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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0.05.07  00: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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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황제’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의 다큐멘터리가 인기라는데

스포츠가 사라진 ‘코로나 시대’에 팬들은 옛 스타들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나 추억의 명승부 등을 꺼내 보며 갈증을 달래고 있다. 이런 시기에 ‘가뭄에 단비’ 같은 작품이 찾아왔다. 미국 스포츠 전문 채널 ESPN이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The Last Dance)’를 공개한 것이다. 반응은 폭발적이다.

농구 역사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굵은 발자취 남겨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던 마이클 조던(1963~ )이 농구로 방향을 튼 것은 고교 2학년 때였다. 고교를 졸업할 무렵 조던은 ‘좀 잘하는’ 농구 선수였을 뿐 전미 고교 유망주 300위 내에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조던의 잠재력을 알아챈 노스캐롤라이나대 농구 감독이 그를 스카우트하면서 조던의 농구 인생은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대학에서 조던의 농구 기량은 일취월장했다. 조던의 현란한 드리블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한 심판들이 수없이 트래블링 반칙을 선언할 정도로 발놀림이 빨랐다. 심판들의 오심은 대학 측이 심판들에게 조던의 동작을 슬로비디오로 보여주고서야 잠잠해졌다.
조던은 1984년 6월에 실시된 미 프로농구(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하킴 올라주원, 샘 보위에 이어 3번째로 지명되어 시카고 불스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에 평균 28.2점을 득점하는 놀라운 기량을 보이며 그해 신인왕 타이틀을 차지함으로써 곧 다가올 ‘조던의 시대’를 예고했다.
조던은 1986년 4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63점을 넣어 플레이오프 최다 득점 신기록을 세웠다. 1986년 3월부터 2001년 12월까지는 무려 866경기 연속으로 두 자릿수 득점 행진을 펼쳤다. 1986~1987년 시즌에서 평균 37.1점이란 가공할 득점력으로 첫 NBA 득점왕 타이틀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1988~1989년 시즌까지 3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혼자서 팀을 우승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989년 필 잭슨이 지휘봉을 잡고 스코티 피펜과의 환상적인 조합이 무르익으면서 1991년 마이클 조던은 또다시 득점왕에 오르고 시카고 불스는 처음 NBA 정상에 등극했다. 이후 1993년까지 조던은 3연속 득점왕을 차지하고 불스 역시 3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미 NBA 무대를 평정했다. 그러나 ‘농구 황제’라는 찬사에 시샘이 난 듯 운명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거액의 골프 도박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그동안 출중한 실력과 모범적인 사생활에 감동했던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조던의 공개 사과로 잠잠해질 무렵이던 1993년 7월 23일에는 아버지가 강도에게 살해되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조던은 이때의 충격으로 1993년 10월 6일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승부욕을 어쩌지 못해 1994년 3월 31일 농구 선수가 아닌 야구 선수로 경기장에 나왔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마이너리그에서 뛰었으나 역시 야구는 그의 본업이 아니었다. 0.202의 낮은 타율에 실망한 조던은 1995년 3월 18일 “내가 돌아왔다(I‘m Back)”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전격 복귀 선언을 했다. 1995년 3월 19일 복귀 첫 경기에서 조던은 19점 득점에 그치고 팀은 패했지만 그것은 17개월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워밍업일 따름이었다. 3월 28일 경기에서 조던은 무려 55 득점을 쏟아부으며 전성기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누가 뭐래도 1990년대는 마이클 조던의 시대

