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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비둘기 집’의 황손 가수, 이석의 삶과 노래

기사승인 2021.11.08  19: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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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손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나 스스로 택한 길을 가고 싶었다

오랜 동안 결혼식 축가로도 사랑받아온 노래 ‘비둘기 집’의 주인공, 가수 이석. 그는 현재 국내에 생존해 있는 ‘마지막 황손’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 황손이라는 신분이 거역할 수 없는 핏줄의 요소였다면, 노래는 이석씨가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다.

1962년, 미8군쇼 무대에 서면서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그동안 늘 두 가지 갈등 속에서 살아왔다고 털어놓는다. 왕실의 법도대로 혈통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아울러 그 현실에서 벗어나 스스로 택한 길을 가고 싶다는 욕망이 그것.

한동안 ‘지프’차에 짐을 싣고 전국을 떠돌던 그가 2004년부터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전주로 거처를 옮겨 현재 ‘황실보존국민연합회’ 총재를 맡고 있다.
황손의 후예인 동시에 대중가요 가수이기도 한 그, 지금은 가수로서의 이석을 만나본다.

글l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작곡가 김기웅 친필악보 ‘비둘기 집’과 작사가 전우, 작곡가 김기웅 콤비의 한 때. 그리고 1988년 작사가 전우의 묘 앞에 세워진 추모비 ‘비둘기 집’. 작곡가 김기웅, 황문평, 가수 최희준 등의 모습이 보인다.

결혼식 축가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노래‘비둘기 집’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메아리 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 터에/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포근한 사랑 엮어갈 그런 집을 지어요.’
-비둘기 집(전우 작사, 김기웅 작곡, 이석 노래, 1969년)

그동안 결혼식 축가로 8000회가 넘게 불러 왔다는 이 아름다운 노래 ‘비둘기 집’의 주인공, 가수 이석(李錫, 80)씨는 현재 국내에 생존해 있는 ‘마지막 황손’이기도 하다.

1941년 8월 30일, 고종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열한 번째 아들로 41년 ‘사동궁’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이해석(李海錫), 어릴 때 아명은 ‘영길’로 항상 상궁들에게 둘러싸여 ‘애기씨 마마’, 혹은 ‘사동궁 도련님’이라 불렸던 황손의 후예, 그러나 지금은 대중가요 가수로서의 이석씨를 만나본다.

 

'왕실의 법도대로 혈통을...' VS '현실에서 벗어나 스스로...'

이석씨에게 있어 황손이라는 신분이 거역할 수 없는 핏줄의 요소였다면, 노래는 이석씨가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다. 본래 외교관이 되고 싶어 했던 그는 한국외국어대 서반어학과(현 스페인어과)에 들어간다. 스페인에는 왕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며 왕실 여인에게 청혼하겠다는 꿈을 꾸었을 만큼 낭만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허나 일제강점기를 지나 이승만 정권에서 박정희 시대로 상황이 계속 바뀌어가는 과정과 궤를 같이해 황실 가족의 거처 역시 ‘사동궁’에서 ‘별궁’, ‘칠궁’으로 변했다. 창덕궁 전화교환수로 일하던 중 후궁이 되었던 어머니 남양 홍씨 역시 황실의 몰락과 더불어 명륜동에서 성북동의 별장 ‘성낙원’으로 거처가 옮겨지면서 급기야 이석은 어머니와 세 동생의 생업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 신분이 바뀌어져 있었다.

심지어 학비 때문에 학업을 중도하차해야 했을 만큼 생활은 어려워져갔고 때문에 선택한 길이 연예계였다. 이미 경동고 3학년 때부터 종로의 음악감상실 ‘뉴 월드(New World)’에서 DJ를 보았을 만큼 음악적 관심이 많았던 그가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62년 당시 미8군쇼 연예회사 ‘화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미8군쇼 무대에 서면서부터. 물론 이 당시까지만 해도 주위의 관계자들은 이 가수 지망생이 황손이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한다.

그가 섰던 첫 무대는 가수 최희준의 대타였다. “그 무렵 최희준씨가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발표하며 뜨기 시작하자 월급을 올려달라고 했는데 거절당했어요. 그 자리에 대신 제가 들어가게 된 거죠.”

