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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제정 66년 만에 폐지된다

기사승인 2019.05.08  02:5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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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헌법재판소 판단이 나왔다. 지난 2012년 헌재가 낙태죄 처벌은 합헌이라고 결정한 지 7년 만에 이를 뒤집은 것이고, 1953년 낙태죄가 제정된 지 66년 만에 나온 폐지 결정이다.

장정미 기자 haiyap@

지난 4월11일 헌재는 산부인과 의사 A씨 등이 제기한 형법 269조 1항 및 270조 1항 관련 헌법소원 심판에서 재판관 4(헌법불합치)대 3(단순위헌)대 2(합헌)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했다. 재판관 9인 중 7인이 위헌 판단한 셈이다.

오는 2020년 12월31일까지 법 개정 결정
헌법불합치는 법 조항이 헌법에 위반되지만 즉시 효력을 상실시킬 경우 법적 공백으로 사회적 혼란이 생길 수 있어 법 개정 시한을 두는 것으로, 헌재는 2020년 12월31일을 시한으로 개정하되 그때까지 현행법을 적용하기로 했다. 개정되지 않을 경우 2021년 1월1일부터 효력을 상실시켜 전면 폐지하도록 했다. 헌재는 낙태를 전면 반대하고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임신과 출산은 여성 삶에 근본적·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라며 “임신 유지 여부는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과 사회관을 바탕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 결정”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자기결정권이 보장되려면 임신 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확보돼야 한다”며 “관련 정보와 조언을 얻어 숙고한 끝에 낙태를 결정한 경우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을 찾아 실제로 수술을 완료하기까지 필요한 기간이 충분히 보장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여성이 이 같은 결정을 할 시기를 임신 22주로 봤다. 신부인과 학계에서 이 시기부터 태아의 독자적 생존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헌재는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고 낙태를 감소할 사회적 여건을 마련하는 등 사전·사후 조치를 종합해 투입하는 게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실효적인 수단”며 “형벌 여부가 낙태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고 실제 형사처벌 사례도 매우 드물어 자기낙태죄 조항은 태아 생명 보호를 실효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봤다. 현행 모자보건법이 정하는 낙태 가능 사유가 사회적·경제적 사항까지 포함하지 않는 점도 지적했다. 헌재는 “낙태가 범죄행위로 규율되면서 낙태 관련 상담이나 교육이 불가능하고 정확한 정보가 충분히 제공될 수 없다”며 “법적 구제를 받기 어렵고, 비싼 수술비를 감당해야 해 미성년자나 저소득층 여성들이 적절한 시기에 수술을 받기 쉽지 않다. 헤어진 남성의 복수 수단, 가사·민사 분쟁 압박수단 등으로 악용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모자보건법상 정당화사유는 학업·직장 지장, 소득 불안정, 이미 자녀가 있어 더 이상 감당할 여력이 안 되는 경우, 양육을 위해 휴직하기 어려운 맞벌이 부부, 상대 남성과 교제 지속 계획이 없는 경우, 남성의 낙태 종용, 사실상 혼인이 파탄된 상태에 배우자 아이 임신한 경우, 미성년자의 원치 않는 임신 등을 포함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자기낙태죄 조항은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정도를 넘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다”며 “태아 생명보호라는 공익에만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법익균형성 원칙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의사낙태죄에 대해서도 “임신한 여성의 촉탁이나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의사를 처벌하는 조항도 같은 이유에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석태·이은애·김기영 재판관은 단순위헌 의견을 통해 “안전한 낙태를 받기 위해 임신 14주까지는 어떤 사유 없이 임신한 여성이 숙고와 판단 아래 낙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합헌 의견을 낸 조용호·이종석 재판관은 “태아의 생명 보호는 매우 중대하고 절실한 공익이다. 특정 기간에는 임신한 여성의 인격권이나 자기결정권이 우선하고, 그 이후는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한다고 볼 수도 없다”고 밝혔다. 한편 산부인과 의사 A씨는 2013년 11월부터 2015년 7월까지 69회에 걸쳐 임신중절수술을 한 혐의(업무상 승낙 낙태)로 기소되자 1심 재판 중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했다. 하지만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자 2017년 2월 헌재에 헌법소원을 냈다. 