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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봉오동·청산리 대첩 100주년

기사승인 2019.08.07  1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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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 뜨거운 삶 돌아보다

2020년은 독립전쟁의 전승을 거둔 봉오동·청산리 대첩 100주년이 되는 해다. 모두가 기억하는 일제강점기 3대 대첩 중 2대 대첩이지만 이 신화의 주역인 홍범도(洪範圖) 장군에 대해 온전하게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평양에서 태어났고, 러시아 망명 시절 소련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 정통 무관 출신은 아니지만 남다른 지략과 전술로 일제와 싸웠던 홍범도. 광복 74주년이 되는 지금까지 그의 유해는 이역만리에 방치된 채 ‘망각의 독립운동가’가 됐다.

신세영 기자 syshin@

일제 강점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만주의 청산리와 봉오동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로 이끈 홍범도(1868~1943) 장군. 그는 무장독립투쟁의 전설적 영웅으로 ‘백두산 호랑이’, ‘날으는 홍범도 장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홍범도는 간도와 연해주에서 크고 작은 항일 전투를 무수히 치르는 동안 그의 부인은 일제의 고문으로 사망하고, 두 아들은 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개인적인 불운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역경에 굴하지 않고 대한독립군 창설과 국내진공작전 및 봉오동·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며 독립 영웅으로 우뚝 섰다. 그런데 봉오동 전투 뒤에 벌어진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 장군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졌다. 한때는 머슴이었고, 포수였고 마지막은 극장 경비원이었다. 고향으로 오고 싶어 했던 그가 76년째 낯선 타국 땅 카자흐스탄 남쪽 크질오르다 시에 묻혀 있다.

▲ 홍범도_1921

홍범도 장군 유해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22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해 늦어도 내년까지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이날 오후 현지 프레스센터에서 오전 악오르다 대통령궁에서 열린 한-카자흐스탄 정상회담 관련 브리핑을 갖고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은 “직접 챙기겠다”고 밝혔다며 이 같이 전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크질오르다에서 서거한 홍범도 장군은 우리 독립 운동사에서 최고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총사령관으로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고 내년이면 100년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올해는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다. 그래서 한국 국민은 올해, 늦어도 내년 100주년에는 홍범도 유해를 봉환했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뜨겁다”며 토카예프 대통령의 관심을 부탁했다. 이에 토카예프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의 역사적 의미를 잘 알고 있고, 그 점 존중한다. 외교, 법률적으로 검토하고 있고, 이 이슈를 협의할 수 있도록 외교장관에게 지시했다. 양국 관계와 국민간 교류 등을 감안해 이 문제가 내년 행사 때까지 해결될 수 있도록 직접 챙기겠다”고 답했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문제는 카자흐스탄과 수교 이래 수십 년째 풀리지 않는 난제다. 홍범도 장군과 북한과의 ‘연고’다. 홍범도 장군은 구한말인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나 수렵을 생업으로 한 포수 출신이다. 한국 정부는 홍범도 장군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해왔다. 박정희 정부 때 1962년 홍범도 장군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에는 해군의 1800t급 최신 잠수함을 ‘홍범도함’이라고 명명했으며, 지난해에는 홍범도 탄생 150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는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맞는 내년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재추진할 계획이다.

출생에서 성장까지
홍범도는 1868년 평남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여천(汝千)으로 매우 어렵게 성장했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해 동네 부인네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고,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됐다. 이후 작은 아버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내다가 어느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했다. 그러던 중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게 됐다. 3년여 간의 병영생활은 선생에게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 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체험한 시기였다. 군대의 핵심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보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진 군교들의 부정과 비리를 목격한 것이다. 결국 날로 심해가는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출했다. 평양성을 빠져 나온 홍범도는 황해도 수안군 총령 아래에 있는 제지소에서 노동자로 3년간 일했고, 1890년부터 약 1년 반 가량 금강산 신계사에 들어가 지담대사의 상좌승으로 수도생활을 했다. 이때 이순신의 후손이기도 한 지담대사로부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비롯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의 활약상을 듣는다. 이 같은 경험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침략하는 일제의 행동에 분노하고 있던 홍범도의 반일의식을 더욱 증폭시켜 갔다.

▲ 연해주 한인 빨치산 간부 사진(1922). 뒷줄 제일 오른쪽이 선생이다

파란만장 젊은 시절, 의병활동 시작
홍범도는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의기상통해 봉기한 뒤, 경기, 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인 철령에 매복해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로 이동한 뒤, 여기에서 12명의 동지를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안변의 석왕사에 주둔하면서 1896년 8월 북천지계에 따라 북상하던 유인석의병부대와 연계해 일본군과 세 번의 전투를 치렀다. 이 와중에서 김수협은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 또한 전사하거나 도주해 홍범도 혼자 남게 됐다. 때문에 이후 1897년까지 평남과 함남, 황해도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을 살상하고,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는 등 단독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함남 북청에 정착해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과 농사에 종사했다. 이때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포연대를 주축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해 반일투쟁을 펼치기 위해 포수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해 갔다. 망국적 상황에서 포수들의 반일의식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1907년 9월 3일 제정 공포된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의 강제 시행이었다. 홍범도는 일제의 총포화약류 단속법을 거부하면서 1907년 11월 15일 최초로 산포수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은 무장투쟁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한평생을 일관했다. 그의 척살 대상은 왜적뿐만이 아니라 민족을 배반한 일진회 회원과 친일파도 가차 없이 처단해 민족의 의기를 살리고자 했다.

