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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4.06.11  13:5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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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

프랑스 식민 지배에서 70여년 만에 벗어나


2024년 5월 7일 베트남에서 개최된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 70주년 기념식’에 프랑스 대표단이 참석해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디엔비엔푸 전투(1954년 3월 13일~5월 7일)는 베트남이 자국을 식민 지배한 프랑스를 궤멸한 전투였다. 프랑스는 전투 패배 후 베트남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 기념식에 정부 대표단을 파견한 것은 종전 후 70년 만에 처음이었다. 베트남의 피침탈 역사 베트남이 1000여 년 이상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 왕조를 세운 것은 939년이었다.

이후에도 중국의 침탈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나 독립 왕조는 부침을 겪으며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시대이던 1883년 또다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불행한 역사로 빠져들었다. 프랑스는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수립함으로써 동남아시아에 대규모 식민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인도차이나는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는 대륙부의 총칭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프랑스령 식민지인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3개국을 가리킨다. 베트남인들은 프랑스 식민 정책에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자체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찌민이 본격적으로 대불 항전을 펼친 것도 프랑스가 베트남을 통치하던 1920~1930년대였다. 호찌민은 1930년 홍콩에서 ‘베트남공산당’을 창당할 때도 힘을 보탰다. 그러던 중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면서 인도차이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독일의 동맹국이던 일본은 독일의 괴뢰정권인 프랑스 비시 정권의 묵인 속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0년 8월부터 인도차이나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로와 비행장을 이용했다. 일본군이 베트남으로 진출하고 있던 1940~1941년, 호찌민은 중국에서 동지들을 베트남으로 파견해 항일 지하 조직을 결성케 했다.

▲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투입된 프랑스 공수부대.

1941년 2월에는 중국 국경에서 가까운 곳에 비밀 아지트를 설치하고 5월에는 비공산주의자들까지 포함한 통일전선 조직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을 결성, 대일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베트남 독립동맹은 한자로 월맹(越盟)이라고 하는데 냉전시대에 우리가 북베트남을 ‘월맹’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서 연유한다. 일본이 베트남 땅에서 야욕을 드러낸 것은 사실상 나치의 패망을 눈앞에 둔 1945년 3월이었다. 프랑스 비시정부와의 공존 관계를 4년 만에 끊고 무력으로 프랑스군을 베트남 땅에서 몰아낸 것이다. 미국과 일본 간의 태평양전쟁도 막바지로 치달을 때였다.

호찌민 주도 베트민과 미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공동전선을 펼쳤다. 특히 보응우옌잡(옛 외래어 표기는 보구엔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 부대는 미 OSS(CIA 전신) 부대와 함께 군사작전을 펼치며 패색이 짙은 일본군을 몰아세웠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베트민이 북부의 하노이(8.19)와 남부의 사이공(8.25)을 장악했다. 8월 30일엔 꼭두각시 바오다이 황제가 20년 만에 퇴위함으로써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도 143년 만에 막을 내렸다. 호찌민은 1945년 9월 2일 국가 주석 자격으로 하노이 바딘 광장에 모인 50만 명의 군중을 향해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2차대전 종전 후 베트남의 영토 분할 베트남은 종전 후 독립해야 했으나 1945년 7월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이 독립을 가로막았다. 북위 16도선 남쪽은 영국이, 북쪽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지배한다는 선언에 따라 16도선 남쪽에 영국군이 들어왔으나 영국은 오랜 식민 종주국 프랑스를 대신할 생각이 없었다. 영국이 1946년 3월 베트남에서 철수한 덕분에 16도선 남쪽의 빈자리는 다시 프랑스 차지가 되었다. 중국 국민당 군대는 16도선 북쪽 베트남을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

미국의 OSS가 ‘호찌민을 옹호하는 특별성명서 발표’를 워싱턴에 요청할 정도로 폐해가 심각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일본이 물러난 마당에 프랑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잠재적인 아시아의 티토’가 될 호찌민을 지원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냉전기 조짐이 보이는 상황에서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될 수 있다는 사실도 고려했다. 호찌민은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알고 프랑스와 중국 국민당 정부가 체결한 ‘중국군이 16도선 북쪽에서 철수하면 프랑스가 그곳까지 지배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받아들였다. 자칫 베트남 땅에 영원히 주둔할 수도 있는 중국보다는 잠시 프랑스를 받아들이는 것이 독립에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차악의 선택이었다.

