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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19.07.04  00: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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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 스토리(TOY story)’와 ‘픽사(PIXAR)’의 탄생과 성장 스토리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4’가 6월 20일 개봉했다. 1995년 첫 편이 나온 후 2편(1999년), 3편(2010년)에 이어 네 번째다. 1편 개봉 후 24년이 지났는데도 시리즈가 낡지 않고 생동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토이 스토리’ 첫 편이 개봉하게 된 과정을 되짚어본다.

‘토이 스토리’는 세계 최초로 개봉한 컴퓨터그래픽(CG)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영화가 개봉하기까지에는 세 주역의 활약이 컸다. 계속된 적자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5,000만 달러를 쏟아부은 스티브 잡스(1955~2011), 영화제작사인 ‘픽사’의 사장 에드윈 캣멀(1945~ ), 영화 연출가 존 래스터(1957~ )가 그 주역이다.
에드윈 캣멀이 CG 애니메이션의 꿈을 꾼 것은 1970년대 초반이다. 캣멀은 유타대에서 컴퓨터공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당시 유타대는 컴퓨터그래픽 혁명의 최전선에 있었다. 캣멀은 대학원생이던 1972년 세계 최초로 1분짜리 흑백 영상물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완성했다. ‘에드의 왼손’이라는 제목의 영상물은 손이 회전을 하고 주먹을 쥐고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캣멀은 1974년 11월 뉴욕공과대 컴퓨터그래픽스 연구소장으로 부임한 뒤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해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당시로서는 몽상에 가까운 꿈을 꾸었다. 1975년 앨비 레이 스미스가 제록스사의 팰로앨토 연구소에서 컴퓨터그래픽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해고되어 연구소에 합류했다. 스미스는 스탠퍼드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1968년 박사학위를 받은 엔지니어였다.

▲ ‘토이 스토리’ 탄생의 세 주역. 왼쪽부터 에드윈 캣멀, 스티브 잡스, 존 래스터

캣멀과 스미스는 CG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컴퓨터가 집채 크기의 괴물 정도로 인식되고 CG 애니메이션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엔 누구도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컴퓨터그래픽이 사용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컴퓨터그래픽의 예술적 가능성을 믿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1979년 7월 루카스 필름에 스카우트되었다. 루카스 필름은 영화 ‘스타 워즈’(1977)를 연출한 조지 루카스가 설립한 회사로, 영화에 사용될 최신식의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두 사람을 끌어들였다.
1983년 12월 어느 날 또 한 사람의 괴짜가 루카스 필름의 문을 두드렸다. 디즈니사에서 해고된 존 래스터였다. 그는 월트 디즈니가 설립한 캘리포니아 예술학교(칼아츠)를 졸업하고 1979년 디즈니에 입사했다. 전통적인 2차원 애니메이션을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3차원 배경과 결합하려는 것이 그의 목표였으나 당시 디즈니는 극도의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디즈니 특유의 도제 시스템도 창의적인 작업을 가로막았다. 
래스터는 결국 1983년 12월 디즈니를 떠나 루카스 필름에 입사했다. 그의 입사는 디즈니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캐릭터 애니메이팅 기술을 가지고 온 것이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던 캣멀과 스미스에게 래스터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래스터에게도 그들은 인생의 은인이었다.
래스터가 루카스 필름에서 만든 첫 혁신적인 3차원 디지털 애니메이션은 ‘앙드레와 월리 비의 모험’(1984)이었다. 하지만 조지 루카스는 심드렁했다. 그가 그들에게 원했던 건 컴퓨터그래픽에 기반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특수효과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점점 40여 명으로 늘어난 컴퓨터사업부를 돈을 빨아먹는 스펀지로 취급했다. 더구나 당시 루카스는 이혼소송으로 거액의 위자료를 물어줘야 할 상황이었다. 루카스는 3,000만 달러에 컴퓨터사업부를 시장에 내놓았다.

