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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0.03.07  12:5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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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세 번째 연임

문화체육관광부가 강수진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에 또다시 임명함으로써 강수진은 2014년 처음 임명된 후 세 번째 예술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임기는 2023년 2월까지다.

‘풍부한 표현력’, ‘화려하고도 섬세한 테크닉’,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 등등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1967~ )을 묘사할 때 흔히 쓰는 수식어들이다. ‘포기는 없다’, ‘그래도 할 수 있다’, ‘내 인생에 변명은 없다’ 등은 강수진이 마음 속으로 외치는 인생의 구호이자 주문이기도 하다.
강수진은 초등학생 때 리틀엔젤스에서 한국무용을 하다가 선화예중 1학년 때 발레를 시작했다. 발레를 늦게 시작한 탓에 180도로 벌어지지 않는 다리를 찢기 위해 잠들 때도 토슈즈를 신고 다리를 벌려 벽에 붙이고 잤다. 아침에 눈을 뜨면 혼자 힘으로 다리를 오므릴 수 없어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선화예고 1학년이던 1981년 3월 발레에 재능이 있는 보석들을 발굴하러 방한한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교장 마리카 베소브라소바의 눈에 띈 것은 이런 후천적인 노력에 타고난 재능이 더해진 결과였다. 마리카는 강수진의 아버지에게 “10만 명 중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발레리나”라고 치켜세우며 유학을 권유했다. 사실 당시의 강수진은 발레를 늦게 배워 테크닉이 뛰어나거나 기본기를 탄탄히 갖춘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리카 교장이 강수진을 눈여겨본 것은 감수성과 표현력 때문이었다.
강수진에게는 예술가의 피가 흘렀다. 외할아버지는 ‘한국의 로트레크’라 불리며 1930~1940년대에 활약한 구본웅 화백이고 언니는 훗날 서울대 음대와 네덜란드 왕립음악원을 졸업하게 될 하피스트, 동생은 서울대 음대와 슈투트가르트 국립음대 석사를 거쳐 프랑크푸르트 국립음대에서 최고 연주가 과정을 마친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아무도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누가 ‘아무도’이고 싶겠는가?”

강수진은 1982년 홀로 모나코로 건너가 왕립발레학교에 입학했다. 8년간의 교육과정을 마쳐야 수료할 수 있는 학교에서 강수진은 모진 연습의 고통과 외로움을 이겨내고 오로지 발레에만 정진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 1985년 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 최고 권위의 주니어대회인 로잔 국제발레콩쿠르에서 대상 없는 4명의 1등 입상자 중 한 명으로 뽑혀 실력을 인정받았다. 동양인의 1등 수상은 강수진이 처음이었다.
강수진은 1985년 11월 세계 5대 발레단 가운데 하나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공개 오디션에 합격하고 1986년 9월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이자 최연소(19세)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했다.
강수진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입단은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밑바닥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동양인이 발레를 하는 것을 매우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양인이 아무리 춤을 잘 춘다고 하더라도 단지 자신들을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강수진은 2년 동안 군무(群舞)에조차 끼지 못했다. 강수진으로서는 이겨내기 힘든 현실이었다. 여기에 언어, 음식, 인간관계가 익숙지 않고 발목 부상도 잦아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러나 강수진은 오히려 맹연습에 돌입했다. 그 결과 1987년 ‘잠자는 숲속의 공주’ 요정 역으로 데뷔했다. 그래도 군무 생활은 계속되었다.
강수진은 남들이 2~3주에 한 번 바꿔 신는 토슈즈를 하루에 네 켤레나 갈아 신은 때가 있을 정도로 매일 18시간의 피나는 연습에 몰입했다. 막대 같은 토슈즈에 발톱이 짓눌려 빠져나가는 고통을 참으면 참을수록 실력은 조금씩 나아졌다. 더구나 강수진에게는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서양 문화와 결합된 동양의 신비였다.

