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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0.01.06  12:5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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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는 우리나라 근대 인물화가의 효시

2019년 국내 8개 경매사에서 거래된 미술품 데이터를 종합한 바에 따르면, 국내 경매시장 최고 낙찰률을 보인 작가는 이당 김은호(54점 중 49점)였다. 최다 출품 작가는 한국화가 민경갑(218점)이고 낙찰 총액 1위는 김환기(249억1900만원)였다.

“전통의 맥을 시대적으로 되살린 근대적 채색화의 개척자”

김은호(1892~1979)는 세밀 묘사와 채색 기법으로 산수, 화조, 인물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특히 인물화에 발군의 기량을 보여 우리나라 근대 인물화가의 효시로 꼽힌다. 미술평론가들은 김은호를 가리켜 “전통의 맥을 시대적으로 되살린 근대적 채색화의 개척자”(이구열), ‘극채세화(極彩細畵)의 화풍을 고수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제자를 기른 인정미 넘치는 예술가’(이규일)라고 평가했다.
김은호는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의 관립일어학교(1906~1907)를 다니다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흥학교 측량과로 옮겼다. 당시로서는 사실상 신기술인 측량은 재미도 있고 적성에도 맞았다. 특히 각을 재고 선을 긋는 제도에 큰 흥미를 느꼈다. 1908년 12월 졸업 후에는 부친이 죽고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서울로 올라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이발소, 도장포, 인쇄소 등을 전전하다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영풍서관이라는 고서점의 주인을 알게 되어 영풍서관에서 고서를 세필로 베끼는 일을 맡았다. 측량과에 다니며 제도를 해 본 경험이 있어 세필로 베끼는 것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서점을 찾은 중추원 참의 김교성이 김은호의 출중한 능력을 발견하고 근대 최초의 미술학교 ‘서화미술회’에 추천한 덕에 김은호는 20세 때이던 1912년 8월 서화미술회에 들어갔다. 서화미술회는 조선 왕조의 붕괴로 화원 제도가 폐지되고 이 때문에 서화 전통을 계승하는 길이 막히자 미술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한 문인화가 윤영기가 1911년 3월 설립한 경성서화미술원이 뿌리다. 하지만 경성서화미술원은 발족 단계에서 재정적으로 후원한 이완용이 서화미술회라는 실질적 운영체를 만들면서 주체가 이완용에게 넘어갔고 이완용이 서화미술회 초대 회장이 되었다.

조선의 마지막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발탁

▲ 김은호 ‘자화상’(45.5ⅹ37.5㎝). 2016년 미술 경매시장에서 1억 5200만 원에 낙찰됐다.

당시 그곳에는 조석진·안중식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포진했는데 이들은 김은호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음을 간파하고 김은호가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당대 최고의 실세이자 친일파로 유명한 송병준의 인쇄용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뒤이어 고종(당시는 이태왕)의 사진도 모사하도록 했는데 고종이 모사 그림에 만족해 하며 순종(당시는 이왕)의 반신상을 그리도록 함으로써 김은호는 왕의 초상화인 ‘어용’이나 ‘어진’을 그리는 조선의 마지막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발탁되었다. 김은호는 스승에게서 어진을 그리는 법도와 기술을 배워 창덕궁을 수시로 드나들며 순종의 어진을 그려 4개월 만인 1913년 봄 완성했다.
이후 김은호가 순종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소문이 퍼져 친일 귀족이나 신흥 자본가들이 너도나도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김은호는 이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화단의 총아로 부상하고 부와 명성을 얻었다. 다만 이때 그린 순종의 어진은 창덕궁 대조전에 걸려 있다가 1917년 화재로 불타 없어졌다.

김은호가 그린 어진만 다섯 왕

왕실은 창덕궁 대조전을 복원하면서 내벽의 장식화를 김은호·이상범·노수현·오일영 등에게 맡겼다. 이들이 그린 벽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두 그림이 김은호가 그린 서벽의 ‘백학도’와 오일영·이용우가 합작해 그린 동벽의 ‘봉황도’다. 김은호는 ‘백학도’를 1920년 9월 완성했다.
김은호는 1917년에도 고종의 어진을 4개월 만에 그렸는데 이 어진 역시 안타깝게도 역대 어진 봉안소에 봉안되었다가 6·25 때 소실되었다. 김은호는 순종과 고종에 이어 태조, 세조, 원종의 어진들도 여벌을 그려 그가 그린 어진만 다섯 왕이나 되었다. 김은호는 서화미술회 화과 과정은 1915년(제2회), 서과 과정은 1917년(제3회) 졸업했다.
191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창설한 ‘조선서화협회’에 이상범·노수현 등과 함께 가입하고 1921년 시작된 ‘서화협회전’(협전)에도 출품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 때는 등사판으로 만든 독립신문을 돌리다가 1년형을 선고받고 5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김은호가 젊은 나이에 왕실은 물론 세인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게 된 결정적 요인은 타고난 재능이었다. 여기에 김은호 특유의 새로운 기법이 더해지면서 김은호만의 독자적인 화풍이 정립되었다. 새로운 기법이란 동양화의 전통적 기법에 근대 서양 회화의 기법을 절충한 이른바 ‘김은호식 절충주의’였다.
김은호의 인물화는 이전의 화가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짜임새가 있었다. 시점, 비례, 원근, 구도 등이 일정한 논리적 연관성 위에 흐트러짐 없이 제자리를 틀었다. 그의 정밀한 세필채화의 기교는 지금도 인정받을 만큼 정밀하고 세밀한 것으로 정평이 났다.
김은호는 1922년 6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동양화부에 ‘미인 승무’로 4등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제3회(1924) 선전에서 ‘부활 후’로 3등상을, 제7회(1928) 선전에서 ‘북경 소견’으로 특선을 수상했다. 제8회(1929) 선전에 낙선한 후에는 더 이상 선전에 출품하지 않았다.
1925년 대부호인 이용문의 후원으로 변관식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3년간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의 청강생으로 있으면서 일본식의 채색화풍을 연마했다. 1926년 도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에 조선의 동양화가로는 최초로 입선하는 영예도 누렸다.

