗날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통일이 된다면 아버지에 대한 학술적 재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부친의 월북 후 어머니와도 헤어진 원경 대종사는 고종사촌형이자 박헌영 선생의 동지였던 한산스님을 만나 불가의 인연을 맺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한산 스님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간 그는 종전 후 1958년 한산스님으로부터 부친의 행적과 죽음을 처음으로 전해 듣고 충격에 빠졌다. 가슴 아픈 가족사, 부친에 대한 원한과 전쟁의 경험은 그가 더욱 치열하게 수행하고 정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출생 내력으로 인해 원경 대종사는 어디를 가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저의 몫은 그동안 모은 사료들을 엮는 것으로 끝이다.
그것을 가지고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 하는 것은 학자들이 할 몫이다.”

 

▲ 두 권짜리 시집 <못다 부른 노래>는 원경 대종사가 고희를 기념하며 20~30년 동안 썼던 시를 엮은 것이다

1973년 여주 흥왕사 주지를 맡은 이후 농사와 수행에만 전념하며 묵묵히 수행자의 길을 걸어온 그는 부친의 업적을 재평가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 1993년부터 학자들과 함께 박헌영 선생에 관한 기록과 사진 자료를 모아 2004년 <이정 박헌영 전집>을 발간했다. 원경 대종사는 “독립 운동가이자 언론인, 노동운동가, 혁명가, 정치가로 일컬어지는 박헌영 선생의 다양한 활동 중에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역할만은 인정해 달라”고 출간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그가 <이정 박헌영 전집>을 완간하여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사료로 활용하게 한 것도 그러한 맥락의 일환이다. 2010년에는 시집 <못다 부른 노래>도 출간, 간 차마 말로 다 말로 풀어놓을 수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 부친인 박헌영 선생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을 230여 편의 시를 통해 노래했다. 두 권짜리 시집 <못다 부른 노래>는 원경 대종사가 고희를 기념하며 20~30년 동안 썼던 시를 엮은 것이다. 사실 원경 대종사는 <못다 부른 노래>를 책으로 출간할 생각이 없었다. 500편 남짓 되는 분량의 시에 그는 차마 말로 다 풀어 놓을 수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 박헌영 선생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을 담았다. 그동안 지은 시를 모아 손으로 대충 써서 정리한 것을 복사해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몇 부 나누어주었는데, 어떤 이는 “어떤 이는 자신이 일하는 시 문예지에 20~30편을 발췌해 싣는가 하면, 시인 김지하 등은 ‘아예 정식 시집으로 만들어 세상에 다녀간 흔적을 남겨보라’고 강권하기도 했다. 그렇게 <못다 부른 노래>가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됐다. 이러한 행보에 대해 원경 대종사는 “위인처럼 신격화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나 죽으면 해 줄 사람이 없어서 한 것뿐이다”면서 “그 양반, 비판받을 건 비판받아야한다. 단지 숨겨졌고 악의적으로 왜곡됐던 것을 자료를 통해 복원하고 확장하는데 의미가 있다. 저의 몫은 그동안 모은 사료들을 엮는 것으로 끝이다. 그것을 가지고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 하는 것은 학자들이 할 몫이다”라고 피력했다. NM

황태일 기자 hti@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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