스페인어 전공으로 영어까지 유창했던 그는 미8군 무대에서 가수로 그리고 MC로 활동하다가 TV의 쇼 프로그램 사회자로까지 나서자 그야말로 황실 가족은 발칵 뒤집혔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 황실이 망했다지만, 이렇게까지 망할 수 있느냐며 개탄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도 스스로의 삶과 생계수단이 필요하다며 활동을 계속 이어간다.

▲ 1964년 미8군쇼 시절에 발표한 이석 데뷔 음반 ‘낭만의 해변’. 창작 재즈곡과 번안곡들이 수록되어있다. 그밖에 이석 노래가 수록된 음반들

 

1964년 미8군쇼 시절 발표한 데뷔곡 ‘낭만의 해변’, ‘그대 위한 노래’

타고난 재능과 바리톤의 성량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1964년 미8군 시절, 드디어 첫 음반을 취입한다. ‘낭만의 해변(Stranger on the Shore)’을 타이틀로 한 최희준·이석 스플릿(split) 음반(베스트레코드사, BL-3001)은 당시 색소폰 연주자로 미8군 쇼 ‘에이트레인’의 단장이었던 강철구 작, 편곡집이다. ‘세상이 그대 눈처럼(Dark Eyes)’ 그리고 재즈 스타일의 창작곡인 ‘그대 위한 노래’, ‘그대 눈동자’ 등이 담겨 있다. 비록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하지 못했지만 이 음반은 그의 뛰어난 음악성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음반이다.

‘그대 위한 이 노래를 다시 한 번 불러본다/아름다운 이 봄 다 지나기 전에/잊지 못할 그대 모습 다시 한 번 그려볼까/봄 여름이 가고 낙엽지기 전에/상하기 쉬운 말 아름다운 로맨스여/다시 만나는 기약 없는 그 약속도 없는데/영원히 그 사랑 간직하고 있게 하여주오/먼 후일에도 사랑의 노래를 들으리.’ -데뷔곡, ‘그대 위한 노래(강철구 작사, 작곡)’이다. 이석 최초로 취입한 이 노래는 슬로우 템포로 시작되어 빠른 템포의 재즈로 변주되는 멋진 리듬과 분위기가 돋보이는 곡이다.
 
사동궁에서 지내던 창경초등학교 시절, 왕족은 절대 뛰어다니면 안 된다는 법도 때문에 급한 연락이라도 취하려면 교장선생님이 직접 그에게 달려왔을 정도로 높은 신분이었던 그가 한 시대를 지나면서 노래로 대중들 앞에 직접 나선 것이다.

“지금까지 늘 두 가지 갈등 속에서 살아왔어요. 왕실의 법도대로 혈통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과 동시에 그 현실에서 벗어나 내 자신 스스로 택한 길을 가고 싶다는 마음, 이 두 가지 갈등 속에서 살아왔지요.” 그동안 자신은 늘 엇박자의 리듬처럼 살아왔다고 토로한다.
 
이 무렵 예측할 수 없이 급변하는 정치상황과 맞물려 황실의 몰락은 이미 현실이었다. 깊은 좌절의 나날 속에 그는 마침내 1966년 군예대에 지원, 월남에 파병된다. 전투병으로서 군예대 위문공연단의 일원이었지만 공연 차 이동 중에 차가 전복되면서 팔에 큰 부상을 당한다. 결국 이 부상으로 전역하지만 왕족 체면 때문에 원호신청은 하지 않았다.

68년 10월, 월남에서 돌아온 가수 이석씨는 이내 무대 활동을 재개, 당시 최고 대우의 ‘워커힐’ 전속가수로 들어간다.

“워커힐 무대에서 이석은 준수한 외모와 부드러운 노래로 관객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이 때 재기할 곡을 만들어 달라 해서 만들어준 곡이 ‘두 마음’과 ‘비둘기 집’이었는데 마침 성음레코드사로부터 음반 제작을 의뢰받고 녹음작업에 들어가는데 이 노래를 연습하던 이석씨가 잠시 LA에 가 있어 대신 이 노래를 남성듀오 ‘투에이스(오승근, 홍순백)’가 먼저 취입하게 되었죠.” 당시 워커힐악단장이었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김기웅(1936~2013 타계)씨의 회고다.