세 주역은 스티브 잡스, 에드윈 캣멀, 존 래스터

이 소식이 잡스의 귀에 들어왔을 당시 잡스는 자신이 설립한 애플에서 쫓겨나 절치부심하며 넥스트를 세워 컴퓨터를 만드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잡스는 루카스 필름의 컴퓨터사업부에 컴퓨터그래픽 고수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선명한 사진과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그래픽 영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잡스는 매물을 덥석 물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1986년 1월 30일 1,000만 달러에 매입하는 것으로 인수서에 서명했다.
잡스는 회사 이름을 ‘픽사 주식회사’로 정하고 캣멀을 사장에 앉혔다. 픽사(Pixar)는 컴퓨터의 ‘Pixel(화소)’과 ‘art(예술)’의 합성어다. 창립 당시 픽사는 그래픽 디자인 전문 컴퓨터를 생산 판매하는 하드웨어 회사였다. 하지만 래스터가 회사 홍보를 위해 제작한 1분 30초짜리 CG 애니메이션 ‘럭소 주니어’가 1986년 11월 LA에서 개봉되고 이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단편영화에 선정되면서 회사의 위상이 컴퓨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바뀌었다. 래스터가 후속작으로 제작한 단편 애니메이션 ‘틴 토이’는 1988년 아카데미상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최우수상에 뽑혔다.
픽사는 자신감이 생기자 TV 광고에 뛰어들었다. 1989년 수선화들이 춤을 추는 15초짜리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고 오렌지 주스를 광고하는 애니메이션도 완성했다. 무생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면서 표정이 풍부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픽사의 능력은 TV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픽사의 광고 제작 목록은 빠르게 늘어났다. 1990년에만 15편의 광고를 제작하고 13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이 정도 수입만으로는 회사 운영이 어려워 회사는 매년 수백만 달러 이상의 적자를 냈다. 다행히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은 좋아져 월트 디즈니가 관심을 보였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사업부를 총괄하는 제프리 캐천버그가 3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공동 제작하자고 픽사에 제안한 것은 1991년이었다. 양사는 1991년 5월 3일 최종 합의서에 서명했다. 디즈니가 픽사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자금을 대고 픽사가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디즈니가 배급하는 방식이었다.
계약 내용은 디즈니에 유리했다. 디즈니는 영화에 대한 100% 소유권을 갖는 것은 물론 속편, 리메이크, TV 프로그램을 자기 재량에 따라서 제작할 수 있는 권리와 비디오 판권을 가져갔다. 양사의 첫 작품은 래스터 감독의 ‘토이 스토리’였다. 잡스는 픽사 인수 후 ‘토이 스토리’를 완성할 때까지 근 10년간 개인 재산 5,000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꼭 봐야 할 영화, 꼭 이야기해야 할 영화, 꼭 다시 찾을 영화”

‘토이 스토리’가 마침내 개봉한 것은 1995년 11월 22일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꼭 봐야 할 영화, 꼭 이야기해야 할 영화, 꼭 다시 찾을 영화”라며 찬사를 표했다. 부정적인 언급이나 비평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잡스는 개봉 1주일 후인 11월 29일 픽사를 상장해 하루 만에 6,2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픽사도 1억 3,970만 달러를 끌어들여 잡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다. 그러자 10여 년 전 잡스를 내쫓았던 애플이 손짓을 했다. 잡스는 1997년 9월 오매불망하던 애플의 최고경영자로 복귀했다.
‘토이 스토리’는 미국에서만 1억 9,200만 달러, 전 세계적으로 3억 5,7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 비디오 판권으로도 1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래스터는 1996년 아카데미상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다. ‘토이 스토리’는 컴퓨터그래픽의 완벽한 영화적 적용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더 큰 의미는 어린 시절 주위에 널려 있던 단순한 인형들에 아름다운 영혼과 매력적 성격을 부여한 성실한 관찰과 진정한 상상력에 있었다. 카우보이 인형 우디, 우주전사 버즈, 강아지 슬링키, 감자 인형 미스터 포테이토, 돼지저금통 햄 그리고 공룡 렉스에 이르기까지 ‘토이 스토리’의 인형들은 모두 살아 움직였다. 래스터는 이후에도 ‘벅스 라이프’, ‘토이 스토리2’, ‘카’ 등을 연출했다.
‘토이 스토리’가 성공하자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언 킹’ 등으로 부흥기를 누리던 월트 디즈니의 전성기가 갑자기 막을 내렸다. ‘토이 스토리’ 이후 선보인 ‘노틀담의 곱추’, ‘헤라클레스’, ‘뮬란’ 등도 크게 떨어지는 흥행을 거두었다. 픽사는 1997년 2월 24일 디즈니와 10년 동안 영화 5편을 제작하기로 계약을 갱신했다. 제작비는 디즈니와 픽사가 절반씩 부담하고 수입도 절반씩 나누기로 했다. 이후 픽사-디즈니 콤비는 승승장구했다. 1998년 11월 픽사가 개봉한 두 번째 애니메이션 ‘벅스 라이프’는 토이 스토리의 흥행 기록을 넘어서며 1998년 최고 애니메이션 흥행작이 되었다.

