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아랍 분쟁의 뿌리는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
팔레스타인은 현재의 요르단과 이스라엘 그리고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이스라엘 남서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가자 지구를 가리킨다. 현지 지명은 ‘팔레스티나’이지만 1차대전 후 영국이 통치하면서 영어식 표현인 ‘팔레스타인’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은 땅이 비옥하거나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1,800여 년 동안 떠나 있던 이곳에 그들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시오니즘’ 운동을 본격화하면서 팔레스타인이 화약고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여기에 20세기 들어 이곳을 차지하려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과 분쟁, 이 분쟁을 이용해 잇속을 채우려는 영국의 이중적인 태도, 영국-프랑스 간 아랍 영토 분할 비밀협정, 2차대전 후 일방적으로 진행된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 등으로 21세기 지금까지 증오와 눈물과 보복으로 점철되고 있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거주한 것은 기원전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1~10세기의 다윗왕과 솔로몬왕 때 전성기를 맞았으나 솔로몬왕 사후 헤브라이 왕국이 북쪽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 유대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8세기 후반 아시리아 제국에, 유대 왕국은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멸망됨으로써 고대 이스라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유대인들은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인 바빌론(현재의 이라크)으로 끌려가 ‘바빌론 유수’를 겪었으나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유대인들을 포로에서 해방시켜준 덕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원후 70년, 로마 제국에 의해 신전이 파괴되고 강제로 유럽 전역으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를 거치면서 유대인들은 또다시 세계 각지에서 수난과 박해를 받아야 하는 고통의 시대를 겪었다. 7세기경 팔레스타인의 지배자는 이슬람 제국이었다. 12세기에는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에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는 등 기독교와 이슬람의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15세기부터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중세 말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의 거주지를 특정한 지구로 한정하는 ‘게토’ 정책이 시작되면서 유대인 다수는 동부 유럽과 러시아 등지로 다시 이동했다. 서유럽에서는 시민혁명을 전후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일부 개선되었으나 19세기 중후반 다시 반 유대주의의 대두로 불안한 삶이 이어졌다. 동유럽에서도 17세기 중반부터 거의 200년 동안 유대인을 집단 습격하고 대량 학살하는 ‘포그롬’이 행해져 그곳도 결코 편치 못했다. 그러자 예루살렘 지역에서 살고 있던 소수의 유대인들은 유럽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위해 1878년 예루살렘에서 벗어나 팔레스타인 시골 지역에 유대인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882년 루마니아에서 유대인이 대거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고 1884년부터 러시아에서도 귀환 행렬이 이어지면서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은 계속 늘어났다.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 인구는 1882년 2만 4000명에서 1895년 4만 7000명으로 급증했다. 유대인들은 이 시기를 1차 이주(1882~1903년)로 구분한다.
시오니즘 운동
그러던 중 1890년대 들어 프랑스에서 반 유대인 풍조가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다. 급기야 1894년 현직 프랑스 장교인데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체포된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이 유대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나라를 세우는 것만이 차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조국 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뼈저리도록 느끼게 했고 유대 민족 국가 건설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닫게 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유대인의 국가 건설과 유대 민족의 활로 개척 운동이자 사상인 시오니즘 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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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 밸푸어와 ‘밸푸어 선언’ |
핵심 인물은 헝가리 태생 언론인으로 ‘유대인 국가’(1896년)를 쓴 테오도어 헤르츨(1860~1904)이었다. 헤르츨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유대인 사회를 찾아다니며 시오니즘 확산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이 1897년 8월 29일~31일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1회 시오니스트 대회였다. 세계 24개국 200여 명의 유대인 대표가 참석한 첫 회의에서 ‘조국 시온(팔레스타인)의 언덕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바젤 선언’이 채택되었다. 이 회의가 전환점이 되어 시작된 ‘조국 귀환 운동’은 유대인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한 정신적인 모체가 되었다.
두 번째 회의는 참가 인원이 300여 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1년 뒤 열렸으며 이후 연례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5번째 바젤 회의 때 영국이 당시 영국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우간다를 신생 유대 국가 땅으로 제안한 일이다. 하지만 이 안건은 사찰단이 우간다 현지를 살피고 돌아온 후 부결되었다. 결국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정착지로 최종 확정했다. 그들은 그곳 땅을 사들이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모금 운동을 벌이면서 대거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그중에는 1906년 폴란드에서 이주한, 장차 이스라엘 초대 총리가 될 20살의 다비드 벤 구리온도 있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는 것이야말로 시온주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썼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고등학교를 설립하고 협동농장인 키부츠 농장을 건설해 더욱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도록 터를 닦았다. 1914년 무렵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이 9만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숫자가 급증하면서 팔레스타인에 터를 잡고 있던 아랍인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맥마흔 선언’과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
팔레스타인이 21세기 지금까지 수난과 고통의 땅이 된 원인(遠因)으로는 아랍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1차대전 때 독일과 맺은 동맹을 꼽을 수 있다. 결국 오스만튀르크는 전쟁 중 영국의 적대국이 되었고 영국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 아랍에서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려 광대한 영토를 얻을 목적으로 피지배 민족인 아랍인들의 전쟁 참여를 유도했다. 특히 팔레스타인은 아랍인과 유대인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치고 장차 화약고가 될 것이 분명하고 영국 또한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데도 영국은 당장의 승리를 위해 상호 모순되고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했다.
