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5주년과 35주년 기념 콘서트를 미국 팬들이 열어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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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귀국한 원로가수 최정자씨와의 인터뷰, 2019년 10월 |
‘초가삼간’, ‘처녀 농군’, ‘창부타령’, ‘매화타령’의 민요가수 최정자씨.1981년 미국으로 떠난 이후 국내 활동을 접었지만 깨끗하고 정겨운 미성의 가수로 가요 팬들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그동안 국내에서의 활동은 접었지만 미국 현지에서 데뷔 25주년 기념 콘서트(시카고, 1991년), 35주년 기념 콘서트(아틀란타, 2003년)를 통해 계속 팬들을 만나왔다.
현재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는 가수 최정자씨가 지난 2019년 10월,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했다. 낙원동 낭만극장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를 만나 데뷔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당시 근황을 들어보았다.
작곡가 황우루씨와는 음악적 콤비이자 소문난 잉꼬 커플. 원로가수 최정자씨와의 인터뷰. 그 삶과 노래, 첫 번째.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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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 최정자(우측)씨를 비롯해 가수 정향, 남백송, 작곡가 김종유, 작사가 야인초씨 등과 함께 부산에서. (아래) 최정자(좌측에서 두 번째)씨를 비롯해 가수 현미, 최희준, 한명숙씨 등의 모습이 보인다 |
‘그리운 초가삼간’ 팬클럽 측. ‘언제 들어도 싫증 나지 않는 노래’
‘초가삼간’, ‘처녀 농군’, ‘창부타령’ 등 맑고 깨끗하면서도 감칠 맛 나는 창법을 정겹게 구사하는 민요 가수 최정자씨(79세).
1981년 미국으로 떠난 이후 국내 활동을 접었기 때문에 국내 팬들에게는 잊힌 원로가수인 듯하지만 그의 노래를 아끼고 그리워하는 팬들이 여전히 많다. 현재 다음 카페에는 ‘그리운 초가삼간(회장 이창환)’이라는 이름의 팬클럽도 운영되고 있을 정도. 회원 수는 약 2천 8백여 명에 이른다.
토속적이면서도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노랫말과 멜로디. 한국 여인들의 소박한 꿈과 행복을 밝고 서정적으로 노래한 최정자 노래, 팬클럽 ‘그리운 초가삼간’의 이창환 회장은 ‘언제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노래’라고 강조한다.
꺾어 신은 운동화 질질 끌며 피란 내려온 고집 센 아이
가수 최정자는 1944년 1월 7일(음력) 부친 최원근, 모친 임천금 사이에서 1남 6녀 중 차녀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되던 해 1.4 후퇴 때 남쪽으로 피란 내려온다.
부친은 먼저 피란을 떠나고 언니, 사촌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걸어서 강화를 거쳐 인천으로 내려왔다.
“어릴 때 제가 유독 고집을 셌다고 하더라고요. 피란 가는데 굳이 꺾어 신은 운동화를 신고 가겠다고 우기더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신을 신겨 피란길에 올랐는데 그런 신을 질질 끌면서 먼 길을 갈 수 없잖아요. 그런데 마침 가는 도중에 금은방이 있었어요. 피란 때는 금반지, 금가락지 등을 애들 팬티 밑에 넣고 꿰매줬어요. 거기서 반지를 하나 빼서 돈으로 바꿔 신발을 산 생각이 나요. 그렇게 걸어 걸어 강화에 도착했지요.” 다행히 피란길 도중에 부친과 우연히 재회한다.
“강화에서 어떤 가게에 들어갔는데 거짓말처럼 아버지가 딱 거기 계시는 거야.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그 후부터 아버지와 함께 인천에서 잠시 지내다가 서울로 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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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자 첫 독집 음반 ‘한 많은 남태평양’과 영화 주제가 음반 ‘민며느리’, ‘머슴의 딸’ |
고등학교 졸업 후 작곡가 김화영에게 노래 지도 받아
서울에 정착한 이후 마포초등학교를 거쳐 한성여중·고등학교에 다녔다. 어릴 때부터 노래 잘한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지만 실제로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남들처럼 바이런과 하이네의 시를 외우고 다니는 평범한 감성 소녀’였다. 노래를 부르게 된 계기 역시 우연히 찾아왔다.
