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플리트 前 미 8군사령관...한국군 현대화의 초석
박세리 전 골프선수와 윤윤수 휠라홀딩스 회장이 밴플리트상을 수상한다. 시상식은 2024년 9월 30일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열린다. 밴플리트상은 미 8군사령관으로 6·25전쟁을 지휘하고 전역 후에도 한국 사랑을 실천한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을 기리는 취지로 밴플리트가 별세한 1992년 한미 친선협회 ‘코리아 소사이어티’가 제정한 상이다. 한미 관계 증진에 공헌한 인물이나 단체에 매년 수여한다. 역대 수상자 중 미국인은 카터와 부시 전 대통령, 키신저 전 국무장관,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 대사 등이 있고 한국인은 이건희, 정몽구, 최종현, 박용만 회장 등 다수 기업인들이 수상했다. 이외 김대중 전 대통령, 백선엽 장군, 반기문 전 유엔 총장 등도 수상했다.
군인의 삶
밴플리트(1892~1992)는 증조부 때 암스테르담에서 뉴욕으로 이주한 네덜란드계 집안의 후손으로 뉴저지주 코이츠빌에서 태어났다. 출생 1년 후 부모를 따라 플로리다주로 이사해 1911년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할 때까지 그곳에서 성장했다.
▲ 제임스 밴플리트 대장 |
1915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동기 중에는 장차 대통령이 될 아이젠하워와 미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될 브래들리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많았다. 164명의 동기 중 59명이 별을 달고 2명의 원수(아이젠하워, 브래들리)와 3명의 대장(밴플리트, 클라크, 맥너리)을 배출해 후일 역사가들은 “별이 쏟아진 기수”라고 불렀다. 밴플리트는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1915년 12월 결혼해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세 아이들은 성장해서 군인이 되거나 군인 남편을 만났다. 외아들은 웨스트포인트 졸업 후 공군 조종사로 한국전에 참전하고 2명의 사위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이었다. 친손자는 공군사관학교를, 외손자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어느 가문에도 뒤지지 않는 대표적인 군인 명문가가 되었다. 밴플리트는 소위 임관 후 미 본토에서 복무하다가 1917년 4월 미국이 1차대전 참전을 결정하자 1918년 7월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었다.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간 밴플리트는 주로 대학의 학군단에서 복무하다가 1936년 중령으로 진급했는데 소령 계급장을 처음 단 때로부터 18년이나 걸렸다. 1941년 대령으로 진급하고 제4사단 제8보병연대장으로 임명되어 2차대전 참전에 대비했다. 1944년 1월 제8보병연대원들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6월에 감행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유타 해변에 상륙했다. 당시 동기생 중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최고사령관, 브래들리는 1군 사령관으로 승승장구했다. 밴플리트의 직속 군단장인 콜린스 소장이 2년 후배일 정도로 밴플리트의 진급은 더뎠다. 하지만 이후 전투에서 활약을 펼치면서 진급 속도가 빨라졌다.
밴플리트는 노르망디 해안에서 내륙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리더십으로 많은 전과를 올려 1944년 8월 마침내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11월 소장 진급은 4개월 만에 대령에서 준장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한 초고속 승진이었다. 그가 지휘하는 90사단은 독일군 방어선의 주요 요새인 메츠를 점령함으로써 독일군의 제1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90사단은 히틀러의 최후 공세라 할 수 있는 벌지 전투 때도 선봉에 섰다. 밴플리티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45년 3월 독일로 진공하는 제3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제3군단은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45년 5월 종전 후에는 미국으로 돌아와 미 제1군사령부 부사령관과 뉴욕 일대 관구사령관을 역임했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후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시작되고 유럽 각지에서 공산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을 때 미국이 2개의 중요한 대외 정책을 발표했다. 그리스와 터키 군사원조를 위해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1947년 3월)과 서유럽 국가의 전후 복구를 지원하기 위한 ‘마셜 플랜’(1947년 6월)이었다. 밴플리트는 1948년 2월 중장으로 진급한 후 그리스 공산 게릴라를 토벌하기 위한 그리스 군사고문단장으로 발탁되었다. 밴플리트는 그리스 정부군이 공산 게릴라를 소탕하는데 전폭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미국 대외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트루먼 독트린의 본래 취지를 살렸다.
