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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데뷔 50주년 맞는 남성4중창단 쟈니브라더스

기사승인 2013.04.04  13: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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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적 매력이 한껏 돋보이던 남성 4중창단 쟈니브라더스가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는다. 우리나라 최장(最長), 최고령(最高嶺)의 보컬 팀이다."원년 멤버 그대로 다시 모여 무대에서 열심히 땀 흘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이들의 평균연령은 73세. 이는 세계에서도 찾기 쉽지 않다. 우리나라 최장(最長) 최고령 보컬 팀으로 김현진(리드·76), 양영일(테너·73), 김준(본명 김산현·바리톤·72), 진성만(베이스·72)이 그 주인공들. 여전히 ‘빨간 머플러’가 썩 잘 어울릴 듯한 외모, 전성기 때 못지않은 ‘박력’에 ‘깊이’까지 갖춘 이들의 정겨운 화음은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젊음의 상징에서 실버세대들의 꿈을 전한다

   
▲ 35년만에 재결합한 남성4중창단 쟈니브라더스의 멤버들. 좌로부터 김준, 김현진, 진성만, 양영일씨.
남성적 매력이 한껏 돋보이던 남성 4중창단 쟈니브라더스가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우리나라 최장(最長), 최고령(最高嶺)의 보컬팀인 셈.
"원년 멤버가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모여 무대에서 열심히 땀 흘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이들의 평균연령은 73세. 이는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쉽지 않을 듯하다. 우리나라 최장(最長) 최고령 보컬 팀으로 김현진(리드·76), 양영일(테너·73), 김준(본명 김산현·바리톤·72), 진성만(베이스·72)이 그 주인공들. 평상시에는 각자 점잖은 의상의 노신사들이지만 무대의상만큼은 반드시 밝고 화려한 색상으로 통일한다. 코디는 데뷔시절부터 의상, 액세서리를 담당해온 김준씨가 여전히 도맡고 있다. 여전히 ‘빨간 머플러’가 썩 잘 어울릴 듯한 외모, 전성기 때 못지않은 ‘박력’에 ‘깊이’까지 갖춘 이들의 정겨운 화음은 세월을 뛰어넘어 특히 중장년층들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것이다.

예그린합창단원으로 출발, 해체 후 쟈니브라더스 결성
이들의 첫 결성 당시 상황은 어떠했을까, 데뷔 후 쉬지 않고 현재까지도 계속 음악활동을 해오고 있는 멤버 김준씨를 먼저 찾아보았다.‘Old is New'라는 문구와 함께 ‘시작은 그 끝과의 약속이다.’라는 어귀가 먼저 눈에 띄는 남양주에 위치한 ‘김준 재즈클럽‘. 이 곳에는 ’재즈계의 신사‘라 불리는 김준씨가 늘 삽화처럼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고 있다.
“재즈는 여백이 많은 음악입니다. 불협화음을 화음화하는 데 묘미가 있지요. 악보에 없는 음을 표현하는  즉흥적인 호흡이 생명입니다.”
재즈는 연습을 게을리 하면 그걸로 끝장이라고 말하는 김준씨. 때문에 그는 활발한 공연과 더불어 매년 한두 장 이상의 음반을 꾸준히 발표해오고 있다.
‘하루 연습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 안 하면 남이 알고, 사흘 안 하면 무대에서 떠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재즈에 몰두하는 김준 클럽에는 필자가 시간 날 때마다 드나들었지만 불과 두세 번 정도를 빼면 손님이 단 한명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스스로 강조하듯 ‘돈 안 되는 일’에 매달려 온지 40여 년째다.
1960년 경희대 음대 장학생으로 입학했던 김준. 대학생활이 시작되자마자 4.19를 맞아 잦은 휴강과 함께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갈 곳이 없었던 그는 종로2가  ‘뉴월드’음악감상실 DJ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함과 동시에 당시 50인조로 구성된 교회 성가대 ‘시온성가단(단장 이동일)’의 일원이 된다. 아울러 이 무렵 당시 4인조 쿼텟 ‘멜로톤‘의 멤버 한 명이 입대해 결원이 생기자, 대타로 참여해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1961년 5월16일, 라디오에서 새벽을 가르는 군가연주와 ‘혁명공약’을 낭독하는 아나운서의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학교는 4.19에 이어 다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교 정문 앞에는 엄청난 포신을 자랑하듯 탱크가 버티고 있었고 이른바 ‘혁명군’들이 10m 간격으로 서서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그리고 2학기 수강신청을 끝내고 정상수업이 시작되던 어느 날, 그는 한 방문객과 마주친다. 그리고 이내 지프차에 실려 미아리고개에 있는 군부대 막사로 이송된다. 그 곳엔 이미 예닐곱 명이 먼저 와서 초조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 중 한명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예술 중흥을 위해 엄격한 자격심사를 거쳐 새로 창단하는 ’예그린가무단‘의 합창단원으로 입회시키겠다’고 했다. 사실상 일방적인 통고에 가까웠던 이 예그린의 단장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혁명 주체 세력’ 김종필씨였다.