중국군이 물러난 후 프랑스와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은 프랑스연합 내 인도차이나 연방의 일원 자유국가’라는 예비협정을 체결했다. 그러자 호찌민에게 타협적 온건주의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호찌민이 직접 파리로 건너가 협상한 본조약은 1946년 9월에 체결되었다. 프랑스 이권을 보장해 주는 대신 베트남에서 두 나라 사이의 무력 충돌을 방지한다는 합의였다. 그러나 합의는 곧 무너졌다. 1946년 11월 하이퐁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고로 두 나라 군대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이 사고로 6,000여 명의 베트남인이 죽고 12월부터 전쟁이 본격화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 전 상황은 호찌민이 “코끼리와 메뚜기의 힘겨루기”라고 규정했을 만큼 북베트남에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하지만 베트남군은 특유의 후방 교란작전으로 불리한 상황을 헤쳐나갔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거점과 은신처가 그 유명한 ‘호찌민 루트’다.

그 무렵 동서 냉전을 고착화한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1947.3) 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더구나 1949년 10월 중국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중국 공산당과 소련이 베트남을 세계 최초로 공식 인정하자 불안해진 미국은 프랑스의 비호를 받고 있는 바오다이 전 황제가 이끄는 남쪽의 사이공 정부를 승인했다. 베트남의 분단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보응우옌잡 장군은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미국의 관심이 인도차이나에서 멀어진 틈을 타 1950년 10월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결국 프랑스는 북베트남을 장악하기는커녕 베트남군의 공세에 밀려 1953년까지 7만 4,000여 명의 전사자와 19만 명의 부상자를 내며 악전고투했다.

디엔비엔푸 전투와 보응우옌잡 총사령관 북베트남군은 프랑스군을 베트남에서 완전히 쫓아내기 위해 1953년 4월 프랑스의 점령 지역이면서 베트남과 길게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라오스를 침공했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군 총사령관 앙리 나바르에게 라오스의 요충지를 지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나바르는 승부수를 띠웠다. 프랑스군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정글 전투를 피해 어느 한정된 장소에서 전투를 하면 경험이 많은 베트남군이라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전술이었다. 나바르가 선택한 곳은 라오스와의 국경선에서 30㎞ 정도 떨어진 외딴 산악지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베트남 북부 소도시 디엔비엔푸였다. 그곳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나바르는 1953년 11월 20일 3,000여 명의 공수부대를 디엔비엔푸로 낙하시킨 것을 시작으로 3일 동안 9,000여 명을 낙하시켜 요새를 구축했다. 부대원은 점차 1만 6,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말이 프랑스군이지 절반은 베트남인과 알제리인들로 구성된 외인 용병부대였다. 현지 전투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크리스티앙 드 카스트리 대령은 중앙 활주로를 중심으로 주변 언덕에 주요 거점과 수십 개 초소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50㎞ 밖 주변마다 견고한 방어진지로 둘러쌌다. 각 거점에는 대포, 박격포, 기관총을 갖추고 거점과 거점 사이에는 베트남군이 침투할 수 없도록 교차 포격이 가능하도록 했다. 나바르와 카스트리는 곧 베트남군이 대규모 인해전술로 공격해 올 테지만 그 정도의 공격은 프랑스군의 화력으로 충분히 분쇄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문제는 디엔비엔푸가 프랑스군 사령부가 있는 곳에서 300㎞나 떨어져 있어 병력이든 장비든 모든 것을 공중 수송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베트남군 총사령관은 보응우옌잡이었다. 그는 디엔비엔푸에 진을 친 프랑스군의 배치 상황을 지켜보면서 조심스럽게 승전을 점쳤다. 그는 “프랑스군이 진지를 완전하게 구축하기 전에 프랑스군을 공격하자”는 베트남군 지휘관들의 의견, “인해전술로 제압하자”는 중국 군사고문단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기러 온 것이지 싸우러 온 게 아니다”라며 때를 기다렸다.

