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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사승인 2019.04.02  08: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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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이른 새벽 서울에서 학생들이 시내에 배포한 독립선언서 첫 단락이다. 3·1독립선언의 핵심은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독립국임을 선언한 데 있다. 독립국임을 선언한 후 독립국을 세웠다. 그것이 대한민국이다.

신세영 기자 syshin@

▲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 홍보탑

독립, 광복, 해방으로 불리는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 민족은 쉬지 않고 일제와 싸웠다.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가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임정은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한민족의 염원을 모아 상하이에 수립한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임정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이 명문화 돼있다.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을 구성하고 3권 분립제도를 표방해 민주화 역사의 기원을 이룩하고, 외교활동, 의열투쟁, 광복군 창설 등을 통해 27년간 항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심어줬다. 한 세기가 지나는 이 시점에도 현재 대한민국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기념하고 주권의식을 기릴 필요성이 있다.

대한민국의 시작
“국호는…대한민국으로 낙착되었다. 그렇게 결정될 때까지 상당한 격론이 거듭됐다. 대한민국 외에 조선 또는 고려공화국이 어떠냐는 의견도 나왔다. ‘대한은 이미 우리가 쓰고 있던 국호로서 그 대한 때문에 우리는 망했다. 일본에게 합병되어버린 망한 나라 대한의 국호를 우리가 그대로 부른다는 것은 감정상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구성원_돌베개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지도자들이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국내외 여러 곳에 있던 임시정부를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했다. 3·1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1919년 4월 10일 밤 10시. 현순, 손정도, 이동녕, 조소앙, 여운형 등 29명이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진션푸루의 한 양식 주택(현순의 자택)에 모였다. 이들은 먼저 임시의정원을 설립했다. 임시의정원은 국회와 같은 것이다. 곧바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서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은 국호(國號)였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결정됐다. 이어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 통과시켰다. 회의를 마친 것은 4월 11일 오전 10시. 이로써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탄생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사의 각료로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李東寧),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신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등이었다. 같은해 6월 11일 임시헌법(전문과 8장 56조)을 제정·공포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내각을 개편했다. 정부는 198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로 제정하고 1990년부터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을 거행해 왔다. 그러나 첫 번째 국가기념식 이후 1991년부터 실제 임정에서 활동했던 분들을 중심으로 기념일 날짜가 옳지 않다는 의견이 개진됐다. 그동안 임정 수립일은 4월 13일로 알려졌으나, 지난해 4월 임정수립 기념사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최근 학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이 국호와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내각을 구성한 4월 11일이므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에 법령 개정을 거쳐 2019년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 11일로 수정해 기념한다.

▲ 김구

김신부로에서 임시정부 첫 회의
1945년 11월까지 중국에 머물렀던 임시정부의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로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그해 5월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항저우, 창사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이르러서야 막을 내린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자 애국지사들은 해외 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한다는 이념아래 해외로 망명하면서 상해를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1919년 4월 10일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임시의정원 회의가 처음으로 열렸고, 이후 상해에서만 12차례 이상 소재지를 옮기는 등 1932년 5월까지 13년 동안 존속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의 압박으로 상해를 떠난 임정 요원 대부분은 항주시와 가흥원으로 옮겨와 1935년까지 약 3년 6개월간 머물렀다. 가흥현 일휘교 1층에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으며 임시정부 요원들은 2층을 사용했다.  그러나 김구는 일제가 현상금까지 걸면서 체포에 혈안이 돼 있는데다 일휘교에 임정 요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으면 안전한 피신처가 될 수 없으므로 일휘교 인근에 있는 매만가로 거처를 옮겼다.

김구는 흰색 천이 집에 걸리면 집으로 들어오고 적색 천이 걸리면 피신했다. 1937년에는 다시 강소성 진강(鎭江)으로 옮겨 장개석(장제스)과 협력, 항일전을 펼쳤다. 1940년 <건국강령 3장>을 발표해 광복군을 강화했고, 1944년에는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 미국군과 함께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5년 11월 29일 임시정부 간부들은 미군정의 임시정부 불인정으로 인해 개인자격으로 입국했지만, 국내의 혼란으로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은 계승되지 못했다.