▲ 홍범도장군과 동료들

‘하늘을 나는 장군’ 혁혁한 전과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22일 포수들의 총을 압수해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을 후치령에서 습격해 적군 2명과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했다. 같은 달 25일에도 이곳에서 미야베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인 군경 70여 명과 3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그의 의병부대는 1908년 11월 선생이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1차 망명하기까지 수십 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며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삼수성과 갑산읍을 탈환하고 헌병분견소, 순사주재소, 우체국, 일본군 관사 등을 습격 소각했다. 일진회 회원, 친일 관리와 부호, 일본인 군관민 등을 응징 처단하기도 하고, 일본인 금광을 습격해 금괴를 빼앗아 군자금으로 이용하는 등 실로 대담무쌍한 활동을 벌였다. 홍범도는 일본군이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술로 일본군을 격파해 명성을 날렸다. 당시 평안도 지방에서는 ‘축지법을 구사하는 홍범도 장군’이라는 전설이 나돌 만큼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됐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 1908년 11월 만주를 거쳐 노령 연해주로 망명한 이후에도 의병활동의 재기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하고자 연추에서 이범윤을 만나 도움을 청하고, 유인석과 항일투쟁의 방략을 논의하면서 재기를 도모했다. 그러던 중 추풍에서 최원세의 도움으로 군자금을 마련해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에 1910년 4월 초순 선생은 러시아에서 구입한 총기로 무장한 30여 명의 의병부대원들과 함께 추풍을 출발해 국내로 진격했다. 그 해 4월 중순 간도를 거쳐 함북 무산에 진입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5월 초순까지 무산과 종성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수차례 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처음 의병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이 많았고, 병력도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체포돼 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홍범도는 그 해 5월 중순 다시 만주의 안도현과 길림을 거쳐 러시아로 망명했다.

1920년 6월, 역사에 기록된 독립군 첫 승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홍범도는 이제야 말로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당시 참여해 활동하고 있던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해 그 해 8월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간도로 가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해 부대를 확대한 뒤 국내로 진공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의 일부를 인솔하고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홍범도 부대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초기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 지휘부는 사령관에 홍범도,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에 박경철로 구성됐다. 홍범도가 지휘한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 경부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해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했다. 일제는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남양수비대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독립군을 추격했다. 이 추격군은 삼둔자의 서남방에 매복해 있던 최동진의 군무도독부 소속 독립군에게 재차 격퇴당하고 말았다. 독립군에 의해 연달아 참패를 당한 일제는 약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1920년 6월 7일 봉오동으로 진군해 왔다. 이곳에는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해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군, 이흥수가 이끄는 대한신민단이 일본군 침입자들을 맞아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해 격파함으로써 대승을 거뒀다. 독립신문(1920. 12. 25)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인원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독립군 측은 4명의 전사자에 2명의 중상자만을 냈다. 봉오동전투는 만주지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광복 2년 앞두고 장렬한 생애 마감하다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은 마적단 토벌을 구실 삼아 2만5000명의 병력을 만주로 출동시켰다. 독립군은 홍범도(대한독립군)· 김좌진(북로군정서) 장군 주도로 연합부대를 구성한다. 연합 부대는 두만강 상류 청산리 일대에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10여 차례 전투를 벌인 끝에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한다. 독립군 전사자는 100여명에 불과한 대승이었다. 청산리 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가장 큰 전투였다. 홍 장군은 두 번의 전투 이외에도 일본군과 맞서 싸운 수많은 전투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기에 일본군에게 그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청산리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지만, 한동안 우리의 역사서에는 북로군정서를 이끌었던 김좌진 장군의 공적으로 기록돼 있었다. 1991년 말 구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 전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냉전시대였다. 그의 유해가 구소련에 안장돼 있단 이유로 김좌진 장군에 비해서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홍범도는 연이은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의 보복전인 간도 자유시 참변에서도 살아남았다. 1917년 러시아가 공산화된 이후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그는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 생활했지만 말년은 쓸쓸했다. 움막집에서 살면서 고려극장 수위로 일했다. 1860년대부터 한민족이 이주한 러시아 연해주에는 1920년대 말부터 자생적인 아마추어 예술집단이 많이 생겨났고 193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노동자청년극장이 설립됐다. 이를 토대로 1932년 9월 9일 고려극장이 문을 열었다. 1942년 ‘의병들’이라는 작품을 초연하는데 후에 ‘홍범도’로 개칭해 공연을 이어갔다. 자신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홍범도’를 지켜보고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NM

▲ 홍범도 장군의 묘


 

신세영 기자 syshin@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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