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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3.07.10  23:5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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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고유모델이자 양산형 자동차 ‘포니’의 등장과 현대차의 성장사

현대자동차가 자사 헤리티지(옛 유산) 강화에 공을 쏟고 있다. 2023년 5월 18일 이탈리아에서 가진 ‘현대 리유니언’ 행사에서 49년 만에 복원한 ‘포니 쿠페’ 콘셉트카를 공개한 데 이어 6월 9일에는 국내 첫 양산형 자동차이자 브랜드 최초 독자 모델인 ‘포니’의 역사와 실제 차량을 살펴볼 수 있는 ‘포니의 시간’ 전시회(6월 9일~10월 8일)를 서울 강남구의 ‘현대 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개최했다. 대한민국 최초 고유모델인 ‘포니’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산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현대차가 어떻게 성장해 급기야 세계 3위 자동차회사로 도약했는지 그 성장사를 살펴본다.

국산차 개발, 외국업체와의 기술제휴 방식으로 시작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의 본격적인 출발은 1955년 8월 출시된 ‘시발’ 자동차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출발’이라는 의미로 이름 붙여진 ‘시-바ㄹ(始發)’ 자동차는 수공업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본격적인 자동차 산업의 태동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국내 인력이 직접 조립한 자동차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8년간 생산된 3000여대가 길거리를 질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지는 않다. 1962년 8월 생산을 시작해 ‘시발’차의 문을 닫게 할 정도로 2년 동안 상종가를 쳤던 ‘새나라’ 자동차는 근대적 생산라인을 갖춘 대규모 조립공장을 세웠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새나라’ 자동차 역시 일본 닛산의 ‘블루 버드’ 승용차를 사실상 완제품이나 다름없는 반제품 상태로 들여와 조립했기 때문에 순수 국산자동차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에도 국산 자동차 개발 노력은 거의 예외없이 외국업체와의 기술제휴에 의한 생산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진자동차는 1966년부터 ‘도요타 코로나’를, 아세아자동차는 1970년부터 ‘피아트124’를 조립·생산했다. 1967년 12월에 설립된 현대자동차도 포드자동차의 영국법인이 생산해온 ‘코티나’ 2세대 모델을 1968년 11월부터 조립·생산해 국내 소형승용차 시장은 3파전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은 연간 2만대였고 대부분은 영업용 차량(택시)으로 팔려나갔다. ‘현대 코티나’는 경쟁 모델들보다 큰 차체와 넉넉한 출력이 강점이었지만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고장이 잦다는 게 문제였다.
현대자동차는 자체 기술력 없이 외국 기업에 의존하는 조립 생산자의 한계를 느끼고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지형에 맞는 고유모델을 독자생산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는 내수보다는 수출을 위한 정주영 회장의 포석이기도 했다. 현대자동차는 고유모델 생산 전 단계로 1970년 5월 포드자동차와 새로운 합작사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포드자동차가 합작공장 설립을 차일피일 미뤄 합작회사 설립은 1973년 1월 무산되었다.
현대는 국내 최초로 고유모델을 개발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고유모델을 개발하려면 엄청난 자금이 드는 데다 5만대를 팔아야 겨우 수지타산이 맞기 때문에 사내외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뜻을 굽힐 정주영 회장이 아니었다. 원천기술 문제는 1973년 9월 엔진(1238cc 새턴 엔진)을 비롯 주요 부품을 들여오기로 일본의 미쓰비시와 기술협조 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풀고 엑셀러레이터와 트랜스미션 등 주요 부품 제작 기술은 영국에서 들여오기로 했다.

