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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4.11.13  1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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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 레슬링의 영웅’ 역도산 탄생 100주년

1938년 5월 5일 단오절이었다,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열린 씨름대회에 30대 초반의 김항락과 10대 중반의 김신락 형제가 출전했다.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우승해 소 2마리를 우승 상품으로 챙긴 형은 함경도에서 워낙에 이름난 씨름꾼이었기 때문에 구경꾼들은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15살의 김신락이 20대의 젊은 씨름꾼들을 제치고 3위를 차지할 때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경꾼들 틈에는 일본 경찰이 있었다, 그는 김신락의 건장한 체격과 씨름 솜씨에 반해 일본 씨름 스모를 권했다. 그러나 병든 아버지를 돌봐야 한다는 형의 반대에 막혀 김신락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해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기회가 왔다. 그런데도 가족은 여전히 반대했다. 심지어 어머니는 아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이웃 마을에서 색시를 구해와 결혼을 시켰다. 
그러나 김신락은 가족의 반대를 뿌리치고 1940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계에 입문했다. 당시 김신락은 17살인데도 175㎝의 키에 84㎏의 몸무게를 가진 당당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김신락은 스모계에 이름을 가네무라 미츠히로(金村光浩)로 등록하고 시합 때는 역도산(리키도잔) 이름을 사용했다. 1940년 5월 첫 시합을 치른 역도산의 주특기는 상대방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치는 하리테였다. 1942년 6월 만주지방 순회 경기 때는 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와 합방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때 임신한 딸(김영숙)은 다음 해 태어났다. 
역도산은 스모의 승급이 쑥쑥 올라갔고 1949년 게이샤와 살림을 차렸다. 1949년 스모의 3등급인 세키와케에까지 올라갔으나 민족적 차별 때문에 요코즈나(최고급)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1950년 8월 25일 스모 선수의 상징인 존마게(상투)를 자른 뒤 스모계를 떠났다. 그리고 1950년 말, 새 호적을 신고했다. ‘본적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296번지, 본명 모모타 미츠히로(百年光浩), 생년월일 1924년 11월 14일’로 신고해 일본에서 태어난 완벽한 일본인으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했다. 역도산의 출생 연도는 1922년, 1923년일 수도 있으나 이 글에서는 공식 연도인 1924년을 기준한다.

프로레슬링은 우연으로 인도된 운명적인 만남

역도산이 스모계를 떠나 술과 싸움으로 초조함을 달래고 있던 1951년 가을, 몇 명의 미국 레슬러가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을 흥행시키고 주일 미군을 위문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 무렵 역도산은 자신의 힘을 믿고 나이트클럽에서 미국인 프로 레슬러와 몸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상대에게 팔이 비틀려 손을 들고 말았다. 
역도산은 그에게서 프로레슬링 입문을 권유받았다. 역도산은 프로레슬링 시합에 참가하기로 하고 가라테 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나카무라 히데오에게서 스모의 하리테와 가라테를 접목한 ‘가라테 촙’을 집중적으로 연마했다. 나카무라는 북한 평양 출신의 한국인으로 본명은 강창수였다. 당시 프로레슬링은 일본인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스포츠였다. 미국 레슬러들이 일본 각지를 순회했지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런 와중에 1951년 10월 28일, 도쿄에서 열린 세 번째 시합 때 역도산이 마침내 데뷔를 했다. 상대는 보비 브란스였다. 미국 레슬러들보다 체구가 작아 보이는 단점을 커버하려고 그 무렵 입은 검은 타이즈는 이후 역도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952년 2월, 역도산은 보비 브란스의 초대를 받아 미국 하와이로 건너갔다. 하와이에서 기초 훈련을 마치고 미국 본토로 건너가 레슬러로서 활약상을 보인 후 1953년 3월 일본으로 돌아왔다. 1년 1개월 동안 미국 본토와 하와이를 오가며 260여 회의 시합을 치렀는데도 5번 밖에 지지 않는 투혼을 발휘했다. 놀라운 전적과 함께 역도산이 일본에 가져온 선물이 또 있었다. NWA(전미레슬링협회)가 인정한 프로모터 자격이었다.
역도산은 1953년 7월 자신의 도장을 개장하고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설립한 뒤 1953년 10월 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번의 목적은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 루테즈와 겨룰 수 있는 도전자 결정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것과, 1954년 봄 일본에서 열릴 프로 레슬링 흥행에 참가할 거물급 외국인 레슬러의 초청이었다. 
루테즈는 ‘철인’의 칭호를 받은 챔피언으로서 불멸의 936연승을 수립한 20세기 최강의 레슬러였다. 역도산은 하와이에서 챔피언 도전권을 따내 루테즈에게 도전했으나 43분간의 격투 끝에 무적 챔피언의 신기술 백드롭에 뒤로 넘어져 결국 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패배했다. 하지만 월드 태그팀 챔피언인 샤프 형제를 일본으로 초청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 도산이 승리를 거둔 뒤 챔피언 벨트를 차고 환호에 답하고 있다.

