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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0.02.06  16: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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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죄로 처형된 민간인이 72년만에 무죄판결 받은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1948년 10월 군인들이 집단으로 무장 반란을 일으킨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내란죄로 처형된 민간인이 72년 만에 처음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광주지법 순천지원 형사 1부는 여순사건 당시 내란 및 국가 문란 혐의로 기소돼 사형당한 민간인 장환봉(당시 29세)씨의 재심에서 “범죄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판결은 여순사건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망자에 대한 첫 재심 판결이다. 순천역 철도기관사였던 장씨는 1948년 10월 20일 열차를 타고 순천역에 도착한 반란 군인들을 도왔다는 혐의로 군경에 체포된 뒤 20여일 만에 순천역 부근에서 총살됐다.

자연발생적이고 우발적 성격 강해 

▲ 여수·순천에서 반란 일으킨 국군 14연대를 진압하기 위해 작전을 펼치고 있는 정부진압군 (출처 라이프지)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 제14연대 소속 병사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출동 명령을 받고 대기 중이던 1948년 10월 19일 밤 10시쯤, 갑자기 비상나팔 소리와 몇 발인지 모를 총소리가 군부대의 밤하늘을 갈랐다. 놀란 병사들이 하나둘 연병장으로 몰려들고 있을 때 부대 곳곳에서는 이미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병사들이 연병장에 집결하자 연대 인사계 주임상사 지창수가 “지금 북조선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 조국 통일을 위해 미국의 괴뢰들을 쳐부수자”고 외쳤다. 그가 선동 연설을 하면서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병사들 사이에서 “옳소! 옳소!”하는 호응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좌익 하사관 그룹이 주축을 이룬 주동자들은 자신들의 선동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지 않거나 반대를 표명하는 군인들은 시범적으로 끌어내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했다. 20명의 장교도 대부분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살된 장교들 가운데 10여 명은 남로당 소속이었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서로 모르는 상태로 군대에 숨어 있다가 반란을 일으킨 지창수 상사 등 같은 좌익의 반란 주도 세력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당시 연대장과 부연대장은 여수 읍내에 나가 있었다.
14연대가 그랬듯 당시의 군은 사실상 좌익의 피난처였다. 먹고살기 위해, 일본군의 경력을 살리기 위해 입대한 젊은이가 대부분이었지만 그 가운데는 남로당의 조직적 침투 지시를 받고 잠입한 좌익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미 군정은 조직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대보다 경찰을 더 신뢰했다. 그러다보니 남한의 치안과 경비는 경찰이 맡고 군은 그저 그들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군의 처우 역시 무기, 장비, 복장, 급식 등 모든 면에서 경찰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이런 이유로 군인은 경찰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전국 각 지역에서 경찰과 자주 충돌했다. 군인들 중 일부는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도 제주도 주민들이 현지 경찰에 대한 반감에서 사건을 벌인 것으로 이해했다.
14연대 반란 5개월 전, 광주 국방경비대 제4연대 제1대대를 주축으로 창설된 14연대 장병들의 불만도 다른 군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 “제주도로 출동해 동족끼리 총을 겨눌 수 없다”는 좌익의 선동이 가세하면서 14연대 사병들은 순간적으로 반역에 몸을 던졌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무장을 마치고 제주 출신 김지회 중위의 인솔 하에 부대 막사를 뛰쳐나가 20일 새벽 1시쯤 여수 읍내로 진입했다.
여수 읍내 좌익들과 하나가 된 그들이 먼저 표적으로 삼은 것은 여수경찰서 등 정부 기관이었다. 곧 여수경찰서의 저지선이 무너져 여수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날이 밝았을 때 여수는 이미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처형은 이튿날까지 계속되어 경찰과 가족, 우익으로 분류된 사람 수백 명이 죽창·총검·몽둥이 등으로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결과적으로 남한의 반공 세력 더욱 강화하는 데 기여