6·25전쟁 때 미 제8군사령관으로 활약
1950년 7월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귀국한 밴플리트는 미 본토에서 복무하다가 1951년 4월 한국전에 참전한 미 제8군사령관으로 발령받아 4월 14일 대구공항에 도착했다. 밴플리트의 제8군사령관 임명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전격 해임에 따른 연쇄 작용의 결과였다. 맥아더의 후임으로 당시 미 제8군사령관이던 리지웨이 장군이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미 8군사령관이라는 빈자리가 밴플리트에게 주어진 것이다. 밴플리트가 미 제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지 10일 만에 중공군이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이른바 중공군의 4월 공세와 5월 공세였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자칫 1951년 1.4 후퇴 후 탈환했던 서울이 재차 적의 수중에 넘어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밴플리트 사령관은 중공군의 두 차례 공세를 물리치고 총반격에 나섬으로써 다시 한번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밴플리트는 1951년 7월 마침내 4성 장군으로 진급했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될 무렵 밴플리트는 북위 39도 선(평양~원산)을 확보하기 위한 대규모 북진 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그의 북진 작전은 워싱턴의 펜타곤과 도쿄의 유엔군 사령부가 미군에 과도한 인명 손실을 끼칠 수 있고 휴전에 악영향을 준다는 이유 등으로 거절함으로써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밴플리트는 이후 2년간 제8군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수없이 많은 공세 작전을 통해 오늘날의 휴전선을 확보하는데 기여했다. 밴플리트가 한국에서 미 8군사령관으로 활약하고 있을 때 외아들 밴플리트 2세가 한국전에 참전했다. 아들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대신 공군 조종사로 임관했다. 아들은 1952년 4월 4일 새벽 1시 5분 B-26 전략폭격기를 몰고 군산 비행장을 이륙했다. 임무는 북한 평안도 순천 지역에 대한 야간 폭격이었다. 폭격기는 새벽 3시 30분 레이더에서 사라지더니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이유를 알지 못해 실종자로 처리되었으나 사실은 중공군의 대공포를 맞고 추락한 전사였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우정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심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자기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 감동받아 존경하고 흠모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신뢰하게 만든 연결 고리는 한국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었다. 두 사람은 전쟁을 보는 눈도 같았고, 전쟁을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었다. 밴플리트는 자신보다 17살 많은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자기 나라의 국가 지도자처럼 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끝나서도 밴플리트를 극찬했다. 1954년 7월 28일, 미국을 국빈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미 상하원 양원 회의에서 영어로 연설할 때는 “오늘날 그에게서 훈련받은 한국 군대는 아시아를 통틀어 최강의 반공군으로 알려졌으며 한국 전선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은 밴플리트 장군을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추켜세웠다.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순간에도 함께 했다. 이승만이 1960년 4·19 발발 후 미국 하와이로 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1965년 7월 19일 그곳에서 세상을 뜨자 플로리다에 거주하고 있던 밴플리트는 부음을 듣자마자 곧바로 하와이로 날아가 미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를 모시고 서울로 왔다. 장례식까지 지켜본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군 20개 사단 확대와 현대화
밴플리트는 한국군의 확대와 현대화에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4년제 육군사관학교 설립, 국군 20개 사단의 증편, 국군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 등이었다. 먼저 1951년 8월 육군 포병학교, 육군 포병학교, 육군 통신학교 등 각종 군사학교를 총괄하는 육군 교육총관부를 설치하도록 해 교육을 강화했다. 1951년 12월에는 이종찬 육군 참모총장과 협의해 고급 지휘관들에게 미국식 전략과 전술 등을 가르치는 육군대학을 대구에 창설했다. 밴플리트는 국군 장교의 질적 향상을 위해 장교들의 미국 유학을 추진했다. 당시는 전시 중이고 국내의 경제 사정으로도 어림없는 일이었으나 밴플리트는 장교 250명을 선발해 1952년 9월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후 더욱 많은 국군 장교로 확대했다. 전쟁 발발 후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편해야 한다고 미국에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밴플리트 역시 부임 후 초기에는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국군 증강보다 지휘관들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밴플리트는 머지않아 국군 20개 사단 증편에 공감했다. 밴플리트 재임 당시 먼저 4개 사단이 창설되어 전선에 배치되었고, 이후에도 계속 사단이 창설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육군은 20개 전투사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밴플리트는 우수한 젊은 지휘관들을 많이 양성해야겠다고 생각해 미국의 웨스트포인트와 같은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데 관심이 많았다. 당시 밴플리티의 두 사위들이 웨스트포인트에 근무하고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육군사관학교는 6·25 전쟁 발발 후 2년제 과정이 폐교되었다가 1951년 10월 30일 경남 진해에서 다시 4년제 과정으로 개교했다. 1952년 1월 20일 입교한 제 11기 생도 중에는 장차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전두환 생도와 노태우 생도가 있었다.