패배감에 찌든 일본인들의 정신적 구원자로 부상

역도산이 샤프 형제를 일본으로 불러들여 일본 최초의 국제 프로레슬링 경기를 개최한 것은 1954년 2월 19일이었다. 역도산은 ‘일본 유도의 귀신’으로 불리던 기무라 마사히코와 태그매치 조를 이뤄 샤프 형제를 상대했다. 당시는 일본 민영 니혼 TV가 개국한지 6개월밖에 안 된 때였다. 부자들은 프로레슬링을 보기 위해 TV 수상기를 구입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길거리 TV 전파상 앞으로 몰려들었다. 도쿄 신바시 역에 설치된 대형 TV에는 무려 2만여 명이 운집했다. 그들은 길거리 TV를 보며 탄식하고 환호했다.
당시 일본은 그들에게 패전을 안겨준 미국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땅이 넓고 자원이 풍부한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의식을 지배했다. 개인끼리 싸움에서도 덩치 크고 힘센 미국인을 당해낼 수 없다는 패배감이 짓눌렀다. 더구나 샤프 형제는 키가 2m에 가까운 거구였다. ‘일본인 몸통만 한 허벅지, 식빵을 집어넣은 듯한 팔 근육에 가슴과 배에도 텁수룩한 털이 난 괴물’로 묘사된 샤프 형제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때려잡은 미국인의 전형이었다. 일본인들은 레슬링에서라도 역도산이 샤프 형제를 꼭 응징해 주길 바랐다.
2월 19일 첫날 경기 1회전에서 역도산이 14분 5초 만에 199cm의 상대를 눌러 덮어버리자 관중석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2회전은 기무라의 반칙으로 패하고, 결승전인 3회전 승부는 승부가 나지 않은 채 오버타임이 되어 무승부가 되었다. 둘째 날은 첫날과 달리 완전 매진을 기록했다. 역도산이 샤프 형제의 형과 일 대 일로 경기를 벌이고 있을 때 전파사 앞에서 경기를 보고 있던 중년 남성이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으로 보내졌다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둘째 날은 개인전이었다. 역도산은 샤프 형제의 형을 2 대 1로 제압했다.
셋째 날, 드디어 챔피언 벨트가 걸린 메인이벤트가 시작되었다. 첫판에는 기무라가 누르기를 당해 샤프 형제에게 지고 말았다. 그러나 둘째 판에서 역도산이 가라테 촙으로 동생 샤프를 거꾸러뜨리자 환성과 함성이 일본 열도를 뒤덮었다. 역도산이 영웅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셋째 판은 무승부로 끝나 타이틀을 가져오지는 못했으나 3일 동안 벌어진 경기에서 기무라는 연속 패배한 반면 역도산은 연속 승리했다. 이후 역도산은 패배감에 찌든 일본인의 영혼에 강인함을 심어준 정신적 구원자로 부상했다. 
1954년 8월에는 태평양 해안 태그 챔피언 벨트를 가진 두 미국인 레슬러가 일본에서 경기를 가졌다. 그런데 이번의 두 선수는 샤프 형제와 달리 심판의 눈을 속이는 반칙으로 일관했다. 결국 역도산 팀이 첫날 시합을 놓치게 되자 경기장에 분노의 함성이 넘쳐났다. 둘째 날은 역도산이 가라테 촙으로 승리를 했다. 셋째 날은 태평양 연안 태그 챔피언 벨트에 도전하는 선수권 시합이었다. 첫판은 역도산이 이겼으나 역도산의 파트너가 두 번째와 세 번째 판 모두 반칙 공격을 당해 패배했다. 그러자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이 링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빈병과 의자를 던졌다. 
프로레슬링이 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금 시각에서 보면 프로레슬링이란 새로운 프로 스포츠를 일본에 심으려는 역도산으로서는 관객을 흥분시키는 악역이 당연한 것이다. 미국의 레슬러도 당초 계획대로 반칙을 거듭하는 악역에 충실한 것이다. 그 후에도 전국을 순회한 프로 레슬링 경기에서 미국인은 악역에 최선을 다하고 역도산은 이들 악당들을 응징하는 영웅으로 등장했다. 역도산은 1954년 9월 악당들을 쳐부수고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찼다.