반란군은 오전 8시 순천행 열차를 타고 북상해 순천에 파견되어 있던 2개 중대와 힘을 합쳐 순천까지 장악했다. 순천의 경찰들은 반란군이 진입하기 전에 수감 중이던 좌익 혐의자들을 미리 집단 살해했다. 반란군과 좌익들도 순천에 진입하는 즉시 경찰과 가족들을 먼저 색출해 잔혹하게 살해했다.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이었다. 반란 과정에서 처형된 여수·순천의 경찰, 지주, 우익 인사만 1,600여 명이 넘었다. 반란군은 10월 21일 이웃한 광양·곡성·구례·고흥 등까지 진출해 동부전남 지역을 해방구로 삼았다.
정부는 송호성 준장을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10월 21일 광주로 급파하고 10개 대대를 토벌군으로 편성했다. 토벌군은 22일 날이 밝으면서 장갑차를 앞세우고 순천 시내로 밀고 들어가 가까스로 순천을 탈환했다. 다만 23~24일의 여수 공격은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송호성 사령관이 부상하고 취재하던 AP통신 기자가 목숨을 잃었다.
새로 부임한 원용덕 토벌군 사령관이 대대적인 여수 탈환작전에 나선 것은 10월 26일이었다. 토벌군은 여수반도를 육지에서 포위한 뒤 바다에 정박 중인 경비정에서 박격포로 포격을 퍼부었다. 여수 진입작전으로 반란군은 무력화되었으나 대신 여수 읍내는 불바다로 변하고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토벌군은 27일에야 잿더미가 된 여수 읍내를 장악했다. 이로써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은 9일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어진 부역자 색출로 좌익은 물론 무고한 민간인까지 피해를 입은 경우가 많아 냉전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반란군 증 생존자는 지리산 일대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14연대 반란은 자연발생적이고 우발적인 성격이 강했다. 군대 내 세력을 더욱 조직화한 후 거사하기를 바랐던 남로당 상층부의 뜻에 어긋난 행동이긴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일이라 남로당 지도부는 어쩔 수 없이 반란을 지원했다. 하지만 반란 실패 후 입산한 지창수·김지회 등의 주모자들은 지리산 빨치산 대장 이현상에게 “무작정 불만 지르고 나왔다”며 책임을 추궁당하고 군사모험주의라는 질책을 받았다.
2개월 전 막 태동한 이승만 정권은 14연대 반란으로 위기를 맞는 듯했지만 다행히 반란이 바로 진압되고 주한미군의 철수까지 1949년 6월로 연기되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에도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은 빠르게 반공국가로 변모했다. 결과적으로 반란군의 소아병적 행동이 역설적이게도 남한의 반공 세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 기여한 셈이다.
14연대 반란 후 정부와 군 지도부는 군대 내부에 숨어든 좌익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신생 대한민국이 제대로 순항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런 점에서 반란은 대한민국에 되레 행운이었다. 군대 내 좌익을 척결하는 숙군(肅軍)을 마무리지어 1년 8개월 뒤 터진 6·25 전쟁 때 일사불란하게 북한군에 맞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731부대의 생체 실험 만행…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연구 윤리 연보’에 실려

2차 세계대전 때 한국인·중국인 등을 대상으로 저지른 일제의 생체 실험 만행이 전 세계 과학자 30여만명이 교육받는 미국 연구 윤리 교재에 실렸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지난 1월 1일부터 홈페이지 ‘연구 윤리 연보’에 일본 731부대 과학자들이 한국인 등에게 저지른 생체 실험 만행을 처음으로 게재한 것이다. NIH는 미국 최대 연구비 지원 기관이고 연보는 NIH 연구비를 받는 과학자가 매년 1~3회 수강해야 하는 연구 윤리 교재다.