형법 269조 1항에 따르면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할 경우 1년 이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같은법 270조 1항은 의사·한의사·조산사·약제사·약종상이 부녀의 촉탁이나 승낙을 얻어 낙태하게 하면 2년 이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모자보건법 14조에 따르면 의사는 대통령령에서 정한 정신장애 및 질환이 있거나 강간·준강간에 의한 임신, 법률상 혼인이 불가한 혈족·인척간 임신, 임부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경우만 낙태 수술을 할 수 있다. 단 임신 24주 이내에만 가능하다. 앞서 헌재는 2012년 8월 낙태죄 관련 사건에서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형법 270조 1항 중 조산사에 대해 촉탁이나 승낙을 받아 낙태한 경우 처벌하는 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낙태죄 폐지 찬성과 반대 진영 희비 엇갈려
지난 4월11일 오전부터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치열하게 장외전을 벌여 온 낙태죄 폐지 찬성과 반대 진영에서는 희비가 엇갈렸다. 큰 소리로 “태아도 생명이다” 등의 구호를 외치던 ‘낙태죄폐지반대전국민연합’(국민연합) 측은 결정 이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회자가 “기뻐하고 슬퍼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자 위헌 측은 “기쁩니다!”라고 외치며 맞섰다. 국민연합 측은 결과가 부당하게 내려졌다고 주장하면서 헌법재판소를 규탄하거나 앞으로 낙태죄를 되살리기 위해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외쳤다. 이들은 “불합치 결정이 났다고 ‘생명 행동’이 끝나지 않는다”며 “국가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이행하라”고 소리쳤다. ‘낙태죄 유지를 바라는 시민연대’는 입장문을 통해 “헌재의 헌법 불합치 결정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낙태죄가 폐지됐을 때 예측되는 수많은 문제에 대해 충분한 검토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성급한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낙태죄 폐지를 이른 오전부터 외쳐 온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공동행동) 측은 환호와 축하의 함성으로 술렁였다. 이들은 서로 포옹하거나 눈물을 훔치면서 위헌 결정을 자축했다. 나영 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19세의 나이로 임신중지시술을 받던 도중 사망한 여성을 계속 생각했다”며 “그때 낙태죄 찬성 단체의 시술병원에 대한 악의적 고발이 없었다면, 그래서 처벌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홀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 여성은 사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울먹였다. 이어 “2012년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이 그 사망을 만들었고 때문에 그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었다”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여성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서 이 법이 사회가 뭘 할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을 이었다. “무려 3명의 재판관이 완전 위헌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 승리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낙태죄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났지만 낙태죄 폐지를 구체화할 입법활동 등 향후 과제가 더 중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나영 위원장은 “(임신중절 허용 사유를 명시한) 모자보건법도 전면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며 “허용한계를 규정해온 이 조항이 존속할 이유는 사라졌다”고 말했다. 또 “다만 입법부에게 구체적인 변화의 책임을 미룬 데 대해서는 아쉽다”며 “앞으로 성적 권리와 재생산 권리가 제대로 보장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고, 국회는 이를 보장할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제이 공동행동 집행위원도 “낙태죄 폐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며 “포괄적 성교육과 고용·청소년·가족·이주·보건의료 등 정책 전반에서 성평등을 보장하고 성적 권리와 재생산 권리가 틀림없이 보장될 수 있게 법무부와 여성가족부 및 보건복지부 등이 연계 시스템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임신중지 전후의 건강관리와 유산유도제 공급 및 어디서든 피임·임신·임신중지·출산과 관련된 안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체계적 시스템 마련 등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부인과 의사이기도 한 윤정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다고 돌려보냈던 여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며 “앞으로는 당신이 임신을 중지하든 유지하든 의료진이 당신을 도우겠다고 할 수 있는 날이 와서 감격스럽다”고 웃었다.