기무라 “역도산의 레슬링은 쇼”라고 폭로

그런데 1954년 2월 벌어진 샤프 형제와의 경기에서 역도산의 태그 파트너였던 기무라가 1954년 10월 말, “역도산의 레슬링은 쇼”라고 폭로하면서 막 달궈지기 시작한 레슬링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졌다. 기무라는 역도산과 별개로 ‘국제프로레슬링단’을 설립한 뒤 “샤프 형제와의 경기에서는 당하는 역을 맡았지만 제대로 승부를 겨룬다면 역도산에게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다.
역도산이 기무라의 도전을 받아들여 성사된 경기는 1954년 12월 22일 1만 5,000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렸다. 기무라는 전 일본 유도선수권을 10년 연속 제패한 유도의 달인이었다. 따라서 이날의 대결은 역도산과 기무라의 대결을 넘어서 양측 레슬링협회 간 자존심을 건 대결이었으며, 유도와 스모의 진정한 승자를 가리는 대결이기도 했다.
오프닝으로 세 경기가 치러진 후 역도산과 기무라의 마지막 결전은 한동안 소강상태로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기무라의 왼발이 역도산의 복부를 때리면서 분위기가 격앙되었다. 역도산은 가라테 촙으로 기무라를 무차별 난타했다. 인정사정없는 공격에 기무라는 무너지듯이 매트에 쓰러졌다.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결국 61분 게임은 15분 49초 만에 끝났고 기무라는 병원으로 실려가 이후 잊힌 존재가 되었다. 경기 후 역도산은 기무라가 경기를 무승부로 하자고 해놓고 비겁하게 자신의 급소를 발로 공격했다고 주장했으나 기무라의 항변은 달랐다.
이후 일본의 프로레슬링계는 사실상 역도산의 독주 체제로 굳어졌다. 반칙 공격을 일삼는 악역들이 연이어 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올 때마다 역도산은 가라테 촙으로 그들을 물리쳐 영웅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그의 인기에 힘입어 1955년 역도산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 영화 ‘노도의 사나이’가 개봉되었다. 역도산은 링 위의 영웅에 만족하지 못하고 프로모터로도 영역을 넓혔다. 그동안 미국에서 레슬러를 불러들이고 시합을 구상한 것은 대부분 역도산이 도맡았으므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역도산은 레슬러로서뿐만 아니라 프로모터로도 일류였다. 복면의 레슬러를 일본에 초청한 뒤 신비감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다른 사람 앞에서 결코 복면을 벗지 못하게 했다. 복면을 벗으면 야단을 쳤다.‘물어뜯는 악마’도 역도산의 연출이었다. ‘물어뜯는 악마’는 TV 카메라 앞에서 “역도산을 이빨로 물어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자신의 입을 줄칼로 문지르는 장면을 보여줬다. 일본 전역은 그의 광기에 전율했다. 너무 처참해 경기를 보던 사람들이 쇼크사하는 사건이 속출했다. 역도산은 2m에 가까운 신장과 240㎏을 넘는 몸무게를 자랑하는 괴물 선수도 일본으로 초대했다. 괴물은 대형 버스를 이빨로 끌어당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사실 그것은 눈속임이었다.

