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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한국이 낳은 불멸의 歌人, 가수 현인

기사승인 2012.11.05  17: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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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어송라이터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월드뮤직 전령사

개방적 사고, 모던한 분위기의 앞선 감각이 그러했듯 싱어송라이터로, 배우로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월드뮤직 전령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가수 현인.
독특한 바이브레이션과 스타카토 창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만의 창법’으로, ‘해방 전 남인수, 해방 후 현인’으로 일컬어지는 가수, 아울러 가수 현인의 업적을 기리는 ‘현인가요제‘가 지난 2005년을 시작으로 매년 항도 부산, 송도해수욕장에서 성대히 펼쳐진다. 만능 엔터테이너 현인의 발자취룰 따라가본다.

                                                                   글l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싱어송라이터, 영화배우로도 활동한 만능 엔터테이너

   
 
독특한 바이브레이션과 스타카토 창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독특한 창법’으로, ‘해방 전 남인수, 해방 후 현인’으로 일컬어지는 가수, 아울러 가수 현인의 업적을 기리는 ‘현인가요제‘가 지난 2005년을 시작으로 매년 8월, 항도 부산의 송도해수욕장에서 성대히 펼쳐지고 있다. 이곳에는 가수 현인의 업적을 기리는 현인공원도 조성되었다.

또한 부산 영도다리 입구에는 부산을 배경으로 피난시절의 애환을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와 가수 현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가로 세로 각 4미터, 높이 3미터로 바다와 항구가 어우러진 배의 모습, 음표와 갈매기가 형상화되어있다. 잿더미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심어 삶에 대한 의지를 심어주기도 했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턱을 떠는 듯 탁탁 끊기는 창법, 그 절제미가 오히려 슬픔을 더해주는 기묘한 아이러니를 불러온 이 노래의 노래비는 지난 해 조성된 현인공원에도 동상과 함께 노래비가 세워졌다.

본명 현동주(玄東柱, 1919.2.14~2002.4.13).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 2월 14일, 영국 스탠더스 석유회사와 일본신문사 한국지사에서 근무했던 인텔리, 부친 현명근씨와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인 모친 오봉식씨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부산시 영선동 183번지에서 출생했다.
 
유년기의 현인은 구포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에 의해 자라났다. 구포보통공립학교에 입학, 3학년 때 영주소학교로 전학한 뒤 다시 5학년 때 부친과 함께 상경, 38년 경성 제2고보(경복고의 전신)에 입학한다.
 
“고등학교 시절 배구선수로도 활동했어요. 운동장에서 매일 배구하던 모습이 생각 나...“ 고교 1년 후배이자 현인의 대표곡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등의 작사가 유호 선생은 학창시절 그의 모습을 공부와 음악, 운동실력이 매우 뛰어난 다재다능한 학생으로 기억했다. 
 

   
 
이 무렵 모친이 동생을 낳다 타계한 후 부친이 일본 여인과 재혼하자, 크게 상심했던 현인은 음악으로 돌파구를 모색한다. 학교의 추천으로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하지만 일본인 계모에 대한 반발로 일본군이 되기를 거부, 대신 부친의 극심한 반대 속에 일본 우에노음악학원에 입학, 성악과 클라리넷을 전공한다.
 
1942년, 음악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지만 스스로 원했던 음악교수 자리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성보악극단에서 음악을 지도하다가 일제로부터 징용을 피해 악극단 '신태양'을 결성, 박단마, 황해, 진방일 등과 함께 중국 천진으로 건너간다.
 
천진과 상하이 등지에서 악극단 활동을 시작하며 클럽에서는 주로 샹송 등 외국곡을 불렀고 일본군 복장을 한 한국인 징용병들이나 조선인들 앞에서는 ‘봉선화’ 등을 자주 불렀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 ‘봉선화’는 국내에서는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이역 타국에서는 그 단속이 미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어 중국 항주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단원 31명과 함께 귀국을 꿈꾸지만 일본군 앞에서 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중국 관헌, 즉 천진경비사령부에 의해 전범으로 체포되어 북경비밀감호소에 수감된다.
 이곳에서 6개월 동안 복역하며 몽당연필과 종이를 구해 동요 70~80곡을 만들었다. 6개월간의 수감생활 끝에 46년, 16차 송환선을 통해 귀국하던 중 일행 중 누군가가 아편을 가지고 나온다는 허위 밀고가 들어가 악보를 비롯해 지니고 있던 물건 모두를 압수당했다.
 
서울로 돌아온 뒤 황해, 계수남씨 등과 함께 ‘19번가’라는 악극단을 조직해 활동, 국내 최초의 나이트클럽인 ‘뉴스맨스클럽’에도 출연했다. 김광수 악단을 주축으로 노명석, 엄토미씨 등과 함께 고향경음악단을 조직해 활동하기도 한다.
   
