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2.06.10  07:53:01

공유
default_news_ad1

윈스턴 처칠… 정파 초월한 전시 연립내각 구성으로 2차대전 위기에서 나라 구해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국회에서 열린 추가경정예산안(추경) 관련 시정연설에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영국 보수당과 노동당은 진영이나 정파를 초월한 전시 연립내각을 구성해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다”면서 ‘처칠과 애틀리의 파트너십’을 강조했다. 전시 연립내각이 어떤 상황에서 탄생하고 이를 주도한 처칠이 어떤 인물인지를 살펴본다.

총리 취임과 전시 연립내각 구성 (1940년)

1938년 9월 아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히틀러에게 넘겨주는 ‘뮌헨 협정’에 서명했을 때 영국 의회와 여론은 “전쟁을 피했다”며 체임벌린을 ‘평화의 사자’로 환영했다. 그러나 같은 보수당 하원의원 윈스턴 처칠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완전한 실패작”이라고 혹평했다. 처칠의 평가는 히틀러가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하고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결국 체임벌린은 전쟁 전 대독(對獨) 정책의 오판을 문제삼은 의회의 불신임으로 1940년 5월 7일 총리에서 퇴진하고 66세의 처칠이 5월 10일 총리로 취임했다.

▲ 런던 시내를 걷다가 시민을 향해 ‘V’ 사인을 보내는 처칠 (1943년 6월)

사실 처칠은 보수당 내에 적이 많았다. 보수당원으로 하원에 입성했다가 1904년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꾸고, 1924년 다시 보수당으로 복귀해 배신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자기중심적 스타일이어서 인기도 없었다. 그런데도 보수당의 당수와 총리로 선출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보수당 주류가 체임벌리 처럼 대독일 유화 노선을 취한 것과 달리 1933년부터 독일의 군사력이 영국의 안전에 중대한 위협이라고 주장하며 군비 증강을 역설해온 처칠이 히틀러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가장 적합한 총리로 비쳤기 때문이다.
처칠은 5월 13일 하원에 출석,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했다. “국민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피와 노고, 땀과 눈물뿐입니다.… 우리의 정책은 바다와 땅과 하늘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동원해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는 것입니다.” 처칠의 연설은 성과 없는 협상과 계속되는 패배에 지쳐 있던 의원들을 감동시켰고, 하원은 만장일치로 총리 임명을 가결했다.
처칠은 곧 자신의 보수당과 경쟁 당인 노동당 인사를 막론한 거국 내각을 구성했다. 내치를 담당할 부총리에는 노동당 당수인 애틀리를 임명하고 노동장관과 내무장관 자리도 노동당에 넘겼다. 처칠 자신은 총리와 함께 국방장관, 해군장관을 겸했다. 처칠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강조한 보수당 수장이고, 애틀리는 복지국가 건설에 앞장섰던 노동당 당수였으나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함께 손을 잡은 것이다.

히틀러에 맞서 싸워 승리한 유럽 유일 지도자 (1940~1945년)

처칠이 총리로 취임할 무렵, 전황은 암담했다.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는 전쟁 전 독일에 흡수되었고 폴란드는 이미 지도에서 사라졌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가 차례로 무너지고 덴마크는 4시간 만에 백기를 들었다. 믿었던 프랑스마저 항복 직전이었다.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미국은 중립을 지켰다. 유럽에서 영국은 외톨이였다.
총리 취임 후 결전 의지를 다지는 처칠의 잦은 연설은 영국 국민들에게 위안과 안심의 메시지로 전달되었다. 처칠은 참전 군인에게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V’자 사인으로 결전을 독려하고 국민에게는 “만약에 대영제국이 천년을 간다면 사람들은 ‘그때가 가장 좋은 시대였다’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처칠은 지하벙커에서 새벽까지 전황보고를 받고 연설문을 썼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도 밀담을 주고받았다. 전시 중인데도 처칠은 ‘항상 눈에 보이는 지도자’였다. 국민은 군수공장, 폭격 맞은 집, 군인 막사 등을 방문해 국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처칠의 모습을 신문에서 확인하면서 자신들의 지도자가 항상 자신들 가까이 있음에 안도하고 친근감을 느꼈다.
문제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탓에 전쟁 물자를 구입할 돈도 운송할 여력도 영국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미국에 손을 내밀었으나 당시 미국의 무기수출법은 대금 선불과 구입자 운송이 원칙이었다. 처칠은 참전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루스벨트 미 대통령을 ‘보스’로 치켜세우고 자신은 ‘부관’이라고 낮추며 무상 무기 제공과 운송을 미국에 요청했다. 루스벨트를 설득하기 위해 거의 2,000여 통의 전보와 편지로도 구애작전을 펼쳤다. 루스벨트는 의회를 설득한 끝에 1941년 3월 ‘무기대여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전쟁물자의 대외 원조 및 대여에 관한 실질적 권한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310억 달러어치 무기를 공급받았다. 1941년 12월 미국은 일본과 독일에 연이어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소련은 이미 그해 6월부터 상호 불가침조약을 어기고 침공해온 독일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결국 1945년 5월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총선 패배와 총리 퇴임 (1945년)