“고등학교 친구가 유명한 작곡가와 같은 동네에 산다며, ‘개나리 처녀’의 작곡가 김화영 선생님을 소개해줬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용기 있게 찾아가 1년간 노래 지도를 받았죠.” 당시 그곳에는 작곡가 이철혁 선생도 계셔서 노래 편곡을 도와주었다고 기억했다.
데뷔하자마자 드라마, 영화 주제가를 유독 많이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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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스터와 신문 광고. ‘눈물에 젖은 왕관(1966년)‘, ‘내별은 어느 하늘에(1967년)’, ‘악인가(1967년)’, ‘꽃가마(1966년) |
‘최정자’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알린 노래는 ‘월남에서 보내주신 오빠의 편지(반야월 작사, 김기표 작곡, 1965년)’다.
실제 데뷔곡은 이보다 먼저 취입한 ‘갈매기 자매 항구(반야월 작사, 고봉산 작곡)’. 이어 영화 주제가 ‘민며느리’(소화당 작사, 고봉산 작곡, 1965년)를 잇달아 발표하는데 음반에 ‘영화 주제가’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로 영화가 개봉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같은 해에 제작되어 화제를 모은 영화배우 최은희의 감독 데뷔 영화 ‘민며느리’와는 다른 영화다.
데뷔와 동시에 아세아레코드 전속으로 활동하던 최정자씨는 잇달아 라음파 작곡의 ‘오동잎(이철수 작사)’과 ‘울다가 지쳤어요(김문응 작사)’ 등을 계속해서 발표한다.
노래에 대한 반응이 좋았던 것일까. 아세아에서는 전속 1년 차인 이 신인가수의 이름을 내건 독집 음반을 기획한다. 이 신인 유망주에게 거는 음반사의 기대가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모두 12곡이 수록된 첫 독집 ‘최정자 히트 앨범 NO.1-한 많은 남태평양(아세아, 1966년)’이 바로 그것. 이 음반은 일본에서 막 귀국한 후 영화 주제가 작업을 주로 하던 작곡가 손목인의 곡 위주로 제작되었다. 무려 5곡이 수록된 것. 그 외 노래들은 아세아 전속 작곡가들인 조춘영, 김영종, 남백송 작곡의 노래들.
이어지는 음반들을 통해 최정자는 영화 주제가를 잇달아 취입한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그린 영화 ‘눈물에 젖은 왕관(하한수 감독, 1966년)’의 동명 주제가 ‘눈물에 젖은 왕관(반야월 작사, 손목인 작곡)’을 비롯해 ‘꽃가마(나봉환 감독, 1966년)’, ‘반역(김영효 감독, 1966년)’ 등의 주제가도 함께 발표했다.
데뷔 초기에 최정자는 유독 라디오드라마 주제가와 영화 주제가를 많이 취입했다. ‘돈나카바레의 귀여운 아가씨...’로 시작되는 노래 ‘돈나카바레(문예부 작사, 고봉산 작곡)’는 영화 ‘누명 쓴 사나이(김봉환 감독, 1966년)’의 또 다른 주제가다. 영화 배경이 되는 카바레 풍경을 경쾌하게 그린 노래로 작곡가인 고봉산과 함께 듀엣으로 취입했다. 영화 주인공은 장동휘.
그런가 하면 이해 12월부터 방송된 동아방송 연속사극 ‘사기옹주(沙器翁主)’의 주제가 또한 취입한다. 이 주제가는 극작가 이영신이 노랫말을 쓰고 홍현걸이 작곡했다. 우리나라의 전통 국악 멜로디를 도입한 이 주제가를 통해 최정자는 우리 민요를 제대로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한국적인 악기 선율과 잘 어울렸다.
