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pop의 원류를 찾아 한국 대중음악으로의 여행을 가다-‘창가’에서 ‘한류’까지
▲ 기록으로 보는 시대별 한국 대중음악사 특별전 패널. |
‘K-pop의 원류를 찾아서/대한민국 대중음악사로의 여행’ 전시회가 오는 9월 3일부터 7일까지 인사동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코트(KOTE)’에서 열렸다. 전시 구성은 필자가 맡았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대중가요’라는 용어가 생기기 전까지는 크게 ‘신식노래’, ‘창가’, ‘유행가’ 등으로 불려 왔다.
일제 강점기에 ‘저항가요’로 출발해 국민의 기쁨과 슬픔을 대신해 온 대중가요. 이 속에는 당대 사회상과 더불어 당시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국민과 함께 해온 대중가요는 제각각의 리듬을 타고 격동의 시대를 관통해 왔다.
광복 이후 분단, 그리고 6.25 피란 시절을 지나 60년대 보릿고개를 넘어 70년대 이후 낭만 시대를 질주해 온 대중음악. 때로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재갈이 물려지는 희생양이 되기도 했고 그 반대로 홍보의 최전방에서 첨병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제금 대중음악은 ‘한류’의 진원지이자 주역이기도 하다.
K-Pop의 원류이자 한국 근대사의 큰 줄기, 한국 대중음악사의 시대별 주요 흐름을 찾아 음악 여행을 떠나본다. 그 첫 번째.
글ㅣ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KOTE 예술제 2024/바람이 전하는 말’ 포스터. |
KOTE 예술제 2024 ‘바람이 전하는 말’
‘화려한 무대를 벗어나 소박한 정자의 풍류(風流)로’... 국내외 100여 명의 예술가, 학자가 참여하는 대규모 실험 문화 행사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복합문화공간 코트(KOTE, 대표 안주영)에서 9월 3일부터 7일까지 ‘코트 예술제 2024/바람이 전하는 말’이 열렸다.
올해 열린 ‘코트 예술제 2024’는 K-pop의 원류부터 기후 위기, 영화 스토리텔링, 국악, 미디어아트까지 다루는 주제도, 방식도 더 다양해졌다. 전시, 강연, 영화 상영, 관객 참여형 게임 등이 5일간 다채롭게 펼쳐졌다.
10여 년의 제작 기간을 두고 완성된 한국 대중음악의 거장, 작곡가 김희갑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바람이 전하는 말(감독 양희)’도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가족 영화사인 ‘욱희씨네’의 다큐멘터리 감독인 허욱과 작가인 양희 부부가 공동으로 제작, 연출했다.
이에 맞춰 오아시스레코드(대표 김용욱) 주최로 ‘릴 테이프 청음회’도 열렸다. 영화, 음악, 재즈, 그리고 김희갑을 주제로 가요사를 수놓은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명곡들을 원본 그대로 릴 테이프로 진행되었다.
아울러 ‘K-Pop의 원류를 찾아 떠나는 대한민국 대중음악사로의 여행’이라는 주제로, ‘기록으로 보는 시대별 한국 대중음악사 특별전/창가에서 한류까지’ 전시 또한 열렸다. 이 전시는 1920년대부터 현재 K-pop의 한류 열풍까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100년 역사와 주요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시대별로 보여준다.
이 전시 구성을 맡은 필자의 진행으로 ‘LP 감상회’도 전시 기간 중 개최되었다. 그 특별전 현장을 가본다.
▲ 1920년대와 1930년대 패널. |
1920년대/한국 대중음악의 태동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레코드로 취입된 첫 창작곡은 성악가 안기영이 부른 ‘내 고향을 리별(이별)하고’를 꼽는다. 1925년 11월 ‘닙보노홍’ 라벨로 발매되었다. 이어 12월에 권번(券番) 출신 가수 박채선, 이류색의 목소리로 ‘이 풍진 세월(희망가, 원곡-제레미잉걸스 작곡 ’Garden')’ 등이 발매되는데 이 음반들은 일축축음기 동경지부장을 겸하고 있던 이세기가 종로에 조선축음기상사를 차린 뒤 일본에 가서 녹음한 것이다.