1945년 5월 전쟁이 끝났을 때 처칠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아 국민들로부터 80%라는 큰 지지를 받았다. 처칠은 보수당 단독으로도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찼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이 우위를 보였다. 그런데도 처칠은 노동당이 참여한 거국 내각을 해산하고 7월 5일 총선거를 단행했다. 승전의 주역이었으니 당연히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노동당 49.7%, 보수당 36.2%로 노동당의 압승이었다. 보수당은 전체 의석의 반도 안되는 197석이었은 노동당은 무려 393석을 차지했다.
노동당의 압승 배경은 6년 가까이 지속된 전쟁이 끝나고 그 과정애서 피폐해진 삶에 지칠대로 지친 유권자들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구호로 전후의 복지국가를 약속하는 노동당의 선거 메시지에 더 높은 점수를 주었기 때문이다. 인기가 높던 처칠 대신 보수당의 전 총리 스탠리 볼드윈과 네빌 체임벌린의 실정을 지적한 선거 전략도 주효했다.
처칠은 선거에 패배했지만 아직 임기가 남아 있어 1945년 7월 17일부터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미국의 트루먼, 소련의 스탈린과 함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7월 26일 애틀리가 총리로 취임하고 그날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자 처칠은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라는 교훈을 스탈린에게 가르쳐주듯이 회담 도중 포츠담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다.

개인 삶 (1874~1965년)

윈스턴 처칠(1874~1965)은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아일랜드 총독, 아버지는 재무장관을 지낸 유명 정치인이었으며 어머니는 뉴욕 출신 백만장자의 딸이었다. 처칠은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하고 말이 어눌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매력적인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작은 키에 뚱뚱했으며, 등이 굽은 데다 대머리였다. 목은 거의 안 보였고 입술은 얇았다.
학교에서는 말썽꾸러기에 성적도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귀족 자제들이 의례적으로 입학하는 옥스퍼드대나 케임브리지대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2번의 낙방 끝에 1893년 왕립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다행히 사관학교는 처칠에게 잘 맞아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장교 임관 후에는 쿠바와 인도 등지의 전투에 4차례 참가했지만 전공을 세우거나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처칠의 이름이 영국에 널리 알려진 것은 1899년 ‘모닝 포스트’지 특파원으로 남아공의 보어전쟁에 종군했을 때였다. 당시 그는 탈선한 열차에서 부상병을 구하려다 포로가 되었으나 한달만에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적진을 뚫고 480㎞를 걸어 남아공의 더반으로 돌아왔다. 이 극적인 탈출기가 신문에 연재되고 이것이 화제가 되어 1900년 7월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처칠은 덕분에 그해 치러진 선거에서 26살의 나이에도 보수당 소속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1920년대의 2년을 제외하고는 1964년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62년간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1904년에는 보수당 정부가 보호관세 정책을 취한 것에 반발, 자유당으로 소속 정당을 바꾸어 1905년 통상장관으로 입각했다. 1908년 9월, 11살 아래 클레멘타인 호지어와 결혼했는데 스코틀랜드 귀족의 딸인 클레멘타인은 이후 처칠의 삶에서 반려자 이상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안식처, 그리고 친구였다. 부부는 1남 4녀를 낳으며 56년간 해로했다.