‘포니’ 생산으로 고유모델 자동차 생산국으로 발돋움

문제는 디자인이었다. 당시 국내 자동차 산업은 초창기 단계였고 신차를 디자인할 수 있는 인력은 전무했다. 현대자동차는 유럽에서 차체 디자인을 해줄 회사를 수소문한 끝에 이탈리아의 ‘이탈 디자인’을 선택했다. 이탈 디자인은 1968년 설립된 신생 회사였으나 창업자인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청년기부터 이탈리아 피아트의 다양한 차종을 비롯해 독일의 국민차 폭스바겐 VW 골프를 디자인하는 등, 성공 가도를 달리던 30대의 젊고 유망한 디자이너였다. 현대자동차는 주지아로가 1973년 10월 완성한 4종의 디자인 중 곧 ‘포니’로 이름 붙여질 ‘꽁지 빠진 닭’ 모양의 디자인을 선택했다.
이후 과정은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1974년 2월 자동차 설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3월부터는 프로토타입(시제품) 제작에 착수했다. 1974년 7월에는 연간 생산능력 5만6000대 규모의 자동차공장을 울산에 착공하고 같은해 10월에는 포로토타입으로 제작한 ‘포니’와 콘셉트가 ‘포니 쿠페’ 시제품을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자동차박람회(모터쇼)에 출품했다. 토리노 모터쇼에는 16개국 65개 회사가 차량 245대를 출품했는데, ‘포니’는 자동차 불모지 한국에서 출품한 고유모델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사실 주지아로는 포니와 포니 쿠페 말고도 이후 현대차가 생산한 프레스토, 쏘나타 1, 2도 디자인했다. 1981년 영화 ‘백 투 더 퓨처’에 등장하는 타임머신 자동차 ‘드로리안’도 그의 작품인데, 포니 쿠페 디자인을 하며 받은 영감을 이때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 현대차가 ‘포니’ 첫 차의 생산 순간을 기념하고 있는 모습.

1975년 12월 1일 마침내 울산 자동차 제1공장이 준공하고 1976년 1월 포니가 본격적으로 생산됨으로써 우리나라는 고유모델 자동차 생산국으로 발돋움했다. 현대차에 따르면 1976년 1월 26일부터 계약을 받아 2월 29일 주문 고객에게 처음 출고된 당시 포니의 가격은 227만원(자가용), 204만원(영업용)이었다. 서울 흑석동의 기와집(82.6㎡) 한 채 가격이 250만~350만 원일 때였다.
여기서 잠깐. 현대차가 기념하는 첫 출고일은 2월 29일이다. 그런데 당시 매일경제에 따르면 3월 5일 혹은 3월 2일로 되어 있다. <소형승용자 포니, 5일부터 출고>(1976년 3월 3일자) 제목의 기사에는 “현대자동차가 개발한 소형승용차 포니가 5일부터 본격 출고될 예정”이라고 쓰여있고, <경기 회복 힘입어 승용차 수요급증>(5월 4일자) 제목의 기사에는 3월 2일로 되어있다. 1976년 매일경제 다른 기사에도 일자는 없지만 3월 출고로 나온다. 그리고 2월 29일이 일요일이라는 점에서 현대차는 이 역사적인 날자를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는 1974년 10월 17일 첫선을 보인 기아의 ‘브리사’가 시장 점유율 55.5%(1975년)를 차지하며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브리사는 일본 마쓰다의 ‘패밀리아’ 보디를 기초로 국산 엔진을 얹어 1974년 10월부터 국내 최초의 일관공정 시스템을 통해 생산을 시작했다. 국산화율은 포니보다도 높았지만 결국에는 ‘포니’에 밀려 1년을 조금 넘기다 무너졌다.

10년간 대한민국 1위 모델로 자리매김

포니는 ‘대량 생산’을 목표로 개발된 첫 ‘국산 고유 모델’이라는 점에서 가치와 진가를 인정받았다. 현대자동차 설명에 따르면 당시 대량생산이 가능한 각국 브랜드의 고유 모델을 기준했을 때, 한국은 기존 8개 자동차 공업국(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독일, 일본, 스웨덴, 체코)에 이어 9번째 고유 모델 출시 국가였다.
포니는 출시되자 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포니가 출시된 1976년 당시, 국내 승용차 판매 대수는 총 2만 4618대였는데 포니 단일 모델이 그해 1만 726대가 판매되면서 43.6%의 점유율을 차지했다. 포니2가 출시된 1982년에는 국내 승용차 판매 점유율의 67%(포니1, 2 합산 기준)를 차지했다. 이처럼 포니는 출시 첫해부터 포니1이 단종되는 1985년까지, 약 10년간 대한민국 1위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1987년 8월 전국에 등록된 77만5900대의 자동차 가운데 50%나 되는 37만6000대가 포니 계열(포니1, 2, 포니 왜곤, 포니 픽업)의 자동차인 것으로 조사되어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포니는 출시 수개월 만에 해외로도 수출되었다. 1976년 2월 중순,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 현대건설에 포니 15대를 보내 시험 운행토록 한 것을 시작으로 1976년 6월 남미 에콰도르에 포니 5대를 수출한 것을 비롯 1976년 한 해 동안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 등지에 1019대의 포니와 포니픽업 등을 팔았다. 첫 수출국인 에콰도르로 떠날 때 바나나를 실은 배를 이용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에콰도르 무역 규제상 바나나를 수출했다는 면장이 있어야 자동차를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7년에는 7,427대를 30개국에, 1978년에는 1만 8,317대를 40개국에 수출했다. 수출 지역도  아시아와 유럽 등으로 확대되었다. 현대자동차의 수출 성과에 고무된 정부는 1979년에 자동차 산업을 10대 수출전략산업으로 선정했다. 1982년 7월엔 단일 차종으로는 국내 최초로 누적 생산 30만 대를 돌파했는데 당시 수출 대상국은 약 60개국에 달했다.