‘건전가요부르기 운동과 함께‘삼천만의 국민가요’로 떠오른 비둘기 집

▲ 당시 ‘삼천만의 국민가요’로 자리한 노래 ‘비둘기 집’이 수록된 음반들.

‘두 마음’ 또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붉은 노을 아래 파란 두 마음이/손에 손을 잡고 뛰놀던 언덕/붉은 노을 아래 파란 두 눈동자/너를 사랑 한다고 속삭인 언덕/나 지금은 그곳에 와 있으나/가늘고 긴 내 그림자뿐/붉은 노을 아래 파란 두 마음이/손에 손을 잡고 뛰놀던 언덕.’ -두 마음(김기웅 작사, 작곡, 이석 노래, 1969년)

이후 이석씨에 의해 다시 ‘비둘기 집’이 재 취입 되어 발표될 즈음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고 동시에 ‘건전가요부르기 운동’도 전국적으로 확대되어갔다. 이 때 ‘비둘기 집’은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로 인해 당시 새마을합창경연대회의 지정곡으로 선정된 데 이어 KBS 라디오의 다함께 노래 부르기 공개방송 ‘삼천만의 합창’의 시그널로 결정되면서 순식간에 ‘삼천만의 국민가요’로 자리한다. 이 노래의 노래비는 1987년 타계한 작사가 전우의 묘 앞에 추모비로 세워져 있다.

지금도 여전히 결혼축가로, 그리고 가족 화목의 상징으로 불리는 이 노래, 그러나 정작 이 노래 주인공의 삶은 그리 축복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그동안 ‘비둘기 집처럼 다정한 가정,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결코 짓지 못했던 것. 네 차례 이혼 후 현재 다섯 번째 결혼, 가정을 꾸렸다.

“어릴 때 살던 궁에서 내몰린 이후 답답해질 때마다 혼자 숲 속에서 마구 소리를 내질렀던 탓에 ‘목이 틔어’ 그 때문에 되레 가수가 될 수 있었다.”는 그의 회고처럼 때때로 신분이 주는 여러 가지 제약을 이겨내게 한 것이 바로 노래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왕의 핏줄’이 오히려 그에겐 아킬레스건이었다. 때때로 세상과 현실에 적응하기 힘든 족쇄로 작용하며 운명처럼 그를 괴롭혔다.

‘비둘기 집’으로 정상에 올랐을 즈음 중앙시장과 영등포시장을 옮겨가며 ‘국수장사’를 하던 어머니 남양홍씨(홍정순 여사)가 신경성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의 타계는 그나마 황실의 법도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은연중 강요하던 ‘끈’마저 그로부터 끊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뜰 앞에 귀뚜라미 슬피 우는 가을밤에/조각달 소나무가지 끝에 걸려있네/밤하늘 아래는 외로운 기러기야/찬이슬 싫어서 우느냐/영롱한 별빛 속에 어머니 모습/아 나를 반겨 주어요 어머니/나를 안아 주어요 어머니/어머니 나를 두고 가지를 말아요/어머니 보고파요.’ -어머니(김호 작사, 작곡, 이석 노래)

71년 1월에 발표한 노래 ‘어머니’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여전히 급변하고 있었고 그럴수록 심화되는 갈등은 그에게 더욱 노래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이대로 돌이 되어(71년)’, ‘외로운 조약돌(72년)’, ‘안개(Misty 번안곡, 72년)’, '내 마음 어디 두오(74년)'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황손의 참담한 몰락,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다

▲ (사진 위) 1970년대 동료가수들과 공연 길에 오른 가수 이석(맨 우측). 아래 사진은 2006년 ‘김기웅 고희 기념 콘서트’ 무대에서

시대는 계속 바뀌어갔다. 이석의 가족은 왕조가 무너진 다음 궁에서 쫓겨난다. 박정희 정권 때까지만 해도 황손들을 삼청동의 ‘칠궁’에서 기거하도록 배려해주었지만 10·26사태 이후 이들은 궁에서마저 밖으로 내몰린다. 어쩌면 황손이 ‘천연기념물 진돗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참담한 몰락이 현실로 깊게 각인되자 다른 황손들도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는 우선 운신이 자유로울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1979년에 미국으로 떠났죠. 캘리포니아에서 지내면서 정원사, 빌딩청소부, 경비원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을 해가며 5년간 5만 달러를 모아 ‘리커 스토어(Liquor Store, 동네 슈퍼마켓)’를 차리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 후 무려 열세차례나 강도를 당했어요.”

