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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19.08.07  14: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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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국무총리가 유족 만난 애국지사 허위는 ‘서대문형무소 1호 순국 사형수’

키르기스스탄을 공식방문했던 이낙연 국무총리가 7월 18일 애국지사 허위(許蔿·1855∼1908) 선생의 후손들을 만났다. 허위 선생은 1908년 의병투쟁으로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한 독립운동의 선구자다. 정부는 허위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독립 유공 최고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서울시는 1966년 선생이 진격한 길을 따라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3.3㎞ 구간을 왕산로로 제정했다. 허위 선생의 형제와 후손들도 조국의 해방을 위해 항일 무장투쟁을 하다 희생됐다. 남은 일가들은 불행하게도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해방된 조국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허위는 구한말 의병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에 반발하며 시작된 대한제국 군인들의 저항을 계기로 전국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투쟁이 봇물처럼 터졌다.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장 중 특히 이름을 떨친 의병장으로는 강원도의 이인영·민긍호, 경기도의 허위, 충청도의 이강년, 경상도의 신돌석, 호남의 기삼연·전해산(전수용) 등이 있다. 의병들은 비록 빈약한 화승총으로 무장했지만 게릴라전을 펼치며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특히 허위(1854~1908)는 의병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경북 선산 태생인 허위는 1895년의 민비 시해와 단발령에 분개했다. 1896년 3월 경북 김천 읍내에서 수백 명의 장정이 항일 의병의 기치를 내걸 때 참모장을 맡았다. 허위 부대는 경북 김천과 성주에서 의병을 모집한 뒤 대구로 진격했으나 관군에게 패해 충북 진천으로 이동해 때를 기다렸다.
그때 “충정은 알겠으나 자중하라”는 고종의 밀지가 내려와 허위는 의진을 해산한 후 낙향해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다가 1899년 고종의 부름을 받아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 서리 재판장(대법원장 서리), 의정부 참관, 비서원승 등을 지내며 쓰러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1905년 1월에는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 국민이 의병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배일 통문과 격문을 전국에 살포했다가 4개월간 구금되었다.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다시 고향을 떠나 전국을 돌며 지사들과 시국을 논했다. 곽종석, 유인석, 민긍호, 이인영, 이강년 등이 그들이었다. 허위는 1907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연천과 철원 등 주로 경기 북부 지역에서 활동했다.

‘서울진공작전’ 주도했으나 실패

▲ 허위 선생의 초상

그 무렵 강원 지역에 의병 활동을 벌이던 이인영(1868~1909)과 뜻이 맞아 1907년 11월 서울로 진격하자는 통문을 전국의 의병 부대에 돌렸다. 강원도의 민긍호, 충청도의 이강년 등 전국의 의병장들이 호응했다. 그 결과 1907년 12월 의병 연합부대인 ‘13도 창의대진소’가 경기도 양주에서 결성되었다.
이인영이 총대장, 허위가 군사장에 추대되고 관동군(강원) 창의대장 민긍호, 호서군(충청) 이강년, 호남군(전라) 문태수, 교남군(경상) 박정빈, 진동군(황해) 권의회, 관서군(평안) 방인관, 관북군(함경) 정봉준이 지역별 대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당초 발표된 교남군 창의대장은 신돌석이었으나 신돌석이 자신의 근거지에서 계속 전투를 벌여 박정빈으로 교체되었다.
연합부대 규모가 총 1만여 명에 달한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로는 모이기로 예정된 병력의 총합인 것으로 보인다.
연합 의병부대의 목표는 ‘서울 진공’이었다. 연합부대는 1908년 1월 이인영과 허위가 이끄는 300명의 선봉대를 앞세워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했다. 선봉대는 망우리 일대의 군사 요충지를 선점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화력과 병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구나 본대는 도착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강년 부대는 양주 왕방산에서 일본군에 묶여 있었고 민긍호 부대는 진군 중이었다. 결국 선봉대는 후퇴를 결정했다.
그 무렵 총대장 이인영의 부친이 작고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이인영은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뒷일을 군사장 허위에게 일임한 채 경북 문경으로 돌아갔다. 결국 1차 서울 진공작전은 실패로 끝이 났다. 이인영은 1909년 6월 충북 영동군 황간에서 체포되어 9월 20일 서울에서 순국했다.

