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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킬링필드, 임진왜란 동래성에 무슨 일이…

기사승인 2012.11.05  17: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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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은 조선인들 죽음의 구덩이였다”

지난 2005년 무참히 떼죽음 당한 조선인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아래턱이 창에 의해 날카롭게 잘려나간 남자의 유골, 앉혀진 채로 위에서 칼로 세 차례나 살해를 당한 20대 여자의 유골, 조총이 뒤에서 뚫고 나간 흔적을 보여주는 5세 이하 유아의 부서진 두개골… 부산의 한 지하철 공사장에서 발굴된 유골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400년 만에 나타난 유골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동래부 순절도
7년 전쟁의 임진왜란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위기였고, 참혹한 전란이었다. 개전 20일 만에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으며,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던 조선은 속수무책이었고, 전란은 필연적으로 백성을 희생을 가져왔다. 전쟁 초기에는 부산진 첨사 정발을 중심으로 한 부산진 전투, 부사 송상현을 중심으로 한 동래선 전투 등 영웅적인 저항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한 패전이었다. 지난 2005년 동래성에서는 충격적인 발굴이 있었다. 지하철 공사 과정에서 수많은 유골이 발굴된 것. 동래성 해자에서 발굴된 120여 구의 유골, 이들이 의미하는 동래성 전투의 그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본다.

동래성의 충격적 발굴현장
2005년 6월 부산 지하철 3호선 수안동 역 주변에서 참혹한 유골들이 발견됐다. 이곳은 과거 동래성 자리다. 예리하게 잘려나간 두개골과 구멍 난 유골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차에 이뤄진 발굴에 따라 최하 81개체에서 최대 114개체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유골뿐만 아니라 수많은 화살촉과 칼. 창날, 깍지, 찰갑, 투모들과 목익이 발견된다. 목익이란 나무 막대기를 뾰족하게 깎아 해자 바닥에 거꾸로 꽂아두는 방어시설로 만약 적군이 성으로 접근하기 위해 해자로 들어설 경우, 이들의 진격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이다. 해자에 설치되는 나무 막대기인 목익이 수천 개가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동래읍성의 해자는 놀랍게도 목익과 함께 도심의 ‘지하’에 존재하고 있었다. 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해자가 유골들의 떼무덤이 되고만 것이다. 또한, 2미터 깊이의 해자에서는 각종 무기류가 발굴되었으며, 함께 발굴된 투구 안에는 ‘동래진’이라는 명문이 뚜렷했다. 방어시설인 해자에서 무기를 비롯해 생활용품까지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이는 바로 이 동래읍성 해자가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다는 증거인 것이다. 치열한 전투 도중 수많은 무기류가 해자에 빠졌고, 전투 이후 노략질 과정에서 수많은 생활용품들이 해자로 던져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대체 이 유물과 유골들은 어느 시대, 누구의 것일까. 동아대 고인골 전문가인 김재현 교수의 도움을 받아 유골을 심층 분석한 결과 동래성에서 출토된 유골은 최소 남자 59개체, 여자 21개체, 유아 1개체이다. 치아 상태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치아분석 결과 이들은 영양 상태가 부족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신장 체크를 해보면 당시 일본 에도인들과 비교해볼 때 큰 편이었다. 남녀 모두의 신장이 당시 일본인에 비해 약 10센티미터 정도 큰 것으로 밝혀졌으며, 동래성 유골은 모두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두개골 분석 결과, 일본인의 것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이들의 연령대별 분석결과 20대에서 40대까지 골고루 분포하고 있었다. 특히 구멍 뚫린 유골의 경우 5세 미만 유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동래성엔 무슨 일이 있었나?

   
▲ 고인골 전문가 김재현 교수팀(동아대)
1592년 음력 4월 13일, 일본군 대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처음 조선은 이들이 단순한 왜구인줄 알았으나 이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정예병 18만이었다. 도요토미는 조선을 차지한 다음 명나라까지 호언장담했고, 내년 설은 북경 자금성에서 맞을 것이라고 큰소리 친 인물이었다. 100년간의 내전으로 단련된 최정예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 앞에서 조선민 관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제1선봉대 고니시 유키나가, 제2선봉대 가토 기요마사군이 속속 부산포로 상륙했고, 부산진과 동래진이 차례로 무너졌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을 공격했던 일본군은 조선 침공의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군 1만8천이었다. 이들은 동래성 이후 대구, 상주, 문경을 거쳐 한양을 제일 먼저 점령하고 평양까지 진격했으며, 전쟁 막바지인 순천에서 이순신 함대와 마지막까지 대치했던 부대였다. 동래성 안에도 연일 아비규환이 벌어졌고, 최대 5천여 명의 조선인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치열했던 동래성 전투 상황을 기록한 <동래부 순절도>. 선조 25년(1592)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커다란 국난을 맞이하여 끝까지 항전한 동래 부민들의 민족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림을 자세히 보면 동래성 순절도의 지붕위에서 왜군을 향해 기와를 던지는 두 명의 부녀자를 볼 수 있다. 성 밖에서는 왜군 하나가 커다란 나무판자를 들고 있고, 나무판자 두 개를 내세우고 있다.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겠다면 길을 빌려 달라’는 목패였다.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빌려 달라, 이것이 일본이 내세운 전쟁명분이었던 것. 조선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명분이었고, 동래부사 송상현은 답을 목패에 적어 일본군 진영으로 내던지고 있다.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줄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이어 전투가 시작되고, 동래성은 동북쪽 성벽이 무너지면서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전투는 한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끝났다고 기록돼 있다. <동래부 순절도>에는 동래성 최후의 순간이 잘 묘사돼 있다. 부사 송상현은 최후를 직감하자 관복으로 갈아입었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네 번의 절을 올렸다.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마지막 예의였으며, 그런 다음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송상현이 북향 사배를 하는 곳을 향해 필사적으로 담을 넘어오는 여인이 순절도에 그려져 있다. 그녀는 끝까지 송상현 옆으로 가고자 했으며, 그 여인은 송상현을 모시던 관기 ‘금섬’이었다. 금섬 역시 담을 넘다가 죽임을 당했다.