김일은 ‘역도산 사단의 삼총사’ 중 맏형

역도산은 1956년 10월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김일이 1957년 2월 풀려나는데 손을 쓰고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전남 고흥의 섬마을에서 태어난 김일은 젊어서 유명 씨름꾼이었다. 183㎝, 90㎏의 체구도 당당했다. 어느날 우연히 역도산을 소개한 잡지 기사를 읽고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1956년 10월 아내와 4남매를 집에 남겨둔 채 시모노세키로 건너갔다. 일본과 아직 수교 전이라 밀항이었다. 결국 김일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강제송환을 기다리던 중 무작정 “제자가 되고 싶다”고 역도산에게 편지를 썼다. 주소를 몰라 겉봉에 ‘도쿄 역도산’이라고 썼는데도 편지는 역도산에게 전달되었다. 김일은 역도산 덕분에 수감 4개월 만인 1957년 2월 석방되었고 역도산 도장 문하생 제1기로 프로 레슬링에 입문했다. 역도산이 김일에게 하사한 일본 이름은 일본의 전설적인 장사의 이름에서 딴 오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였다. 
김일의 훈련은 온몸이 매일 상처투성이가 될 정도로 힘들었다. 몸에 난 상처 때문에 병원에서 상처 부위를 꿰매고 돌아오면 역도산은 그 상처 부위를 다시 때려서 피가 터지도록 만들곤 했다. 김일이 입문하고 1년 뒤인 1958년 머지않아 상남자 스타일에 화려한 기술을 겸비할 안토니오 이노키와 역시 같은 일본인 자이언트 바바가 역도산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김일(1929~2006)은 안토니오 이노키(1943~2022), 자이언트 바바(1938~1999)와 함께 ‘역도산 사단의 삼총사’로 불리며 프로 레슬링계를 뜨겁게 달궜다. 
역도산의 마지막 목표는 세계 최강 루테즈였다. 수차례의 도전에도 번번이 졌던 역도산은 1958년 8월 미국 LA에서 당시 NWA(전미레슬링협회) 챔피언인 루테즈를 마침내 쓰러뜨려 NWA 인터내셔널 챔피언을 차지했다. 역도산은 프로 레슬링 세계에서 부와 명예까지 거머쥔 천하무적으로 군림했다. 
역도산은 스튜어디스 출신의 17살 아래 일본 여성과 1963년 6월 결혼했다. 1940년 일본을 떠날 때 북에 두고 온 첫 아내, 1949년 새살림을 차린 게이샤 아내까지 포함하면 공식적으로는 세 번째 여성이었다. 결혼식에는 일본 총리를 비롯 3,000여 명의 하객이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역도산은 북한에서도 영웅이었다. 김일성은 역도산에 대해 3번이나 교시를 내릴 정도로 역도산에 관심이 많았다. 역도산이 죽고 8년이 지난 1971년 3월에는 열사증을 딸에게 수여했다. 
역도산이 한국계라는 사실은 프로 레슬링계와 언론계에서 극소수만 공유하는 비밀이었다. 누구도 이를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주변에서도 진위를 캐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할 때 미국인을 이긴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일본인이어야 했다. 역도산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신문과 방송, 책과 영화에서 역도산은 나가사키현에서 태어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일본인으로 그려졌다. 역도산은 김일과 둘이 있을 때도 일본어로만 얘기했다. 김일은 역도산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세 번째 아내 다나카 게이코에게는 약혼할 즈음인 1962년 1월에서야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국내 언론 역시 역도산을 한동안 일본인으로 보도했으나 뒤늦게 사실을 앍고 1962년 10월부터는 한국계로 보도했다. 역도산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63년 1월 8일이었다. 북한도 방문을 요청하고 있어 북한을 고향으로 둔 그로서는 민감한 방한이었다. 역도산은 판문점에서 외투와 셔츠를 벗어버리고 “형님” 하고 울부짖었다. 역도산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몰랐던 일본인들은 ‘역도산, 모국 방문’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역도산은 1963년 12월 8일 밤, 도쿄 아카사카의 고급 나이트클럽에 찾아갔다. 화장실 안 좁은 복도에서 술이 거나한 상태에서 20대 야쿠자 청년과 시비가 붙었다. 역도산이 먼저 주먹을 휘둘렀고 청년은 품속의 칼을 꺼내 역도산의 배를 찔렀다. 다행히 상처는 경미해 외과병원이 아닌 부근의 산부인과 병원에서 간단한 봉합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전치 2주라고 발표해 아무도 역도산의 회복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1주일 뒤인 12월 15일 상태가 악화되어 재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오후 4시 무렵에 끝났고, 의사는 걱정할 거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역도산은 다시 급격한 쇼크 상태에 빠졌다. 결국 모든 치료에도 불구하고 오후 9시 50분 숨을 거뒀다. 39살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역도산이 39살의 나이에 어이없는 죽음을 맞자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병원은 복막염 발병에 따른 장폐색이 사인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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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연극의 파수꾼’ 차범석 탄생 100주년
     