디즈니의 막강한 배급력과 픽사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합쳐진 환상의 콤비

‘토이 스토리2’(1999.11)는 전 세계적으로 4억 8,0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하며 애니메이션 영화사상 전편의 흥행을 넘어서는 최초의 속편이 되었다. 또한 제작 과정이 모두 디지털로 이뤄진 최초의 영화로 영화사에 기록되었다. ‘몬스터 주식회사’(2001.11)는 개봉한 지 9일 만에 미국 내에서만 1억 달러를 돌파하는 박스오피스 기록을 세우고 전 세계적으로 5억 6,281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기록했다. ‘니모를 찾아서’(2003.5)는 9억 2,174만 달러의 수입을 올려 이전 기록을 껑충 뛰어넘고 ‘토이 스토리3’(2010.6)는 10억 631만 달러의 최고기록을 세웠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전체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의 패권은 픽사로 넘어갔다. 콧대가 높아진 픽사는 디즈니와 계약이 만료되는 2005년을 앞두고 “배급료는 지불하되 흥행 수입은 픽사가 단독으로 차지하겠다”는 자사에 유리한 새로운 수익 배분 방식을 내놓았다. 그 무렵 두 회사의 위치는 완전히 역전되어 디즈니로서는 이를 거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디즈니는 자체 영화를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운영비의 45%를 픽사가 제작한 영화를 배급해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결국 디즈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포기할 수 없어 계약이라는 불안정한 방식보다는 아예 인수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그리고 2006년 1월 무려 74억 달러에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인수하는 형식으로 합병했다. 이로써 디즈니의 막강한 배급력과 픽사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합쳐진 환상의 콤비가 탄생했다.


■에베레스트 세계 최초로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 탄생 100주년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전인미답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마침내 인간이 첫발을 내디뎠다. 역사적 순간의 주인공은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1914~1986)였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서로를 연결한 로프를 풀지도 않은 채 감격의 악수를 나누고 힘차게 끌어안았다. 힐러리는 작은 십자가를, 텐징은 초콜릿과 비스킷과 딸의 연필을 눈 속에 묻고 하산했다. 하산에 앞서, 힐러리는 29년 전인 1924년 에베레스트의 북동쪽(노스콜)으로 등정하다 실종된 조지 말로리의 흔적을 눈으로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에드먼드 힐러리(왼쪽)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에베레스트 등정 후 모습이다