보응우옌잡 전략의 원칙은 ▲작은 것     (小)으로 큰 것(大)을 이긴다 ▲적음(少)으로 많음(多)과 맞선다 ▲질(質)로 양(量)을 이긴다 세 가지였다. 응 우옌 지압은 실천 전술로 3불(不) 작전을 내렸다. ▲적이 원하는 시간을 피하고 ▲적에게 낯익은 장소를 멀리하고 ▲적이 익숙한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였다. 보응우옌잡은 베트남군을 크게 2개로 나누어 전투에 대비했다. 하나는 군수품과 무기를 수송할 농민군이고, 다른 하나는 산악 지역을 하루에 30㎞씩 행군하는 정규군이었다. 농민군은 1인당 5㎏의 쌀을 지고 정글을 헤쳐나갔다. 정규군은 200문이 넘는 105㎜ 곡사포를 분해한 뒤 몸에 연결한 채 정글을 뚫었다. 하루에 800m밖에 전진하지 못하는 3개월의 고행길이었으나 이런 고행의 결과 베트남군은 병력과 화력에서 프랑스군에 우위를 차지했다.

프랑스군은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긴 했으나 베트남군이 중화기를 주변의 험한 산 위에까지 갖고 올라올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사태를 낙관했다. 보응우옌잡은 미.소.영.불 등 4대 강국이 인도차이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1954년 4월 말 제네바에서 회담을 연다는 것을 알고 공격 시점을 앞당겼다. 5만 명의 베트남군은 언덕 위까지 은밀히 깊게 판 참호를 통해 언덕 위 요새 벽까지 접근했다. 베트남군은 디엔비엔푸 인근의 도로들까지 장악한 뒤 1954년 2월 초 대포와 박격포로 비행장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수송기의 접근은 대공포로 막았다. 다급해진 프랑스군이 믿을 거라곤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이었으나 이마저도 미 의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베트남군의 1차 공세는 1954년 3월 13일 오전부터 이튿날 밤까지 계속되었다. 이 공격으로 프랑스군은 500여 명이 전사했다. 15~16일에는 주요 거점인 가브리엘 진지가 베트남군의 집중 포격과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베트남군은 다른 주요 진지까지 함락한 후 활주로 바로 앞에 대공포를 설치했다. 이로써 비행기 공수에 쓰려고 닦아놓은 활주로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프랑스군은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다. 보응우옌잡은 전투가 장기화할 것을 예상해 계곡 중앙으로 연결되는 참호를 파는 데도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참호는 프랑스군 지휘소에서 수백 m 지점까지 이어졌다. 베트남군은 5월 5일 밤 마지막 전투를 재개해 1954년 5월 7일 오후 5시 30분 디엔비엔푸를 함락했다. 이로써 56일간의 사투도 막을 내렸다.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라고 쓰인 베트남군의 군기가 포연 가득한 디엔비엔푸 계곡에 펄럭였다. 디엔비엔푸 전투 결과 프랑스군은 3,000여 명이 전사하고, 5,000여 명이 다쳤으며 1만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베트남군도 전사 8,000여 명에 부상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프랑스군 포로들은 동쪽으로 480㎞ 떨어진 포로수용소까지 60일간 죽음의 행진을 하고, 또 3개월간의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해 또다시 수천 명이 사망했다. 보응우옌잡은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 후 호찌민과 함께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아시아의 나폴레옹’, ‘베트남의 국보’ 등으로 불렸다. ‘제네바 협정’…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에 종지부 찍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결을 논의하는 제네바 회담이 열린 것은 디엔비엔푸가 함락된 다음 날인 1954년 5월 8일이었다.

미국,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 라오스, 캄보디아, 남베트남, 북베트남 등 9개국 정부 대표들이 참석해 열띤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전쟁 당사국이 아닌 4대 강대국 중 미국은 베트남의 일시적인 분리안에 반대했으나 영국, 소련, 중국이 분리안을 받아들여 1954년 7월 21일 제네바 협정이 조인되었다. 조인 때도 미국과 남베트남은 서명을 거부한 반면 전쟁 당사국인 프랑스, 북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가 협정에 조인, 70여 년에 걸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이 잠정 군사경계선이 되어 북베트남은 호찌민, 남베트남은 프랑스가 지원하는 바오다이가 통치하고, 2년 뒤인 1956년 7월 국제 감시 하에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베트남을 점령해온 프랑스는 1년 내에 모든 병력을 철수하기로 했으며 북위 17선을 기준으로 남북 베트남이 분리되기 전까지 3개월 동안 남북 간 합법적인 교류를 인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북베트남에서는 지주와 가톨릭 신자 등 85만 명이 내려오고, 남쪽에서는 베트민 병사 가족들이 주축을 이룬 8만 명이 북쪽으로 올라갔다. 자진 월북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중에 다시 내려와 지하 세포로 활동했다. 베트남은 1954년 10월 11일 마침내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국이 되었다. 프랑스는 1955년 1월 남베트남의 주권을 바오다이 정권에 이양하고 남베트남에서 철수했다.