그렇게 10년을 살다가 지난 89년, 이방자 여사 장례식 참석차 귀국했다가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대한민국 국적을 다시 찾는다.

“현재 황제 왕손 중 4남 5녀가 생존해 있지만 모두 미국,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지로 흩어졌고 저만 한국에 살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마지막 황손'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뀐 현실과 쉽게 타협하지 못한 그는 ‘바둑판 위의 알’처럼 세상을 겉돌며 몇 번의 좌절 끝에 여덟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빛을 계승하는 집, 전주 승광재’로 거처 옮겨

한동안 ‘지프’에 짐을 싣고 전국을 떠돌던 그는 2004년 전주로 옮겨 현재 ‘황실보존국민연합회’ 총재로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전주에 기거하고 있다.

‘빛을 계승하는 집, 승광재(承光齋)’, 대한제국의 첫 연호 ‘광무(光武)’에서 ‘빛 광(光)’ 자를 따고, 그것을 잇는다는 의미로 ‘이을 승(承)’ 자를 붙였다. 아침이면 대한제국의 황손 이석은 승광재 문을 열고 전주 한옥마을 산책에 나선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 역사 알기’ 등 역사와 전통의 맥을 잇는 문화유산 계승자로, 아울러 전주대학에서 ‘구한말 이후의 황실가족사’라는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 ‘빛을 계승하는 집’, 전주 승광재 팜플렛. 그리고 ‘숭례문 화재’ 1주기를 앞두고 발표한 음반 ‘아! 숭례문’ 재킷.

 

2009년, 가수 활동 접은 뒤 35년 만에 취입한 신곡 ‘아! 숭례문’

그렇게 그는 가수 생활을 ‘공식적’으로 마감했으나 지난 2008년, 국보1호 숭례문이 화재로 불타는 것을 목격한 뒤, ‘숭례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그 안타까움을 그린 ‘아! 숭례문’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사실 노래를 부를 뜻은 없었으나 ’이런 사건은 국민이 빨리 잊어버리니까, 황손이 직접 불러 국민을 규합해 달라.’는 요구에 결국 노래를 취입하게 됐다. 1974년 ‘이 마음 어디 두고’ 취입 이후 무려 35년만이다.

‘1. 비바람 눈보라를 온몸에 맞으면서/가슴에 꿈을 안고 긴 세월 지켜온 너, 어허/세상이 바뀌어 변해가도 사람이 바뀌어 달라져도/항상 너는 예를 다해 그 자리에서/향기롭게 웃고 소리 없이 우네/아! 숭례문 우리 숭례문/아! 숭례문 영원히 빛나리.

2. 오늘도 어제처럼 하루를 맞으면서/너와 나 얼이 되어 말없이 지켜온 너, 어허/강산이 바뀌어 변해가도 세월이 바뀌어 달라져도/항상 너는 아름답게 그 자리에서/향기롭게 웃고 소리 없이 우네/아! 숭례문 우리 숭례문/아! 숭례문 영원히 빛나리.‘ -아! 숭례문(김동찬 작사. 심수천 작곡, 이석 노래. 2009년)

또한 그는 황손을 아끼는 전국의 후원 회원에게 감사의 의미에서 '황손과 함께하는 콘서트'를 해마다 열고 있다. 이제금 그는 ‘황실보존연합회’를 통해 기나긴 방황을 접고 본래 자신의 위치로 스스로 한걸음 더 다가가며, 이제금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NM

[참고 자료]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이석[1, 2]’ (서울신문 2006년 10월12일, 19일 자).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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