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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영원한 로맨스 그레이, ‘기타 부기’‘월남의 달밤’의 가수 윤일로 Story[3]

기사승인 2018.09.12  10: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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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스타의 상징이자 멋쟁이가수의 대명사, 가수 윤일로의 삶과 사랑[3]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모든 것’

윤일로씨는 음악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원로가수다.
50, 60년대 ‘기타부기’와 ‘월남의 달밤’을 부른 주인공인 동시에 SP, 축음기시대에 ‘내가 울던 파리’, ‘연분홍 로맨스’, ‘재즈봄’, ‘지나간 날’ 같은 모던한 분위기의 노래를 구사하는 로맨티스트였다. ‘기분파 인생’, ‘항구의 사랑’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히트 넘버.

'일로(一路)'라는 이름은 '오로지 한 길로만 가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 하지만 한 길로만 가기에는 재주가 너무 많았다. 직접 작사, 작곡은 물론 MC, 그리고 코미디언 보다 더 놀라울 정도의 성대모사까지 구사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60년대 전성기 시절, 대한뉴스 화면을 통해 소개된 선배가수 현인과 함께 부르는 ‘신라의 달밤’ 영상이 화제가 될 만큼 성대모사는 놀라웠다. 강아지 성대모사가 압권인 ‘강아지 부기’는 또 어땠는가.

부기우기, 룸바, 탱고, 왈츠 등 유행을 리드했고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냈던 만능 엔터테이너 윤일로씨, 요즘도 중요한 날, 의미 있는 날에는 빠짐없이 카카오톡 메시지로 안부를 주고받는 멋쟁이다. 물론 부인이 대신 보내지만 말이다.

현재 매니저 겸 비서 역할을 맡고 있다는 부인 박수전 여사(본명 박순자, 79세)도 60년대에 ‘사랑의 물새 한 쌍’, ‘희망의 청춘(With 오기택)’ 등의 노래를 발표한 가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지난 2010년, 76세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발표한 신곡 ‘돈돈’이 그렇듯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즐겁게 했던 원로가수 윤일로씨의 삶과 사랑,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 그의 세 번째 이야기, 완결 편.

글 I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대전에서 가장 빼어난 가수’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가수, 박수전을 만나다

▲ 가수 윤일로
윤일로씨가 현재 자칭, 타칭 매니저 겸 비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부인 박순자 여사를 만난 것은 1960년대, KBS 남산방송국에서였다. 앞서 소개했듯 부인 박수전 여사가 가수 출신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박수전(朴秀田)이란 예명은 ‘대전에서 가장 빼어난 가수’라는 의미로 작곡가 김현씨가 지어준 이름이다. 김현은 ‘못 잊을 대전의 밤(안다성)’, ‘기분 찾는 인생(윤일로)’을 발표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물론 가수로써의 활동 기간이 짧은 만큼 발표곡 또한 많지 않다. 데뷔곡 ‘사랑의 물새 한 쌍’, 그리고 오기택과 함께 부른 ‘희망의 청춘(김영광 곡)’ 등을 발표했는데 윤일로씨 역시 이러한 사실을 그동안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 2012년, 박수전 여사가 윤일로씨와 함께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KTV의 ‘대한늬우스와 함께 하는 리사이틀 인생쇼-윤일로 편’에서였다. 물론 이 방송에서도 본인이 가수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대한늬우스와 함께 하는 리사이틀 인생쇼’는 우리나라 원로가수 한 분씩 초대해서 데뷔 때부터 현재까지를 이야기를 노래와 함께 엮는 40분짜리 공개방송 프로그램이다. 개인 콘서트 같은 포맷이라 해서 타이틀을 ‘콘서트’의 옛 표기인 ‘리사이틀 인생쇼’라고 붙였다. 프로그램명 앞에 붙는 ‘대한늬우스와 함께 하는..’은 예전 대한뉴스 화면에 나온 그 시절 본인 영상을 함께 보며 진행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지어진 제목이다. 사회는 가수 김상희씨와 필자가 함께 MC를 맡아 진행했다.

그 무렵 중장년층이 좋아할만한 원로가수들은 대부분 이 무대를 거쳐 갔다. 금사향, 김광남, 김상희, 김용만, 김하정, 남보원, 남상규, 남진, 명국환, 박건, 박일남, 손인호, 송춘희, 안다성, 안정애, 원희옥, 윤일로, 조애희, 진송남, 한명숙 그리고 쟈니브라더스까지.

