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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사랑해봤으면’ ‘내 이름은 소녀’의 가수, 조애희의 삶과 노래

기사승인 2021.12.08  2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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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를 한 곡도 제대로 모른 채 KBS 전속가수가 되었죠’

여전히 ‘소녀’로 기억되는 가수 조애희(78)씨. 1963년 KBS 전속가수로 발탁된 이후 ‘사랑해봤으면’으로 TBC 제1회 방송가요대상 신인가수상을 수상하며 대중들 앞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계속해서 ‘내 이름은 소녀’, ‘홀로 가는 사람’, ‘그 사람 바보야’, ‘그대여’ 등을 발표하며 맑고 정감 있는 목소리로 사랑받았다.

클라리넷 연주인 이동기(1936~2018)씨와 결혼한 이후 이들은 함께 작곡가와 가수로 호흡을 맞추며 ‘그 사람 바보야’를 시작으로 ‘푸른 하늘 구름처럼’, ‘세월’, ‘그대여’ 등을 발표했고 또한 2000년도까지 함께 재즈클럽 ‘문라잇’ ‘사또’ 등의 무대에 함께 올랐다.

아름다운 감성을 담은 노래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가수, 조애희의 삶과 노래 이야기.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데뷔곡 ‘사랑했으면’과 ‘내 이름은 소녀’가 수록되어 있는 김인배 작곡 1, 2집(텔스타)

여학생들에게 손거울을 들고 다니게끔 만든 노래 ‘내 이름은 소녀’

1. 이름은 소녀 꿈도 많고/내 이름은 소녀 말도 많지요/거울 앞에 앉아서 물어 보며는/어제보다 요 만큼 예뻐졌다고/내 이름은 소녀 꽃송이 같이/예쁘게 피며는 엄마 되겠지.

2. 이름은 소녀 눈도 많고/내 이름은 소녀 샘도 많지요/거리거리 쌍쌍이 걸어가며는/내 그림자 깨워서 짝을 지우고/내 이름은 소녀 꽃송이 같이/곱게 피며는 따라오겠지. -‘내 이름은 소녀(하중희 작사/김인배 작곡/조애희 노래)’

‘내 이름은 소녀’로 뭇 남성의 짝사랑 대상이었던 가수 조애희씨는 청순하고 귀여운 외모로 ‘한국적 미인의 대명사’로 불렸다. 1964년, 이 노래를 발표할 즈음 그녀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풋내기가수였다. 화장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줄 몰라서 매번 한명숙, 박재란 같은 대선배들에게 구박을 받아가며 도움을 받곤 하던 시절이었다.

어느덧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세인들의 기억에서처럼 여전히 소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가수 조애희씨.

조애희씨는 1943년 부친 조병조, 모친 박정숙 사이의 3남 3녀 중 넷째로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1945년 세살 때 광복을 맞아 부산으로 가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영도 영선초등학교 1학년 때 터진 6.25 한국전쟁 때 부친이 행방불명된다. 어린 시절 기억에도 부친은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했던 멋쟁이였다.

남은 여덟 명의 가족들은 비좁은 2층집에서 몸을 부대끼며 살아야 했던 만큼 어렵게 그 시절을 보냈다. 그 이층집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뛰어다닐 때마다 집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학교가 파한 뒤에도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교실에 있던 풍금 앞에서 보냈을 만큼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부산 남여중 2학년 때 서울로 이사, 덕성여고를 졸업한다.

대중가요를 한 곡도 모른 채 KBS 전속가수로 발탁

그가 가수활동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1963년 당시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로 발탁되면서부터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직도 안 되고 하던 차에 고모 딸이 ‘노래를 그렇게 잘하면서 왜 재주를 썩히느냐, KBS에서 합창단 모집한다는데 가보지 그러냐’, 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방송합창단원 모집인 줄 알고 갔죠.” 그러나 막상 가보니 합창단이 아니라 전속가수 모집이었다.

“당시 학교에서 배운 노래 외에는 잘 몰랐어요. 그래서 그냥 돌아서 나오는데 옆에서 신청하려던 한 여성도 그냥 나오더라구요. 둘이 내려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죠. 그냥 가면 우리 할 게 없지 않느냐. 쉽게 취직도 안 되고... 온 김에 가수시험이라도 보자고 해서 결국 함께 접수를 했죠.”