1914년 발발한 1차대전 초기, 프랑스는 독일-오스트리아를 상대한 서부전선에서 그런대로 조금씩 승기를 잡아나갔다. 그러나 영국이 오스만 제국과 맞붙은 레반트(지금의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 전선에서는 좀처럼 전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해군을 주력으로 하는 영국이 사막과 광야의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15년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가 생겼다. 오스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아라비아반도 서부 헤자즈 지역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 알리가, 이집트 카이로 주재 영국의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에게 자신들이 오스만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싸울 테니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 통일 아랍 왕국을 세워 자신에게 달라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맥마흔의 보고를 받은 영국 정부는 당연히 아랍의 반란 계획을 받아들였다. 1915년 7월부터 1916년 3월까지 모두 10차례에 걸쳐 서신이 오가며 후세인과 맥마흔은 미래 아랍 왕국의 영토를 논의했다. 그 과정에서 맥마흔은 “아랍인들이 참전하면 전쟁이 끝난 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 국가 건설을 포함해 아랍 지역의 독립을 보장해 주겠다”라고 약속했다. 이른바 ‘맥마흔 선언’이었다. 영국의 약속을 믿고 후세인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전개한 것은 1916년 6월이었다. ‘아라비아의 로런스’로 유명한 영국의 토머스 에드워드 로런스가 후세인을 돕기 위해 이집트 카이로에 파견된 것은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916년 10월이었다.
그런데 영국은 아랍 부족이 봉기하기 1개월 전인 1916년 5월, 프랑스와 기만적인 비밀협정을 체결해 놓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영국과 프랑스 양국이 아랍 지역을 분할·통치한다는 이른바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이었다.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가 맺은 비밀협정은 1차대전이 승리로 끝날 경우 레반트와 아라비아반도 일부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 통치하자는 내용이었다. 양국은 1915년 1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이어진 비밀협상 끝에 1916년 5월 16일 정식으로 협정에 서명했다. 협상 기간을 보면 후세인-맥마흔 서신 교환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영국의 이중 플레이가 분명했다.
‘밸푸어 선언’
그 무렵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기 위해 혈안이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은 훗날 ‘이스라엘 공화국 건설의 아버지’로 불리게 될 하임 바이츠만이었다. 1차대전 때 영국의 맨체스터대 교수였던 그는 폭약 제조에 쓰이는 아세톤의 대량생산법을 개발함으로써 영국의 전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의 고위 정치인들과 폭넓은 인맥을 형성했다.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 영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영국 정치인들을 설득했다. 영국으로서도 미국 내 유대인들을 통해 미국의 대 독일 전쟁 참여를 유도하고, 유대인 재벌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으려면 그들의 협조가 절실했다. 이에 따라 아서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이 세계시온주의자연맹 대표이자 유럽 최대 금융재벌이던 라이어널 로스차일드에게 1917년 11월 2일, 유대인들이 전후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른바 ‘밸푸어 선언’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의 집을 세울 것을 지지하며,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조항 뒷부분에 ‘현재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는 비유대인 단체의 시민적·종교적 여러 권리를 손상하지 않고, 또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고 있는 여러 권리 및 정치적 지위를 손상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다’는 내용이 있긴 하지만 시온주의자들에게는 열광적인 기대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아랍인들에게는 영국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밸푸어 선언으로 시온주의 운동에 불이 붙으면서 반 유대주의로 배척받던 유럽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또다시 대거 몰려왔다. 이주 유대인들이 많아질수록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로 인해 두 민족은 30년간에 걸쳐 갈등, 충돌, 암살, 살상으로 얼룩진 세월을 보내야 했다.