실제로 데뷔 초기인 이 무렵 최정자씨가 스스로 밝힌 취미는 ‘그릇 모으기’였다. 독특한 모양의 그릇에 관심이 많다 보니 집에 특이한 그릇이 많다고 밝혀 가정적인 여성 이미지가 부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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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주제가 음반, ‘내 별은 어느 하늘에’, ‘누명 쓴 사나이’ |
혼혈아 에니박의 수기를 영화화한 ‘내 별은 어느 하늘에’의 주제가 ‘이 밤을 어이 하리’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노래가 이듬해 발표한 ‘이 밤을 어이 하리(김문응 작사, 손목인 작곡, 1967년)’다. 이 노래는 뉴욕타임즈에 소개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던 혼혈아 에니박의 베스트셀러 수기를 영화화한 ‘내 별은 어느 하늘에’의 주제가다. 기지촌이라는 이방 지대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혼혈아 에니박의 비극적인 삶을 심도 있게 그려낸 수작이다.
1. 달빛 어린 임진강에 물새도 슬피 우는/이 밤을 어이 새나 등불마저 서러워요/아무리 불러봐도 아니 올 그 사람/나는 왜 이다지도 못 잊어 눈물짓나/아-- 내 별은 어느 하늘에.
2. 파란불이 켜질 때면 설움도 짙어가는/밤마다 짜는 눈물 한 동이냐 두 동이냐/파파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 내 몸/누구의 품에 안겨 이 밤을 새야 하나/아-- 내 별은 어느 하늘에.
-‘이 밤을 어이 하리(김문응 작사, 손목인 작곡, 최정자 노래, 1967년)’
조긍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 ‘내 별은 어느 하늘에’에서 에니박 역은 배우 김혜정이 맡았다. ‘양공주’, ‘따랑누나’라 불리는 등 갖가지 비아냥거림에도 밤만 되면 웃는 얼굴로 살아가야 하는 아이러니를 묘사한 이 노래는 최정자의 맑은 음색으로 인해 그 슬픔이 더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갖가지 후유증에 시달리듯 6.25 한국전쟁이 남긴 비극, 혼혈아의 아픔을 고발한 이 영화가 그렇듯 우리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함께 취입한 ‘악인가의 에리자(김문응 작사, 고봉산 작곡)’는 영화 ‘악인가(최영철 감독, 1967년)’의 삽입곡이다. 이 영화에는 고은아, 독고성, 이예춘이 출연했다.
활동 당시 밝힌 가수 최정자의 노래 철학
“가수라는 작업은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감정을 표현하는 직업이니까. 자신의 감정이 아닌 듣는 이들의 감정, 이를테면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노래로 대신 표현해야 하니까 매우 어렵지요. 물론 그만큼 더 노력해야겠지요.” -당시 모 인터뷰에서 그녀가 한 말이다.
듣는 이의 입장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 그녀의 노래 철학이었다. 가느다란 비단 실타래가 풀리듯 맑고 고운 음색은 그녀의 노래를 더욱 서정적으로 만들었다.
‘등대불 하소연’, ‘머슴의 딸’, ‘등잔불 사랑’ 등 주로 서정적인 대중가요를 부르며 지고지순한 한국적 여인 이미지로 점차 주목받던 가수 최정자씨는 본격적으로 민요풍의 노래를 부르며 민요 가수로 거듭난다. 작곡가 황우루씨를 만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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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당시 발표한 최정자 음반 |
연인이자 명콤비, 작곡가 황우루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민요 가수로 변신
그 시작은 ‘초가삼간’이었다. 이 노래를 발표할 당시 작곡가 황우루(본명 황갑성)씨는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무서운 신예였다.
‘키다리 미스터김(이금희)’, ‘먼 산울림(이정민)’, ‘울릉도 트위스트(이시스터즈)’,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봉봉)’,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이시스터즈)’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명실공히 히트메이커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당시 황우루씨는 악보조차 그릴 줄 몰랐어요. 작곡한 노래를 그냥 육성으로 부르면 주위에서 대신 채보해 악보를 그려줬지요. 실제로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었어요.”
황우루 작곡 데뷔곡인 ‘먼 산울림’의 가수 이정민(80세)씨의 회고다. 황우루씨와 포항중학교 동창이기도 한 그는 당시 국군방송국에 근무, ‘먼 산울림’을 취입하면서 ‘우리나라 아나운서 출신 가수 1호’라는 칭호를 얻었다.
황우루와 최정자, 이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국군방송국에서였다고 최정자씨는 회고한다.