1926년 8월, 소프라노 윤심덕이 ‘사의 찬미(원곡-이바노비치 작곡 ’도나우강의 잔물결‘)’와 ‘부활의 깃붐(기쁨)’ 등을 ‘닛토오(日東)레코드’에서 취입한 후 귀국길에 대한해협에서 투신해 더욱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28년, 빅터와 콜롬비아가 서울지사를 설립한 데 이어 29년, 영화 주제가 '낙화유수(강남달, 이정숙 노래)'가 발표된다. 이 노래를 현 한국 대중음악의 첫 창작가요로 삼는다. 29년 일제는 ‘아리랑’ 등에 금창령을 내렸다.
당시 ‘소리판’으로 불리기도 했던 축음기 음반(SP)은 직경 10인치 크기로 앞뒤 한 곡씩 담을 수 있었다. 또한 이 음반은 ‘소리 나는 마술상자’라고도 했던 축음기를 전기 없이 손으로 태엽을 감아 음반을 재생시켰다.
1927년에는 경성방송국(현 KBS)이 개국했는데 이때 라디오 총등록 대수는 1,440대로 일본인 1,065대, 한국인 275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930년대/대중음악 개화기, 저항가요 시대
1930년대는 대중음악이 본격적으로 꽃 피웠던 시기다. 이를 전후해 ‘노들강변’, ‘처녀 총각’ 등 ‘신민요’가 등장하는데 전래민요와 다른 점은 작사, 작곡자가 분명한, 우리 가락을 기초로 한 형식의 노래라는 점이다.
‘직업 가수 1호’라 불리는 채규엽은 30년 3월 직접 작사, 작곡, 노래한 ‘유랑자의 노래’로 데뷔, 우리나라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로 자리매김하고 1932년 ‘황성의 적(황성옛터, 이애리수)’ 음반에 이어 ‘타향(타향살이, 고복수, 34년)’과 ‘목포의 눈물(이난영, 35년)’이 발표된다. ‘목포의 눈물’은 우리나라 노래비 1호라는 영예도 가지고 있다.
30년대에는 빅터, 태평, 콜롬비아, 포리돌 등 레코드사들과 함께 한국인 이철이 경영하던 ‘오케레코드’가 있었다. 각 음반사는 음반 홍보 수단으로 직영 악극단을 운영했고 신인가수를 선발하기 위한 콩쿠르를 개최했다.
1937년부터 방송에서 ‘유행가’라는 용어 대신 ‘가요곡’이라 사용했고 레코드 산업이 호황을 누렸지만, 서울에 녹음실을 설치한 곳은 37년 오케레코드사뿐이었다. 이후 40년대에 포리돌, 콜롬비아 등이 간이 녹음실을 설치했었으나 태평양전쟁에 따른 물자 부족으로 유명무실했다.
30년대에 발매된 음반 라벨에는 노래의 장르를 다양하게 분류해 놓고 있는데, 이 중에서 유행가, 유행소곡, 유행곡, 서정소곡, 애정소곡, 영화 주제가, 가요곡, 신가요, 만요 등이 오늘날 민요, 가곡, 동요 등과 같이 세분된 '대중음악'의 범주에 드는 것들이다.
▲ 1940년대와 1950년대 패 |
1940년대/노래도 함께 해방된 광복, 그리고 남북 분단 가요 시대
1941년 조선연극협회와 연예협회가 통합,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창설되었고 연예인들에게는 ‘기예증’이 발급되었다. 41년 ‘라미라가극단’이 ‘견우와 직녀’를 초연, 이것이 우리나라 뮤지컬의 효시로 본다. 43년에서 45년까지는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음반 제작이 중단되고 오로지 군국가요만이 울려 퍼졌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우리말과 노래도 함께 해방되었으나 당시 음반산업은 일본 레코드사들이 모두 철수한 뒤라서 말 그대로 불모지였다. 46년 조선레코드회사가 설립되었으나 장비와 물자 부족으로 성과는 거의 없었다.
이 무렵 대중음악을 이끈 것은 결국 무대공연이었다. 46년 8월 악극협회가 결성되었고 47년 전국가극협회가 결성되었다.
1947년 고려레코드사가 설립, ‘가거라 38선(남인수)’을 발표한 데 이어 ‘달도 하나 해도 하나(남인수, 아세아)’, ‘울어라 은방울(장세정, 오케)’ 등이 발표된다.
1948년 작곡가 박시춘에 의해 본격적으로 녹음시설을 갖추고 설립된 럭키레코드사는 ‘신라의 달밤(현인)’을 1호 음반으로 출시했고 이어 서울, 오리엔트, 코로나 등 군소 음반사들이 설립되어 음반의 명맥을 이어갔다.