현대차, 2022년 사상 첫 글로벌 판매 3위에 올라

포니의 후속모델로 1985년 생산을 시작한 ‘포니 엑셀’과 ‘프레스토’가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 처음 상륙한 것은 포니 생산 후 10년만인 1986년 2월이었다. 엑셀과 프레스토는 1986년 16만8000대, 1987년 26만3000대가 미국에서 팔려나가 1987년 미국 전체 수입 소형차 판매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돌풍을 일으키며 한국차의 경쟁력을 세계에 과시했다. 하지만 낮은 품질과 서비스 등으로 결국에는 미국 소비자의 신뢰를 잃으면서 점차 하향곡선을 그렸다. 이후 포니는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조롱을 받았다. 정비망을 구축하지 못하고 품질관리도 엉망이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세계 자동차업계의 대형화가 세계적인 흐름으로 인식되고 있을 때는 위기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경쟁력은 없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선두주자였다. 그랜저(1986년), 쏘나타(1988년), 엘란트라·스쿠프(1990년), 쏘나타2(1993년), 엑센트(1994년), 아반떼(1995년), 아토스(1997년) 등을 연이어 생산하고 1991년 한국 최초로 알파엔진을 독자 개발했으며 1996년 남양종합기술연구소를 준공했다.
현대차가 글로벌 시장에서 기존의 이미지를 뒤집는 기반을 마련한 것은 IMF 때이던 1998년 12월 기아차를 인수하고 나서였다. 기아차와 현대차를 합쳐 연매출이 20조나 되어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은 1998년 12월 3일 정몽구의 현대·기아자동차 회장 취임이었다. 정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품질 경영을 경영철학의 전면으로 내세웠다. 취임 직후 서울 본사에 품질상황실을 만들어 24시간 고객 민원을 받게 했다. 품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산라인을 중단하거나 신차 출시 일정을 미루면서까지 품질 경영을 다그쳤다.
이후 현대·기아차의 성장속도는 눈부셨다. 정몽구 회장이 취임한 1998년에는 143만대를 팔아 글로벌 12위였으나 이후 210만대(1999년), 257만대(2000년)를 팔아 글로벌 10위에 올라섰다. 이후에도 377만대(2005년), 464만대(2009년)를 거쳐 2010년 575만대를 판매해 마침내 GM, 폴크스바겐, 도요타, 르노-닛산에 이어 글로벌 빅5에 진입했다. 2021년 GM을 제치고 4위에 오르더니 2022년 684만대를 판매해 도요타·폴크스바겐에 이어 사상 첫 글로벌 판매 3위에 올랐다.
한편 1974년 10월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했던 콘셉트카 ‘포니 쿠페’는 포니가 1976년 1월 출시되어 국민차 명성을 얻은 것과 달리 1979년 2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글로벌 경기 침체와 대량생산 계획 취소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모터쇼에 출품했을 때의 차까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히 포니 쿠페를 디자인한 주지아로의 창고에 포니 쿠페 설계도와 차 사진이 있는 것을 알고 주지아로에게 복원을 맡겨 2023년 5월 차체와 엔진, 실내까지 1974년 당시와 완전히 똑같이 재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중국의 티베트 침공과 병합 그리고 달라이 라마
 
‘문화 교류’를 명목으로 티베트를 다녀온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티베트 인권 탄압 문제에 대해 “70년 전 일”이라고 했다. 방중단 단장이었던 도종환 의원은 6월 19일 CBS라디오에서 ‘티베트가 인권 탄압이 심각한 곳인데 왜 갔느냐’는 지적에 대해 1951년 중국의 티베트 병합, 1959년 티베트 봉기 이후로는 인권 탄압 문제가 없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티베트와 중국 간의 역사적 관계와 중국의 티베트 병합 과정을 살펴본다.