“‘위문열차‘라는 공개방송을 마치고 나오는데 PD가 황우루씨를 소개했어요. 그래서 처음 보았는데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나를 위해 곡을 만들었다며 악보를 불쑥 내미는 거예요. 순간 당황해서 대답조차 할 수 없었죠.”
인사를 시킨 이석민(본명 이병훈) PD와 이정민 아나운서, 황우루씨는 모두 절친한 사이였다.
“어색하게 머뭇거리다 나오는데 갑자기 쪽지를 하나 건네면서 자기가 가고 난 다음에 읽어보래요. 나중에 펼쳐보니 느닷없이 ‘아내가 돼줄 수 있느냐’는, 그런 말이 있었어요. 순간 너무 황당했고 또 한편으로는 무서웠지요. 그래서 도망치듯 거길 빠져나왔죠.”
첫 만남은 그렇게 어색하게 끝났다. 불발이었지만 황우루씨는 집요했다. 그에게는 어떤 확신이 있었다.
그 무렵 황우루씨는 세운상가에서 ‘우루레코드’라는 음반가게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최정자의 새 앨범 ‘머슴의 딸’의 음반 재킷을 보게 된다. 한복 차림의 표지 사진에도 호감이 갔지만 무엇보다 실같이 곱고 맑은 음색이 귀에 쏙 들어왔다. ‘이 가수다’, 자신이 찾던 목소리를 발견했다고 확신한 황우루씨는 그때부터 이 목소리에 맞춰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초가삼간’이다.
1. 실버들 늘어진 언덕 위에 집을 짓고/정든 님과 둘이 살짝 살아가는 초가삼간/세상살이 무정해도 비바람 몰아쳐도/정이 든 내 고향/초가삼간 오막살이 떠날 수 없네.
2. 시냇물 흐르면 님의 옷을 빨아 널고/나물 캐어 밥을 짓는 정다워라 초가삼간/밤이 되면 오손도손 호롱불 밝혀놓고/살아온 내 고향/초가삼간 오막살이 떠날 수 없네.
곡을 완성한 뒤 그는 최정자를 만나기 위해 수소문한 끝에 국군방송 ‘위문열차’에 출연한다는 사실을 알고 무작정 달려갔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신곡 취입을 제의했지만 거절당한 것. 그러나 황우루씨는 집요했다.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하는가 하면 심지어 집골목을 지키고 있다가 그 앞에 나타나 취입해줄 것을 재차 요구했다.
결국 요구에 못 이겨 최정자씨는 이 노래를 취입한다. 음반이 나오자마자 황우루씨는 ‘초가삼간’을 들고 전국 방송국을 돌았다.
단조롭고 조용한 트로트 리듬에 간드러진 민요풍 가락이 매력적인 노래 ‘초가삼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노래는 당시 한창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던 ‘등대불 하소연’을 한순간에 누르고 지방에서부터 인기몰이를 시작한다. 공교롭게 이 무렵 방송가에는 자체 심의로 많은 노래가 방송금지 되었던 터라 민요풍의 ‘초가삼간’은 더욱 자주 전파를 탔다.
이를 시작으로 둘은 계속해서 ‘고향 산천’, ‘일편단심’, ‘그리워라 어머님이여‘ 등을 잇달아 발표, 히트 행진을 이어간다.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황우루·최정자‘ 스타일의 토속적인 신민요는 당시 가요계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결국 민요 가수 최정자의 대표곡이 된 이 ’초가삼간‘은, 사실상 황우루가 최정자에게 보내는 일종의 프로포즈 송이었다. 첫 만남에서 건넨 쪽지 내용이 그러했듯. 결국 이들은 이듬해 2월, 주위의 예상을 깨고 전격 약혼을 발표한다.
독신주의자 황우루, 최정자와 전격 약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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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스터와 신문 광고. ‘눈물에 젖은 왕관(1966년)‘, ‘내별은 어느 하늘에(1967년)’, ‘악인가(1967년)’, ‘꽃가마(1966년) |
1968년 2월 10일, 황우루·최정자의 전격 약혼 발표에 가요계가 술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황우루씨는 공공연하게 독신을 선언해 왔기 때문이었다.
