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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1.11.08  19:4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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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억㎞의 우주 대장정 떠난 美 소행성 탐사선 ‘루시’는 20년간 ‘최초 이브’ 자리를 지켰던 원인(猿人) 화석에서 따온 이름

미 항공우주국(NASA)의 소행성 탐사선 ‘루시’가 태양계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10월 16일 우주로 떠났다. ‘행성 고고학 탐사선’이라 불리는 루시는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커내버럴 우주발사장에서 아틀라스5호 로켓에 실려 발사됐다. 앞으로 12년간 목성까지 날아가면서 소행성 8개를 탐사할 예정이다. 이동 거리가 총 63억㎞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루시라는 이름은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320만년 전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화석의 애칭에서 땄다. 당시 발굴단이 자주 듣던 비틀스 노래가 ‘다이아몬드와 함께 하늘에 있는 루시(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였다고 한다. 인류의 조상 화석인 루시처럼 탐사선도 태양계의 기원과 진화 과정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길 바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루시가 어떻게 발견되고 어떤 화석인지를 알아본다.

‘루시’는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지만 인류의 특질을 지닌 최고(最古) 원인(猿人)

1969년 프랑스의 젊은 지질학자 모리스 타이에브가 에티오피아의 하다르 계곡에서 코끼리뼈와 코뿔소·돼지의 화석 등을 발견했다. 하다르 계곡은 타이에브가 고대 호수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에티오피아의 아와시 계곡을 뒤지다가 계곡 북동쪽 끝에서 발견한 계곡이다. 코끼리뼈들을 파리로 가져가 연대를 측정했다. 300만 년이나 된 오래된 화석이었다.
그때까지 발견된 ‘호미니드’ 화석 중 300만 년 전 것은 없었기 때문에 타이에브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국의 고생물학자 도널드 조핸슨에게 도움을 청했다. 호미니드는 현생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의 직접적 조상은 아니지만 인간의 특징을 많이 지닌 수백만 년 전의 초기 원인(猿人)을 말한다.
조핸슨은 1972년 4월 타이에브와 함께 하다르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973년 10월 넓적다리뼈의 아래쪽 끝 부분을 발견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무릎관절에서 나온 둥근관절돌기도 보였다. 두 조각을 맞춰보니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조핸슨은 그 뼈가 원숭이의 무릎뼈일 것으로 추정하면서도 혹시 원인의 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지역의 한 무덤에서 사람의 넓적다리뼈를 파내 비교하니 같은 모양이었다.
조핸슨은 넓적다리뼈를 가지고 미국의 한 생물인류학자를 찾아갔다. 학자는 뼈의 주인공은 호미니드이고 키는 107㎝ 정도로 침팬지보다 가벼운 암컷이며 직립보행을 했음을 알려주었다. 연대 측정 결과 300만~350만년 전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순간 조핸슨의 머릿속에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이 넓적다리뼈로 걸었던 호미니드는 인간의 직계조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호모'였을까? 아니면 남아프리카·케냐·탄자니아 등지에서 발견된, 인간의 혈통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거리가 있으면서도 인간에 가까운 원인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 뼈대의 주인공은 ‘호모’가 아니라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다.