티베트가 중국과 교류를 시작한 것은 당나라 시대

티베트는 대대로 신정통치를 해온 역대 ‘달라이 라마’들이 쇄국정책을 펴고 히말라야, 카라코람, 곤륜산맥에 둘러싸인 지리적 환경으로 오랫동안 세상 밖의 세상으로 존재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최고의 정치·종교 지도자를 일컫는 말로 티베트어로는 관세음보살이라는 뜻이다. 기록상 서양의 이방인이 티베트에 닿은 건 12세기 나바라 왕국의 율법자 벤자민을 시작으로 18세기까지 몇몇 선교사들이 전부였다.
티베트가 중국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한 것은 중국 당나라 때였다. 중국이 티베트를 가리켜 지칭한 토번(吐蕃)의 시조는 송첸캄포였다. 토번은 실크로드를 장악, 정복전쟁에 나설 정도로 강력했다. 해발 3700m의 라싸를 수도로 삼고 포탈라궁을 지었으며 인도에서 불교와 문자를 도입했다. 당 태종은 이런 티베트를 부마국으로 삼기 위해 문성공주를 송첸캄포에게 시집보냈다.
당나라 이후 티베트는 초원의 유목세계와 거래했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티베트 불교의 수장 팍빠를 스승으로 모셨다. 15세기 말에 등장한 다얀 칸이 알타이 산맥 동쪽의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그의 손자 알탄 칸이 명나라의 북경을 위협할 무렵, 티베트에서는 승려 총카파가 신흥 개혁교파인 겔룩파(派)를 창시했다. 겔룩파는 세력이 급성장했다. 1578년 몽골의 알탄 칸이 겔룩파의 지도자 소남 갸초에게 바다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란 뜻의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8세기 말 인도 지배체제를 구축한 영국은 19세기 중엽 네팔·부탄을 넘보더니 급기야 1888년 티베트를 공격했다. 청은 영국에 티베트에서의 배타적 특권을 양보하고 명목상의 주권을 지켰다. 때를 기다리던 청조는 영국의 식민지배가 약화된 틈을 타 1906년 티베트 왕(제후)의 지위를 되살리고 한족을 관료로 파견했다. 종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2인자 판첸 라마의 통치권은 박탈했다. 달라이 라마 13세는 영국의 보호를 받으며 인도로 물러났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다음해 청조의 황제 지배체제가 무너졌다. 각 성은 독립 열풍에 휩싸였다. 인도에 머물던 달라이 라마 13세는 인도 총독의 지원 아래 1912년 4월 측근 세력을 티베트의 중심지 라싸에 파견해 한족 관료와 중국군을 축출한 뒤 그해 6월 라싸로 귀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자 1912년 중화민국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가 티베트를 공격했다. 하지만 티베트에 지분을 갖고 있던 영국이 “위안스카이 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며 가로막았다. 영국의 개입으로 티베트군은 티베트의 중심지 라싸를 지킬 수 있었다. 중국은 이후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 시달려 티베트를 관심에 두지 못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1940년 5세 나이로 즉위