생체 실험 대상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마루타’(통나무)로 불려

1932년 8월 중국의 만주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의 관동군이 흑룡강성의 하얼빈에서 남쪽으로 70㎞ 떨어진 베이윈허(北運河)에 들이닥쳤다. 곧이어 주민을 불러모아 마을을 떠나라며 겁박했다. 주민이 떠난 자리에서는 곧바로 비밀 기지 공사가 시작되었다. 수십 채의 건물이 지어지고 건물 주변에는 높은 담장과 철조망이 처졌다. 이렇게 완성된 베이윈허 기지의 운영 책임자로 군의관인 이시이 시로(1892~1959) 소령이 임명되었다. 그는 평소 군고위 간부와 동료 과학자들에게 “세균전이야말로 일본의 차세대 무기이고 일본의 번영을 보장하는 필수 요소”라고 강조해온 인물이었다.
문제는 실험 장소였다. 세균전 무기가 실전에서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는지를 살펴보려면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해야 하는데 검증도 안 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실험을 일본에서 진행할 수는 없었다. 이시이가 주목한 곳은 1931년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된 만주였다. 1932년 8월 만주에서 장소를 물색한 끝에 발견한 장소가 소련 국경과 멀지 않은 베이윈허였다.
이시이는 1933년 가을 완성된 비밀 기지에서 탄저열, 비저, 페스트 등을 연구했다. 생체 실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많은 중국인이 산 채로 죽어갔다. 베이윈허 기지는 최소한 1,000명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1937년 말 폐쇄되었다. 그 사이 이시이는 중령으로 진급하고 비밀 기지는 1936년 6월 정식 부대로 승격해 ‘관동군 방역부’라는 이름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이시이는 여전히 부대 책임자였다.
본격적으로 생체 실험을 목적으로 설립한 ‘관동군 방역부’는 하얼빈 시내에서 20㎞ 남짓 떨어진 핑팡(平房)에 세워졌다. 이시이는 대령으로 진급한 1938년 생체 실험을 시작했다. ‘관동군 방역부’는 1940년 7월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개칭된 후 731부대로 불렸다. 주변 지역에는 제재소로 알려졌기 때문에 생체 실험 대상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마루타’(통나무)로 통했다. 마루타 대부분은 중국인과 몽골인이었지만 조선인과 소련군 포로도 끌려왔다. 731부대는 흑룡강성에 속한 하이린(海林), 쑨우(孫吳), 린커우(林口)와 내몽고자치구의 하이라얼(海拉爾) 등지에도 지부를 두었다.

살아 있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30여 가지 생체 실험 자행

731부대는 계속 확장되어 1942년에는 부대원 총수가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731부대에서는 살아 있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전염병 실험, 동상 실험 등 30여 가지 생체 실험이 자행되었다. 항공기로 마을에 페스트균을 뿌리고 진행 결과를 조사하는 페스트균 실험, 우물에 콜레라균을 뿌리고 진행 과정을 살피는 콜레라균 실험, 세균의 전이 과정을 추적하고 세균폭탄을 만들기 위한 세균전 실험, 신체 부위가 견딜 수 있는 압력을 체크하는 압력 실험, 한겨울에 옷을 벗고 얼마나 견디는지를 살피는 동상 실험, 총알이 뇌에 박혔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탄환 실험 등이 간단없이 진행되었다.
마취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뇌, 폐, 간 등 장기를 적출하고 출혈 연구를 위해 팔다리를 절단한 뒤 잘라낸 것을 다른 쪽에 붙여보는 실험, 온도와 화상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불이나 뜨거운 물에 넣어보고 강제로 얼린 손발을 도끼로 때려 뼈를 부러뜨리는 실험도 다반사였다. 원심분리기에 넣어 죽을 때까지 돌리기도 하고 큰 유리 상자 속에 사람을 가두고 밖에서 공기를 빼내 완전 진공 상태를 만든 뒤 인간의 생존 시간을 체크하기도 했다.
악마들은 실험이 끝나면 마루타들을 실험실 내부에서 소각하거나 한꺼번에 구덩이에 파묻었다. 이렇게 죽어간 마루타들은 731부대에서만 최소 3,000여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양적인 면에서 인간의 잔인함을 보여주었다면 731부대는 질적인 면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이시이는 1942년 8월 새로운 근무지 남경에서도 생체 실험을 계속 이어갔다.
731부대에 이어 대규모 생체 실험장이 세워진 곳은 만주국의 수도 장춘이었다. 핑팡의 생체 실험장과 같은 해에 공사를 시작한 장춘 부대는 대외적으로 가축병 예방 부대라고 공표했으나 사실은 세균전 실험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 부대였다. 장춘 부대는 100부대로 불리며 중국 전역에 퍼져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분대를 두고 주로 야외 실험에 치중했다. 731부대와 별개로 세워진 100부대는 대량의 세균 배양과 실험을 위해 쥐, 파리, 모기, 빈대, 이 등 전염병을 옮기는 여러 곤충을 번식시키고 생체 실험용 혈액 재료를 얻기 위해 말, 소, 낙타, 원숭이 등을 사육했다.
731부대는 핑팡, 장춘에 이어 세 번째로 규모가 큰 기지를 1939년 4월 남경에 건설했다. 공식 부대명은 전염병 예방 및 수질 공급 부대였으나 1644부대로 더 많이 알려졌다. 이 부대 말고도 북경에 1855부대, 광주에 8604부대, 싱가포르에 9420부대가 세워졌다.
일본은 본토에서도 미군 포로를 상대로 생체 해부 실험을 했다. 일본의 패전 3개월 전 일본군에 격추된 미군 B29 폭격기 승무원 8명을 규슈대 의대로 비밀리에 끌고 가 산 채로 해부한 것이다. 규슈대 의료진은 산 채로 미군 포로들의 폐를 적출하거나 혈관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식으로 생체 실험을 했다. 미군은 모두 죽었다