‘루시’ 이름, 비틀스 노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

1974년 11월 조핸슨 탐사대는 또다시 팔뼈 부분, 작은 머리뼈의 뒷부분, 넓적다리뼈 부분, 등뼈, 골반뼈 부분, 갈비뼈들을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뼈대들이 한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그 개체가 발견된 지층을 칼륨·아르곤 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해보니 330만 년 전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계속된 작업을 통해 몇백 개의 뼛조각을 추가로 발견했다. 이렇게 발견한 뼈는 사람의 뼈 가운데 20~40%나 되었다. 이처럼 많은 원시 개채의 뼈대가 발견된 적은 그때까지 없었다. 사자(死者)가 평온하게 죽음을 맞았기 때문인지 뼈대 상태도 좋았다. 평화롭게 죽고 모래와 진흙에 덮인 뒤 퇴적하는 흙더미에 짓눌려 화석으로 변했다가 330만 년이 지나 폭우에 쓸려 땅 위로 드러난 것이다.
화석의 두뇌는 작았지만 직립보행을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골반으로 보아 뼈의 주인공은 여성이었고 팔이 긴 것으로 보아 나무타기를 잘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키는 120㎝로 작았으며 사랑니가 다 자라고 닳은 흔적으로 보아 성인임을 알 수 있었다. 척추가 변형된 것은 관절염이나 다른 뼈질환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하게 했다.
조핸슨 탐사대는 어느날 발굴 캠프에서 밤새도록 맥주를 마셨다. 마침 그때 카세트 테이프에서 1967년 떠나간 소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비틀스의 노래 ‘다이아몬드와 함께 하늘에 있는 루시(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가 들려왔다. 순간 330만 년 전 여성에게 ‘루시’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이후에도 그곳에서 뼈는 계속 발견되었고 뼈를 모두 모아보니 적어도 13명은 되는 집단의 뼈임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최초의 가족’으로 불리게 될 집단 역시 루시와 같은 종임이 밝혀짐으로써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라는 학명을 얻게 되었다.
2000년에는 에티오피아 디키아 지역에서 발견된 3살짜리 여자 아기도 루시와 같은 종으로 확인되어 ‘셀람’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셀람 유골은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한 두개골과 윗몸통, 팔다리 주요 부위 등을 토대로 2006년 복원되었다. 루시는 1992년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 즉 ‘아르디’라는 고대원인 유골이 발견되어 440만 년 전에도 인간에 가까운 원인이 존재했음이 드러날 때까지 20년 동안 인류의 특질을 지닌 최초의 원인(猿人)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20년 동안 루시는 ‘최초의 이브’ 자리를 지켰으며, 세계의 모든 교재에 인류의 조상으로 등재되었다.

▲ ‘루시’ 화석을 토대로 상상해 만든 ‘루시’ 조형물 (출처 미 클리블랜드 박물관)

 

대표적 ‘참여시인’ 저항시인‘ 김수영 탄생 100주년

김수영(1921~1968)의 문학적 생애에서 4·19는 분수령이자 전환점이었다. 김수영의 초기 시는 주로 모더니즘적 경향을 띠었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는 관념적 모더니즘의 허위와 기만성을 까발리고 도시 소시민의 내면과 자의식을 그렸다. 그러다 맞은 4·19를 계기로 사회성 짙고 현실참여적인 시를 쏟아냈다. 1960년 4월 혁명이 일어나고 1주일 뒤 이승만의 하야 소식이 들렸을 때 김수영은 일필휘지로 시를 써내려갔다. 김수영 시의 지향점이 어딘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제목의 시였다.

김수영의 문학적 생애에서 4·19는 분수령이자 전환점

김수영은 서울 종로6가에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병약해서 잔병치레가 잦았다. 초등학교 때 급성 장질부사에 걸리고 이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1935년 선린상고 야간부에 입학했다. 1941년 졸업 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미즈시나 하루키(水品春樹) 연극연구소에 들어갔다. 유학시절 함께 하숙생활을 했던 영문학자 이종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소련의 사실주의적 연극이론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예술과 나의 생애’에 심취했다. 미즈시나 연극연구소의 전신은 쓰키지(築地)소극장이다. 1920년대에 주로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연극이 끝난 후에는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천황제를 전복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김수영은 1944년 가족이 살고 있는 만주 길림성으로 갔다가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왔다.
해방공간에서는 주로 박인환이 운영하는 ‘마리서사(茉莉書舍)’ 서점을 근거지로 삼아 당시 첨단을 걷던 김기림, 김광균, 오장환 등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과 교유했다. 그러면서 광복 후 최초로 나온 동인지 ‘예술부락’에 활자로 인쇄된 자신의 첫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했다. 1949년 4월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간행한 5인 합동 사화집(詞華集)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공자의 생활난’이라는 난해한 시를 발표해 주요 모더니스트의 한 사람으로 각광을 받았다. 사화집은 김기림, 이상의 1930년대적 모더니즘을 1950년대 모더니즘으로 확산시키는 길목에서 징검다리가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김수영은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인천상륙작전 후 패퇴하는 인민군에 붙잡혀 북으로 끌려가다가 탈출에 성공해 서울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대한민국 경찰에 체포되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1951년 1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 또다시 지옥 같은 생활을 견뎌야 했다. 다행히 수용소 야전병원 외과원장의 영어 통역관 일을 맡아 생활은 편해졌으나 이번에는 무료함을 참을 수 없어 자신의 생니를 하나씩 뽑았다. 이후 김수영은 술에 취하면 틀니를 빼서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1953년 10월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서울로 돌아왔으나 전쟁통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이 머무를 집도 없었다. 시를 써서는 입에 풀칠도 못하고 발표할 지면도 없었다. 결국 미8군 통역, 선린상고 영어교사, 평화신문사 기자 등의 직업을 전전하다가 1955년 6월 마포구 구수동으로 이사해 부인을 따라 채소를 가꾸고 닭을 길렀다. 틈틈이 번역 일도 하며 생계를 꾸렸다.