해방 후에는 문화 권력의 정점이자 화단의 총수로 군림

김은호는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담배 한 모금 피워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매주 교회에 나가고 여자도 멀리 했다. 후배 양성에도 관심이 많고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어 제자가 많았다. 1930년대 들어 김은호의 집에는 적게는 4~5명 많게는 10여 명이 묵으며 그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제자들 중 백윤문·장우성·김기창·조중현 등은 1936년 6월 김은호의 뜻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후소회’를 발족했다. 이후 후소회는 이상범의 ‘청전화숙’, 광주 허백련의 ‘연진회’와 더불어 당시 동양화 분야의 후진 양성 통로 역할을 하며 선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제21회(1942) 선전에서는 동양화부 입선작 60점 가운데 특선작 2점을 포함한 21점이 후소회 회원의 작품이었을 정도로 후소회는 화단에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했다. 김은호는 허백련·박광진·김복진과도 수묵채색화와 유채화, 조소를 가르치는 전문 미술교육기관인 ‘조선미술원’을 1936년 10월 개설해 다수 제자들을 양성했다.
오늘날 김은호는 대표적인 친일 화가로 분류되고 있다. 그 첫 번째 그림이 1937년 11월 완성해 미나미 조선 총독에게 증정한 ‘금차봉납도’이다. 이 그림은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 원호에 앞장선 ‘애국금차회’의 1937년 8월 결성 순간을 그린 것이다. 김은호는 이후에도 본격적인 친일 활동에 나섰다.
이 때문에 해방 후 미술인들의 총합적 단체로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김기창·이상범·김인승 등과 함께 김은호를 배제했으나 그 자신의 탄탄한 실력에다 제자들까지 화단을 주도하는 정치력을 갖게 되면서 김은호는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 권력의 정점이자 화단의 총수로 군림했다.
김은호는 해방 후에도 많은 주요 인물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비롯해 남원의 ‘춘향상’, 진주의 ‘논개상’, 강릉 오죽헌의 ‘신사임당상’,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영정, 정몽주, 서재필, 이승만 등 역사적인 주요 인물 상당수가 그의 손을 거쳤다. 1979년 2월 7일 8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전쟁의 향배를 한순간에 바꾼 대결전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전쟁 초기인 1942년 6월 5일부터 3일간 하와이 북서쪽 미드웨이 앞바다에서 있었던 미·일 양군 사이의 해전이다. 이 전쟁을 다룬 영화 ‘미드웨이’가 지난 12월 31일 국내에서 개봉했다.

日, 미드웨이 해전을 태평양 전체 싸움의 승부처로 간주

일본은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에 성공하고 이후 5개월 만에 괌, 홍콩, 필리핀,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싱가포르, 버마 등은 물론 서태평양의 주요 섬까지 점령함으로써 북태평양 쿠릴열도에서 중부 태평양을 거쳐 버마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제1단계 작전을 완료했다.
일본의 최고사령부가 다음 작전을 구상하고 있을 때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시간을 끌수록 미국이 우세해지므로 하와이 북서쪽 1,600㎞ 지점에 위치한, 일본 본토와 하와이 중간에 있는 미드웨이를 공략해 하와이와 미국 서해안에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고사령부는 야마모토의 작전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2년 4월 18일 미국의 ‘둘리틀 폭격대’가 일본의 본토를 기습 공격한 것에 놀라 미드웨이 침공을 승인했다.
야마모토는 미드웨이 해전을 태평양 전체 싸움의 승부처로 간주했다.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1942년 7월 무패의 항공모함들을 뉴칼레도니아와 피지로 보내고 8월에는 호주 남부의 연합군 기지들을 폭격한 뒤 하와이까지 점령한다는 작전 계획을 머릿속에 그렸다. 따라서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승리를 굳히기 위한 운명의 일전이었으며 태평양전쟁의 향배를 한순간에 바꿀 수 있는 중차대한 대결전이었다.
4척의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하는 일본의 제1기동함대와 야마모토가 이끄는 연합함대 주력이 미드웨이 섬을 향해 출발한 것은 1942년 5월 말이었다. 연합함대는 구축함, 순양함, 수송선 등 수십 척으로 구성되었다. 미군은 일본의 암호를 이미 해독해 일본군이 미드웨이 섬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고도 일본만큼 대규모 함단을 동원하지는 못했다.
미국의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황급히 전함들을 끌어모았으나 항공모함 3척과 순양함 8척, 구축함 15척 등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항공모함 요크타운호는 5월 8일 산호해 전투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어 진주만에서 막 보수작업을 마친 뒤였다. 미국의 항공모함에 탑재된 비행기 편대 역시 속도와 기동성, 탑재 무기에서 일본에 비해 뒤졌다. 더구나 미드웨이로 향한 일본 함대는 그때까지의 일본 해전 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최강을 자랑했다.