이 프로그램에 박수전 여사가 깜짝 등장한 것은 급작스레 결정된 일이었다. 매주 방송되던 이 프로그램은 2주치를 같은 날, 오전과 오후로 나눠 2회분을 녹화했다. 윤일로 편을 녹화하던 날은 오전으로 편성되었는데 갑자기 오후에 녹화하기로 예정된 모 원로가수가 갑자기 펑크를 내게 되었다는 통보가 왔다.

제작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공개홀 대여는 물론 악단(박찬일 악단)까지 모두 대기하고 있는 상황도 그렇거니와 방송 일정 차질은 더욱 난감한 일이었다. 결국 고심 끝에 제작진은 윤일로씨를 1, 2부로 나눠 오후까지 녹화를 강행, 2주 분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자니 이야기 거리가 더욱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작진은 윤일로 선생을 모시고 온 부인 박수전 여사를 함께 무대에 등장시켜 이야기를 보충키로 했다. 사랑얘기, 가정얘기, 그리고 최근 근황까지.

얼떨결에 부인은 평상복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즉석에서 관객에게 머플러를 빌려 코디를 보완해야 했을 정도로 상황은 급박했다. 물론 호칭도 ‘박수전’이라는 가수 이름 대신 ‘박순자’라는 본명으로 소개되었다. 사전 대본 없이 녹화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도 필자에게 이 때가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녹화 내내 뭉클했고 한편으론 아쉬움 또한 컸기 때문이다. 처음 윤일로 선생이 방송국에 도착했을 때 필자는 그가 10년 넘게 쓰고 있던 안경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또한 그 무렵 녹내장 수술로 인해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가슴 또한 먹먹해져 있던 참이었다.

눈앞의 사물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화제는 둘이 처음 만나던 때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부인이 말을 받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친구인 가수 유성희와 함께 KBS 남산 방송국에 놀러갔다가 나오는 길이었어요.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때 윤일로씨가 곤색 우산과 장화를 건네주기에 순간 감동 받았죠.”

일종의 프로포즈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처음부터 호감이 갔다고 말하는 부인의 말에 윤일로씨는 짐짓 쑥스러운 듯 ‘우산을 자기만 준 줄 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미남 스타인데 그동안 스캔들이 하나도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자 윤일로씨는 “스캔들이 나지 않은 건 기술이 좋아서 그렇다.”고 답해 관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녹화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여자로써의 매너는 모두 갖췄다”는 게 윤일로씨의 부인 자랑이었다. 실제로 녹화장에서 느낀 부인의 내조는 헌신적이었으며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참고로 이 날 방송된 ‘윤일로 편 1,2부’는 현재 유투브를 통해 볼 수 있다. 1부 (https://www.youtube.com/watch?v=PYYY124F9ik),2부(https://www.youtube.com/watch?v=zHm8etDxakc).

방송에서 스스로 밝혔듯 윤일로 선생은 당시 투병 중이었다. 때문에 방송이나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지냈다. 그날이 2년만의 외출이라고 했다. 의사는 만류했지만 팬들을 만나고 싶다는 윤일로씨의 바램이 워낙 커서 강행한 방송이었다.

무엇보다 스탭진이 감동을 받았던 것은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방송국까지 힘들게 왔지만 무대에 오르자마자 갑자기 생기가 넘치며 밝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부터였다.

부인은 ‘무대에서 윤일로씨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니 기적을 보는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예정된 다섯 곡을 부르고 또 한 회분이 늘어났기 때문에 다섯 곡을 더 불러야 했다.

‘기타 부기’, ‘월남의 달밤’, ‘항구의 사랑’ 그리고 신곡 ‘돈돈’... 그리고 나머지 다섯 곡 역시 평소 그가 즐겨 부르는 애창곡들로 채워졌다. ‘섬머 타임’ ‘눈이 나리네’ 등등.
 

▲ 윤일로·박수전 여사의 ‘우리 기쁜 젊은 날’
마지막 노래를 부르는 도중 그가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 흐느끼던 모습에 관객석과 제작진은 잠시 숙연해졌다. 목소리가 생각처럼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녹화는 무사히 마쳤지만 안타까웠던 만큼 아쉬움도 컸다. 이 방송이 2, 3년 전에만 제작되었어도 그야말로 ‘젊게 사는 멋쟁이, 로맨스  그레이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말이다. 내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육성과 노래하는 모습을 기록해두었다는 것에 애써 위안을 삼았다.