준비가 전혀 안 된 채로 전속가수 시험을 본 것만큼이나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방송국에서 처음 받은 테스트가 ‘본인이 알고 있는 가요 제목을 아는 대로 써라’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깨알같이 종이를 메워 가는데 제 답안지는 아예 백지였죠.” 조애희씨의 회고다.

“당시엔 라디오에서 가요가 나오면 일부러 다이얼을 돌렸을 정도로 기피했어요. 무심코 듣다 보면 하루 종일 입안에서나 머릿속에서 맴도는 게 싫어서였는데 그 때문에 방송국 측으로부터 ‘그러고도 왜 가수가 되려했느냐.’는 꾸중을 매번 듣곤 했죠.”

가요 지정곡과 자유곡을 각각 한 곡씩 부르는 선발 1차 관문도 그에겐 매우 버거웠다. 당시 방송국이 제시된 지정곡은 지금까지도 그 제목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그 때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전혀 모르는 노래였다. 그러나 행운이 따랐다. 수백 명의 참가자 중 다행히도 그의 순서가 중간쯤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차례가 올 때까지 앞 응시자들이 부르는 노래를 즉석에서 익혀 가까스로 관문을 통과한다. 이어진 자유곡 오디션에서는 당시 여학생들의 애창곡인 ‘I Went to Your Wedding’을 비교적 자신 있게 불러 최종 합격자 명단에 들면서, 중앙방송국 제6기 전속가수로 발탁된다.

▲ (사진 1, 4) 공연 중 단체사진. 작곡가 김강섭, 김인배, 가수 현인, 한명숙, 현미, 최숙자, 남일해, 송춘희, 황인자, 코미디언 고춘자씨 등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2)가수 오기택씨와 화보 촬영 중. (사진 3)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한명숙, 최숙자, 이미자, 현미, 조애희씨.

첫 취입곡 ‘사랑해봤으면’으로 TBC 방송가요대상 신인가수상 수상

그의 첫 음반 취입곡 ‘사랑해봤으면’과 잇따라 발표하는 ‘내 이름은 소녀’ ‘홀로 가는 사람’ 등 그의 초기 히트곡들 대부분은 당시 KBS 전속경음악단장 김인배의 곡이다.

1. 꽃이 피면 벌 나비가 오는데/나에겐 아무도 와주지 않네/해가 뜨면 새들도 노래하는데/나에겐 아무도 와주지 않네/외로운 창가에 기다리는 마음/조용히 그렇게 사랑해봤으면/꽃이 피면 벌 나비가 오는데/나에겐 아무도 와주지 않네.

2. 꽃이 피면 봄가을 오는데/나에겐 아무도 와주지 않네/달이 뜨면 별들이 속삭이는데/나에겐 아득히 들리지 않네/외로운 창가에 기다리는 마음/조용히 그렇게 사랑해봤으면/꽃이 피면 봄가을 오는데/나에겐 아무도 와주지 않네. -‘사랑해봤으면 (하중희 작사, 김인배 작곡, 조애희 노래)’

경음악단장이자 작곡가였던 김인배씨는 공교롭게도 조애희와 같은 동향인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었다. 그는 드라마 ‘삼별초’의 주제가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 이후 1964년, 직접 음반사 ‘텔스타(Tellstar)레코드사’를 설립해 자신이 만든 노래를 직접 음반으로 제작했다.
텔스타의 첫 기획 음반인 ‘김인배 작곡 1집’에 수록된 ‘사랑해봤으면’은 때 묻지 않은 조애희 목소리를 타깃으로 만든 노래다. 그러나 정작 조애희씨는 취입을 거절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노래일 텐데 잘 못 불러 망치면 안 된다’는 소심한 걱정이 욕심보다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인배 선생은 ‘한명숙 등 다른 가수가 불러도 좋을 노래지만 이미 다들 결혼을 했기에 노래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며 조애희씨를 설득했고 작사가 하중희씨까지 가세, ‘노래의 맛을 제대로 살려주면 계란 한 꾸러미를 사 주겠다.’고 회유해왔다. 당시 계란은 매우 귀했다. 밥상에 계란프라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결정되던 시기였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사랑해봤으면’이 김인배 작곡 1집에, 이어 발표하는 ‘내 이름은 소녀’가 ‘김인배 작곡 2집’에 수록된다.