대장 전역 후에도 한국 사랑
밴플린트는 야전군 사령관으로서의 회환과 아쉬움을 뒤로한 채 1953년 2월 11일 미 제8군사령관에서 이임하고 다음날 정들었던 대한민국을 떠났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기 전 한국은 밴플리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과 태극무공훈장 그리고 서울대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38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미국에서 대장으로 전역한 3월 31일 전역식에는 법무 장관, 체신 장관, 육군 장관, 해군 장관, 대법관 5명, 상원 의원 20명, 하원 의원 37명,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 17명의 육군 장성들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뤘다. 밴플리트가 전역한 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밴플리트를 주한 미국 대사로 임명해 이승만의 휴전 반대를 철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이 왜 휴전을 반대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한 미국 대사직을 거절했다.
밴플리트는 전역 후 1953년 9월 미국에서 한미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한미재단(AKF)은 1952년 8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6·25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을 돕기 위해 뉴욕에 설립한 단체다. 한미재단 지원사업은 밴플리트가 이사장에 취임한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을 떠난 후에도 밴플리트는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자주 방문,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 했다.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절 생일 축하 겸 미국 민간기업과의 사업 중개 등의 목적으로 연 1~2회 꼬박꼬박 한국을 방문했다. 밴플리트는 전시 중에 자신이 애써 만든 육군사관학교 첫 졸업생들의 임관식을 보기 위해 미국에서 건너와 1955년 10월 4일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4년제 과정 첫 졸업식(11기)에 참석했다. 밴플리트가 보기에 육군사관학교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또다시 육군 사관학교를 위해 나섰다. 지인들을 상대로 기금을 모집, 1958년 6월 육군사관학교 도서관을 개관하게 했다. 육군사관학교는 1960년 3월 밴플리트 장군의 동상을 교내에 세워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아버지’로 받들었다. 밴플리트는 1957년 미국에서 저명 인사들과 함께 ‘코리아 소사이어티’도 창설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미국과 한국 국민 간의 이해와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한 비영리 단체로 지금도 뉴욕 본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밴플리트는 우리나라 조선업이 세계적인 산업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1974년 울산에 현대 조선소가 처음 세워졌을 때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 배를 수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럴 때 밴플리트 장군이 나서 애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2차대전 종전 후 그리스 정부와 쌓은 인맥을 활용해 울산에 조선소가 완공되기 전인데도 그리스에 26만t급 유조선을 2척이나 수출할 수 있게 주선해 줬다. 이런 그를 기억하기 위해 2014년 3월 국가보훈처가 밴플리트 부자를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 그들의 희생정신과 대한민국에 대한 헌신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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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나비부인’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음악 인생
KBS가 2024년 8월 15일 광복절에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방송했다가 시청자들의 반발을 샀다. 이날 방영된 ‘나비부인’에 여자 주인공이 기모노를 입고 있고, 결혼식 장면에서 일본 국가 ‘기미가요’의 선율이 삽입되는 등 왜색이 보이자 광복절에 이런 방송을 해도 되느냐고 항의한 것이다.
