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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19.10.08  11: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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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100주년… 1919년 10월 개봉한 ‘의리적 구토’가 출발점

조선 최초의 영화는 박승필이 제작하고 김도산이 감독·각본·주연을 맡아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된 연쇄극 영화 ‘의리적 구토’다. ‘연쇄극 영화’란 한정된 무대에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 신(scene)이나 특수 장면을 미리 필름에 담아두었다가 무대 사이사이에 보여주는 이를테면 무대극과 영화를 합친 것이다. 따라서 ‘의리적 구토’는 100% 필름 영화가 아니다.
이런 연유로 1923년 4월 9일 공개된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우리 영화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영화인도 있다. 하지만 ‘의리적 구토’ 중간에 ‘경성 전시의 경(景)’이라는 기록영화가 상영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영화계는 ‘의리적 구토’를 조선 영화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영화의 날’ 역시 ‘의리적 구토’가 처음 상영된 10월 27일이다.

‘영화의 날’은 ‘의리적 구토’가 처음 상영된 10월 27일

사실 ‘의리적 구토’는 이 땅에서 공연된 최초의 연쇄극은 아니다. 첫 연쇄극은 1915년 10월 부산의 부산좌에서 개연된 ‘짝사랑’이고, 서울 최초의 연쇄극은 1917년 3월 을지로 황금관 무대에 오른 ‘문명의 복수’다. 그러나 두 연쇄극 모두 일본인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의리적 구토’는 죽은 아버지의 재산을 탐내 음모를 꾸미는 계모와 그 일파를 아들이 혼내주는 권선징악을 주제로 만들어진 활극조의 신파 연쇄극이다. 1,000피트 길이의 필름을 연극 중간에 끼워 넣은 것에 불과하지만 공연 도중 무대 위에서 스크린이 내려오고 눈에 익은 조선의 풍광이 상영되는 것을 신기하게 여긴 관객들로 대성황을 이뤄 한 달 동안 장기 공연을 했다.
매일신보 1919년 10월 29일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초저녁부터 조수같이 밀려든 관객 남녀는 삽시간에 아래 위층을 물론하고 빽빽히 차서 만원의 패를 달고 표까지 팔지 못하는 대성황이었더라.” ‘의리적 구토’에서는 한강철교, 장춘단, 노량진공원, 청량리, 뚝섬 등 서울 시내의 볼 만한 풍경과 기차, 전차, 자동차 등을 이용해 찍은 ‘경성 전시의 경(景)’이 상영되었다.
‘의리적 구토’는 연쇄극 제작에 앞서 먼저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김도산이 연출하고 신파극단 ‘신극좌’ 단원들이 연기한 연극은 1919년 7월, 우미관에서 5일 동안 공연되었다. 이 연극을 연쇄극으로 제작한 것은 박승필(1875~1932)이었다. 모두 8막 28장으로 구성된 ‘의리적 구토’의 감독·각본·주연은 김도산이 맡고 박승필이 이끄는 ‘신극좌’ 단원들이 출연했다.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이 맡았다.
김도산은 일찍이 ‘신소설의 개척자’ 이인직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원각사에서 연극 수업을 쌓았다. 1911년 신파극단 ‘혁신단’에 들어가 이론과 기초를 닦은 뒤 극단 ‘신극좌’를 창단해 수 편의 극을 무대에 올렸다. 김도산은 ‘의리적 구토’를 성공시킨 후에도 연쇄극 ‘시우정’, ‘형사의 고심’, ‘의적’ 등을 잇따라 발표하며 과도기의 영화계를 이끌었으나 한강에서 연쇄극을 찍던 중 당한 낙상 사고와 늑막염이 겹쳐 1921년 7월 유명을 달리했다.

