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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1.09.12  10:5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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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만에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홍범도 장군은
‘항일 게릴라전의 비조’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지난 8월 카자흐스탄에서 봉환되어 대전현충원 제3묘역에 안장됐다. 별세한 지 78년 만이다. 홍 장군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본다.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은 동학혁명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홍범도 장군(1868~1943)을 이해하려면 그에 대한 제3자의 기록이 없어 ‘홍범도 일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홍범도가 직접 작성했다는 ‘친필 일지’가 남아 있지 않고 필사본만 전해지고 있어 이마저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홍범도 일지’ 필사본에 따르면, 홍범도는 평남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가난이 대물림되었다. 머슴살이, 막일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홍범도를 항일운동에 뛰어들게 한 것은 동학혁명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었다. 1895년 11월 강원도 단발령에서 봉기하고 일본군 10여 명을 습격해 무기를 빼앗은 뒤 포수와 빈농 40여 명으로 의병 부대를 조직했다. 그 후 함경도 안변으로 이동, 북상하던 유인석 의병 부대와 연합해 일본군과 수 차례 전투를 벌였다. 1904년 가을 함남 북청의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해 30여 명을 척살하는 등 항일 투쟁을 벌이면서도 산포수 생활을 병행했다.
망국적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포수들의 반일 의식을 부채질한 것은 1907년 9월 일제가 공포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의 강제 시행이었다. 단속법은 총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산포수들의 생존을 위협했다. 홍범도는 1907년 11월 산포수, 화전 농민, 광산 노동자, 해산군인 등 70여 명을 모아 항일 의병전에 나섰다.
홍범도군은 신출귀몰하는 게릴라전의 비조였다. 1907년 11월 함남 후치령을 시작으로 함경도 삼수·갑산과 운파령 등에서 일제의 군경과 수십 차례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에 밀려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08년 11월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고 13도의군에 참여했다. 13도의군은 의병 지도자들이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하나의 군단으로 통합하고 작전과 지휘를 단일 계통으로 통일하기 위해 1910년 6월 우수리스크 부근의 추풍에서 결성된 무장 독립군 부대였다. 홍범도는 함경도의 무산, 갑산, 종성 등으로 진공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동지 대부분이 체포되자 홀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일제는 홍범도를 체포하기 위해 아내와 큰아들을 인질로 삼았으나 홍범도가 꿈쩍도 하지 않자 부인과 아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홍범도 장군

봉오동전투는 1920년대의 본격적인 무력 항일투쟁의 신호탄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독립단체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노동판의 짐꾼이나 금광의 땅군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의병을 모집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1915년 9월 북만주의 밀산 지역으로 이동해 청년단체를 조직하고 동포들과 연대를 다졌다. 그러던 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무렵 두만강 건너편의 북간도는 독립군들의 주무대였다. 특히 3·1운동 후에는 많은 독립군이 이곳을 거점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독립군의 성지나 다름없었다. 10여 개의 독립군 단체가 북간도를 무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창설되고 있을 때 홍범도 역시 1919년 5월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총사령관이 되었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한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3·1운동 후 만주와 러시아령에서 편성된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 진공작전 중 최초의 공격이었다. 1919년 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침투, 일제의 통치기관을 급습하고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의 만포진을 거쳐 자성군까지 진출, 일본군 70여 명을 살상하는 승전보를 알렸다. 이는 독립군 부대가 국내로 진공해 이룬 최초의 승전이었다.
홍범도는 1919년 10월 대한독립군 100여 명과 함께 중국령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1920년 5월 두만강변의 국경 지대에서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 ‘대한북로독군부’라는 대규모 연합부대 진용을 갖췄다. 대한북로독군부는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을 근거지로 삼아 최진동이 총지휘를 맡고 홍범도는 군사령관을 담당했다. 당시 52살이던 홍범도는 31살인 김좌진을 비롯 최진동·안무 등과 함께 1920년 6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연합작전에 의한 승전이고 이를 계기로 무장투쟁의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는 점에서 1920년대의 본격적인 무력 항일투쟁의 신호탄이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1920년 10월에도 김좌진(1889~1930)과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김좌진·홍범도 연합부대는 어랑촌 전투를 끝내고 소부대로 나눠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도 맹개골 전투, 만기구 전투, 쉬구 전투, 천보산 전투 등을 벌이며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했다. 10월 26일 홍범도 부대가 고동하 골짜기 전투에서 마지막 승리를 장식함으로써 청산리전투로 통칭되는 6일간의 크고 작은 전투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홍범도와 김좌진은 우리나라 항일무장투쟁사에 우뚝 솟아 있는 두 거봉이자 영웅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에는 일제의 토벌을 피해 1921년 1월 다른 독립군 부대와 함께 국경을 넘어 러시아령 이만에 집결했다. 독립군 연합부대원 중 홍범도와 200여 명의 대원은 1921년 3월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스보보드니)로 이동한 반면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 부대원 380명은 자유시로 가지 않고 다시 중국령으로 돌아갔다. 홍범도는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을 때 가해자인 한인 이르쿠츠크 공산당 편을 들었다. 이후 민족주의자보다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었다. 자유시 참변 후 홍범도는 휘하 병력과 함께 이르쿠츠크 소재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에 편입되어 제1대대장으로 활동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1차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김규식, 여운형, 조봉암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참석했다. 당시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주최한 이 대회에는 한국·중국·일본·몽골 등에서 148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접견하고 권총 1자루와 금화 100루블, 레닌이 친필서명한 '조선군 대장'이라는 증명서를 선물로 받았다.