그렇듯 방송 내내, 그리고 방송이 나간 지 몇 해가 지날 때까지 부인이 가수로 활동했던 사실을 대부분 알지 못했다. 그것도 여러 장의 음반을 발표했던 가수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윤일로씨가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것은 지난 2016년 7월, KBS 라디오의 ‘세월 따라 노래 따라’에 필자와 함께 출연했을 때였다. 방송 중에 갑자기 부인이 ‘가수 박수전’이라고 밝혀 제작진과 본인은 방송이 진행되는 도중 부랴부랴 자료를 찾아야 했다.

부인 박수전 씨에게 가수로써의 이야기를 듣다

이 칼럼을 쓰기 위해 부인 박수전 여사에게 50 여년 만에 처음으로 가수 당시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보았다. 아울러 ‘가수 박수전’에 대한 자료들도 함께 찾아보았다. 그것을 정리해보자면...

가수 박수전씨는 비록 결혼과 함께 활동을 접어야했지만 당시 가요계에서 주목받는 유망주였다. 대전 대흥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대전여중, 고 나온 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진학한다.

‘대전에서 가장 빼어난 가수’라는 뜻의 예명이 그렇듯 그녀는 처음 대전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60년대 대전에서 활동하던 그룹 ‘덩쿨클럽’에서 활동하며 작곡가 김현씨 만나 대전방송국 전속가수로 들어간 후 크고 작은 공연무대에 섰다.

서라벌예대에 진학한 후 상경, 지인의 소개로 서울시민회관 무대에 서면서 만난 가수 유성희씨와 특히 가깝게 지냈다. 유성희(본명 유난옥, 2013년 타계)씨는 이후 작곡가 나화랑씨와 결혼, ‘양산도 맘보’, ‘사랑은 즐거운 스윙’을 발표한 가수. 지금은 음악인 조규천, 규만, 규찬 형제의 어머니로 더 유명한 유성희씨와는 충무로 대한극장 근처, 필동에서 자취를 하며 데뷔 초에 가수의 길을 함께 걸었다.

박수전씨는 데뷔곡 ‘사랑의 물새 한 쌍’을 발표한 데 이어 오기택씨와 함께 듀엣으로 부른 ‘희망의 청춘(김영광 작곡)’을 발표했다. 이 무렵 ‘명랑’이나 ‘아리랑’ 잡지에 스포트 기사가 오르내릴 정도로 유망주였다.

비록 윤일로씨의 만류로 결혼과 함께 연예활동을 접었지만 활동 당시에는‘미스 백마’로 뽑힐 정도로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이들 부부가 그렇듯 윤일로 가족 중에는 음악 관련 활동을 했던 이들이 제법 눈에 띈다.

‘우리는 음악가족’, 윤일로의 형제들

앞서 밝혔듯 윤일로씨는 1935년 평양 태생이다. 정확히 말하면 평안남도 양덕군 동량면 하덕리 74번지가 그가 태어난 곳. 양덕에서 여관을 하던 집안의 6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곱 살 때 평양으로 이사해 11살 때인 1946년 3월에 어머니를 따라 7남매와 함께 월남, 인천에 도착했다.

그의 형제 중 바로 밑에 동생인 4남 윤일민(一民, 본명 윤승초)씨는 밴드 출신으로 가수협회 인천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의 아들이 탤런트 겸 영화배우 윤철형씨다. 또한 5남인 윤일야(一夜, 본명 윤승배)씨는 전자오르간 연주자 및 밴드 마스터로 활동했는데 ‘펜싱선수 출신 래퍼’로 화제를 모았던 제이스가 그의 딸이다.

또한 막내 윤승칠(昇七)씨는 1971년 포크 듀오 ‘아미고스’로 활동을 시작해 이후 ‘파도(후에 이수만이 리메이크 히트)’를 부른 6인조 그룹 ‘비스(Bee's)’에 합류한 뒤, 이어 ‘하얀 비둘기’를 부른 6인조 ‘비둘기 그룹’에서 기타리스트 겸 보컬로 활동했다. 이렇듯 그의 동생들도 윤일로씨를 따라 음악활동으로 방향을 선회, 활동했던 음악가족이다.