62년간 하원의원으로 활동

처칠은 1911년부터 5년간 해군장관을 맡아 해군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적국인 오스만 투르크 수도 이스탄불 근처에 영국군(주로 호주·뉴질랜드 출신 부대)을 상륙시키는 갈리폴리 작전을 추진했다가 20여 만명의 사상자를 내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 해군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그는 하원의원인데도 현역 군인으로 복귀해 1915~1916년 부대 대대장으로 최전방에서 싸웠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면서 갈리폴리 작전 실패를 만회하고 꺼져가던 정치 생명을 되살릴 수 있었다.
1917년 다시 입각해 군수장관, 육군장관, 식민장관을 차례로 역임하며 행정 경험을 쌓았으나 1차대전 종전 뒤 자유당의 인기가 떨어져 1922년 총선에선 패배했다. 1923년 보궐선거에서도 의회에 복귀하지 못했다. 결국 인기 없는 정당 간판으로는 더 이상 당선되기 힘들다는 현실적 이유와 자유당 정부의 지나친 친소련 정책이 못마땅해 자유당을 탈당하고 1924년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해 간신히 당선되었다. 1925년, 21년만에 보수당으로 복당한 뒤에는 재무장관으로 활동하면서 1925년 파운드화의 금본위제도를 부활시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정책은 심각한 디플레이션과 실업, 노동자 파업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총파업에 나선 노조를 강경 진압했다가 격렬한 비난을 초래해 자신은 물론 보수당의 지지도까지 떨어뜨렸다.
보수당이 1929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패해 야당이 되자 처칠은 총선 책임론에 시달렸다. 보수당이 1935년 재집권했을 때도 처칠은 내각 기용에서 철저히 외면당해 다선 평의원으로 ‘정치적인 황야’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나 처칠은 나치 독일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언제라도 무력을 쓸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런 전력을 인정받아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또다시 해군장관을 맡아 10년만에 내각에 복귀하고 1940년 5월 총리로 취임했다.
1945년 7월 총리에서 물러난 처칠은 1946년 미국으로 건너가 2차대전이 끝나 안락과 풍요에 젖어있는 미국인을 향해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3월 5일 트루먼 대통령까지 참석한 미국 웨스터민스터대에서 처칠은 “발트해의 스테틴으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철의 장막이 대륙을 가로질러 드리워지고 있습니다.”며 소련의 팽창을 경고했다. 이 ‘철의 장막’ 연설로 처칠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확인시켰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동구권이 차례로 소련 공산주의 수중에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는 용어로 명쾌하게 정의한 이날의 연설은 냉전시대의 개막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경고음이었다.

총리 복귀(1951년)와 퇴임(1955년)

1945년 7월 총리 자리를 꿰찬 애틀리는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복지국가, 계획경제를 국정 3대 지표로 삼았다. 자유시장을 중시하는 경제 기조에서 시장을 통제하는 쪽으로 전환, 영국중앙은행, 광산, 철도, 전기 등 기간 산업을 국유화하고 의료·주택·연금·실업 수당 등 복지 정책을 제도화했다. 특히 ‘요람에서 무덤까지’ 구호로 요약되는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지금도 영국이 자랑하는 국민건강시스템(NHS)이다. NHS는 세금을 재원으로 전 국민을 무료로 진료해주는 획기적인 정책이다. 이런 그에게 오늘날까지 따라붙는 수식어가 ‘영국 전후 질서의 설계자’ ‘영국을 복지국가로 전환시킨 주역’이다.
그러나 1949년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영국민의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서 좌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인기를 잃어갔다. 보수당은 ‘국민을 풀어주라(Set the people free)’라는 구호로 노동당의 계획경제와 국유화 정책을 비난했다. 결국 애틀리와 노동당은 1951년 10월 총선에서 20만표라는 박빙의 표차로 정권을 보수당에 넘겨줘야 했다.
1951년 10월 26일, 6년만에 총리 자리에 복귀한 처칠은 정권을 잃었던 기억을 잊지 않고 다양한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공산주의 세력 확대에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러나 80세가 넘는 노령으로 국정을 수행하기에 무리였다. 결국 1955년 4월 7일 앤서니 이든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하원의원으로 남아 있다가 1964년 의원직에서 물러나고 1965년 1월 21일 91세로 타계했다.
처칠은 정치인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에세이와 시사평론 등을 신문에 기고하고 소설, 전기, 역사서 등을 집필한 작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하며 평생 43종 72권의 책을 출판했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 ‘영어 사용 국민들의 역사’ ‘2차대전 회고록’ 등 20여 권에 이르는 역사서도 집필했다. 그중 ‘2차대전 회고록’(전 6권)은 1953년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다.
2002년 영국 BBC방송이 100만 명 이상의 영국인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을 조사했을 때 셰익스피어나 뉴턴, 엘리자베스 1세 등을 제치고 당당히 1위에 꼽혀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과 신뢰를 받은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

장한나… ‘첼로의 신동’에서 ‘거장 지휘자’로 변신

독일 함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최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서 장한나가 2022년 9월부터 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를 맡는다고 발표했다. 장한나는 1994년 12살의 나이로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하면서 세계 음악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면서는 지휘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2007년부터 지휘 겸업에 나섰고 2017년부터는 노르웨이의 명문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도 맡고 있다.