차범석(1924~2006)은 전통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희곡을 발표해 한국적 개성이 뚜렷한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하는 데 공헌한 당대 최고의 극작가이자 현대 연극의 파수꾼이었다. 평단이 그를 가리켜 “리얼리즘 희곡의 최고봉”이라고 극찬한 이유는 1930년대 유치진이 시작한 우리나라 리얼리즘 연극이 그에게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차범석은 1924년 11월 15일 전남 목포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막연하나마 그에게 예술에 대한 영감을 처음 불어넣어준 것은 세계적인 무용수 최승희의 무대였다. 13세 때인 1937년 목포 평화극장에서 본 최승희의 춤사위는 그의 예술 의지를 자극했다. 
1942년 광주고보 졸업 후 일본의 명문 고교 입학시험에 낙방하자 2년 동안 도쿄에서 백수로 생활하며 연극과 영화에 심취하고 각종 문학작품을 탐독했다. 그 2년은 차범석의 끊임없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1945년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그해 5월 일본군에 징집되었으나 다행히 8월 일본의 패망으로 복직했다. 1946년 22살의 늦은 나이에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 교내에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1949년 10월 제1회 전국대학연극 경연대회에서 그가 번역·연출한 ‘오이디푸스왕’으로 연출상을 차지하는 등 해방공간에서 연극에 심취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고향 목포로 낙향해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51년 봄 목포의 한 예술제에 각본·연출·주연한 ‘별은 밤마다’로 비공식 데뷔했다. 그의 이름이 중앙무대에 알려진 것은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밀주’가 가작으로 입선하고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귀향’이 당선되면서였다. 이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에 매달린 그는 1956년 김경옥, 최창봉 등과 함께 직업 극단인 ‘제작극회’를 창단, 흥행주의와 상업주의를 배척하는 소극장운동의 선봉에 섰다. 
당시 그는 6·25 전쟁을 겪은 전후문학 세대로서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의식이 강한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특히 전쟁의 상처로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인간상을 그린 ‘불모지’(1957년)와 이념의 허구성과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산불’(1962년)은 6·25의 비극을 부각시키고 반전 의식을 일깨운 전후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았다. 

‘산불’은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정수

‘산불’은 이진순의 연출로 1962년 12월 25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무대에 올려져 호평을 받았다. ‘산불’은 6·25 전쟁 중 남자들이 다 전쟁터로 나가고 여자들만 남은 한 과부마을에 빨치산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인간 본연의 욕망과 이데올로기를 다룬 작품이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실주의 희곡의 교과서로 평가받고 있다. ‘산불’은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작답게 영화, TV드라마, 오페라로도 만들어졌다. 
차범석은 1963년 9월 연극의 대중화와 전문화를 표방한 극단 ‘산하’를 창단, 적자를 면치 못하는 영세한 상황 속에서도 20년간 대표로 활동하며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리얼리즘 연극을 고수하고 한국의 현대극을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연출에도 관심을 가져 ‘사형인’(1956년), ‘말괄량이 길들이기’(1964년), ‘세일즈맨의 죽음’(1975년), ‘도미부인’(1984년) 등을 연출했다. 

▲ 청주대학교 예술대학장 시절(1984년)의 차범석.

평소 대중성을 요구하는 TV드라마도 사회성을 띠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1980년 첫 회 ‘박수칠 때 떠나라’를 시작으로 MBC TV드라마 ‘전원일기’를 1년간 집필했다. 1983년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의 작업을 끝으로 산하를 해체했는데 이유는 “무대에 설 만하면 돈을 따라 철새처럼 TV로 가버리는 배우들에게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평소 깐깐하고 원칙주의로 소문난 그는 1986년 88서울예술단 초대 단장에 임명되었을 때도 창단 시연회에서 관계 장관이 잠을 잔 것을 알고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이처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불성실한 후배들에게는 불벼락을 내리기 일쑤였다. 연극상을 심사하는 과정에서도 무의미한 공연 기록과 긴 연륜을 앞세우기보다 작품의 질과 연기력을 따져 날카롭게 자격 여부를 가려내는 ‘연극계의 칼날’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 
평생 자가용, 신용카드, 휴대전화를 곁에 두지 않아 ‘차범석 3무’라는 말을 낳기도 했던 그는 팔순의 나이에도 8번째 희곡집 ‘옥단어’(2003년)를 탈고하고 국내 처음으로 우리 소극장 연극의 발달사인 ‘한국 소극장 연극사’(2004년)를 출간했다. 총 90여 편의 희곡을 남긴 그는 2005년에도 신작 ‘연오랑 세오녀’를 발표하며 영원한 현역임을 과시했다. 2006년 세상과 작별한 그의 죽음은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마감이었으며 한국 정통 연극의 종언이었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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