‘강수진 신드롬’, ‘황색 돌풍’ 일으키며 관객 사로잡아

▲ 강수진이 2015년 11월 국내 고별무대인 ‘오네긴’에서 공연하는 모습 (출처 크레디아)

무명 생활을 하던 강수진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 것은 군무로 활동하고 7년이 지나서였다. 1993년 1월 29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에서 줄리엣 역을 맡아 마침내 주역 무용수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1,400여 명의 관객은 줄리엣 역을 맡은 동양인 여성 무용수의 동작 하나하나에 숨을 죽였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은 20회의 커튼콜과 기립박수로 세계 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한 강수진을 축하해 주었다.
강수진은 이후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외모, 타고난 열정과 음악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강수진 신드롬’과 ‘황색 돌풍’을 일으키며 관객을 사로잡았다. 1997년에는 수석 무용수로 승격하고 1999년 5월에는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우수 여성무용가상을 수상했다.
2002년에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종신단원이 되고 2007년에는 독일의 궁정무용수를 뜻하는 캄머탠처린 작위를 받았다. 창단 이래 51년 동안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거쳐 간 수많은 무용수 중에 단 3명만이 작위를 받았을 만큼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작위다. 강수진은 동양인 최초로 그것도 10년 만에 탄생한 캄머탠처린으로 선정되어 한동안 독일 언론에 오르내렸다.
2007년 7월에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강수진의 입단 20년을 축하하기 위해 ‘로미오와 줄리엣’을 강수진에게 헌정했다. 세계 정상급 발레단이 현역 무용가에게 헌정 공연을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2013년에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발레단의 예술감독이 오직 강수진만을 염두에 두고 세계 최초로 만든 발레곡 ‘나비부인’의 초연 무대에 출연, 14회 공연 전석이 매진될 정도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강수진은 2014년 3월 우리나라 국립발레단의 단장으로 취임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원으로 고별 무대는 2016년 7월 22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려진 ‘오네긴’이었다. 그날 공연이 끝나고 수차례의 커튼콜 끝에 강수진 혼자 무대에 남게 되자 1,400여 명의 관객들은 일제히 종이를 무대를 향해 펼쳤다. 오페라극장은 순식간에 붉은색 하트와 ‘DANKE SUE JIN(고마워요 수진)’ 글자로 뒤덮였다. 단원들과 스태프는 차례로 장미꽃을 강수진에게 건넸다. 기립한 관객들은 20분이 넘게 강수진의 이름과 브라보를 외치며 그를 떠나보내지 않았다. 강수진은 이 공연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국내 발레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3월 5일과 4월 1일 각각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 현존하는 한국 신문 중 전국지로는 가장 오래 되었다.

1919년의 3·1 운동 후 일제의 무단정치가 잠시 뒷자리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사이토 마코토 신임 총독이 1919년 9월 3일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4개항의 훈시를 발표하면서였다. 본질과 노림수에 있어서는 무단정치와 별반 차이가 없었으나 형식상으로는 일부 변화가 있었다. 종전의 헌병 경찰 제도를 보통 경찰로 바꾸고 조선인의 관리 임용과 처우를 개선했으며 교육기관의 설립 요건을 완화했다. 금지해온 민간지의 발행도 허용했다.
그동안 일제는 1907년 7월 공포한 ‘광무신문지법’을 전가의 보도로 삼아 신규 신문 발행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왔다. 이 때문에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만이 발행되었을 뿐 순수 민간지는 없었다. 일제가 민간지 창간을 허용한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전국 곳곳에서 신문 발행 신청이 쇄도했다. 이 가운데 총독부가 발행을 허가한 곳은 지방신문 10여 종과 서울의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 세 신문이었다.
서울의 3개 민간지 가운데 가장 먼저 창간호를 발행한 곳은 조선일보였다. 1920년 3월 5일 선보인 조선일보의 발기인은 양정의숙 설립자 엄주익,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변호사 유문환 등 실업인, 금융인, 변호사, 의사 등 39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대정실업친목회와 관계된 인사는 11명이었는데 대정실업친목회는 일본인 유력자와 조선인 부호들이 만든 민간 사교 친목단체였다.
조선일보는 3·1 운동 1주년이 되는 3월 1일 창간호를 발행할 계획이었으나 조선총독부가 “조선 민중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며 반려해 연기되었다. 창간 작업에 참여한 60여 명은 당시 경성부 관철동 249번지에서 창간 준비에 혼신의 힘을 다해 마침내 데드라인인 3월 5일에 창간호를 낼 수 있었다.