결정을 마주한 일반 시민들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A씨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았지만 66년 만에 한국에 이런 변화가 왔다는 것이 여성 입장에서는 각별하게 느껴진다”며 “계속 (낙태죄 폐지를 위해) 싸워 왔던 분들이 생각나서 벅차오르는 순간”이라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헌재 결정을 직접 방청하기 위해 현장을 찾았다는 B씨는 “불합치 결정이기는 하지만 헌법상 문제가 있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여성 인권계의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며 “합법화 이후에도 남성의 무책임한 양육 기피, 임신을 여성 억압의 도구로 쓰는 모든 것들을 제한하는 법제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모든 발언을 마친 공동행동은 ‘낙태죄 위헌’이라고 적힌 피켓을 환호와 함께 허공에 날려보내는 것으로 기자회견을 마무리했다. 낙태죄 위헌 결정이라는 결과를 받아든 국회는 오는 2020년 12월31일까지 관련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이 시한이 만료되면 낙태죄의 법률 효력은 사라진다.

외신, 헌재 결정에 관련 소식 보도
우리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외신들도 관련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와 BBC, CNN,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들은 이날 헌재 결정 직후 즉각 보도를 쏟아냈다. 블룸버그통신은 보도에서 임신중단을 제한해온 현행법에 대해 “1950~1953년 한국전쟁 이후 인구를 늘리려던 한국의 독재 지도자들이 제정했다”며 “헌재는 현행법이 여성의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여성단체들의 손을 들어줬다”고 평가했다. BBC는 이번 결정을 “역사적인 결정”이라고 평가하며 “1953년 이래 임신을 중단한 여성은 성폭행이나 근친상간, 건강상 위험한 경우를 제외하곤 벌금형에 처해지거나 수감될 수 있었다. 한국은 임신중단이 범죄로 취급되는 몇 안 되는 선진국 중 하나”라고 꼬집었다. NYT는 그간 국내 낙태죄 적용 실태에 대해 “1970~1980년대에는 정부가 인구를 줄이기 위해 광범위한 임신중단을 모른척했었다”며 “(최근 출산율이 낮아지자) 정부의 태도가 바뀌었다. 당국자들은 임신중단을 ‘비애국적’이라고 부르고 엄중히 단속하겠다고 위협했다”고 비판했다.

CNN은 “많은 나라에서 임신중단은 의료보험 지원이 가능한 간단한 의학수술”이라고 지적했다. 또 “결혼하지 않은 산모에 대한 사회적 오명은 여성들이 임신중단을 시도하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라며 “최근에도 결혼제도 밖에서 아이를 낳는 여성들은 소외당하거나 가족제도의 지원이 차단되곤 한다”고 한국의 출산 현실을 지적한다. 우리 형법 269조1항과 270조1항은 임신중단과 관련해 각각 시술을 받은 여성과 행한 의사 등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당 조항들은 임신중단 직접 피의자를 ‘부녀’와 ‘의사’로 한정, 이성 간 성교의 결과인 임신과 그 중단의 책임을 여성 및 행위담당자인 의사 등에게만 전가한다는 점에서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아울러 임신중단 문제를 여성과 태아 간 권리다툼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문제제기가 있었다. 임신이 이성 간 성교의 결과임에도 남성의 책임을 배제하고 여성을 일방적 가해자로 설정, 손쉬운 비난과 처벌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남성을 제외하고 여성만 처벌하는 규정으로 인해 낙태죄가 이별 등으로 앙심은 품은 남성의 보복성 신고에 악용되거나, 강제로 만남을 지속하기 위한 협박거리로 이용된다는 비판도 제기돼 왔다. NM

장정미 기자 haiyap@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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