서울에서 찾은 임시정부 발자취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에는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의 주인공 ‘매헌 윤봉길기념관’이 있다. 1988년 문을 연 이 기념관에는 <농민독본>을 포함한 각종 서책류와 서한, 의거 당시의 소지품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1층에 들어서면 왼쪽 벽에 훙커우공원 의거 장면이, 오른쪽 벽에는 농촌에서 배움의 길을 여는 윤 의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는 청년 시절 고향에서 농촌 계몽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운동을 벌였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큰 뜻을 털어놓고 일왕 생일 경축행사가 열리던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수뇌부가 도열한 단상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 등 10여 명의 군·정 수뇌들을 사상케 했다. 윤 의사는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으로 이송돼 그해 12월 19일 24세 나이로 순국했다. 윤 의사의 의거 소식에 중국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는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 한국인 청년이 해냈다”며 격찬했고 이후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윤봉길

서울 용산구 효창동과 청파2동 등에 자리한 널찍한 효창공원은 백범 김구 선생과 항일투쟁을 하다 목숨을 바친 삼의사, 임시정부 요인 3인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삼의사 묘는 백범 선생이 광복 후 일본에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의 유해를 모셔와 만든 곳이다. 삼의사 묘역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나란히 모셔져 있다. 1948년에는 임시정부 요인인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선생의 유해가 모셔졌다. 1949년에는 백범 선생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됐다. 효창공원 한쪽에는 2002년 10월 개관한 백범기념관이 있다. 백범기념관에는 동학, 의병, 애국계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통일운동 등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한 백범 선생의 일대기와 관련한 각종 기록과 자료가 디오라마, 모형, 애니메이션 등 최첨단 전시기법을 활용해 전시돼 있다.
“정부는 국민의 종복이요, 국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함께 1896년 순한글과 영문판 독립신문을 창간한 분이 송재 서재필 선생이다. 송재 선생은 같은 해 독립협회를 창설했고, 이듬해(1897년)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국민 성금으로 독립문을 건립했다. 원래 종로구 교북동에 있던 독립문은 1979년 서대문구 현저동 지금의 자리로 이전 복원됐으며, 1992년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연계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문을 열었다. 독립문과 머지않은 자리에 송재 선생의 동상이 있다.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이기도 한 그는 1864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해 18세에 관직에 진출했다가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자격증을 취득했다. 평생 조국과 미국을 드나들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송재 선생은 3·1독립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위원장을 맡았다. 선생은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독립을 청원하고 1925년 호놀룰루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규탄했다. 1951년 작고한 선생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2021년 8월까지 서대문에 ‘임시정부기념관’ 건립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2월 16일 충칭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해 “우리 선열들의 강인한 독립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정부가 모든 힘을 다해 조기에 임시정부 기념관이 국내에서도 지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애국선열들의 나라사랑정신을 기리고 미래세대에게 체험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중국에서는 상해, 충칭 등 임시정부 청사로 활용되었던 현지 장소를 복원해 임시정부 관련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음에도 정작 국내에서는 그간 임시정부 활동을 기리는 기념공간이 없었던 아쉬움이 있었다.

▲ 임시정부의 이동경로

정부는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인근 서대문구 의회청사 부지에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을 건립키로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갖는 역사적, 민족사적, 세계사적 의의와 성격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킬 계획이다. 기념관의 기본기능인 관련자료 수집 및 전시, 교육 등 기능에 더해 도서관 + 자료관 + 박물관의 개념을 종합한 라키비움(Larchiveum)의 개념을 도입, 기존의 기념관과 차별화를 도모할 방침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임시정부기념관은 오는 11월 착공해 2021년(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9,000㎡) 완공될 예정이다. 서대문 형무소를 비롯해 경교장, 탑골공원 등 인근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와 연계해 국민들과 외국 방문객으로 하여금 임시정부 활동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나라사랑정신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NM

신세영 기자 syshin@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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