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19.11.06  16:51:42

공유
default_news_ad1

■‘첼로의 신동’에서 ‘거장 지휘자’로 인생행로 바꾼 장한나의 첫 지휘자 내한공연

1994년 열두 살에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 신동(神童)으로 이름 날렸던 장한나(37)가 자신의 악단을 이끌고 서울에 온다. 지휘자로선 처음이다. 2007년부터 지휘 겸업에 나서서 불과 10년 만에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겸 예술감독이 된 그가 첫 내한인 트론헤임과 함께 11월 13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부산, 대구, 전북 익산을 돈다. 트론헤임 심포니는 110년 역사의 노르웨이 악단이다.

“한나의 연주를 듣고 나서 환생을 믿게 되었다”

장한나(1982~ )의 웃음은 천진하고 해맑다. 상황에 따라 “호호호”, “히히히”, “헤헤헤” 등 각기 다르게 들리는 장한나의 웃음을 접한 사람들은 일순간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무장해제되고 만다. 이런 웃음은 장한나의 성격이 여유가 있고 낙천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는 연주자들에게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장한나는 경기 수원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3살부터 피아노를 배우다 5살 때 생일 선물로 받은 첼로에 매료되었다. 장한나는 일취월장했다. 9살 때인 1991년 ‘월간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서울시향을 비롯해 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했다. 부모는 몸이 달았다. 결국 장한나가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칠 무렵인 1993년 1월 장한나의 재능 하나만을 믿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가 유학생 비자 신분으로 도미했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장한나의 학업비와 값비싼 악기 구입 등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장한나의 천재적 재능과 자신들의 열성이었다.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도 장한나의 연주 테이프만을 듣고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을 허락했다. 줄리아드 음악원에서는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출전하는 장한나에게 8분의 7 사이즈의 첼로를 빌려주었다.
장한나는 1994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3대 첼로 콩쿠르 가운데 하나인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 출전했다. 100명이 넘는 유망주가 대거 출전한 콩쿠르에서 장한나는 10월 15일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연소 대상과 현대음악상을 수상했다. 콩쿠르 주최자인 로스트로포비치는 “한나가 잘못되면 내가 죄를 짓는 것”이라며 장한나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지휘계의 거장 주세페 시노폴리도 그녀의 천재적인 음악성에 반해 후원을 약속했다. 지휘자 로린 마젤은 “장한나만큼 완벽한 연주를 하는 첼리스트는 내 생애에 처음”이라며 극찬하고 미샤 마이스키는 “한나의 연주를 듣고 나서 환생을 믿게 되었다. 누구도 그 아이를 함부로 가르쳐선 안 된다”며 장한나의 천재성에 경외심을 표했다.

세계가 알아주는 ‘첼로의 신동’인데도 일반고와 하버드대 입학

▲ 장한나 (출처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홈페이지)