문화정치 표방 후 가장 먼저 창간호를 발행한 곳은 조선일보

석간으로 발행된 창간호는 지금의 신문과 같은 크기로 16면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3월 5일자 창간호와 3월 7일자 2호는 발견되지 않고 3월 9일자 3호만이 전해지고 있다. 2010년 창간호 3·4면과 13·14면이 발견되긴 했으나 1면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조선일보는 재정난으로 창간호부터 3호까지 격일로 발행한 뒤 휴간에 들어갔다가 4호를 53일 만인 4월 28일 발행했다. 1921년 4월 6일 창간을 1년 갓 넘긴 상태에서 또다시 고질적인 자금난에 봉착, 휴간에 들어갔다. 총독부는 매국노 송병준을 앞세워 재정난에 빠진 조선일보 인수 공작을 펼쳤다. 송병준은 4월 8일 조선일보 판권을 인수했으나 반일적인 편집국 분위기를 의식해 자신이 사장에 취임하지는 않고 황성신문 사장 등을 역임하고 반일 투사로 이름을 날렸던 남궁훈을 3대 사장으로 영입했다.
송병준은 노쇠한 남궁훈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실질적인 경영은 자신의 아들 송종헌에게, 편집은 매일신보 출신인 친일 언론인 선우일에게 맡긴다는 구상을 했으나 기자들의 항일 기개를 꺾지 못하고 심각한 경영난도 이기지 못해 인수 3년 만인 1924년 9월 13일 독립운동가 신석우에게 회사 판권을 넘겼다. 신석우는 상해임시정부 교통총장을 지내고 ‘대한’이라는 국호를 처음 제안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점에서 1924년은 소유 구조로나 기사 내용으로나 조선일보가 새로 탄생한 출발점이었다.
신석우는 당시 우리 민족의 사표로 추앙받고 있는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에 취임하는 등 경영진의 면모를 일신했다. 또한 동아일보의 창간 주역이자 ‘신문의 귀재’로 불리던 이상협을 편집고문으로 초빙하고 안재홍을 주필로 포진시키는 등 편집진도 새롭게 정비했다. 그러나 신석우도 재정난을 어쩌지 못해 1931년 5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안재홍과 조만식이 과도기 사장으로 있으면서 차기 소유주로 주목한 인물이 ‘광산왕’ 방응모였다. 방응모는 갖고 있는 광산을 모두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1933년 3월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방응모는 국내 언론사상 첫 혁신호 100만 부(12면)를 1933년 4월 26일자로 발행하며 조선일보의 부흥을 전국에 알렸다. 그리고 이광수와 서춘을 동아일보에서 스카우트해 각각 부사장과 주필로 기용하는 등 새 진용을 짠 뒤 1933년 7월 19일 조선일보 제9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조선일보는 면모를 일신하고 성장의 질주를 시작했다.