“황우루씨는 몸이 약해 오래 살 수 없을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어릴 때 유독 잔병치레가 많았고 군에 입대했지만 훈련 중 급성 간장염으로 인해 의가사 제대를 해야 했죠. 그러다 보니 그 스스로 앞으로 15년 정도밖에 못살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 때문에 결혼도 평생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죠. 어느 여인에게도 비극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겠지요.” 황우루씨의 절친, 가수 이정민씨의 말이다.
그러나 ‘초가삼간’을 시작으로 최정자와 콤비를 이룬 이후 그의 생활 자체가 180도 달라졌다고 말한다.
‘황우루씨 눈에는 최정자씨가 가수이기 이전에 평범한 현모양처로 보였을 것’이라며 ‘언론과 인터뷰할 때도 동생을 항상 동반할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순정파’로 ‘전혀 연예인 같지 않은 단정하고 고전적인 모습, 가정적이고 순수한 인간미에 끌렸을 것’이라며 ‘아마도 6.25 때 잃은 어머니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최정자씨 역시 황우루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민요 가수로 변신.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한다. 비로소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1968년 신세기 전속에 이은 결혼 발표
약혼과 함께 이 둘은 당시 메이저 음반사인 신세기에 전속된다. 전속기념으로 만든 노래 중 한 곡이 최정자씨의 또 다른 대표곡, ‘처녀 농군’이다. 1968년 9월에 발표되었다.
1. 홀어머니 내 모시고 살아가는 세상인데/이 몸이 처녀라고 이 몸이 처녀라고/남자 일을 못 하나요/소 몰고 논밭으로 이랴 어서 가자/해 뜨는 저 벌판에 이랴 어서 가자/밭갈이 가자.
2. 홀로 계신 우리 엄마 내 모시고 사는 세상/이 몸이 여자라고 이 몸이 여자라고/남자 일을 못 하나요/꼴망태 등에 메고 이랴 어서 가자/해 뜨는 저 벌판에 이랴 어서 가자/밭갈이 가자.
향토색이 짙은 노래를 주로 부르는 가수 최정자씨가 힘찬 스윙 리듬에 실어 발표한 노래다. 당시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전국 방방곡곡 ‘잘 살아 보자’는 슬로건과 맞물려 발표되자마자 전국을 강타했다.
최정자·황우루 커플은 계속해서 이슈메이커로 세간에 조명을 받는다. 신세기 전속에 이어 1968년 10월 19일, 드디어 결혼식을 올린 것.
황우루씨가 결혼 선물로 건넨 노래가 ‘옹달샘’이다. 노래를 만들면서 그는 아내를 영원히 행복하게 할 남편이 되리라고 다짐했다고 훗날 밝혔다. 전원 풍경을 아름답게 그린 아기자기한 가사에 전형적인 4분의 2박자 트로트의 쉽고 고운 멜로디가 매우 정겹게 느껴지는 노래다.
1. 옹달샘 흐르는 물에 버들잎 훑어놓고/옷고름을 입에 물면 님의 품이 그리워/치맛자락 잘잘끌며 남몰래 와서/무뚝뚝한 그 사람에게 내 마음 전할 때/옹달샘 맑은 물에 비는 내 사랑.
2. 향나무 그늘 아래 옹달샘 흐르면/가슴속에 간직한 사랑 님의 품이 그리워/열아홉 남모르게 부푼 이 가슴/부끄러워 얼굴을 살짝 붉혀보지만/옹달샘 맑은 물에 비는 내 사랑. -‘옹달샘(황우루 작사, 작곡, 최정자 노래, 1968년)’
이처럼 마냥 행복한 이 둘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첫딸 ‘새봄’ 양을 얻을 무렵 발표한 ‘창부타령’, ‘매화타령’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최정자씨는 민요 가수로써 확실한 입지를 다진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황우루씨는 우루레코드에 이어 우루기획을 설립, 본격적으로 레코드 제작에 직접 뛰어든다. 뚜아에무아, 은희, 블루벨즈, 조영남, 블루진, 숙이와 용이 등 음반 제작에 이어 극장식 주점 ‘니캉내캉‘까지 오픈하며 꿈과 야망을 한껏 펼쳤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이들의 질주는, 그러나... (계속)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