문제는 장한나의 재능을 뒷받침해 줄 값비싼 첼로였다. 장한나 부모는 우리나라 문화체육부 장관 앞으로 “좋은 악기를 구입해서 한나에게 임대해줄 수 없느냐”고 호소 편지를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와 장한나 후원회가 나서 7억 원을 호가하는 1757년산 명기 과다니니를 구입해 1995년 4월 30일 장한나에게 기증했다. 장한나는 그날 이 악기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장한나는 커티스 음악원에 첼로 부문 최연소로 합격했다. 하지만 “음악에만 치우치면 보편적인 사고를 갖추기 힘들 것”이라는 부모의 판단에 따라 일반 사립학교로 보내졌다. 이번에도 수업료는 전액 장학생 대우를 받아 면제받았고 장한나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2002년에는 하버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장한나는 1995년 11월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하고 런던심포니가 연주한 데뷔 앨범을 EMI에서 냈다. 첼리스트로서는 역대 최연소였다. 음반은 장한나에게 ‘에코 음반상’과 ‘올해의 영아티스트상’을 안겨주었다. 이후에도 장한나는 ‘그라모폰 협주곡 부문 올해의 음반상’(2003)을 수상하고 영국의 ‘그라모폰’지가 뽑은 '내일의 클래식 슈퍼스타 20인'(2006)으로 선정되는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장한나는 2007년 5월 27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린 ‘성남 국제청소년 관현악 페스티벌’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세계적 음반사 EMI를 통해 이미 6장의 독집을 발표한 정상급 첼로 연주자인데도 생소한 지휘 무대에 선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첼로는 바이올린과 달리 레퍼토리가 적다. 바흐, 베토벤, 하이든, 드보르자크 등 50여 곡이 주요 레퍼토리의 전부다. 그래서 첼리스트들은 음악적 한계를 넘기 위해 지휘 공부를 한다. 첼리스트 출신인 토스카니니와 로스트로포비치 등이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시 장한나는 지휘를 시작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50년 더 첼로를 한다고 했을 때 알면 알수록 점점 현미경으로 디테일을 보는 일밖에 안 남아요. 시야가 좁아지는 위험이 있죠. 또 음악은 스스로 새로운 열정을 갖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빠져요.”
거장 지휘자 가운데 여성이 없는 음악계 현실에서 장한나가 지휘자로 세계에 알려진 것은 2012년 12월이었다. 카타르 국립교향악단인 ‘카타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장한나를 음악감독으로 영입한 것이다. 단원은 인종과 국적을 망라했고 평균 연봉은 신설 오케스트라치고는 파격적으로 뉴욕 필하모닉 수준에 맞췄다. 장한나는 2013년 9월, 2년 임기의 음악감독으로 정식 취임했다. 하지만 2년의 임기를 채우지 않고 취임 1년 만에 물러났다. 경영진과의 계속되는 행정적 불화와 타협하기 어려운 예술적 견해 차이가 원인이었다. 이후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의 수석 객원지휘를 거쳐 2017년 트론헤임의 수장(首長) 자리를 꿰찼다. 장차 세계적인 여성 지휘자로 이름을 떨칠 장한나의 미래가 자못 궁금하다.

■제1회 응창기배에서 중국의 섭위평 꺾고 우승한 조훈현이 30년 만에 섭위평과 기념대국 펼친다

바둑계는 1989년 9월 5일을 ‘싱가포르 대첩’의 날로 기억한다. 조훈현이 섭위평(녜웨이핑)을 따돌리고 제1회 응창기배에서 우승한 날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고 고희(古稀)를 눈앞에 둔 두 노장이 그날의 격전을 기념하는 대국을 펼친다. 11월 2일 한국기원 내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진행될 공개 해설엔 이창호 9단이 특별 게스트로 참여한다.