서울의 ‘왕산로’(동대문~청량리) 도로명은 허위의 서울진공작전을 기념한 이름

허위는 제1차 서울 진공작전이 무산된 후에도 제2차 서울 진공작전을 준비했다. 1908년 4월 전국의 창의대장과 연명으로 13도 의병 연합부대의 재의거 격문을 전국에 띄워 이에 호응하는 의병들과 연합군을 재편성했다. 그리고 경기도의 창신리, 불광리, 뚝섬, 동작나루에서 서울 진공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이번에도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에 밀려 1908년 6월 다시 서울 외곽으로 철수했다. 그러던 중 은신처가 발각되어 1908년 6월 체포되었고 그 해 9월 27일(양력 10월 21) 서대문형무소에서 형무소 개소 후 첫 사형수로 순국했다.
당시 허위를 신문한 일본인 소장은 허위를 가리켜 “조선의 국사(國士)”라 추앙하고 안중근은 “관계 제일의 충신”이라며 구국의 본보기로 삼았다. 허위가 제1차 서울 진공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66년 서울시가 공식 명칭으로 지정한 도로명이 허위의 호를 딴 ‘왕산로’(동대문~청량리)다.
허위 집안만큼 일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예도 드물다. 허위의 형 허혁은 1912년 한인 자치단체 조직으로 만주에서 결성된 ‘부민단’의 초대 총장을 지냈고 조카 허형식은 만주 동북항일연군 참모장이었다. 허위의 조카딸 허길은 퇴계의 진성 이씨 집안에 시집가 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해 아들들을 독립지사로 길러냈다.
친손자인 허진은 독립군인 아버지를 따라 만주 벌판을 누비다 광복 후 북한으로 갔다. 그러나 러시아 모스크바로 유학을 갔다가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을 보고 김일성 비판 운동을 시작했다. 북한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자 반김일성 운동이었다. 1957년 주소련 북한대사관에 잡힌 그가 2층 화장실 창문을 통해 탈출한 사건은 유명하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100주년

1차대전이 사실상 막을 내리고 독일의 공식적인 항복 절차만 남아있을 때였다. 독일 킬 군항 수병들의 출동 명령 거부(1918.11.3)를 신호탄으로 노동자·병사 평의회 결성이 전국의 주요 도시로 확산하더니 11월 9일 오전 독일의 베를린에서도 총파업이 결행되었다. 총칼로 무장한 노동자·병사 시위대의 손에는 “자유와 평화와 빵을! 형제들이여 쏘지 말라. 오라, 우리에게!”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무장 군인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동원되었으나 노동자·병사 시위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위대는 왕궁을 향해 행진하며 “황제는 필요없다”, “황제는 민주정치를!”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빌헬름 2세는 왕궁에 없었다. 열흘 전쯤, 이미 베를린을 떠나 독일군 총사령부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제국의 상층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11월 9일 정오 무렵, 1개월 전 1차대전의 휴전 회담 임무를 띠고 총리가 된 막스 폰 바덴 대공이 일방적으로 황제 퇴위를 선언하고는 사회민주당 당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후임 총리로 지명한다고 발표했다.
오후 2시쯤에는 사회민주당 의원이자 제국의회 부의장이던 필립 샤이데만이 제국의회 의사당 발코니에서 수만 명의 군중을 향해 “독일 인민은 전면적으로 승리했습니다. 낡은 군주제는 붕괴했습니다. 에베르트 내각이 새 정부의 총리로 모든 사회주의 정당에 의한 내각을 조직합니다. 독일공화국 만세!”라고 외쳤다.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과 같은 성격의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립이 선언되면 혁명의 주도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샤이데만이 선수를 친 것이다. 군중은 박수와 만세로 화답했다.
샤이데만의 열변이 대중을 사로잡고 혁명 정부도 아직 구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샤이데만의 사적인 선동 연설과 선언은 공식 포고와 같은 결과를 가져와 사실상 독일공화국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황제는 결국 11월 10일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1차대전은 11월 11일 체결된 종전 조약에 따라 막을 내렸다. 이후 독일은 군부의 지지를 받는 온건 사회주의자 에베르트와 좌파 혁명 세력 간의 싸움에 휩싸였다.
본격적인 충돌은 1918년 12월 수천 명의 좌익 군사 조직 ‘인민해병단’이 베를린으로 진군해 황궁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군부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의용군’을 앞세워 인민해병단에 맞섰다. 사회주의 혁명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단도 에베르트의 의회주의 노선에 반대하며 반정부 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1월 5일에는 스파르타쿠스단이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유혈 폭동을 일으켰으나 의용군에 의해 가혹하게 진압되었다.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살해되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당시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헌법