데뷔곡 ‘사랑해봤으면’은 발표되자마자 방송 인기 차트 1위에 올랐고 이듬해에 개최된 제1회 TBC 방송가요대상 신인가수상과 함께 작사 부문상을 수상했다. 제1회 방송가요대상은 1965년 5월에 개최되었다.

▲ 전성기 시절 조애희 발표 음반들

해외공연 중, ‘사랑해봤으면’ 히트 소식에 서둘러 귀국길에 올라

첫 데뷔곡인 이 ‘사랑해봤으면’을 취입한 지 얼마 후 가수 조애희씨는 당시 미8군쇼의 인기 무용수 라복희와 팀을 이뤄 홍콩공연을 떠난다. 6개월간의 계약일정이었지만 출국 직전에 취입했던 ‘사랑해봤으면’이 발표되자마자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마침 때맞춰 라복희씨의 가정사정과 맞물려 조애희씨는 2개월 만에 홍콩활동을 접고 서둘러 국내무대로 복귀했다.

‘사랑해봤으면’을 시작으로 작곡가 김인배씨와 콤비를 이뤄 ‘내 이름은 소녀’, ‘숲 속의 하루’, ‘홀로 가는 사람’ 등으로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한 그는 계속해서 강수향씨와 듀엣으로 불렀던 드라마 주제가 ‘딸이 좋아요’, ‘민들레꽃도 봄이면 핀다’를 비롯해 ‘남아있는 마스코트(DBS 드라마 ‘부모님전상서’ 주제가, 1965), ‘도정궁의 낙조(DBS, 1966)’, ‘밤에만 멋쟁이(1966)’, ‘개나리꽃 피는 마을(1966)’ 같은 드라마 주제가를 잇달아 취입했다.

1. 비바람 개이면 푸른 저 하늘/어두운 밤 지새면 새날이 와요/이 마음 쓸쓸히 구름과 같이/들 건너 언덕 넘어 흘러만 가요/사랑의 오솔길 원앙의 오솔길/아들이 좋다지만 딸이 더 좋아/재롱둥이 딸이 좋아 딸이 더 좋아.

2. 오늘의 인심이 내일은 천심/꽃이 좋아야만 열매가 되죠/이 마음 한없이 무지개 따라/은하수 저 너머로 달려만 가죠/사랑의 오솔길 원앙의 오솔길/아들이 좋다지만 딸이 더 좋아/재롱둥이 딸이 좋아 딸이 더 좋아. -‘딸이 좋아요(김기만 작사, 김인배 작곡, 조애희 강수향 노래)’

이 노래는 60년대 당시 계몽적 메시지를 담은 밝고 경쾌한 홈드라마 ‘딸이 좋아요’의 주제가다.

▲ 연주인 겸 작곡가 이동기 연주 음반들과 이동기 고희기념 헌정음반

클라리넷 연주인 이동기씨와 사랑에 빠지다

이 무렵 조애희씨가 드디어 사랑에 빠진다. 상대는 유독 말 없고 수줍은 성품인 것으로 유명했던 클라리넷 연주인 이동기씨. 그는 1956년, 대동상고 시절부터 모자를 눌러 쓴 채 색소폰 연주자 출신인 부친 이준영씨가 운영하던 악단을 따라다니며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기준으로 서른을 막 넘긴 노총각이었다.

“당시 함께 무대에 섰던 조선호텔의 클럽 ‘프린세스룸’에서 처음 만났는데 첫 인상이 너무 순수해보였어요. 전혀 밤무대에서 연주하는 사람답지 않은 순수한 매력에 이끌렸지요.” 조애희씨의 회고다.

“처음부터 집안의 반대가 매우 심했어요. 무엇보다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며 극구 만류했죠. 그렇지만 ‘돈은 같이 벌면 된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이 무렵 이동기씨가 즐겨 연주하던 레퍼토리 중 하나가 바로 ‘허무한 마음(전우 작사, 오민우 편곡, 정원 노래)’였다. 이동기씨 역시 이 노래를 타이틀로 연주곡 음반(킹, KL-7022)도 발표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노래는 정원보다도 먼저 조애희씨가 발표했던 노래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조애희씨가 이 노래를 발표할 당시 제목은 ‘너무나 사랑해서’. 주리오 작사, 김영광 작곡으로 표기되어 발표되었다. 주리오는 김영광의 또 다른 예명.