홍범도는 1923년 군복을 벗고 연해주의 집단농장에서 일하다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1937년 11월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했다. 1938년 4월 크질오르다에 정착한 뒤에는 밤에는 고려극장의 수위로 일하고 낮에는 정미소 근로자로 살며 말년을 보냈다. 그런데도 기개는 잃지 않았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일본의 동맹국 독일과 싸워야 한다며 73살 고령임에도 ‘현역 징집’을 간청할 정도로 항일 투쟁에 적극적이었다.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 홍범도와 김좌진 두 장군은 우리나라 항일무장투쟁사에 우뚝 솟아 있는 두 거봉이자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출신과 사후 평가에서는 사뭇 대조적이다. 김좌진이 부유한 부르주아였다면 홍범도는 뼛속까지 가난했던 프롤레타리아였다. 남한에서는 김좌진을 청산리전투의 신화적 인물로 평가하지만 북한과 연변학계에서는 홍범도를 더 높이 추앙한다. 이유는 홍범도가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는 등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반면 김좌진은 민족주의 노선을 고수하다 공산당원에게 피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청산리전투가 두 사람의 연합작전에 의한 승리였는데도 남한은 김좌진을 부각하고 북한은 아예 홍범도의 단독작전으로 소개한다.


70년 전 9월, 독가스 학살 본격화 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유대인을 절멸하기 위한 강제수용소가 만들어지기까지 나치 수용소의 역사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부터 나치 독일이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한 1936년까지다. 이 시기의 강제수용소는 주로 공산주의자, 정치적 반대파, 노동운동가들을 격리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세워진 수용소는 1933년 3월 뮌헨 부근에 건립된 다하우 수용소다. 1945년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20여만 명이 수감되어 이 가운데 4만 3,000여 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유대인 절멸 위한 강제수용소, 세 단계 거쳐 완성돼
두 번째 단계는 1936년부터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1941년까지다. 1단계 수용소가 나치 입장에서 주로    ‘공공의 적’을 격리·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2단계로 세워진 작센하우젠(1936), 부헨발트(1937), 아우슈비츠(1940) 등의 수용소는 강제 노역과 교화가 목적이었다. 2단계 수용소는 처음에는 독일 땅에 지어졌다가 2차대전이 발발한 1939년부터는 동유럽 지역에 건립되었다. 그 중에서도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는 폴란드 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3단계는 절멸수용소가 본격적으로 세워진 1942년부터다. 시발점은 1941년 말 폴란드 헤움노에 지어진 강제수용소였다. 이곳에서는 1941년 12월부터 유대인을 독가스로 살해했으나 상설 가스실이 아니어서 많은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처음부터 유대인을 절멸할 목적으로 지어진 절멸수용소는 1942년 폴란드에 집중적으로 건립된 베우제츠(1942.3), 소비부르(1942.5), 트레블링카(1942.7) 수용소 등이다. 이 중 가장 먼저 세워진 베우제츠 수용소는 상설 가스실을 갖춘 최초의 학살수용소였다. 나치가 절멸수용소를 건립한 이유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일일이 살해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절멸수용소 설치를 주도한, 인간의 탈을 쓴 악마는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였다. 그는 1936년 친위대 총사령관 겸 독일 경찰 총수 자리에 오른 뒤 독일 내 여러 곳에 섬처럼 흩어져 있는 강제수용소들을 단일 체제로 연결했다. 강제 노역과 교화를 목적으로 지어진 부헨발트와 작센하우젠 등 2단계 수용소도 1942년 봄부터 집단 학살을 단행했으나 본격적으로 대규모 학살이 이뤄진 곳은 아우슈비츠(폴란드어로는 오시비엥침) 수용소였다.