미군, 일본 함대의 위치, 방향, 일정, 목표 파악하고 기다려

이런 일본군에 맞서야 하는 미군이 단 하나 우위를 보인 것은 레이더와 통신 체계뿐이었다. 미드웨이 해전 후 미군의 자유로운 사고, 자율적 판단, 개인주의 등이 천황 숭배만을 고집하는 일본의 군사문화보다 전쟁에 유리한 것으로 분석되었지만 해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미국 문화가 일본 문화보다 우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드웨이 작전 지역에 도달한 일본군이 1차 공격부대를 발진시켜 미드웨이 섬을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1942년 6월 5일 오전 4시 30분이었다. 당시 미 태평양함대 최고사령부는 이미 암호를 해독해놓은 터라 일본 함대가 미드웨이에 도착하기 전부터 함대의 위치와 방향, 일정, 목표를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첫 출격은 미드웨이 섬의 미군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미군이 일본의 작전 상황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는 것과 달리 4척의 항공모함을 지휘하는 일본의 제1기동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미군의 항공모함이 미드웨이 섬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구모는 미드웨이 섬에 두 번째 타격을 주기 위해 같은날 오전 7시쯤 항공모함에 대기 중인 뇌격기에 미드웨이 섬 공격용 폭탄을 장착하라고 명령했다. 그 사이 미 함대는 일본군 항모를 겨냥해 오전 8시 100여 기의 급강하 폭격기를 발진시켰다. 뒤늦게 미 항공모함의 접근 사실을 알게 된 나구모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어이없는 실수를 범한 것은 바로 그 시간이었다. 
1차 출격을 마치고 귀환하는 편대를 위해 항모 갑판을 비워야 하므로 그 전에 항모에 대기 중인 뇌격기들에 출격 명령을 내려야 하는데도 뇌격기에 장착되어 있는 지상공격용 폭탄으로는 미 항공모함에 타격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해 1차 공격부대를 먼저 항모에 착함시키고 2차 출격용 뇌격기는 어뢰·대함공격용 폭탄으로 무장을 교체한 뒤 출격하라고 결정한 것이다. 결국 항공모함 갑판과 그 아래에는 급유와 재무장을 위해 온갖 항공기들이 빼곡히 들어차고 휘발유통, 폭발물, 탄약 등으로 가득했다.

니미츠 제독, “정보전의 승리였다”

일본의 뇌격기들이 항모에서 발진을 준비하고 있던 10시 22분쯤, 인근에 있는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호와 요크타운호에서 발진해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미군 폭격기 편대가 갑자기 급강하하며 일본 항모에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폭탄 투하로 갑판에 줄지어 있던 일본 뇌격기와 전투기들은 속수무책으로 파괴되었다. 미처 치우지 못한 탄약과 연료는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일본군의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태평양전쟁 개전 후 연전연승을 자랑하던 항모 아카기호(3만 4,000톤 급), 가가호(3만 3,000톤 급), 소류호(1만 8,000톤 급)는 불과 6분 만에 불길에 휩싸여 대파되거나 두 동강 나고, 미 항모 요크타운호를 침몰 직전까지 몰아가며 끝까지 버티던 마지막 항공모함 히류호(2만톤 급)도 오후 4시경 태평양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모 4척, 순양함 1척, 항공기 330여 기가 파괴되었다. 3,500여 명의 베테랑 비행 요원과 해군 요원도 바닷속에 수장되었다. 미군 피해는 일본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 항모 요크타운호와 구축함, 그리고 항공기 140여 기와 300여 명의 군인뿐이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해군 전력에서 열세이던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로 일본과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서고 태평양전쟁의 최종 승리를 예감했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정보전의 승리였다”며 “일본으로서는 16세기 말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패배 이후 최초의 대패로 끝났다”고 말했다. 니미츠의 지적대로 미드웨이 해전은 미국이 일본의 암호를 정확하게 읽은 데서 이미 판가름 나 있었다. 이처럼 미군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공격을 기다렸으니 승패는 불을 보듯 뻔했다. 적의 병력과 공격 위치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군대가 결전에 나서는 경우는 역사상 드물었다. NM

▲ 영화 ‘미드웨이’의 한 장면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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