   
 
‘단복은 계절에 따라 무상 제공’ ‘출연료 파격 대우’ ‘향후 무대 활동 보장’ 등이 그들이 내건 조건이었다. 이 예그린합창단의 월급은 당시 돈으로 무려 ‘오천원’ 정도였기 때문에 기성가수나 교직에 몸담은 실력자들까지 앞 다투어 응시, 경쟁이 치열했던 터라 그로썬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된 예그린, 그는 창작 뮤지컬 ‘한 여름 밤의 꿈’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등 활동을 시작했으나 1년 후 예그린은 해산되고 만다. 때문에 합창단 중 막내이자 가장 ‘끼’가 많았던 동갑내기들, 즉 김준, 양영일, 장호성, 진성만은 4중창단을 결성한다. 아울러 이들은 당시 mbc 톱싱거 경연대회, 동아방송 연말 중창단경연대회 등을 잇달아 휩쓸며 무서운 신예로 급부상했다. 예그린은 당시 악보 보는 것을 시작으로 연기, 춤까지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를 요구했던 만큼 이들 네 명의 실력은 이미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면적이었던 TV 쇼를 입체적으로 바꾼 ‘버라이어티’의 주인공들

   
▲ 2007년, 35만에 원년 멤버 그대로 재결성 ‘돌아온 쟈니브라더스’
특히 춤과 연기 실력은 물론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어야만 활동이 가능했던 당시 ‘예그린악단’. 이 악단의 합창단원 출신답게 춤과 연기 실력으로 완전무장한 쟈니브라더스의 등장으로 당시 평면적이었던 TV 쇼가 놀랍도록 화려하고 입체적으로 변신했다. 그야말로 ‘버라이어티’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주인공인 셈이다. 아울러 당시 MC 후라이보이 곽규석과 꽁트까지 소화했던 ‘뿅망치의 원조’이기도 하다.
쇼 프로그램에서의 절대적인 인기 못지않게 이들은 ‘방앗간 집 둘째딸’ ‘아나 농부야’ ‘마포 사는 황부자’ 등에 이어 ‘빨간 마후라’ ‘수평선’까지 공전의 히트를 날리며 정상의 인기그룹으로 급부상했다. 당시 멤버는 김산현(김준)을 비롯해 김현진, 양영일, 진성만. 이들의 힘차고 경쾌한 하모니는 듣는 이들에게 '알파파'(※마음이 평온해질 때 나오는 뇌파)가 샘솟게 만드는 노래, 그 자체였다.
이들의 음악적 실력은 대표곡인 ‘빨간 마후라’ 취입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63년 초여름. 이 영화 제작사인 신필름 측은 작곡가 황문평씨에게 주제가 작곡을 의뢰해온다. 아울러 이 영화주제가는 파일럿들이 첫 출격할 때 불러야하는데 하필 오늘 OO기지 비행장을 빌려 촬영하는 날짜라 오늘 중으로 만들어 달라고 독촉을 해왔다.
가사를 받아 쥔 황문평씨는 노래 구상은 물론 동시에 노래를 불러줄 가수부터 찾아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급한 대로 당시 동아방송 강수향 음악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때 마침 방송국에 쟈니브라더스가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 황씨는 곧바로 악상의 뼈대를 잡고 방송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멜로디를 다듬었다.  주제가를 의뢰받은 뒤 불과 몇 시간 만에 작곡을 했고 두서너 번의 연습 끝에 ‘빨간 마후라’는 쟈니브라더스에 의해 취입된 것이다. 쟈니브라더스의 넷 모두는 악보만으로도 곧 바로 노래가 가능한 말하자면 ‘초견독보(初見讀譜)’의 실력자들이었다.
이렇게 급조된 ‘빨간 마후라’였지만 이제는 어느덧 대표적인 공군가로 자리했다. 또한 아시아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비롯, 상을 휩쓴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수출되면서 특히 대만에서도 이 노래가 대만 공군가로 불려지고 있는데 심지어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대만국민들은 이 노래가 자국의 군가로 알고 있을 정도다.