세계 최연소 입단 기록, 지금도 깨지지 않아

조훈현(1953~ )은 전성기 때 세계 주요 4대 기전을 모두 석권한 ‘세계 바둑의 황제’였다. 그의 바둑 인생은 각종 신기록과 진기록으로 연속된 한 편의 드라마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조훈현의 천재성이 드러난 것은 4살 때였다. 바둑을 따로 배우지 않고 어깨 너머로 구경만 했는데도 첫 대국에서 8급 기력의 아버지를 이겼다. 아버지는 아들의 기재를 살리기 위해 5살 때 서울로 이사했다.
조훈현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62년 10월 14일, 예선 13전 전승, 본선 10승 2패로 입단함으로써 세계 최연소(9세 7개월) 프로기사가 되었다.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조훈현은 1963년 10월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나 세고에 겐사쿠(1889~1972) 9단의 문하생이 되었다. 세고에 9단은 일본과 중국의 바둑 천재 하시모토 우타로와 오청원 두 사람만을 문하로 두었기 때문에 사실상 한·중·일 세 나라의 대표 기사를 모두 제자로 삼은 셈이 되었다. 일본 기원은 한국기원에서 2단을 부여받은 조훈현에게 4급만 인정했다. 그러나 조훈현은 도일 3년 후인 1966년 입단하고 1971년 5단으로 승단해 기세를 떨쳤다.
조훈현은 1972년 3월 병역 의무 때문에 귀국했으나 입대 일정이 맞지 않아 입대할 때까지 국내 기전에서 활동했다. 성적은, 우리말을 거의 못하는 데다 6개월 뒤 스승 세고에 9단이 자살한 충격과 입대를 앞둔 부담감으로 예상보다 저조했다.
조훈현은 1974년 1월 생애 첫 타이틀인 최고위(부산일보 주최)를 따냈다. 1976년 10월에는 국내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국수전(동아일보 주최)과 1977년 2월 왕위전(TBC 주최)에서도 우승, 조훈현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렸다. 기세가 오른 그는 1977년 9개월 동안 31연승을 거둬 신기록을 세웠다. 1980년 7월에는 마지막 남은 명인 타이틀까지 쟁취함으로써 국내 첫 전관왕(9개 타이틀)에 올랐다. 이런 그에 대해 1980년 8월 19일자 워싱턴포스트지는 ‘컴퓨터를 능가하는 계산력’이라는 제목으로 조훈현 특집을 실었다.
조훈현은 1982년 5월 4일 한국 최초 9단으로 승단, 첫 ‘입신(入神)’이 되었다. 여세를 몰아 1982년 11월(10개 타이틀)과 1986년 6월(11개 타이틀)에도 전관왕에 올라 3번째 천하통일을 이뤄냈다. 그를 제외하고 전관왕 기사는 국내에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

응창기배 우승으로 한국 바둑의 국제적 위상 올라가

▲ 1989년 9월3일 조훈현(왼쪽) 9단과 섭위평(오른쪽) 9단이 ‘제1회 응창기배’ 결승전에서 도전 4국을 시작하고 있다.(출처 한국기원)

1987년 8월 대만의 거상이자 열렬한 바둑광 응창기(잉창치)가 세계 최대 규모의 프로바둑 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4년마다 한 번씩 개최할 이 대회는 상금 규모가 우승상금 40만 달러를 포함해 100만 달러나 되어 각국의 바둑기사들을 들뜨게 했다. 우승상금 40만 달러는 그해 US오픈 골프대회 상금 18만 달러의 두 배도 넘었다. 응창기는 일본의 바둑 2000여 국의 승패를 통계·분석하고 나서 덤을 8집으로 하는 것이 흑백 간 승패를 5대 5에 가장 가깝게 만든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바둑 룰을 제시했다.
거액의 상금을 건 세계 대회를 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현대 바둑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이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요미우리신문 주최로 1988년 4월 도쿄에서 제1회 후지쓰배를 개최한 것이다. 16명의 세계 강자가 도쿄에 모였다. 한국에서는 조훈현, 서봉수, 장두진이 참가했으나 1회전에서 3명 모두 탈락하는 충격적인 패배를 맛봤다. 국내에서 8개 타이틀을 휩쓸고 있던 조훈현은 당시 일본의 기성인 고바야시 고이치 9단에게 졌다. 한국의 바둑이 세계 수준과 거리가 너무 멀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988년 8월 21일 조훈현은 중국 북경에서 개막된 제1회 응창기배에 한국 대표로 출전했다. 참가 선수는 모두 16명으로, 한국은 조훈현과 조치훈 2명뿐이었다. 일본은 5명, 중국은 4명, 대만 3명, 미국과 호주가 각각 1명이었다. 조치훈이 일본에서 활동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한국 대표는 사실상 조훈현 한 명뿐이었다. 프로기사 제도가 없는 미국·호주와 동격으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조훈현은 대만의 왕명완 9단과 4개월 전 후지쓰배에서 자신을 무너뜨린 고바야시를 꺾고 4강에 진출했다. 조훈현은 11월 서울에서 열린 준결승 3번기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대만의 임해봉을 2-0으로 완파했다. 결승 상대는 중국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신흥 고수 섭위평 9단이었다. 조훈현은 1989년 4월 25일 중국 항주에서 열린 1국에서는 승리했으나 2국과 3국은 허망하게 내주었다. 다행히 9월 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4국에서는 승리해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9월 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결승 5국에서 조훈현이 흑 145를 두는 순간 섭위평 9단은 무겁게 고개를 떨어뜨리며 돌을 던졌다. 조훈현의 불계승이었다.