▲ 마이클 조던

그동안 하락세를 면치 못하던 시카고 불스는 조던 복귀 이듬해인 1996년 72승 10패라는 역대 NBA 시즌 최다승을 기록하며 옛 명성을 이어갔다. 시카고 불스는 1997년과 1998년 또다시 3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는 기쁨을 누렸으나 조던은 1999년 1월 13일 두 번째 은퇴를 발표했다. 이듬해 1월 조던은 선수가 아닌 워싱턴 위저즈의 공동 구단주가 되어 나타났지만 또다시 농구에 대한 열정을 어쩌지 못해 2001년 9월 25일부터 다시 위저즈의 선수로 뛰었다. 2003년 4월 16일 조던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은퇴함으로써 ‘농구 황제’는 ‘농구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조던은 농구 역사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굵은 발자취를 남겼다. 시카고 불스를 6차례나 NBA 챔피언으로 끌어올리고 개인 통산 득점왕 10차례, 플레이오프 MVP 6차례, 정규 시즌 MVP 5차례, 올스타 14번 출장, 올스타전 MVP 3차례, 스틸왕 3차례에 오르는 등 공수 양면에서 농구 선수가 할 수 있는 각종 기록을 갈아치웠다.
15시즌 통산 경기당 평균득점도 역대 최고인 30.12점이나 되었고 통산 득점은 카림 압둘 자바(3만 8,387점), 칼 멀론(3만 6,928점)에 이어 3위(3만 2,292점)를 기록했다. 그러나 3위 기록은 2014년 12월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와 2019년 3월 르브론 제임스에 의해 추월당함으로써 5위로 밀려났다. 2020년 5월 현재 3위 기록은 제임스가, 4위 기록은 브라이언트가 갖고 있다. 브라이언트는 2020년 1월 헬기 추락사로 3만 3,643점에 멈춰있고 현역인 제임스의 기록은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조던은 올림픽과도 인연이 있어 대학 때는 LA 올림픽(1984), 프로 때는 바르셀로나 올림픽(1992)에 출전해 두 차례 모두 미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압둘 자바, 윌트 체임벌린 등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AP가 선정한 ‘20세기 최고’로 꼽힐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조던만의 화려한 플레이 때문이었다.
조던이 현란한 드리블, 폭발적인 슬램덩크,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도 슛, 엄청나게 긴 체공 시간 등으로 종횡무진할 때마다 농구 팬들은 탄성을 쏟아냈다. 큰 키로 골밑을 제압하는 센터들이 코트를 지배하던 시대에 보통키(198cm)의 조던이 보여준 것은 인간의 동작이 아니라 신의 동작이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농구의 신’이었다.
NBA가 미국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지구촌 스포츠로 격상할 수 있었던 것도 조던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포츠 산업에 끼친 ‘조던 효과’도 엄청났다. 조던이 입단할 때 2,000만 달러이던 불스 구단의 값은 조던이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던 1999년 2억 달러로 치솟았다. 나이키 등 조던과 광고 계약을 맺은 기업들도 ‘조던 특수’에 엄청난 돈을 벌었다. 누가 뭐래도 1990년대는 마이클 조던의 시대였다.


■100년 전,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이 국내 여성 최초로 산부인과·소아과 전문 병원 개원하다

국내 여성 최초로 병원을 개원한 의사로, 병든 남편을 지키는 아내로, 네 아이의 어머니로, 일제하 여기자로 다중의 삶을 산 신여성이 있다. 분야마다 그보다 뛰어난 여성이 더러 있긴 했지만 이 넷이 중첩되는 영역에서는 독보적이었다. 그의 이름은 허영숙(1897~1975)이다. ‘대문호’ 이광수의 아내라서 세간의 주목을 더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광수의 그늘에 묻혀 있기에는 그가 남긴 궤적이 굵고 선명했다.

이광수에게 허영숙은 아내·누이·어머니

허영숙은 서울에서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나 진명보통학교(1911)와 경기여고의 전신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1914)를 졸업했다. 1914년 4월에는 일본의 도쿄여자의과전문학교(도쿄여의전)에 입학했는데 의학을 전공하기 위해 해외로 유학한 여성으로는 김점동에 이어 두 번째였고 일본 유학은 최초였다.
허영숙이 유학을 떠난 1914년 국내에서는 조선총독부 의원양성소(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에서도 청강생 제도를 신설해 안수경·김해지·김영홍 3명의 여학생을 입학시켰다. 이들 3명은 1918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과 동시에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는 김점동이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그를 남편 박씨 성을 따라 박에스더라 불렀다. 그는 자신이 통역해주던 미국인 여의사 로제타 홀의 의술을 지켜보면서 여의사를 꿈꾸다가 1895년 로제타가 미국으로 귀국할 때 남편 박유산과 함께 따라가 미국에서 공부했다.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귀국해 선교병원에서 환자를 돌보았으나 폐결핵에 걸려 1910년 33세의 짧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이영숙이 이광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이광수가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무정’(1917년 1월 1일~6월 14일)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고 유명인사로 떠오른 1917년 3월이었다. 당시 허영숙은 도쿄여자의과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이광수가 폐병으로 각혈까지 하던 중 허영숙의 헌신적인 간호를 받고 위기를 넘기면서 둘 간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도쿄에서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갔으나 허영숙이 1918년 7월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이광수도 곧 귀국, 1918년 9월 첫 부인과 이혼하고 다음 달 허영숙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허영숙의 부모는 이혼 경력에 4살 된 아들까지 있는 이광수와의 결혼을 적극 반대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1918년 10월 허영숙이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한 뒤 북경으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 조선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허영숙과 결혼하자 이광수에게 온갖 억측과 비난 쏟아져