현재 윤일로씨 부부 슬하에는 2남3녀의 자녀가 있다. 물론 음악에 관련한 자녀는 없지만 제각각의 분야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현재 윤일로 부부의 유일한 낙은 손주들의 재롱 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적극적이고 거침없는 성격 그대로 젊은 시절 별명은‘인천 벽돌’

젊은 시절, 윤일로씨의 별명은 ‘인천 벽돌’이다. 주먹이 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 별명 그대로 현재도 거침없고 매사 적극적인 성격이다. 투병생활을 하기 전까지 그는 전화벨이 세 번 이상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는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남들 앞에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을 만큼 스타로서의 자존심 또한 셌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를 알아보는 팬들에게 스타로써의 자존심은 반드시 지킨다.

부인은 그를 자신의 노래제목처럼 ‘기분파 인생’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기분파 인생’은 ‘기타부기’의 2탄 격인 노래다. 그만큼 낙천적이다. 또한 항상 청바지차림의 멋쟁이로 기억력 또한 비상하다는 게 부인의 귀띔.

전성기 시절, 윤일로씨는 싱어송라이터로써 음반 역시 꾸준히 발표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약 2백50여 곡을 취입했고 직접 작곡한 곡만도 50 여곡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취입한 곡이 2010년에 발표한 ‘돈돈(유영환 작사, 작곡)’이다. 무려 76세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발표, 화제를 모았다.

“문득 돌아보니 정말 바쁘게 활동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심지어 지방공연을 가면 그 지역 음반사들, 즉 대구 오리엔트나 부산 도미도 등으로부터 꾸준히 음반 취입을 요구 받았지요. 사흘 공연 일정으로 내려갔는데도 서, 너 곡 씩 악보를 주며 취입을 권유했어요. 특히 대구 오리엔트 이병주 사장의 경우 특히 끈질겼지요. 어쨌든 악보를 볼 수 있으니 가능했던 일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한 번은 노래 욕심이 유독 많은 P선배와 함께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노래가 마음에 든다며 한꺼번에 대여섯 곡씩 받아 연습했어요. 그러나 악보를 볼 줄 모르니 노래를 전부 외어서 취입해야지, 결국 한 곡도 취입 못하고 그냥 올라오던 기억도 납니다. 하하...”

이 시대의 진정한 엔터테이너, ‘기분파 인생’

“집에서도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아요. 잠깐이라도 기척이 없으면 어디 갔느냐며 찾고...”

▲ KBS 라디오 ‘세월 따라 노래 따라’ 출연 당시 스탭들과 함께
윤일로씨는 앞서 말한 것처럼 녹내장으로 인해 시력을 잃었다. 한쪽 눈은 이미 실명했고 나머지 한 쪽마저 약해졌다. 눈이 제대로 안보이니 평소 이어폰 끼고 음악을 듣거나 라디오를 끼고 산다. 그렇듯 윤일로씨 머리맡에 항상 라디오가 켜져 있다. 일주일에 세 차례, 투석도 계속 받고 있다.

“새벽이라도 라디오에서 자신의 노래가 나오기 하면 무조건 깨워요. 그 뿐 아니라 라디오에서 애국가가 나오면 큰 소리로 4절까지 따라 부르는데 얼마 전, 딸이 집에 왔다가 한밤중에 그 소리에 놀라 깨어 귀를 막았다, 뗐다... 했다더군요. 몸이 약해지니 노래에 더욱 의지하는 것 같아요.”

그렇듯,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노래는 더더욱 뗄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다. 그를 지탱해주는 또 하나의 힘인 것이다. 노래가 가진 힘, 그 기쁨과 즐거움... 지금까지 그가 노래를 통해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전해왔다면 이제는 그 노래를 통해 자신이 위로받고 있다.

부기우기, 룸바, 탱고, 왈츠 등 유행을 리드했고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냈던 가수. 그리고 작사, 작곡, 진행까지 네 박자를 모두 갖춘 엔터테이너. 때로 코미디언보다 더 코미디언 같이 재치 넘치는 입담, 성대모사... 그렇듯 그가 있는 자리는 늘 즐거웠다. 가수 윤일로, 그는 국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한 시대를 건너온 우리들의 동반자이자 소중한 친구다. 윤일로 선생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NM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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