전범 재판에 회부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실험 자료 미군에 넘겨

▲ 하얼빈에 있던 731부대 생화학실험 시설 터 (출처 위키피디아)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일·소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만주 지역으로 남하했다. 이시이는 소련군이 731부대를 송두리째 접수할 것을 우려해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까지 6일 동안 죽음의 공장을 파괴했다. 수백 명의 마루타는 독가스로 살해한 후 불을 지르거나 마대에 담아 송화강에 버렸다.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나서도 한동안 송화강 부근에는 세균이 퍼졌고 인근 주민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다.
이시이는 부대원들에게 비밀 엄수를 지시한 뒤 군용기를 타고 대련을 거쳐 일본으로 도주했다. 다량의 물품과 장비, 세균전 자료 등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가져가 극비 장소에 보관했다. 가장 중요한 문서들은 자신의 집에 숨겼다. 지인들에게는 자신의 부고 기사를 신문에 내도록 해 죽은 것으로 꾸몄다. 하지만 미군 사령부에 의해 곧 소재지가 파악되어 조사를 피하진 못했다.
미군 조사관은 이시이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소련으로 넘기겠다”고 협박해 진술을 받아냈다. 이시이는 자신과 동료들이 전범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자유를 보장받는다는 조건으로 자신과 동료들이 알고 있는 사실과 자료를 미군에 넘겼다. 맥아더 사령관은 전범재판이 한창이던 1947년 5월 “생체 실험, 세균병기 정보를 얻기 위해 면책이 필요하다”고 워싱턴에 요구했다. 이시이는 형식적으로 마련된 도쿄 국제군사법정에서 “마루타는 총 3,850명이었고 이 가운데 중국인은 3,034명, 러시아인은 562명, 한국인은 254명”이라고 밝혔다. 미군 사령부는 1947년 12월 생체 실험과 표본 자료를 근거로 작성한 보고서를 완성했다. 그리고 1948년 4월 “모든 정보를 얻었다. 결과는 만족스럽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소련은 세균전 무기를 사용하려 했다는 혐의로 1949년 12월 12명의 일본군을 기소했다. 마지막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대장을 비롯해 군의부장, 731부대 지부장 등 12명 중 장교에게는 12~25년 형을, 일반 병사에게는 2~3년의 형을 선고했다. 이들 역시 세균전 정보를 소련에 제공한 대가로 감형되어 1956년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시이는 은둔 생활을 하며 67세까지 살다가 1959년 10월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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