프랑스가 떠난 후 군사 원조를 앞세운 미 군사고문단의 역할이 남부에서 점차 확대되었다. 당시 미 정부는 종국에는 호찌민이 통일 베트남의 실력자가 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도미노 이론’을 우려했다. 하노이가 중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의 관문이 될 것이라는 워싱턴의 우려는 결국 미국을 베트남이라는 수렁 속으로 빠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주목한 인물은 응오딘지엠(옛 외래어 표기는 고딘디엠)이었다. 지엠은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 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바오다이 왕정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지엠은 불교 신자가 95%인 베트남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기반이 취약했으나 미국은 다른 대안이 없다며 지엠을 도미노 이론의 방어막으로 삼았다.

지엠은 곧 미 CIA의 지원을 받아 바오다이 황제를 폐위하고, 1955년 10월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98%의 지지를 얻어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응오딘지엠은 남북 통일보다 권력 강화에 더 혈안이었다. 그의 동생은 비밀경찰을 조직해 반정부 인사를 탄압하고 국민투표를 조작했다. 비밀경찰들은 베트민의 전략촌으로 알려진 1만 6,000여 개 마을을 소개(疏開) 하고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7만 5,000명을 살해하고 5만 명을 투옥했다. 북베트남은 이에 맞서 1957년 10월 사이공에 있는 미국의 시설물을 파괴하고 1958년 1월 사이공 북쪽의 농장을 공격했다. 이때 응오딘지엠이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경멸하며 꺼낸 말이 ‘베트콩(Viet Cong)’이다. 우리로 치면 ‘빨갱이’ 격인 베트콩은 그전까지 표현해온 ‘베트민’이라는 말을 대신해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나가 대명사가 되었다.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하고 프랑스를 쫓아냈다고 해서 독립이 보장되지는 않았다. 미국과의 20년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 남미 해방과 쿠바 혁명에 투신한 39년의 삶

글로벌 여성 리더들이 서울에서 5월 22~23일 열리는 제15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 집결했다. 그중에는 남미 해방과 쿠바 혁명에 투신했던 체 게바라(1928~1967)의 딸도 있다. 그는 “우리 가족이 쿠바 국민에게 받은 사랑을 보답하고자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됐다”며 “쿠바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양국의 연대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의사에서 혁명가로 운명이 바뀐 것은 남미 여행 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는 의사라는 안정된 미래를 포기하고 고통받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을 위해 삶 전체를 혁명운동에 투신했던 휴머니스트였고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인터내셔널리스트였다.

이런 그를 가리켜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 “우리 시대의 예수”라고 찬탄하고 쿠바 혁명가 피델 카스토르는 “순결하고 용감하고 초연하고 욕심 없는,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했으며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20세기를 움직인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게바라를 꼽았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194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에 진학한 체 게바라의 미래 운명을 의사에서 혁명가로 바꿔놓은 것은 남미 여행이었다.

▲ 체 케바라.

체 게바라는 의과대 졸업을 앞둔 1951년 12월 의과대 선배와 함께 남미 여행을 떠났다. 500cc 중고 오토바이를 개조해 아르헨티나 코르도바를 출발,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를 9개월 간 여행했다. 그렇게 여행한 거리가 8,000㎞나 되었다. 1953년 3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자격증을 딴 뒤에도 7월 볼리비아에서 시작해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돌았다. 기나긴 여로에서 목격한 남미 민중의 삶은 체 게바라로 하여금 인간과 사회의 질병에 깊은 연민과 분노를 느끼게 했다.

특히 1954년 과테말라에서 목격하고 경험한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의 토지개혁 시도와 뒤이은 좌절은 그에게 혁명이 왜 필요한지를 일깨워주었다. 아르벤스는 1953년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츠 컴퍼니’를 국유화하고 토지를 빈농에게 분배하는 등 개혁정책을 단행했다가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은 군부 쿠데타로 1954년 6월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다. 아르벤스 정부가 붕괴되고 과테말라의 현지 사정이 악화하자 체 게바라는 멕시코로 거주지를 옮겨 1954년 9월 이름을 체 게바라로 바꾸고 한동안 의사로 활동했다.