▲ 필립 샤이데만 사회민주당 의원이 1918년 11월 9일 제국의회 의사당 발코니에서 수만 명의 군중을 향해 새 정부가 조직되었다고 외치고 있다

이런 혼란 속에서 1919년 1월 19일 총선이 실시되었고 선거 결과 새롭게 구성된 국민회의는 베를린의 불안정한 정세를 피해 독일 고전문학의 본고장인 바이마르에서 1919년 2월 6일 첫 회의를 소집했다. 국민회의는 2월 10일 입헌공화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임시 헌법을 가결하고 2월 11일 사회민주당 소속의 에베르트를 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같은 사민당 소속 샤이데만은 총리로 임명되었다.
2월 13일에는 제1당이지만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에베르트의 사회민주당이 중앙당·민주당과 연합해 바이마르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뒤이어 법률가이자 좌파 정치가인 후고 프로이스가 주도하고 사회학자 막스 베버 등이 참여해 이른바 바이마르 헌법의 초안을 완성했다. 7월 31일 국민회의가 헌법을 의결하고 8월 11일 에베르트 대통령이 서명·공포함으로써 바이마르 헌법이 탄생했다.
바이마르 헌법은 당시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헌법이자 현대 복지국가의 초석을 다진 진보적인 헌법이었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해 프랑스·영국 같은 민주주의 선진국들을 부끄럽게 했으며 언론·집회·신앙·양심의 자유를 인정했다. 의무교육, 사회보장제, 노동력 보호 등도 규정했다.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7년 임기의 연방 대통령은 총리를 임명하고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과 긴급조치권을 부여받았다. 총리는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해 의회주의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이로써 독일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인 절차와 헌법을 토대로 한 정치체제가 출범했지만 의회가 신임을 철회하면 총리와 장관들이 즉각 사임해야 한다는 조항 등은 바이마르 체제의 안착과 순항을 가로막았다. 이 때문에 각 정당들은 자신들의 정치투쟁을 목적으로 불신임을 남발했고 바이마르 공화국 14년 동안 내각이 16차례나 바뀌고 정당은 한때 40개에 이를 정도로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

경제는 혼란스럽고 정치는 폭동과 내분의 연속이었으나 문화적으로는 ‘황금의 20년대’

1919년 6월 조인된 ‘베르사유 조약’은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에 결정적인 짐으로 작용했다. 조약에 따라 많은 영토를 상실했지만 더 큰 문제는 독일 경제에 치명적인 부담으로 작용한 1,320억 마르크의 전쟁 피해 배상금이었다. 프랑스가 배상금 지불 불이행을 빌미로 1923년 1월 루르 지방을 점령하기까지 하자 독일 정부는 배상금 지불을 위해 통화를 남발했다.
결과는 극심한 인플레로 나타났다. 1921년 1달러 대 75마르크였던 환율은 마구 치솟아 급기야 1923년 11월에는 마르크의 가치가 1조분의 1로 떨어졌다. 경제가 혼란 상태에 빠지고 좌우익의 반공화주의 세력들이 곳곳에서 폭동과 내란을 일으켜 사민당의 대중적 지지율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런 파국적 상황에서 1923년 8월 신임 총리가 된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연립내각은 통화 안정을 위해 화폐를 평가절상하고 미국에서 대규모 차관을 들여왔다. 1924년 8월에는 전쟁배상금을 낮추는 것을 골자로 한 미국의 ‘도스안’이 채택되어 배상금의 과중한 부담에서도 벗어났다. 덕분에 경기는 회복되고 경제는 안정되었다. 1925년 12월 로카르노 조약으로 라인란트의 비무장화가 실현되어 루르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철수하고 1926년 9월 국제연맹의 일원이 된 것도 사회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엄청난 지적 생산력과 예술적 창조력이 폭발한 ‘황금의 20년대’를 구가했다. 문학과 예술 전 분야에 활력이 넘치고 후대에 남을 위대한 작품들이 속속 발표되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등 산문의 개화에 이어 표현주의 시들이 독일의 현대문학을 다채롭게 장식했다. 헤르만 헤세의 초기작, 프란츠 카프카의 주요 작품들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음악에서는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희곡에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당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1930년대 세계를 강타한 세계 대공황은 경제적으로 호전되던 독일 경제를 또다시 수렁에 빠뜨렸다. 산업 생산량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노동인구의 3분의 1은 실업자로 전락했다. 국민들은 정치적 투쟁과 경제 혼란으로 얼룩진 현재보다는 군사적 영광을 누렸던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단합과 엄격한 규율로 복귀하려는 열망은 불가피한 것이었으나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히틀러에게서 희망을 찾은 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1933년 1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마침내 제1당이 된 나치당의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함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은 히틀러의 총리 취임과 함께 사실상 막을 내렸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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