첫 압수 신문은 동아일보의 지령 13호

동아일보 창간은 김성수가 주도했다. 총독부가 민간지 발행을 허용하자 평양매일신문의 한글판 주간을 지낸 장덕준, 매일신문의 편집장을 지내다 사표를 낸 이상협, 아사히신문 기자를 지낸 진학문 등이 김성수를 찾아가 민족 신문 창간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당시 중앙학교 교장이던 최두선도 “애국 진영, 민족 진영에서 (민간신문을) 하나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황성신문 사장을 지낸 신문계의 원로 유근도 합류했다.
김성수는 1919년 10월 9일 이상협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내세워 신문 발행 신청서를 제출한 뒤 서울 북촌의 화동에 위치한 구중앙학교 교사를 빌려 ‘동아일보 창립사무소’ 현판을 내걸었다. 김성수는 ‘민족의 자긍심을 북돋는 독립운동’임을 강조하며 전국의 유지들을 설득했고 전국에서 78명이 주식을 인수했다. 1월 14일 동아일보 발기인 총회를 열어 사장에 박영효, 편집감독에 유근·양기탁 등 주요 인선을 결정했다.
창간 주역들은 당초 3·1 운동 1주년인 3월 1일자로 첫 호를 낼 예정이었으나 당초 목표했던 자본금이 채워지지 않아 결국 창간 마감일인 3월 5일을 넘기고 말았다. 발행 연기 신청서를 다시 내 1920년 4월 1일 창간호를 발행했다. 타블로이드 배대판인 전지판 8쪽이었다. 이후 7년 동안 구중앙학교 교사에서 신문을 발간하다가 1926년 광화문의 신축 건물로 사옥을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제, 논조 눈에 거슬리면 사사건건 탄압 가해

▲ 조선일보 제3호 1면

총독부는 조선일보·동아일보에 신문 발간을 허락하고서도 곳곳에 촘촘한 그물망을 쳐놓아 행여라도 논조가 눈에 거슬리면 사사건건 탄압을 가했다. 탄압에는 다양한 수단이 동원되었다. 신문 발행 전에는 간담, 주의, 경고 등으로 주눅 들게 하고 신문 발행 후에는 삭제, 압수, 정간, 폐간 등으로 옭아맸다. 두 신문이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압수당한 기사건수만 조선일보 471건, 동아일보 437건에 달했다.
첫 압수 신문은 동아일보의 지령 13호였다. 1920년 4월 15일자 ‘평양에서 만세 소요’라는 제목으로 평양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를 상세히 전했다가 창간 2주 만에 배포 금지 처분을 받은 것이다. 조선일보는 4월 28일자 제4호에 실린 ‘어약혼 있었던 민낭자, 지금부터의 각오’라는 기사로 첫 압수 처분을 받았다.
1회성에 그친 압수보다 더 강한 언론 탄압책이 정간이다. 먼저 정간을 당한 것은 조선일보였다. 1920년 8월 27일자에 실린 ‘자연의 화(化)’라는 사설로 민간신문 최초의 정간을 당한 것이다. 1차 정간은 1주일 만인 9월 3일 풀렸으나 조선일보는 사흘 후 9월 5일자 제116호에서 ‘우열(愚劣)한 총독부 당국은 하고(何故)로 우리 일보(日報)를 정간시켰나뇨’라는 사설로 또 정간을 당했다. 1차 정간을 정면으로 비판한 탓에 이번에는 무기정간이었다. 정간은 1920년 11월 24일 해제되었으나 조선일보는 경영난으로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다가 12월 2일 겨우 속간호를 냈다.
1925년 9월 8일자 ‘조선과 露國(러시아)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이 또다시 문제가 되어 일어난 3차 정간 때는 기자가 구속되고 윤전기가 압수되는 등 피해가 컸다. 박헌영 등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언론인 17명도 이 사건으로 해직되었다.
동아일보는 1920년 9월 25일자 ‘제사(祭祀) 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제목의 사설로 1차 무기정간을 당했다. 총독부는 이 사설이 일본 황실의 상징인 거울, 곡옥, 칼 등 3종의 신기(神器)를 비판했다는 트집을 잡았다. 일제는 두 신문사 폐간 때까지 20년 동안 조선일보·동아일보에 각각 4차례 정간 조치를 내렸다. 기간으로는 동아일보가 569일, 조선일보가 240일이었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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