천재적 재능과 부모 열성의 합작품

장한나(1982~ )의 웃음은 천진하고 해맑다. 상황에 따라 “호호호”, “히히히”, “헤헤헤” 등 각기 다르게 들리는 장한나의 웃음을 접한 사람들은 일순간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무장해제되고 만다. 이런 웃음은 장한나의 성격이 여유가 있고 낙천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는 연주자들에게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장한나는 경기 수원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3살부터 피아노를 배우다 5살 때 생일 선물로 받은 첼로에 매료되었다.
장한나는 일취월장했다. 9살 때인 1991년 ‘월간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서울시향을 비롯해 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했다. 부모는 장한나가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칠 무렵인 1993년 1월 장한나의 재능 하나만을 믿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가 유학생 비자 신분으로 도미했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장한나의 학업비와 값비싼 악기 구입 등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장한나의 천재적 재능과 자신들의 열성이었다.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도 장한나의 연주 테이프만을 듣고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을 허락했다.
장한나는 1994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3대 첼로 콩쿠르 가운데 하나인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 출전했다. 100명이 넘는 유망주가 대거 출전한 콩쿠르에서 장한나는 10월 15일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연소 대상과 현대음악상을 수상했다. 콩쿠르 주최자인 로스트로포비치는 “한나가 잘못되면 내가 죄를 짓는 것”이라며 장한나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지휘계의 거장 주세페 시노폴리도 그녀의 천재적인 음악성에 반해 후원을 약속했다. 지휘자 로린 마젤은 “장한나만큼 완벽한 연주를 하는 첼리스트는 내 생애에 처음”이라며 극찬하고 미샤 마이스키는 “한나의 연주를 듣고 나서 환생을 믿게 되었다. 누구도 그 아이를 함부로 가르쳐선 안 된다”며 장한나의 천재성에 경외심을 표했다.?

세계적인 거장들, 장한나의 천재성에 경외심 표해

▲ 장한나

문제는 장한나의 재능을 뒷받침해 줄 값비싼 첼로였다. 장한나 부모는 우리나라 문화체육부 장관 앞으로 호소 편지를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와 장한나 후원회가 나서 7억 원을 호가하는 1757년산 명기 과다니니를 구입해 1995년 4월 30일 장한나에게 기증했다. 장한나는 그날 이 악기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장한나는 커티스 음악원에 첼로 부문 최연소로 합격했다. 하지만 “음악에만 치우치면 보편적인 사고를 갖추기 힘들 것”이라는 부모의 판단에 따라 일반 사립학교로 보내졌다. 이번에도 수업료는 전액 장학생 대우를 받아 면제받았고 장한나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장한나는 연주 여행을 떠날 때는 교과서를 들고 가 틈틈이 공부하고 담임교사의 배려로 이메일 강의를 듣는 것으로 교과 과정을 따라갔다. 이런 노력 덕에 2002년 하버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장한나는 1995년 11월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하고 런던심포니가 연주한 데뷔 앨범을 EMI에서 냈다. 첼리스트로서는 역대 최연소였다. 음반은 장한나에게 ‘에코 음반상’과 ‘올해의 영아티스트상’을 안겨주었다. 이후에도 장한나는 ‘그라모폰 협주곡 부문 올해의 음반상’(2003)을 수상하고 영국의 ‘그라모폰’지가 뽑은 '내일의 클래식 슈퍼스타 20인'(2006)으로 선정되는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장한나는 2007년 5월 27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린 ‘성남 국제청소년 관현악 페스티벌’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세계적 음반사 EMI를 통해 이미 6장의 독집을 발표한 정상급 첼로 연주자인데도 생소한 지휘 무대에 선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첼로는 바이올린과 달리 레퍼토리가 적다. 바흐, 베토벤, 하이든, 드보르자크 등 50여 곡이 주요 레퍼토리의 전부다. 그래서 첼리스트들은 음악적 한계를 넘기 위해 지휘 공부를 한다. 첼리스트 출신인 토스카니니와 로스트로포비치 등이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거장 지휘자 가운데 여성이 없는 음악계 현실에서 장한나가 지휘자로 세계에 알려진 것은 2012년 12월이었다. 카타르 국립교향악단인 ‘카타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장한나를 음악감독으로 영입한 것이다. 장한나가 음악감독을 맡게 된 과정도 전격적이었다. 2012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이 악단을 처음 지휘했을 때 단원 투표를 거쳐 악단이 음악 감독직을 공식 제안한 것이다. 장한나는 2013년 9월, 2년 임기의 음악감독으로 정식 취임했다. 하지만 2년의 임기를 채우지 않고 취임 1년 만에 물러났다. 경영진과의 계속되는 행정적 불화와 타협하기 어려운 예술적 견해 차이가 원인이었다. 이후 장한나는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의 수석 객원지휘를 거쳐 2017년 트론헤임의 수장(首長) 자리인 상임지휘자를 꿰찼다. 2022년 5월에는 독일 함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지휘자까지 맡았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저작권자 © 뉴스메이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3
default_setImage2

최신기사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실시간 뉴스

전국 뉴스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