영국의 기만정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차대전 종전 후 열린 1920년 4월의 산 레모 회의에서 팔레스타인과 이라크는 영국이 위임통치하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맡기로 한 것이다. 이는 아랍인들의 기대를 다시 한번 무참히 짓밟은 배신이었다. 결국 후세인이 통일 아랍 왕국의 영토로 삼고자 했던 레반트와 아라비아반도는 쪼개졌다. 이후 본격적으로 제국 해체 작업이 시작되어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은 통일 아랍 왕국 대신 오늘날 22개 아랍 국가로 재편되었다. 1차대전 종전 후, 유대인들은 밸푸어 선언을 믿고 아랍인들의 거센 반대 속에서도 세계 곳곳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아랍인들은 분노가 극에 달했으나 그렇다고 군사 강국인 영국을 상대할 수 없어 유대인을 표적으로 삼아 분노를 터뜨렸다. 유대인들도 폭력으로 맞섰다.
‘화이트 백서’
유대인의 이주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유대인 박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1930년대 들어 급증했다. 그러자 영국의 필(Peel) 위원회가 1937년 이 지역을 유대인, 아랍, 영국 등 3국이 돈을 내고 땅을 나눠 갖도록 하는 분할안을 제안했다.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 실세로 활동하고 있는 벤 구리온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비록 소규모이지만 유대인 국가 창설 자체가 시온주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벤 구리온의 설득으로 시온주의 지도부가 필 위원회의 분할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영국은 전운이 감도는 2차대전에 아랍인들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20여 년 전 구사한 기만술을 또다시 꺼내 들었다. ‘팔레스타인에는 단일 국가만이 존재하며 유대인의 이민자 수를 향후 5년 동안 매년 1만 5,000명으로 제한하고 5년 후에는 아예 중단한다’ ‘유대인들은 위임통치령의 5%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아랍 땅을 구입할 수 없다’는 내용의 이른바 ‘화이트 백서’를 1939년 5월에 발표한 것이다.
유대인 시오니스트 그룹은 즉시 백서를 거부하고 유대인 총파업을 주도했다. 벤 구리온 역시 불만이 컸으나 당시 세계 정세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벤 구리온은 “우리는 마치 백서가 없었던 것처럼 영국을 지원할 것이며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우리는 영국의 백서에 분연히 저항할 것이다” “히틀러와 싸울 때는 백서를 생각하지 말고 백서와 싸울 때는 히틀러를 생각하지 말자”고 겉으로는 말하면서도 ‘하가나’(이스라엘군의 전신)를 통해 유대인들의 불법 이주를 은밀히 지원했다.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영국의 백서 정책에 격분하면서도 막상 2차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의 정책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대거 영국군에 가담했다.
하지만 영국은 2차대전 종전 후에도 백서 정책을 변경하지 않고 유대인들의 밀입국 러시를 저지했다. 분노한 유대인들은 준 군사 단체인 ‘하가나’, 사설 무장단체인 ‘이르군’을 중심으로 기습과 테러로 영국에 타격을 주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을 돌아다니며 영국군을 상대로 기습과 폭탄 공격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1946년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영국군 최고사령부가 있는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파해 80여 명의 영국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점차 무정부 상태로 치닫는데도 영국은 갈등을 조정하는데 실패하자 이 문제를 국제 사회에 떠넘겼다. 유엔은 1947년 11월 유엔총회 결의안 제181호를 통해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 땅 절반을 분할해 줘야 한다는 일명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를 채택했다. 유대인은 즉각 환호하며 이듬해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아랍-팔레스타인은 이에 반대해 이스라엘을 상대로 제1차 중동전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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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뮌헨 맥주홀 봉기 100주년
20대 중반까지 실의와 원망과 고독의 날들을 보내던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1차대전을 만난 것은 독일 뮌헨에 있을 때였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국적은 오스트리아지만 독일 바이에른 연대에 입대하고 싶다”는 청원서를 보내 참전을 허락받고 그해 10월 서부전선에 배치되어 연락병으로 활동했다. 히틀러는 군대 문화가 만족스러웠다. 가문, 학력, 재산을 따지지 않고 용기와 공훈만이 힘을 발휘하는 군대 경험을 통해 히틀러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고독감과 열등감이 사라지고 전우애가 자리를 잡았다. 히틀러는 전쟁에서 두 차례 부상을 겪고 1급·2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뮌헨 맥주홀 봉기는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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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돌프 히틀러 |