쇼쇼쇼’통해 ‘자니브라더스 고별쇼’, ‘메아리진’으로 개명

   
▲ MBC 제2회 톱싱거경연대회에 출연했던 당시의 쟈니브라더스, 1963년.
이들은 당시 꿈의 무대였던 워커힐에 전속되며 통행금지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마치 한 몸 인양 ‘사인일각(四人一脚)’을 이뤄 바쁘게 활동,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인기가 높아갈수록 멤버들은 되레 심각한 고민에 빠져든다. 음악적인 불만족에서 오는 갈증이었다. 4중창단은 4성, 즉 네 화음이 모여 노래가 구성되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유니 송’으로 불러달라는 주문까지 받아야 했던 만큼 중창단이라는 의미가 무색하던 시절이었다. 중창단의 인기에 비례해 본인만의 개성은 죽여야 하는, 이른바 개개인의 능력을 제대로 드러내 보일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차 이들은 각자 솔리스트로써의 기량을 쌓아나가며 해체 수순을 밟기 시작한다.
“한사람, 한사람만으로도 무대가 꽉 차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쟈니브라더스는 TV와 워커힐 무대 등에서 화려한 스테이지와 함께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면서도 쇼 중간 중간 쉬는 시간을 이용해 각자 솔리스트로서의 기량을 키우기 위해 경쟁적으로 각자 연습무대에 나섰던 장면들이 생각납니다.”
당시 워커힐악단에서 키타리스트로 활동하며 ‘저녁한때 목장풍경’ ‘비둘기집’ 등의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던 김기웅씨의 회고다. 그는 당시 이들의 레퍼토리 편곡을 기꺼이 도맡아 주기도 했다.
 결국 68년 8월, 그룹보다 각자 솔로로 활동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린 이들은 마침내 TBC-TV ‘쇼쇼쇼’를 통해 ‘자니브라더스 고별쇼’를 갖는다. 솔리스트로의 변신을 위해 피아노 독주부터 빅밴드 곡에 이르기까지 1백여 곡을 준비해오며 ‘스타일리스트(Stylist)'를 꿈꾸던 김준씨가 멤버 중 가장 먼저 독립, 솔로활동을 시작한다. 69년 11월, 평소 즐겨 부르던 레퍼토리들을 모아 독집음반 ’김준과 톱송(Top Song)'을 발표한 것. 스탠더드 팝과 재즈의 번안곡이 주를 이룬 이 음반의 수록 곡들은 지금까지도 김준씨의 변함없는 애창곡들이다.
그러나 자니브라더스는 주위의 권유에 의해 또다시 재결성하게 된다. 이들의 재결합을 가장 적극적으로 권유했던 사람이 바로 당시 서울신문사 발행인이던 장태화 사장. 음악애호가이기도 했던 장사장은 이들의 재능을 아까워하던 끝에 직접 그룹명을 ‘메아리진(’전국에 메아리 친다’는 뜻의 순수 우리말)‘으로 개명해준 뒤 70년 1월11일 mbc-TV ‘메아리진쇼전우중 PD)’를 통해 컴백, 매주 30분씩 브라운관을 화려하게 장식, 음악성과 예술성 있는 인상적인 프로그램을 한동안 펼쳐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시 중창단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제각각 부업전선에 나선 후 이어 72년, 을지로 4가에 ‘메아리진’이라는 음악 살롱을 차려 경제적 타개책을 적극 모색하지만 이러한 ’인기‘도 그들 개개인의 ‘끼’와 ‘욕구’를 막기엔 역부족, 1년이 채 못돼 하나둘씩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결국 최정상에서 이들은 완전히 해체하고 만 것. 이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섰던 무대는 73년 1월, 당시 TBC '쇼쇼쇼(PD 황정태)‘ 4백회 특집프로그램이었다.