반복과 역설, 비약과 반전, 단절과 압축 등 갖가지 기법 쏟아내

▲ 김수영

김수영은 1953년 ‘자유세계’ 4월호에 발표된 ‘달나라의 장난’을 경계선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어와 시 형식을 구사했다. 이전에 보이던 한문투의 문장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시어가 줄어들고 일상 용어가 자주 등장했다. 이후 김수영의 시들은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에서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지식인의 방황과 암담한 시대 속에 내팽겨진 소시민의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노래했다. 1957년 12월 한국시인협회상 수상자로 선정되고 1959년 생전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달나라의 장난'을 펴냈다. 이 시집은 1959년 춘조사에서 ‘오늘의 시인선집’ 제1권으로 발간되었는데 제2권은 김춘수의 시집, 제3권은 전봉건의 시집이었다.
4·19가 일어나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한 1주일 동안 김수영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거리와 골목, 다방과 술집을 쏘다녔다. 매일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시를 썼다. 불과 몇 달 사이에 1년치 시를 지었다. 그때 쓴 시 중에는 미국인도 소련인도 모두 이 땅에서 나가달라는 ‘가다오 나가다오’ 같은 당시 한국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운 시도 있었다. 그중 한 구절을 소개한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 /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 ‘미국인’과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가다오 가다오”
1961년의 5·16은 김수영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뒤엎어버리는, 반동 그 자체였다. 5·16 직후 쓴 ‘격문(檄文)’ ‘모르지?’ 등 연작시에는 5·16을 빗대 쓴 시구가 자주 나타난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특유의 반복과 역설, 비약과 반전, 단절과 압축 등 갖가지 기법을 동원한 작품을 쏟아냈다. ‘거대한 뿌리’(1964년),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년), ‘눈’ ‘설사의 알리바이’(1966년), ‘VOGUE야’ ‘사랑의 변주곡’ ‘꽃잎 1·2·3’(1967년)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풀’(1968년) 등이 이때 발표됐다. 1968년 숨지기 보른 전 발표한 ‘풀’은 생애 마지막 시였다.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풀’ 전문)

시 ‘풀’은 민중운동과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효시로 평가받아

'풀'은 민중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민중을 풀로 형상화함으로써 1980년대 초반부터 급격히 대두되기 시작한 민중운동과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효시로 평가되고 있다. ‘풀’은 2007년 ‘시인세계’가 시인 1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가 뭐냐고 물었을 때 최고의 시로 뽑힐만큼 시인들 세계에선 으뜸으로 꼽힌다.
1968년 6월 15일 김수영은 모처럼 받은 고료를 가지고 오후부터 신동문, 이병주, 정달영과 함께 청진동과 무교동 술집을 전전하다가 밤 11시 30분 취한 채 홀로 술집을 나왔다. 그가 을지로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마포 서강 종점에 내린 것은 자정을 바로 앞둔 시간이었다. 김수영은 인적이 끊긴 밤길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때 갑자기 인도로 뛰어든 버스가 뒤에서 그를 덮쳤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수영은 곧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다음날 아침 영원히 눈을 감았다. 향년 47세였다. 장례식은 치러졌고, 유해는 서울 도봉산 선영에 묻혔다.
김수영의 부인은 관 속에 그가 평소 좋아하는 책 중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넣어주고 작별을 고했다. 김수영은 이렇게 황망히 떠났으나 암울했던 1970~1980년대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화려하게 부활했다. 시선집 ‘거대한 뿌리’(1974년)와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년), ‘김수영 전집’(1981년)이 간행되었으며 1981년 ‘김수영문학상’이 제정되었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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