‘푸치니 3대 걸작’은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오페라 ‘나비부인’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1858~1924)는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주세페 베르디(1813~1901) 이후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다. 베르디가 ‘오페라의 왕’이라면 푸치니는 ‘아리아의 제왕’이었다. 푸치니의 작품이 세계 오페라 극장에서 늘 최고 인기를 누리는 것은 아름다운 선율과 극적인 스토리, 다채로운 인물의 등장 때문이다. 특히 우아하고 풍부한 아리아(기악 반주에 맞춰 부르는 선율적인 독창이나 이중창) 선율이 감정을 극도로 끌어올려 이탈리아어를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관객들에게도 입체적인 감동을 느끼게 해 눈물샘을 자극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이다.
▲ 자코모 푸치니 |
푸치니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도시 루카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지방의 유명 음악가 가문이었지만 5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푸치니는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다행히 음악적인 재능을 깨우쳐 주려는 어머니 덕에 루카의 음악 학교에 입학, 음악가의 길을 준비했다. 푸치니는 18세이던 1876년 3월, 피사를 여행하던 중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보고 충격과 감동에 휩싸였다. 이날을 기점으로 교회의 음악가가 아닌 오페라 작곡가로 살기로 결심했다. 비로소 음악적 재능이 꽃을 피운 것은 1880년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였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경력을 시작한 것은 26세이던 1884년 5월 31일 자신이 작곡한 첫 오페라 ‘요정 빌리’가 밀라노 무대에서 호평을 받은 후였다.
훗날 애증으로 점철될 엘비라 본투리를 만난 것은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고향을 찾아간 1884년 7월이었다. 엘비라는 옛 친구의 아내였는데 친구가 자신의 아내에게 피아노와 성악을 가르쳐 달라고 푸치니에게 부탁한 것이 운명의 시작이었다. 둘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1886년 엘비라가 푸치니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당시 두 아이의 어머니이던 엘비라는 가정과 남편을 버리고 푸치니를 선택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혼 관계였다.
푸치니는 1893년 2월 1일 토리노 왕립극장에서 초연한 오페라 ‘마농 레스코’의 성공을 계기로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896년 ‘라 보엠’ 역시 대성공을 거두며 이탈리아를 넘어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다. 푸치니는 총 12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중 대표적인 오페라가 ‘푸치니 3대 걸작’으로 꼽히는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이다.
오페라 ‘나비부인’
푸치니가 ‘나비부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00년 5월 런던 무대에 올려진 동명의 연극 ‘나비부인’을 보면서였다. 연극은 1898년 미국 잡지 ‘센추리’에 실린 존 루터 롱의 단편소설 ‘나비부인’을 미국의 극작가 데이비드 벨라스코가 각색한 것으로, 1900년 초 뉴욕에 이어 런던 무대에서 공연 중이었다. 작가 존 루터 롱은 미국 선교사의 부인으로 수년 동안 나가사키에 살았던 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만들어 발표했다.
‘나비부인’은 1900년대 초반 일본의 항구도시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미국 해군 장교 핑커턴과 게이샤 초초상(초초는 일본어로 ‘나비’라는 뜻)의 사랑을 그린 짧은 소설이다. 핑커턴은 집안 몰락으로 게이샤가 된 15세의 초초상과 결혼식을 치르는데 당시 핑커턴은 일본 여성과의 결혼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반 장난식의 결혼이었다. 이런 그에게 초초상은 현지처에 불과했으나 초초상은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했다. 핑거턴은 복무 기간이 끝나자 일본을 떠나 일말의 주저도 없이 미국 여성과 다시 정식으로 결혼했다. 초초상은 자신이 낳은 핑커턴의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3년을 기다린 어느날 핑커턴이 미국인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와 아들을 데려가겠다고 하자 절망한 초초상은 아들과 마지막 이별 인사를 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연극에 감명을 받은 푸치니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일본어 어감을 익히고 일본 음악의 5음계를 연구하며 ‘나비부인’의 오페라 곡을 작곡했다. 일본 민요 ‘사쿠라 사쿠라’와 군가 ‘미야상 미야상’ 등 다양한 선율도 사용했다. 오페라 1막 핑커턴과 초초상이 혼례를 올리는 장면에는 일본 전통 혼례를 연상시키기 위해 장차 일본 국가(國歌)가 될 ‘기미가요’ 음악을 삽입했다. 핑커턴의 활달한 성격을 묘사할 때는 미국 국가 ‘별이 빛나는 깃발’을 사용했다.