당시 국내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3명의 여성이 이미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허영숙은 중국에서 돌아와 1년간 임상 수련을 거친 뒤 자기 집을 개조해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개원한 조선 최초의 병원을 1920년 5월 1일 개원했다. 병원 이름은 허영숙에서 ‘영’을, 광혜원에서 ‘혜’를 따 ‘영혜의원’이라 지었다.
허영숙은 이광수가 상해에서 독립운동 관련 일에 매진하고 있던 1921년 2월 상해로 가 이광수에게 함께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상해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큰 파문이 일어났다. 임시정부가 “허영숙은 일제 앞잡이”라며 체포령을 내리고 안창호도 이광수의 귀국을 만류했으나 이광수는 1921년 2월 먼저 허영숙을 돌려 보내고 3월 말 홀로 귀국하다가 중국 심양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런데도 재판도 받지 않고 불기소 석방되어 독립운동가들의 의심을 샀다. 소설가 박종화는 일기에서 총독부의 신변 보장을 언질 받은 허영숙의 설득 때문에 이광수가 귀순했다고 썼다.
이광수가 1921년 5월 허영숙과 결혼하자 이광수에 대한 억측과 비난이 빗발치듯 일어났다. 이광수는 묵묵히 집안에 들어앉아 병을 치료하며 그 유명한 ‘민족개조론’을 집필했다. 1922년 2월에는 흥사단의 국내 지부격인 수양동맹회(1926년 1월 수양동우회로 개칭)를 결성, 궁극적으로 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 부르주아 민족운동을 펼쳤다.
허영숙은 더 수준 높은 의학 공부를 하겠다며 1922년 3월 다시 도쿄로 떠났다가 도쿄제국대 입학이 여의치 않자 4개월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폐결핵으로 동아일보 기자 일을 할 수 없게 된 이광수를 대신해 1924년 말 동아일보의 부인 기자로 입사했다. 전공을 살려 가정 위생과 건강관리에 관한 글을 써 1925년 12월에는 학예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다가 첫아들 봉근을 임신하자 1927년 3월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이광수에게는 전 부인이 낳은 아들이 있었지만 허영숙에게는 첫아들이었다. 2년 후 영근, 다시 4년 후 정란, 다시 2년 후 정화가 태어났다.
그러던 중 1934년 2월 장남 봉근이 패혈증으로 숨져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되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허영숙은 1935년 11월 병든 남편과 자식 셋을 서울에 남겨두고 선진 의학을 배우기 위해 홀로 도쿄로 건너갔다. 의학에서 손을 놓은 지 15년이나 지나고 새로 공부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을 37살 때였다.

이광수의 소설 ‘사랑’은 허영숙의 헌신적 사랑에 대한 헌정 소설

▲ 1928년 무렵의 이광수와 허영숙. 아이는 첫아들 봉근이다.

허영숙이 구상한 병원은 해산을 전문으로 하는 산원이었다. 처음에는 일본의 적십자병원 산원 연구생으로 들어갔다가 3년 예정의 조수로 채용되었다. 그러자 마음을 굳게 먹고 서울의 아이들을 도쿄로 불러들였다. 아이들을 곁에 두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며 박사 논문을 준비했으나 1937년 6월 이광수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자 공부를 중단하고 1년 반 만에 귀국했다. 그리고 1938년 6월 서울 효자동에 국내 최초의 산원인 ‘허영숙 산원’을 개원했다.
어머니로, 기자로, 의사로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면서도 이광수에 대한 그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 이광수에게 허영숙은 아내이자 누이였고 어머니였다. 1938년 이광수가 발표한 소설 ‘사랑’은 허영숙의 헌신적 사랑에 대해 이광수가 바치는 헌정 소설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 사랑과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이광수는 문인이었고 허영숙은 의사였다. 따라서 한쪽이 감성적 인간이라면 한쪽은 이성적 인간이었다. 허영숙은 생활력이 ‘빵점’이고 무욕의 삶을 사는 남편을 향해 “세상 살아갈 줄 모른다”며 바가지를 긁어댔다. 그러면서도 폐병에 걸린 이광수의 주치의이자 간병인이었고, 후견인이자 매니저였다.
허영숙·이광수 부부는 1944년 3월 경기 양주군 사릉리로 이사해 살다가 해방을 그곳에서 맞았다. 해방 후 이광수가 반민특위에 회부될 때는 가정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남편과 합의이혼하는 끈질긴 생활인의 모습을 보였다. 이광수의 납북으로 생이별을 한 뒤에는 세 자녀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 각각 물리학 박사, 영문학자, 생화학자로 키워냈다. 자신은 홀로 서울에 남아 출판사를 운영하며 1963년 남편의 원고를 모두 모아 ‘춘원전집’을 완간하고 말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75년 세상을 떠났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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