2007년, 35만에 원년 멤버 그대로 재결성 ‘돌아온 쟈니브라더스’

   
▲ 가수 김상국과 함께 국군의 날 특집방송에 출연한 쟈니브라더스, 1965년.
이로부터 35년 뒤인 2007년 3월 12일, 이들은 KBS '가요무대, 돌아온 쟈니브라더스편'을 통해 공식적으로 재결합, 컴백을 선언했다.
오랜만에 똑같은 의상으로 통일한 이들은 당시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비록 그동안 제각각의 길을 걸어왔지만 늘 음악과 함께 해왔기에 이 번 재결성은 매우 자연스레 이루어진 일’이라고.
실제로 멤버 중 바리톤 파트의 김준씨는 그룹 해체 후 싱어 송 라이터로 변신, 솔로가수로 그리고 작곡가로도 재능을 한껏 발휘하며 현재까지도 매년 음반을 발표해왔다.
그가 작곡한 노래들을 살펴보면  ‘사랑하니까’(패티김)을 비롯해 84년 TBC 세계가요제 금상 수상곡 ‘나 이제 여기에(박경희)’, ‘내 마음은 풍선(장미화)’, ‘그래도 설마하고(임희숙)’, ‘Blue Smile(이미배)', 그리고 김준 자신의 목소리로 발표한 ‘휘파람 하이킹’ ‘여보소 날보소’ '태양의 데이트(김준 작사, 김학송 작곡)'  등. 그는 70년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음반을 발표하지 않은 해가 없을 정도로 ‘음악의 생활화’, 그 일관된 삶을 지켜왔다.
또한 1980년에 'International JUN Free Art'를 설립한데 이어 K.J.C(한국재즈모임)의 창립회장을 맡았기도 하는 등 재즈 활동을 위해 힘을 바쳐왔다. 아울러 주위동료들의 신명을 도와주며 앞장서왔던 그는 현재, 남양주에서 부인 김미자 여사와 함께 ‘김준재즈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지난 해 12월, 재즈처럼 자유스럽고 심오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과 음악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김준 재즈이야기(포이즌 발행)‘를 출간했다.
멜로디 파트의 김현진씨는 그간 보험일을 거쳐 현재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본인이 이끄는 ‘울바우 남성합창단’과 더불어 매년 정기공연을 해왔다.
또한 ‘빈대떡 신사’의 작곡자인 양원배씨의 차남으로 경희대 음대 출신이기도 한 테너 양영일씨는 지난 23년 간 음악교사로 재직해왔다.
그런가하면 동아방송 성우 1기생이기도 한 베이스 진성만씨는 영화배우 김지미씨의 여동생 김지애씨와 결혼, 지미필름 대표를 거쳐 현재는 요식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렇듯 이들은 쟈니브라더스를 떠나서도 여전히 현역들이다.
‘쟈니브라더스’라는 이름으로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는 이들은 수시로 모여 호흡을 고르고 화음을 맞추고 있다. 이전까지는 멜로디 위주의 유니송(Unison)을 주로 발표해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모니 위주의 4성, 즉 네 화음을 조화시켜 남성4중창단으로써의 매력을 한껏 펼칠 예정.
클래식과 교회음악에서 출발한 이들이 들려줄 주 레퍼토리는 역시 올드 팬들에게 친숙한 ‘올드송’들, 즉 ‘메모리’다. 자신들의 히트곡은 물론 민요에서 올드 팝까지 폭넓게 소화하고 있고 있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것 중 가장 늦게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목소리라 했던가. 이들의 전성기가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젊음의 상징이었다면 이들의 재결합된 쟈니브라더스는 바로 실버세대의 꿈이자 희망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해본다.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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