남북 분단의 혼란기를 전후해 강홍식, 박영호, 이면상, 조명암 등이 월북하고 계수남, 김동진, 전오승, 한정무, 한복남 등이 남하하는 등 가요계 또한 남북으로 갈라지며 이후 월북작가의 곡들은 한동안 금지곡에 묶여 남한 가요사에서 묻혔다.
1947년 6월, 서울중앙방송국이 전속 경음악단(박시춘, 손목인 등 지휘)을 결성한 데 이어 전속가수 제도를 시행했고 미군이 주둔하면서 서구 문물 유입과 함께 댄스홀이 등장했다.
1950년대/6.25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연예인들은 군예대에 편성, ‘군번 없는 용사’가 되어 전쟁터를 함께 누볐다. 국방부 정훈국 직속 문예중대가 조직되었는데 제1소대는 ‘신협’으로 순수 극단이었고 제2소대는 ‘가협’이라 칭해 일선 위문, 전후방 공연 활동을 펼쳤다.
임시수도 부산과 대구에서는 쇼나 악극 공연이 활발했고 도미도, 미도파, 오리엔트, 스타 등 음반사를 통해 음반이 꾸준히 제작되었다. 6, 25 전쟁 동안 한반도는 포성 소리와 함께 진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굳세어라 금순아(현인)’, ‘전우야 잘 자라(현인)’을 비롯해 실향민들을 위한 망향가 ‘꿈에 본 내 고향(한정무)’, ‘경상도 아가씨(박재홍)’, 그리고 ‘이별의 부산정거장(남인수)’ 등이 등장했다.
1953년, 휴전 환도 이후 대중음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 갔다. 서구문화가 본격 상륙하면서 ‘춤바람 열풍’과 함께 맘보 등 경쾌한 리듬의 다양한 곡들이 등장했고 전통가요의 현대화가 가속화되었다.
1957년 레코드가 SP에서 LP(long playing micro grove record)로 대체되고 기기도 축음기에서 전축으로 바뀌는 등 일대 혁신을 몰고 왔다. 전쟁의 상흔이 점차 아물면서 미8군 쇼 가수들의 일반무대 활동이 두드러졌고 영화 주제가 전성시대도 펼쳐진다. 레코드사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59년에는 본격적인 상업방송 부산MBC가 개국한다.
▲ 1960년대 패널. |
1960년대/‘소리의 혁명’ ‘장르 다양화’, 대중음악 르네상스 시대
4.19로 시작되어 5.16으로 이어지며 시작된 60년대 들어 가요계의 가장 큰 변화는 ‘소리의 혁명’이다. 1963년부터 LP가 10인치 크기에서 앞뒤 여섯 곡씩 담을 수 있는 12인치 크기로 제작되었고 64년부터 스테레오 음반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오디오 또한 급성장 추세에 따라 대중음악 역시 일렉트릭 사운드가 도입되며 남녀 중창단, 그룹사운드 전성시대가 펼쳐지는 것도 60년대 소리 변화의 상징이다.
5.16 이후 각종 가요 단체가 한국연예협회로 통합되었고 1962년 방송윤리심의위원회가 발족했다. 67년 1월 한국예술윤리위원회가 발족, 모든 음반은 사전심의를 받아야 했다.
1961년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한명숙)’의 히트를 계기로 장르가 더욱 다양해짐과 동시에 번안가요 붐과 함께 한명숙, 최희준, 현미, 패티김 등 ‘미8군 쇼 가수’들이 대거 가요계로 진입해 한 축을 담당했다.
1964년 ‘동백 아가씨(이미자)’ 빅히트와 맞물려 가요계의 주 흐름이 다시 트로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1964년 그룹사운드의 효시를 이루는 ‘키보이스’, ‘에드포’가 첫 독집 음반을 발표, 이후 그룹사운드 전성시대를 견인했다.
YMCA의 '싱어롱 Y'를 시작으로 건전가요 부르기 붐과 함께 리크레이션 문화가 본격화되고 68년에 트윈폴리오가 등장, 이른바 ‘세시봉’ 세대가 등장해 통기타 시대를 예고하는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스타들이 60년대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다. (계속)
▲ 필자의 진행으로 열린 ‘음악평론가 박성서와 함께 하는 LP감상회’ 현장. |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