박승필, 질식 상태에 빠져 있는 전통 예술인들에게 힘 실어줘

▲ ‘의리적 구토’와 함께 ‘경성 전시의 경’ 상영을 전하는 1919년 10월 28일자 매일신보 광고

박승필은 서울에서 태어나 광무대의 소리꾼으로 활동했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그밖의 성장 배경이나 신상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없다. 하지만 박승필은 ‘의리적 구토’를 제작하기 전부터 공연계의 유명 인사였다. 그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08년 9월 미국인 콜브란으로부터 ‘광무대’를 임차해 구극 전용 극장으로 개설하면서였다. 광무대는 한성전기회사가 활동사진 상영관으로 개설한 ‘동대문 활동사진소’를 창극과 연극 상연을 위해 1907년 6월 개조한 곳이다.
박승필은 이동백·김창환·송만갑 등 당대의 명창을 모아 각종 공연을 주선했다. 이를 통해 공연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질식 상태에 빠져 있던 전통 예술인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콜브란이 한성전기회사의 소유권을 일본인에게 넘기면서 박승필은 광무대에서 손을 떼야 했다. 대신 1913년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연기관’을 임차해 광무대로 간판을 바꿔 달고 구극의 메카로 만들었다.
박승필은 1917년 단성사의 일본인 소유주 다무라 미네에게서 단성사를 임차해 그해 말 건물을 신축·확장한 뒤 단성사를 활동사진과 신극 전용관으로 1918년 12월 재개관했다. 박승필은 광무대에 이어 단성사까지 경영함으로써 구극·신극·영화를 아우르는 흥행계의 거물이 되었다. 박승필은 ‘의리적 구토’ 이후에도 연쇄극 제작에 더욱 힘을 쏟다가 1923년 단성사 안에 영화부를 신설하고 100% 필름 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해 1924년 9월 5일 단성사에서 상영했다.
‘장화홍련전’은 몇 가지 지적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도움 없이 순수 우리 자본과 기술과 인력으로 제작한 최초의 조선 영화라는 데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장화홍련전’은 박승필에게 큰돈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단성사 영화부는 ‘장화홍련전’ 한 편을 제작하는 것을 끝으로 공식 제작 활동을 중단했다.
1926년 10월 나운규가 연출·각본·주연을 맡은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박승필은 나운규를 주목했다. 마침 나운규가 잇따른 흥행 실패로 그가 소속되어 있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위치가 불안해지자 나운규에게 재정적 후원을 약속하며 독립을 권했다. 나운규는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는 것으로 독립했다. 박승필은 윤백남프로덕션에서 ‘심청전’, ‘개척자’ 등을 감독한 이경손의 독립도 지원했다.
박승필은 이처럼 조선 영화계의 대부로 활약하며 영향력을 넓혀나갔으나 1932년 1월 4일 5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단성사장으로 치러졌으며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하루 동안 극장 문을 닫았다. 윤백남은 매일신보에 “싸움의 마당에서 후생을 위하여 피 흘리다 화살이 다 떨어져 명예의 전사를 하고 말았다”는 글을 실어 박승필의 죽음을 애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70주년

일본이 마침내 항복을 선언하기 6일 전인 1945년 8월 9일, 150만 명의 소련군이 탱크 5,000여 대를 앞세우고 물밀 듯이 중국·소련 간의 국경을 돌파했다. 뒤이어 중국의 동북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8월 18일 소련에 항복을 선언하고 9월 2일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128만 명의 일본 관동군은 손에서 총을 내려놓아야 했고 중국의 동북 3성은 15년 만에 해방되었다. 그러자 무주공산이나 다름없게 된 동북 지역을 둘러싸고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정부가 막판 혈전에 돌입했다.