아우슈비츠는 과거 폴란드군 기지로 사용되던 곳을 1940년 5월 강제수용소로 개조해 만들어졌다. 수용소장은 루돌프 회스였다. 당초에는 저항적인 폴란드인의 격리·수용을 목적으로 지어졌으나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부터는 포로수용소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곳에는 유대인은 물론 동성연애자, 집시, 매춘부, 여호와의 증인 신도 등도 수용되었다.

유대인, 동성연애자, 집시, 매춘부, 여호와의증인 신도 등 수용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회스가 화장장을 가스실로 개조한 것은 1941년 9월이었다. 그리고 곧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을 사이클론B 가스로 집단 학살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첫 학살이었다. 회스는 엄청나게 밀려드는 유대인을 살해하기에는 가스실이 너무 좁다는 것을 알고 1941년 11월 아우슈비츠에서 3km 떨어진 비르케나우에 아우슈비츠 2호 수용소를 세웠다. 이곳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다. 이곳에서 유대인을 절멸하기 위한 이른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42년 6월이었다.
당시 아우슈비츠 내 유대인들은 세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어린이, 애 딸린 엄마, 노인, 병자 등은 노동을 할 수 없는 제1그룹으로 분류되어 수용소 내 아우슈비츠 기차역 플랫폼에서 바로 아우슈비츠 2호 수용소로 보내져 죽음을 맞았다. 노동을 할 수 있는 제2그룹은 수용소 내 공장 등에 투입되었으나 부실한 식사, 열악한 보건위생, 고된 노동 등에 시달리다가 죽어갔다. 쌍둥이나 난쟁이는 제3그룹으로 분류되어 ‘죽음의 천사’로 불린 요제프 멩겔레의 실험에 이용되었다.
유대인을 독가스실로 보낼 때는 먼저 샤워를 해야 한다며 발가벗도록 했다. 가스실에는 샤워실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고 ‘옷 벗은 위치를 표시해 둬야 나중에 옷이 바뀌지 않는다’는 안내문까지 붙어있었다. 그렇다고 유대인 모두가 독가스실을 목욕탕으로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큰 저항 없이 가스실로 향한 것은 심리적으로 자포자기 상태인 데다 같은 종족인 유대인 작업반이 침착하고 온화한 말씨로 겁을 먹고 있는 동족의 불안을 덜어주는 체하며 가스실로 안내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250명가량을 수용하는 가스실에 모두 들어가면 문이 잠기고 천장에서 독가스가 흘러나왔다. 15~20분 후 유대인들이 시체로 변하면 머리털이 잘리고 반지와 금니 등이 뽑혀 화장터 불가마로 보내졌다. 말 그대로 ‘홀로코스트’(‘완전히 불태워진다’는 뜻의 그리스어)였다. 아우슈비츠가 끔찍한 장소로 알려진 또 다른 이유는 쌍둥이와 난쟁이 등에 대한 생채실험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흔적은 독일군이 빠져나가면서 파괴되거나 빼돌려져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들어섰을 때 그들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피골이 상접한 7,650여 명의 병자와 600여 구의 시체였다. 수용소 곳곳에는 시체에서 수습한 7,000kg이나 되는 머리카락이 자루에 담겨 있고 사람의 골분과 의치와 안경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특히 소련군을 경악케 한 것은 도처에서 발견된 사이클론B 가스를 사용한 흔적이었다. 소련의 조사 결과 5kg으로 1,000여 명을 살상할 수 있는 사이클론B가 2년 동안 수용소에서 1만kg이나 사용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서 발견한 학살의 파편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뿐 대부분의 흔적은 독일군이 빠져나가면서 파괴되거나 빼돌려졌다. 가장 규모가 컸던 비르케나우 수용소(아우슈비츠 2호)는 1944년 10월 나치의 완전 파괴로 만행 흔적이 모두 지워졌다. 수용자들도 환자들만 남기고 걸을 수 있는 5만 8,000여 명은 독일 내 다른 수용소로 옮겨진 상태였다.
수용소장 회스는 종전 후 전범재판에서 “독가스와 화형으로 250만 명이 처형되고 굶주림과 병으로 50만 명이 죽었다”고 말해 방청객을 전율케 했지만 가스실의 가동 능력을 감안한 각종 조사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에서만 대략 120만 명 정도가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폴란드인, 집시, 소련군 포로, 동성애자들도 집단살해되었다.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 외의 다른 절멸수용소에서도 몇 십만 명씩 죽어갔다.
트레블링카에서 90만 명, 베우제츠에서 60만 명, 소비부르에서 25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용소장 회스는 종전 후인 1947년 4월 16일 아우슈비츠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아우슈비츠의 마지막 처형자가 되었다. NM

▲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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