 

 주로 팝송, 샹송 등을 부르던 현인이 대중가요 가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7년. 당시 명동 명치좌(이후 시공관, 국립극장 등으로 개명)에서 영화 ‘자유부인’ 상영 당시 ‘신라의 달밤’을 열창, 고음으로 올라가면 목청을 심하게 떠는 바이브레이션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28세.
 당시 이 공연을 관람했던 작사가 유호 선생은 관객들이 '앙코르‘를 연발해 그 자리에서 아홉 번이나 불러야했던 유명한 일화를 증언한다.

아울러 가수 현인은 스크린에도 진출,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영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제작된 영화 ‘푸른 언덕’에 출연, 주제가 또한 직접 불렀다.

가수 현인의 등장 이전까지는 고복수, 남인수, 백년설 등 주로 미성의 가수들이 가요계를 주도했다. 그러나 독특한 창법을 구사하는 현인의 등장을 시작으로 이후 50~60년대 우리 가요계는 이른바 개성시대를 맞게 된다. 송민도, 한명숙, 최희준, 현미로 이어지는 개성가수 계보가 그것.
‘신라의 달밤’의 빅 히트를 계기로 럭키레코드가 출발, ‘유호-박시춘-현인’ 콤비 시대를 열며 이어 ‘비 나리는 고모령’, ‘고향 만리’, ‘럭키 서울’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한국전쟁 중 군예대에서 ‘총 안든 용사’로 활동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발표되는 ‘전우야 잘자라’ 또한 군의 사기를 한껏 북돋아주었던 노래, 이 노래 역시 유호- 박시춘-현인 콤비의 작품이다. 이 무렵 그는 155마일 전선을 27차례나 오가며 ‘군번 없는 용사’로 전쟁터를 누비는데 도중에 차가 굴러 허리를 크게 다쳤다. 그 후유증으로 만년에는 피아노에 기대거나 의자에 앉아 노래를 해야 했다. 때문에 ‘건방지다’는 일부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 무렵 발표한 ‘굳세어라 금순아’ 역시 전쟁의 아픔과 피난민의 애환을 생생히 그린 노래. 당시 이 노래를 발매한 대구 오리엔트 레코드사 사장이었던 이병주 선생은 ‘취입 당시 폭격으로 한쪽 벽이 무너진 대구방송국에서 가마니로 무너진 벽을 막고 방음장치를 해 이 노래를 녹음했다.’고 회고한다.
 
아울러 ‘꿈속의 사랑‘, ‘베사메무초’, ‘그루미 선데이’ 같은 외국의 새로운 음악을 국내에 소개하는 전령사이기도 했고 국내 최초의 샹송이라 일컬어지는 ’세월이 가면‘과 ’서울의 샹송‘ 등을 발표한 이후 싱어 송 라이터로 ‘서울야곡’을 비롯해 ‘런던야곡’ '카네이션' 등의 노래를 직접 작곡해 발표하기도 했다.
 
현인의 노래들은 시대를 건너 60, 70년대 가요에 까지 영향력을 발휘했다. 60년대 번안곡 열풍이 그렇고 또한 70년대 통기타세대에 들어서도 ‘세월이 가면’을 비롯해 ’서울야곡’, ‘즐거운 여름’, 그리고 번안곡 ‘꿈속의 사랑’, ‘베사메무초’ 등이 속속 리바이벌되어 당시 젊은이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다.
 
아울러 영화 ‘푸른 언덕’ ‘성벽을 뚫고’의 연기자로, 52년 신청년극단의 가극 ‘성웅 이순신’, 65년 악극 ‘춘향전’에서 이도령 역 등을 맡는 등 가수로서 뿐 아니라 만능 엔터테이너로 전성기를 누리며 가요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대한가수협회 전신, 가수협회 2, 3대 회장 맡아 가수들 권익에 공헌

   
 
1958년 설립된 가수협회 2,3대 회장을 역임했고, 67년 문화공보부 공로상, 90년 제3회 원로연예인 공로대상, 96년 제30회 가수의 날 특별공로상, 99년 제6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 화관문화훈장을 서훈 받았다.

광복이후 격동의 현대사와 더불어 우리 가요사의 매 소절을 빼곡히 채워갔던 가수 현인. 노래와 무대에 대한 열정은 그를 지탱해준 힘이요, 인생의 부표 같은 것이었다. 그만의 독특한 창법은 후배들에 의해 흉내의 대상은 되었지만 아무도 그의 독특한 맛을 제대로 살린 가수가 없었다고 할 만큼 독특한 창법은 물론 노래에 대한 표현과 해석력이 매우 뛰어난 가수로 우리 가요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딸 현혜정, 수정,‘가요계 2세’로 한때 아버지 길 이어
현인은 73년 미국으로 무대를 옮겨 활동하다가 미스코리아 진 출신이자 영화배우 김미정 여사를 만나 세 번째 결혼을 한다. 미망인 김미정 여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국내에서 연예계 선후배로 알고 지내다가, 69년에 내가 먼저 이민을 갔고 그 후 73년도에 들어오셔서 LA에 있는 ‘대호’라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할 때 구경 갔어요. 그 때 피아노에 기대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6.25 당시 위문공연 시 차사고로 허리통증이 도져서 그렇다는 것을 알고 내가 한방과 친구와 소개해 치료를 받다가 정이 들어 결혼했지요. 그 후 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코리아나 하우스’라는 식당을 함께 운영하기도 했고 ‘가스등’이라는 피아노 바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유난히 고국을 그리워하던 현선생이 먼저 들어오시고 후에 나도 귀국, 서울에서 줄곧 지냈죠.”
 