무주공산의 중국 동북 3성을 둘러싸고 막판 혈전 벌여

선수를 친 것은 공산군이었다. 공산당 중앙은 당 간부와 신사군·팔로군을 대거 산동성에 집결시켜 그곳에서 목선을 이용해 발해만을 건너도록 했다. 공산군은 동북 지역의 광대한 농촌과 중소도시는 물론 교통선을 하나둘 장악했다. 이에 질세라 수십만 명의 국민당군도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군함과 수송기를 동원해 동북으로 집결했다.
이처럼 양측 군대의 대거 이동으로 내전 발발의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국민당의 장개석이 평화의 제스처를 취했다. 자신의 점령지인 중경에서 건국 방안을 협의하자고 모택동에게 제안한 것이다. 모택동은 회담을 거부했다가는 자칫 평화를 거부하고 인민의 단결을 깨는 내전 세력으로 비난을 받을까봐 마지못해 회담에 응했다. 모택동이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주중 미국 대사 패트릭 헐리와 함께 적지인 중경으로 날아간 것은 8월 28일이었다. 이후 43일 동안 장개석과 국·공 평화를 위한 교섭을 벌였다.
회담 결과는 10월 10일 체결된 ‘쌍십 협정’에서 드러났다. 남부의 8개 해방구에서 홍군 철수, 홍군을 10분의 1 규모인 20개 사단으로 축소, 공산당과 중도 세력이 참가하는 정치협상회의 개최 등이 협정의 골자였다. 그러나 회담이 끝나자마자 국민당군은 중국 본토에서 만주 방면으로 연결되는 육상교통로의 관문인 산해관(11월)과 장춘·심양·하얼빈 등 대도시(12월)를 점령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공산군은 대도시를 벗어나 농촌과 중소도시를 거점으로 삼는 전략을 더욱 강화했다.
국민당군이 이처럼 내전에 준하는 공격을 멈추지 않자 학생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쌍십 협정 준수와 내전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러자 미국의 특사로 파견된 조지 마셜 전 육군참모총장이 조정에 나서 1946년 1월 10일 국공 양당의 정전협정을 성사시켰다. 쌍방은 곧 휴전에 들어갔고 양측의 모든 군대는 이동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정전협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양측의 이해가 부딪치면서 무력 충돌이 불가피한 데다 소련군이 1946년 5월 대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철수를 완료하면서 동북 지역은 내전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1946년 6월 26일 국민당군이 정치협상 결의와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200만 명에 가까운 병력으로 동북 지역을 비롯해 중국 전역에서 공산당의 거점인 해방구와 홍군을 공격하면서 마침내 중국의 운명을 가르는 국공 내전이 시작되었다.

군사력은 국민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 민심은 공산당 쪽으로 기울어

내전 발발 당시 국민당군의 병력은 430만 명이나 되고 무기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점령 지역의 인구는 3억 명 이상이었다. 공산당 병력은 팔로군과 신사군을 합친 128만 명에 19개성의 해방구 민병 200만 명이 전부여서 국민당군에 비해 현격히 약세였다. 공산당에 소속된 인구도 1억 3,000만 명에 불과했다. 내전 발발 후 국민당군은 열하성(1946.8)을 장악하고 중국 공산당의 심장부이자 상징인 연안(1947.3)을 점령함으로써 바야흐로 국민당 정부의 승리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문제는 내전으로 인해 급등한 인플레 때문에 국민당 지배 지역의 민중이 기아 상태에 빠지고 경제가 파탄으로 치달았다는 데 있었다. 통화가치는 수직으로 하락하고 국민당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공산당이 주도한 도시 노동자와 학생·지식인의 항의 시위는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반면 공산당의 해방구에서는 토지개혁이 이뤄져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가지고 부패한 관리들에게 착취당하는 일도 사라졌다. 악질 지주와 일본에 부역한 사람 등도 1만 5,000여 명이나 처단되었다.
전술적으로도 공산군은 임표, 주은래, 팽덕회 등 군사 능력이 탁월한 지휘관들이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서로 협력하며 달려간 반면 국민당군은 파벌로 극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다. 고위 장교들은 전투보다 착복에만 신경을 썼고 중앙군과 지방군 간 파벌 대립, 중앙군 내에서도 직계와 방계 간의 대립이 극심해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지 못했다. 미군이 국민당에 제공한 최신 무기도 국민당의 부정과 부패로 공산당 수중에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소련군도 동북에서 철군하면서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를 그대로 공산군에 넘겨주었다. 결국 국민당의 초기 승리는 서서히 비관적으로 바뀌고 민심은 공산당 쪽으로 기울었다.
자신감을 얻은 공산당은 1947년 7월 전략적 방어 단계에서 전략적 공세 단계로 전환했다. 1948년 들어서는 동북 지역의 대도시 장춘·길림·심양 등을 포위하고 빼앗겼던 연안을 탈환한 뒤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결정적인 전투는 1948년 가을부터 전개되었다. 1948년 9월 12일부터 11월 2일까지 52일간 계속된 요령·심양 전투에서 중공군은 47만 명의 국민당군을 섬멸하고 동북 지방의 절대 다수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11월 2일의 심양 입성은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의 전주곡이었다.