‘나비부인’은 1904년 2월 17일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클레오폰테 캄파니니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개막 전 반응은 좋았다. 입장권에는 프리미엄이 붙었고 입장료 수입은 이 극장에서 초연된 작품 가운데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푸치니도 거금의 선금을 챙겼다. 푸치니는 ‘나비부인’의 성공을 확신한 듯 가족을 동반하고 객석을 지켰다. 그런데 막이 오르고 잠시 후 객석에서 폭소와 야유가 터져 나왔다. “라 보엠을 우려먹는 거냐”며 고함을 치는 관객도 있었다. 2막에서는 주역을 맡은 소프라노 로지나 스토르키오의 기모노가 바람 때문에 부풀어 올라 불룩 솟은 배가 보이자 “스토르키오가 임신했다! 토스카니니의 아이”라는 인신 모독성 발언까지 들렸다. 실제로 당시 여주인공 스토르키오는 유명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소란은 막이 내릴 때까지도 멈출 줄 몰랐다. 결국 초연은 관객들의 조롱 섞인 모욕과 조소를 받으며 참담한 실패로 끝이 났다. 푸치니는 공연 실패에 큰 충격을 받고 선금으로 받은 돈을 극장 측에 돌려준 뒤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부분 개작에 착수했다. 지루한 2막을 둘로 나누고 몇 군데를 고쳤다. 3막에 핑커턴의 아리아를 추가했다. 5월 28일 브레시아에서 다시 무대에 올려진 ‘나비부인’은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백미는 ‘어떤 갠 날’ ‘꽃의 이중창’
‘나비부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0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세기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핑커턴을 열연하고부터였다. 특히 초초상이 핑커턴을 애타게 기다리며 부르는 ‘어떤 갠 날’, 초초상과 하녀가 함께 노래하는 ‘꽃의 이중창’ 등의 아리아는 백미로 꼽힌다. ‘나비부인’은 점점 인기가 높아져 서양인들이 일본을 이해하는 통로로 작용했다. 그러나 일본에선 1914년 초초상의 자결 장면을 삭제한 상태로 초연했다. 전곡 공연은 1936년 처음 이뤄졌다. 우리나라에선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늦은 1970년 김자경 오페라단이 초연했다. 무대 의상 대부분이 기모노인데다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중간에 등장하는 탓에 자칫 반일 감정을 자극할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늦어졌다.
푸치니는 젊어서부터 카사노바 기질을 드러냈다. 명성이 높아질수록 여성 팬들의 유혹도 끊이지 않았다. 푸치니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던 엘비라는 푸치니를 의심하고 염탐했다. 그러던 중 1903년 2월 푸치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누워 지내야 했다. 엘비라는 푸치니의 간호를 위해 도리아 만프레디라는 16세 소녀를 고용했다. 도리아는 성심으로 푸치니를 간호했고 엘비라는 이런 도리아를 딸처럼 아꼈다. 그런데 푸치니가 교통사고가 난 다음날 엘비라의 남편이 사망했다. 당시 미망인은 배우자가 사망하고 10개월이 지나야 재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엘비라는 남편의 사망 후 10개월 동안 기다렸다가 푸치니와 정식 결혼했다.
문제는 도리아가 20대가 되면서 귀여운 소녀에서 매력적인 숙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엘비라는 도리아를 푸치니의 애인으로 의심했다. 엘비라는 도리아를 해고하고 나쁜 소문을 동네방네에 퍼뜨리며 마을에서 쫓아냈다. 견디다 못한 도리아는 결백하다는 유서를 남긴 채 자살했다. 시신 감식 결과 도리아가 처녀로 판명되자 도리아 가족은 엘비라를 고소했고 엘비라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푸치니는 엘비라와 결별하려 했으나 아들의 호소로 포기하고 도리아 가족에게 거액의 위자료를 주고 합의했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