각종 기록 보유한 ‘걸어다니는 기네스북’

사실상 세계 최초 국제 메이저 대회였던 이 승부는 본인들과 한·중 양국 바둑계 운명을 모두 갈라놓았다. 단기 필마로 출전한 조훈현의 우승으로 한국 바둑의 국제적 위상은 올라갔고 국내엔 바둑 붐이 도래했다. 반면 중국 바둑계는 이후 오랜 침체의 길을 걸었다. 조훈현 개인적으로는 ‘세계의 바둑 황제’에 오르는 또 하나의 위업이었다. 조훈현은 이 우승을 신호탄 삼아 모두 9차례나 세계 정상에 섰지만 섭위평은 패배 후유증에 시달리다 평생 한 번의 국제 우승컵도 들어보지 못했다.
두 기사는 평생 18번 맞붙어 조훈현이 12승 6패로 앞서 있다. ‘싱가포르 대첩’ 후 한때는 9승 3패까지 벌어졌다. 이후 섭위평이 3연승(96~97년)해 추격하는 듯했으나 2000년 이후 다시 조훈현이 3연승 중이다. 거의 모든 대국이 조훈현의 날렵함과 섭위평의 두터움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내용이었다.
조훈현은 1993년 2월 국가대항전인 진로배SBS 세계바둑최강전, 1994년 6월 동양증권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1994년 8월 후지쓰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 세계 바둑사에 길이 남을 4개 국제기전을 모조리 석권하는 그랜드슬램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이처럼 국제대회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국내 대회에서는 거의 모든 타이틀을 잃었다. 이유는 내제자 이창호가 자신의 타이틀을 하나둘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돌부처’ 이창호 9단을 키워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조훈현은 2003년 1월 제7회 삼성화재배 제패를 끝으로 우승이 없다. 체력과 정신면에서 젊은 고수들에게 밀리기 때문이다. 바둑은 머리로 하는 게임이지만 고수들끼리는 실력 차이가 반 집 차이이므로 체력과 정신력이 좌우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 체력과 정신력에서 딸리므로 젊은 기사들을 좀처럼 이기기 힘들다.
그래도 ‘최초’를 달고사는 사람답게 2010년 12월 만 50세 이상만 출전하는 시니어들만의 기전인 제1회 대주배에서 우승했다. 지금은 국회의원직을 유지해 공식 대국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임기가 끝나면 다시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할 것이다.
조훈현은 ‘걸어다니는 기네스북’답게 각종 기록의 보유자다. ▲세계 최연소 입단(9세 7개월) ▲한국 최초 9단(1982년) ▲전관왕 3회(1980년 9관왕, 1982년 10관왕, 1986년 11관왕) ▲세계 대회 그랜드슬램(1994년) ▲단일 기전 세계 최다 연패(패왕전 16연패, 1977~1993년, 20회 우승) ▲세계 최다승(재일 기간 118승 5무 41패를 포함해 2788전 1949승 830패) ▲세계 최다 우승(세계 대회 11회 포함 160회) ▲최고령 타이틀 획득(49세 10개월, 제7회 삼성화재배) 등의 기록을 지금도 갖고 있다. 승률(70.13%)에서만 이창호(72.09%)에 이어 2위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저작권자 © 뉴스메이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실시간 뉴스

전국 뉴스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