헐러리의 등정 사실이 영국에 알려진 것은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대관식 전야인 6월 1일 밤이었다. 곧 영국 전역에 열광과 환호의 물결이 넘쳐났다. 영국은 그동안 대영제국을 자부하면서도 북극은 미국의 피어리에게, 남극은 노르웨이의 아문센에게 ‘최초’ 자리를 내주어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따라서 영국인에게 에베레스트는 구겨진 자존심을 세워줄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유일한 극지였다. 영국 정부는 ‘제3의 극지’라는 신조어를 만들면서까지 국가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이 초등(初登)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1921년 봄이었다. 제1차 영국 등반대는 네팔이 아닌 티베트 쪽을 선택했다. 쇄국정책을 펴오던 두 나라 중 먼저 문을 연 나라가 티베트였기 때문이다. 1차 등반대에 부여된 임무는 사전 답사와 코스 확인이었다. 등반대는 10주 동안 동면과 북면을 정찰한 끝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노스콜 루트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내려왔다. 
제2차 영국 등반대는 1922년 8,326m까지 올라가 인류 최초로 8,000m 도달에 성공했으나 셰르파 7명이 희생되는 비극을 겪었다. 1924년에도 제3차 영국 등반대의 초등 도전이 있었으나 8,572m까지 올라갔다가 대원 중 조지 말로리와 앤드루 어빙이 실종되어 발걸음을 되돌려야 했다. 계속된 영국 등반대의 노스콜 루트 등정은 1938년 제7차 도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1950년 중국의 침략으로 티베트의 문이 닫히고 네팔의 문이 열리자 영국 등반대는 네팔 쪽 남동릉(사우스콜) 루트를 개척했다. 1951년 8차 등반대가 사우스콜에 처음 도전했으나 결과는 역시 참담한 실패로 끝이 났다. 이 등정에 참가했던 힐러리는 실패 후 이렇게 말했다. “에베레스트산은 이미 자랄 대로 자랐지만 내 꿈은 아직도 계속 자라고 있다.”
영국은 1952년에도 네팔 정부에 등정 허가를 신청했으나 1년에 1개국만 허락한다는 네팔 정부의 방침에 밀려 먼저 신청한 스위스에 등정의 기회를 내주어야 했다. 1952년 봄 스위스 등반대가 사우스콜 루트로 8,595m까지 도달해 1924년 영국의 제3차 등반대가 기록한 8,572m의 기록을 갱신하자 영국의 초조감은 극에 달했다.

“에베레스트는 자랄 대로 자랐지만 내 꿈은 계속 자라고 있다”

1953년 제9차 영국 등반대가 구성되었다. 힐러리와 텐징도 동참했다. 등정을 지원하기 위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부근의 바크타푸르에 모인 짐꾼만 1,200명이나 되었다. 길도 자동차도 비행기도 없어 이들 모두는 그곳에서부터 에베레스트 산행 루트가 시작되는 남체까지 16일 동안 걸어갔다.
힐러리는 1919년 7월 20일 영국령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1939년 뉴질랜드 남알프스의 올리버산 등정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탐험가의 길을 걸었다. 셰르파로 기용된 텐징 노르가이만큼 산을 잘 알고 높이 올라가본 인물은 없었다. 텐징은 영국의 5, 6, 7차 등반과 1년 전 스위스 등반 등 모두 6차례나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당대  최고의 셰르파였다.
1953년 5월 26일 제1차 공격조가 정상을 향해 올라갔으나 남봉(8,770m) 지점에서 강풍에다 시간과 산소 부족 등으로 등반을 포기했다. 제2차 공격조로 구성된 힐러리와 텐징은 5월 29일 오전 6시반, 8,537m에 친 제9캠프를 출발했다. 날씨는 바람도 없고 유난히 맑았다. 
오전 9시 정각, 남봉 정상을 거쳐 칼날 설릉을 가던 중 12m 높이의 빙벽이 가로막았다. 옆은 천 길 낭떠러지였다. 힐러리는 오늘날 ‘힐러리 스텝’으로 불리는 빙벽 틈새에 피켈을 꽂아 한발한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그날이 있기까지 지난 32년 동안 모두 14명의 셰르파와 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1990년에는 아들 피터 힐러리가 아버지가 37년 전 오른 남동릉을 타고 정상을 밟아 최초의 부자 등정기록을 세웠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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