유골이 말해주는 것들

   
▲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두개골의 모습
왜군에게 함락당한 동래성은 최대 5천여 명의 조선인이 죽임을 당하고, 그 일부는 바로 해자에 버려졌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전투 도중에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이었을까. 유골은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주었다. 고고학 전문가들에게 의해 유골을 분석한 결과 유골의 두개골에서는 다양한 날카로운 상흔들과 구멍이 발견된다. 아래턱이 잘려나간 남자의 유골은 정면에서 칼을 맞고 고개를 돌린 상황에서 2차 가격을 당하고 다시 후두부에서 공격당해 살해당한 남자의 유골로 판명된다. 손상된 유골은 그가 살해당한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움푹 꺼진 함몰 자국 역시 학살의 개연성을 더 높여준다. 중년 남성의 것으로 판명된 함몰 두개골, 만약 희생자가 선 상태로 움직이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정확하게 위에서 내리칠 수 없는 것이었다. 희생자를 꿇어앉혀 놓고 근거리에서 위에서 아래로 직선으로 내리친 함몰자국이었으며, 이는 전투상황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20대 젊은 여성의 유골은 주저앉혀진 상태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가해자에 의해 세 차례나 두개골이 칼로 찔린 후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또 다른 20대의 여성의 것으로 판명된 두개골은 아예 얼굴 부분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 여성은 얼굴에 직접 칼을 맞았던 것이다. 가슴 아프게 하는 두개골도 있었다. 5세 어린이의 유골이 그것이다. 유아 두개골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으며, 총알이 뒤 쪽에서 뚫고서 나간 흔적을 보인다. 갑옷을 관통할 정도의 위력이 있는 조총탄이 유아의 머리를 관통한 것이다. 대부분의 유골들은 전투 이후에 처형,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은 조선인 말살 전쟁

   
▲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두개골의 모습
다섯 살 어린이의 머리에 조총을 쏜 일본군, 20대 여성을 주저앉혀 놓고 세 차례나 칼을 휘두른 일본군은 왜 이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정황상 조선인 희생자들은 전투가 끝난 다음 학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래성처럼 참혹했던 양민 학살은 비단 동래성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충신, 열녀, 효자 등을 기록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보면 조선 백성들의 피해 상황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일본군을 피해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달고 자결한 여인들이 많이 나온다. 목이 사라진 채 몸뚱이만 누워 있는 시신 그림도 즐비하다. 일부에서는 임진왜란은 조선의 도자기를 차지하기 위한 도요토미의 문화 침략 전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쟁 상황을 보면 이런 주장에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다. 도자기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그 목적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 실제로 수많은 조선의 사기장들이 일본으로 납치되거나 자발적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백성들이 참혹한 죽임을 당했기에 단순히 도자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1597년 정유재란 이후에도 조선 군민에 대한 학살은 계속되었다. 전사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살아있는 조선인의 코를 베기도 했다. 또 다른 기록인 영산방문에서 반항하거나 피하면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이는 정유재란을 일으킨 도요토미는 조선군의 코를 베라고 명령을 내린 것. 도요토미의 명령은 전장에서 조선인을 얼마나 많이 죽이느냐가 그의 관심사였다. 전장의 왜장들은 조선인의 코를 베서 도요토미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도요토미는 코를 잘 받았다는 영수증을 발행하면서 ‘수고했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살인과 방화는 일본군에게 공식적으로 허용된 행위였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배경에서 처음 자행된 학살의 현장이 동래성이었고, 일본군들의 만행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 동래성의 해자임을 보여주는 수천 개의 목익
왜인들은 왜 이토록 처절하게 조선인을 말살하려고 했을까. 동래성 전투 후 왜군들은 수많은 조선인들의 시신과 일상용품까지 모조리 다 해자에 버렸다.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14년 뒤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이 시로 남겼다. “온 고을 사람 한꺼번에 성 안에서 피로 물들고...모두 죽어서 곡할 자 없는 이 그 얼마인지 모른답니다”(1608년 동래부사 이안눌의 詩 동래맹하유감 中). 임진왜란은 조선인 말살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조선판 킬링필드’, 동래성 유골들이 400여년 만에 세상으로 나와 우리에게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NM (참조. 「한국사를 바꿀 14가지 거짓과 진실」)

신세영 기자 ssy@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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