▲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북경의 천안문 성루 누상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오늘 여기에 수립되었다”

중국 중부의 철도 요충지 회해에서 1948년 11월 6일부터 1949년 1월 10일까지 벌어진 회해 전투는 내전 이래 가장 큰 대전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최대 규모 전투 중 하나였다. 50만의 공산군과 50만의 국민당 정부 정규군이 65일 동안 혈전을 벌인 회해 전투에서 국민당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이로써 양자강 중하류 이북의 드넓은 지역도 공산당 수중에 떨어졌다.
패색이 짙어지자 장개석은 1949년 1월 자신의 남경정부 권력을 그대로 두는 것을 전제로 한 평화를 제의했다. 하지만 승기를 잡은 모택동은 장개석을 포함한 전쟁 범죄자 처벌, 군대 재편성, 토지개혁 등 장개석이 지킬 수 없는 8개항의 조건으로 응수해 사실상 평화 제의를 뿌리쳤다.
모택동이 중국의 상징인 북경에 평화적으로 입성한 것은 1949년 3월 23일이었다. 홍비(紅匪)로 몰려 22년 동안 중국 전역을 떠돌며 2만 5000리 장정 등 생사를 넘나든 투쟁 끝에 이뤄낸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공산당은 1949년 4월 최후의 공격을 시작해 4월 20일 양자강을 건너 4월 23일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에 진입했다. 이어 항주·상해·서안(5월) 등을 함락하고 신강·내몽고(6~7월) 등 서북 전체도 장악했다. 8월에는 호남·호북·복건성, 10월에는 광동성 등 화남 지역, 11월에는 사천·귀주성 등도 함락했다. 더 이상 오갈 데가 없어진 장개석은 중경과 성도를 거쳐 1949년 12월 10일 대만으로 달아났다. 
내전이 진행 중이긴 했으나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던 1949년 9월 21일 공산당 대표들이 인민정치협상회의를 열어 10일 동안 국기·국가를 제정하고 신정부의 조직을 구성했다. 9월 29일에는 ‘인민민주주의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정치적 토대라는 점에 만장일치로 합의한다’는 공동강령을 통과시켰다. 10월 1일에는 모택동 주석, 유소기 부주석, 주덕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은래 국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구성된 새 정부가 천안문 광장에서 건국 선포식을 열었다.
모택동이 천안문 성루 누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0월 1일 오후 3시였다. 천안문에는 모택동의 거대한 사진이 걸려 있고 군중으로 가득한 광장 곳곳에는 깃발이 펄럭였다. 이윽고 모택동이 30만 명의 군중을 향해 외쳤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오늘 여기에 수립되었다.” 곧 장엄한 선율의 의용군행진곡이 연주되고 28발의 예포가 발사되는 가운데 오성홍기가 게양되었다. 예포 28발은 공산당이 걸어온 28년의 간난의 세월을 상징했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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