1918년 전쟁이 끝난 후 뮌헨의 국방군에 소속된 히틀러에게 ‘독일노동자당’이라는 정치단체를 정탐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독일노동자당은 노동자 몇 명이 모여 만든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단체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을 정탐하다가 매력을 느껴 1919년 9월 입당하고 당 내 영향력을 확대했다. 독일노동자당의 당명은 1920년 4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으로 바뀌었고 히틀러는 1921년 나치당 당수에 선출되었다. 히틀러가 당수로 먼저 한 일은 당의 행동 부대 격인 돌격대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전직 군인, 의용군, 청년 노동자, 학생 등으로 구성된 돌격대의 무기와 자금은 바이에른 국방군이 지원했다. 당시 독일군은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병력이 10만 명 이하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나치 돌격대와 같은 우익 무장단체를 별도로 운영했다. 이를테면 ‘비밀 국방군’이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탁월한 대중연설가답게 무력감에 빠져 있는 국민의 마음을 교묘히 파고들어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었다. 유대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연설은 1차대전 패전 후 희생양을 찾고 있던 독일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독일 경제는 연합국 측의 무자비한 배상금 부과로 사실상 파탄 상태였다. 1922년 겨울에는 프랑스가 배상금 지불을 강요하기 위해 석탄과 철강 생산 지대인 루르 지방으로 진군해 들어오기도 했다. 물가는 급상승하고 마르크화는 불쏘시개로 쓰일 정도로 폭락했다. 이처럼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히틀러가 “옛 게르만의 영광을 되찾자”며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히틀러가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노린 것은 1923년 11월 8일 구스타프 폰 카르 바이에른주 총독이 수천 명의 시민을 상대로 연설하고 있는 뮌헨 시내의 맥주홀이었다. 연설이 한창이던 밤 9시 15분쯤, 히틀러가 맥주홀 안으로 쳐들어가 천장을 향해 권총을 발사한 뒤 큰소리로 “국가혁명이 일어났다”며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밖은 300여 명의 돌격대원이 에워싸고 있었다. 히틀러는 “바이에른 주정부 및 베를린 정부는 해산되었고 곧 독일 임시정부가 조직될 것이다. 임시정부 총통은 나 아돌프 히틀러이고 국민군 사령관에는 루덴도르프가 취임할 것”이라고 연설한 뒤 맥주홀 안에 있던 카를 총독과 바이에른 지역 군사령관, 바이에른주 경찰서장에게 “함께 혁명을 하자”고 위협했다.
세 사람은 일개 하사 출신의 제안에 동참할 생각이 없었지만 히틀러와 함께 거사한 1차대전의 영웅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세 사람을 설득하면서 쿠데타는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잠시 후 밖에서 주 정부군과 나치 돌격대가 무력 충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히틀러가 그곳으로 달려나간 사이 세 사람은 현장에서 빠져나오고 쿠데타는 진압되었다. 히틀러는 11월 9일 아침 300여 명의 나치당원과 함께 시내를 행진하는 것으로 다시 한 번 세를 과시했으나 경찰의 발포로 16명의 나치당원과 3명의 경찰이 숨졌다. 히틀러는 현장에서 도망쳤다가 이틀 후 체포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출소 후 ‘나의 투쟁’ 출간
1924년 2월 26일부터 24일 동안 재판이 열린 법정은 히틀러에 대한 응징의 장소가 아니라 히틀러가 자신의 존재를 독일 전역에 알리는 선전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의 법정 웅변은 독일 모든 신문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히틀러는 1924년 4월 1일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2월 20일까지 9개월 동안만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궤변을 가다듬었다. 그에게 독일 민족인 아리안족은 가장 뛰어난 인종이었고 유대인은 기생동물이거나 열등 동물이었다.
히틀러는 함께 수감된 루돌프 헤스와 운전사에게 자신의 이런 생각을 받아 적도록 했다. 그리고 석방된 후인 1925년 7월 18일 감옥에서 정리한 기록들을 자서전으로 출간했다. 당초 제목은 ‘허위, 우열, 비겁에 대한 4년의 투쟁’이었으나 강렬한 인상을 주자는 출판사의 권유로 ‘나의 투쟁’으로 바꿔 출간했다. ‘나의 투쟁’은 1926년 제2권, 1929년 합본호가 나왔으나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1933년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한 뒤부터는 불티나게 팔렸다. 1933년에만 100만 부가 팔리고 1940년에는 600만 부나 팔려나갔다.
히틀러는 실패로 끝난 뮌헨 맥주홀 쿠데타를 거울삼아 합법적인 수단에 의한 새로운 집권 투쟁을 준비했다. 1924년 5월 총선에서 6.5%의 득표로 32석의 의석을 획득해 기세등등했으나 1928년 5월 총선에서는 득표율 2.6%에 의석수 12석으로 떨어져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이런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1929년 말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과 경제난이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1930년 9월 총선에서 18.3%의 득표율로 107석을 얻어 일약 제2당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1932년 총선에서 마침내 제1당에 오르고 1933년 1월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것은 머지않아 인류에게 닥칠 대재앙의 서곡이었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