떠나버린 님이건만 밤마다 속삭여주네/꿈속에서 만나던 내 마음은 뜨거워지네/지금은 눈물이 사라져가네/그립던 마음도 사라져가네/떠나버린 님이건만 밤마다 속삭여주네. -‘너무나 사랑해서(주리오 작사, 김영광 작곡, 조애희 노래)’

이렇듯 음악적 교감이 절묘하게 교차했던 이들은 결국 1966년, 웨딩마치를 울린다. 이들이 신혼여행을 겸해 찾은 곳이 바로 부산. 당시 최고의 신혼여행지였던 해운대가 위치한 곳이기도 했지만, 조애희씨 입장에서는 비록 고생스러웠을지언정 그래도 아름다운 유년시절의 추억이 있는 부산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 가보고 싶다는 마음도 작용했으리라. 때문에 조애희씨는 신랑 이동기씨와 함께 예전에 살던 영도의 봉래동, 옛 이층집 동네를 찾아간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금만 뛰어도 집 전체가 흔들리던 그 위태로운 이층집이 안쓰럽게나마 고스란히 남아 있어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해 자신이 살던 집은 이미 헐린 것 같다고 둘러댔다.

호흡이 유독 잘 맞았던 재즈 연주인과 인기 여가수의 무대

▲ 인터뷰 당시 조애희, 이동기씨와 필자. 아래 사진은 조애희·이동기 가족

결혼 이후 두 사람은 더욱 호흡을 맞춰 활발한 음악활동을 전개한다. 또한 이때까지 순수한 연주인이었던 이동기씨는 조애희씨를 위해 작곡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첫 작품이 바로 1968년에 발표한 ‘그 사람 바보야’. 이 노래는 후에 가수 정훈희씨가 불러 대중들 사이에서 크게 히트했지만 처음 레코딩의 주인공은 조애희씨였다.

1. 단 한번 윙크로 내 마음 줄까봐/살짝꿍 윙크한 그 사람 떠났네/다시 한 번 눈짓했음 웃어줄 텐데/다시 한 번 윙크하면 사랑할 텐데/아-- 나는 몰라 그 사람 바보야 그 사람 바보야요/아-- 나는 몰라 그 사람 바보야 그 사람 바보야요/.단 한번 윙크로 내 마음 줄까봐/살짝꿍 윙크한 그 사람 떠났네.

2. 단 한번 윙크로 내 마음 줄까봐/싱겁게 윙크한 그 사람 떠났네/용감하게 눈짓했음 웃어줄 텐데/뜨거웁게 윙크했음 따라갈 텐데/아-- 나는 몰라 그 사람 바보야 그 사람 바보야요/아-- 나는 몰라 그 사람 바보야 그 사람 바보야요. -‘그 사람 바보야(정두수 작사, 이동기 작곡, 조애희 노래)’

조애희가 1968년에 처음 취입한 이 노래는 이후 정훈희가 부른 노래와 가사도 약간 다르고 또 2절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직후 본인이 리메이크한 또 다른 버전은 1, 2절 가사를 하나로 묶어 발표했다.

이렇듯 재즈 연주인과 인기 여가수의 만남은 서로 최상의 호흡을 이끌어내며 상승효과로 이어졌다. 이들은 함께 ‘그 사람 바보야’를 시작으로 ‘푸른 하늘 구름처럼’ 그리고 ‘세월’, ‘그대여’ 등을 발표하며 1993년까지 함께 음반을 발표했고 또한 2000년대 초까지 재즈클럽 ‘문라잇’, ‘사또’ 등의 무대에 함께 서며 많은 박수를 받았다.

특히 평생 클라리넷을 연주한 탓에 윗입술이 지나치게 두꺼운 이동기씨와 재즈 분위기가 한껏 돋보이는 조애희씨와의 조인트무대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스스로 ‘전당포 인생’이라 할 만큼 가난한 연주인의 길을 걸어왔던 클라리네티스트 이동기씨는 타계 직전까지 재즈 클럽 ‘야누스’와 ‘문 글로우’ 무대에 서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현재 조애희씨는 모든 활동을 접고 그동안 스스로 소홀히 했다고 여기는 가정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현재 가족은 아들 둘, 그리고 아들을 꼭 빼닮은 손주...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 무대 활동 때문에 제대로 뒷바라지 못한 아쉬움을 이제 부터라도 손주에게 쏟겠다.”고 말하는 조애희씨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보였다. NM

[참고 자료]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조애희[1][2](서울신문 2006년12월21일, 28일 자)’.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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