1953년 쿠바의 몬카다 병영 습격 실패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멕시코로 망명한 쿠바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1926~2016)를 1955년 7월 멕시코에서 만난 것은 혁명을 준비해온 개인 여행의 종착점이었다. 카스트로는 멕시코에서 쿠바의 몬카다 병영을 습격한 날을 따서 ‘7월 26일단’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대원들을 규합해 쿠바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전복을 도모했다. 쿠바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전사로 활약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와 함께 1956년 11월 25일 새벽, 낡은 요트 그란마호를 타고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떠나 쿠바로 향했다. 그것은 진정한 혁명가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함께 멕시코를 출발한 82명 중 1주일 뒤 쿠바 해안 늪지대에 도착한 사람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 불과 12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정부군에 체포되었거나 살해되었다.

괴멸 직전에 겨우 목숨을 건진 게릴라들은 산 속으로 도주, 쿠바 동부의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거점 지역으로 삼았다. 그곳은 높이가 2,000m나 되는 험준한 산악지대인 데다 수도에서도 800㎞나 떨어져 있어 사실상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체 게바라는 산 중에서 게릴라 활동을 적극 펼쳐 혁명군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바티스타 정권을 향한 카스트로 반군의 전면적인 공세가 시작된 것은 1958년 8월 21일이었다. 체 게바라는 148명의 대원을 이끌고 서쪽 아바나로 길을 떠났다. 1958년 12월 그가 지휘한 산타클라라 전투는 바티스타 독재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 독재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체 게바라는 의사와 전사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쿠바 혁명 후 체 게바라가 맡은 공직은 쿠바의 산업부 장관과 국립은행 총재였다.

1960년에는 소련, 중국, 불가리아, 북한, 체코슬로바키아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모택동, 김일성, 네루 등을 만나 쿠바의 생존과 제3세계의 연대를 모색했다. 1965년 1월에는 콩고, 기니, 가나, 알제리, 탄자니아, 이집트 등을 방문했다. 1965년 3월 쿠바로 돌아온 그는 그해 4월 어느 날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싸워야 한다는 성스러운 임무를 안고 나는 새로운 전장을 찾아갑니다”라는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남기고 잠적했다. 그에게 새로운 전장이란 아프리카 콩고였다. 하지만 1966년 3월까지 10개월 동안 이어진 그의 아프리카 투쟁은 성공하지 못했다. 현지의 혁명 조직이 와해된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혁명이 그를 필요로 하기보다 그가 혁명을 필요로 했기에” 실패는 예견된 일이었다. 체 게바라는 쿠바로 돌아왔다가 발길을 다시 남미의 볼리비아로 돌렸다. 미국의 힘을 분산시키려면 제2, 제3의 베트남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개인의 혁명 전략에 따라 가짜 여권을 갖고 1966년 11월 볼리비아의 낭카와수 게릴라 캠프에 도착, 그곳을 새로운 혁명의 거점으로 삼았다. 볼리비아는 페루,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등 5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혁명 수출에는 최상의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가 쿠바의 해방구였다면 볼리비아는 남미의 해방구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체 게바라가 지휘하는 모두 50여 명의 다국적 민족해방군은 남북 320㎞, 동서 120㎞ 넓이의 해발 2000m 정글에서 1,800명의 볼리비아 특공대를 상대로 20여 차례의 크고 작은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러나 체 게바라는 한 배신자의 밀고로 1967년 10월 8일, 산악마을에서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장딴지에 총탄을 맞고 체포되었다. 볼리비아 정부와 미 CIA는 그를 살려두면 오히려 혁명의 바람이 들불처럼 일어날 것을 우려해 사살을 결정했다. 이튿날인 10월 9일 오후 1시 10분, 체는 살해되고 양 손목은 잘려나갔다. 잘린 손은 그의 죽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쿠바의 카스트로에게 보내졌다. 39세를 일기로 체가 죽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가 그를 마음 속으로 추종했던 많은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카스트로는 체가 죽었다는 소식에 30일 동안 조기를 게양토록 하고, 그가 체포된 10월 8일을 ‘게릴라 영웅의 날’로 정했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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