1988년부터 2000년 봄까지 출연했던 악극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의 무대를 끝으로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향년 83세를 일기로 별세, 의형제를 맺은 작곡가 손목인, 생전에 아파트 아래, 위층에 살았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던 영화배우 황해도 함께 현재 삼성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유가족은 미망인 김미정 여사를 비롯해 1남 3녀. 소학교 교사였던 조창길씨, 명창 박녹주 선생의 질녀인 박정혜씨와의 사이에 삼남매를 두었고 장녀인 현혜정씨와 차녀 현수정씨는 한때 가수로 활동하며 ‘가요계 2세’로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걸었다.

미망인 김미정 여사 인터뷰
현인 선생의 미망인, 김미정 여사를 그동안 세 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그 내용을 정리해본다.

가까이서 보신 현인선생의 성격이나 특징적인 것을 들려주신다면..

   
 
경상도 분이라서 그런지 성격이 무뚝뚝하세요. 많이 안하시지만 약주를 좋아해서 소주 한 병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번 나눠 마시곤 하셨어요. 무뚝뚝한 점때문에 아내로서는 다소 섭섭했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쓸 데 없는 말이나 잔소리 안하시고 정말 이해심 많은 분이시라는 것을 알겠어요. 완고하고, 또 약속 1시간 전에 꼭 나가기도 하시고... 우리 집 가훈이 ‘시간관념 철저, 최선을 다하기, 거짓말 안하기’ 등이었어요. 가족들에게도 굉장히 엄하셨죠.

생전에 우리가요계에 대한 생각은 어떠하셨는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대학에서 음악을 지도하려고 했으나, 당시 우리나라에는 관련 학과가 없어, 중국으로 공연을 떠났지요. 본래 가요를 안했던 분이라 처음 ‘신라의 달밤’을 발표할 때는 당시의 가요 스타일로 노래를 부르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로 부른 것이 지금의 노래가 된 것입니다. 평소 자기가 섰던 TV무대는 절대로 안보시고, 또 스스로 만족을 못하시는 듯했어요. 평소 노래를 흥얼거리는 경우도 별로 없으신 편인데 본인의 노래 중에는 ‘세월이 가면’과 ‘굳세어라 금순아’를 특히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6.25 때 특히 전쟁가요로 많은 이들의 아픔을 달래주었는데...
많은 분들이 그래요. 현인선생은 ‘총 안든 용사’라고. 6.25 때 일선 위문공연을 갔다가 차가 굴러 허리를 크게 다쳤어요. 내색을 잘 안하시는 분이라 그렇지, 만년에도 허리 때문에 겨울만 되면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셨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도 그냥 서서 부르지 못하고 피아노에 기댄다든지, 의자에 앉아서 노래를 해야 했는데 그 때문에 건방져 보인다는 오해도 많이 받았지요. 그래도 본인이 내색 안하고 커버할 수 있을 만큼 지혜로우신 분이다, 라고 생각해요. 6.25 당시에는 노래로서 군의 사기와  피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고, 또 당시 포로교환 할 때 이남과 이북을 구별하기 힘드니까 ‘신라의 달밤’ 같은 노래를 불러서 제대로 부르면 이남사람, 못 부르면 이북사람으로 구별했다는 일화도 유명하죠. 그만큼 큰 가수였습니다.

현인선생에 대해 아쉬움도 많을텐데...
특히 만년에 전국 투어와 함께 부산에서 생활하던 곳까지 한 바퀴 돌며 촬영하기로 약속했는데 결국 못 이루고 가셔서 너무 아쉽습니다. 고향 부산에 와서 사시고 싶어 했고 특히 부산 모래사장에서 옛날 부르던 노래를 시민들과 함께 실컷 불러보고 싶은 것이 꿈이라고 했어요. 감기 한번 안 걸릴 정도로 건강하셨는데 갑자기 당뇨 진단을 받고 8개월 만에 돌아가셨어요. 그 무렵엔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라는 무대에 서고 계셨기 때문에 많이 바빴지요. 다리를 유독 심하게 절고 몸이 자꾸 피곤하다고 했는데 그 때만 해도 공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했지, 전혀 몰랐거든요. 결국에는 이렇게 돼서 아내로서 늘 죄인이 된 기분이에요. 저한테는 이토록 후회가 많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끝까지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 마지막 공연을 하고 가셨기 때문에 다행이다, 라고도 생각됩니다.

최근 우리 가요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현인선생의 현인가요제 또한 그러한 작업 중 하나다. 이 가요제를 위해 늘 분주하게 앞장서고 있는 김미정 여사, 그동안 세 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김미정 여사의 눈은 늘 젖어 있었다.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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