그러던중 1935년 7월 6일 티베트 동북부 탁체르의 가난한 농가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2살 되던 해인 1937년 하인의 모습으로 변장한 라마교 승려 일행이 아이의 집을 방문했다. 아이는 승려가 목에 걸고 있는 염주가 자기 것이라며 달라고 졸라댔다. 염주는 4년 전 세상을 떠난 13대 달라이 라마의 염주였다. 승려는 북과 지팡이로도 아이를 시험했으나 아이는 그때마다 13대 달라이 라마가 쓰던 염주만을 가리켰다.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가 속세의 생을 마감하고도 열반에 들지 않고 2~3년 후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환생해 어디선가 살고 있을 달라이 라마를 승려들이 찾아다닌 것이고 몇 번의 시험을 거쳐 아이가 달라이 라마임을 확인한 것이다. 아이는 1939년 11월 23일 4세 나이로 출가했다. 라모 톤둡이라는 속명 대신 텐진 가초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1940년 2월 22일, 5세 나이로 즉위식을 열고 제14대 달라이 라마(1935~ )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 무렵  티베트는 엄연한 독립국가였다. 달라이 라마의 즉위 후 티베트는 어린 달라이 라마를 대신해 레팅 린포체가 섭정했다. 하지만 린포체가 복잡한 여성문제로 구설에 오르고 귀족들의 권력투쟁이 갈수록 격화하면서 티베트의 기운과 기상이 약화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의 중국이 그 틈을 이용했다. 중국 정부는 1950년 1월 “티베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이며 티베트 정부는 외교사절 파견의 권한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전 세계가 6·25전쟁에 주목하고 있던 10월 7일 티베트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티베트 전역을 침공했다. 브래드 피트가 출연한 ‘티베트에서의 7년’은 이 당시 중국의 티베트 침공을 다룬 영화다. 티베트군은 침공에 맞서 싸우다가 5,700여 명이 죽고 2,000여 명이 투항했다.
이런 비극적인 결과에도 당시 국제사회의 눈길은 온통 한국전쟁에 쏠려 있어 중국에 적대적인 미국 조차도 “중국 공산주의자의 티베트 침략에 맞서는 티베트 정부에 비밀 지원을 약속한다”는 내용만 전달할 뿐 직접적으로는 티베트 침공에 관여하지 못했다. 다만 중국의 침공 후인 1950년 11월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의회의 요청에 따라 15세의 어린 나이로 섭정을 버리고 친정에 임했다. 티베트는 중국의 침공을 물리쳐 달라고 유엔에 중재를 요청했으나 대다수 국가는 티베트의 법적 지위가 불분명해 유엔에서 토의할 문제가 아니라며 등을 돌렸다. 결국 티베트는 1951년 5월 23일 중국과 ‘티베트의 평화 해방에 관한 17조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에서 양측은 중국이 외교권과 군사권 등을 계속 유지하고 티베트인은 자치권을 갖는다는 데 합의했다. 이로써 티베트는 독립국가가 아닌 민족자치를 시행하는 중국의 한 지방으로 전락했다.
17조 협정 체결 후, 중국은 수도 라싸를 포함한 티베트 전역에 인민해방군을 주둔시켰다. 그러나 티베트 인민들은 독립을 요구하며 저항했다. 중국 정부는 1954년 7월 북경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한 달라이 라마를 일방적으로 부상무위원장으로 임명한 뒤 티베트인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파국을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 1956년 4월에는 티베트 자치 준비위원회를 설치, 중국의 지도력을 강화하고 귀족제와 사원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자 기존의 지배계급에서 불만과 동요가 확산해 인도 등으로 망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티베트 국경에 인접한 인도 마을 칼림퐁은 이같은 망명자들의 집결지였다. 미국, 대만, 인도의 첩보기관원들은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며 민중봉기를 부추겼다. 특히 미국의 CIA는 티베트인에게 특수훈련을 시킨 뒤 티베트로 잠입시키는 등 적극적이었다. 봉기는 1956~1957년에 걸쳐 동부에서 서부로 확대되고 1959년 3월 10일 마침내 수도 라싸에서 대대적인 봉기로 발전했다. 이 때 수천명의 티베트인이 죽고 승려들이 투옥되었으며 사원들이 파괴되었다.

▲ 1950년 티베트를 침공한 중국 인민해방군.

중국의 인민해방군, 총칼로 티베트인들의 저항을 진압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총칼로 티베트인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한편 달라이 라마를 체포하기 위해 달라이 라마의 여름궁전인 노블링카궁을 겨냥했다. 티베트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보호하기 위해 노블링카궁을 에워싸고 있던 3월 17일 밤, 달라이 라마는 평민복으로 갈아입고 궁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히말라야를 넘는 2,600㎞의 대장정 끝에 3월 31일 인도에 도착, 망명을 요청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도와 중국 간의 불화가 시작되었다. 미국과 소련까지 인도를 지원함으로써 중소분쟁이 격화되는 등 티베트 봉기는 국제정치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달라이 라마는 1960년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설립한 망명정부를 거점으로 삼아 고난의 독립 투쟁을 전개했다. 티베트 본국의 저항은 1962년 3월 완전히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만 명이 살해되고 10만여 명이 인도 등지로 망명했다. 중국 정부는 1965년 9월 티베트를 서장자치구로 지정, 중국의 정규 행정체제로 편입했다. 이듬해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6,200여 개의 티베트 라마사원을 파괴하고 티베트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짓밟아버렸다. 1980년대 들어 등소평 등 개혁파가 실권을 장악한 뒤 중국 정부가 유화정책을 폈으나 그래도 티베트인의 반중 감정은 누그러지지 않고 분리독립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달라이 라마는 지금도 다람살라를 거점으로 해외를 돌며 티베트의 독립을 외치고 있으나 중국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자신을 초청하는 곳이 있으면 전 세계 어디든지 찾아가지만 중국 정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약소국들은 그의 입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한국도 그런 국가 중 하나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밖에서 독립외교를 펼치는 동안 티베트 안에서는 승려들이 목숨을 건 분신 투쟁을 벌였다. 특히 2008년 3월에 촉발된 유혈 시위 후 분신자살이 급증해 2013년 2월 100번째 분신 시도가 있었고, 분신한 티베트인이 지금까지 200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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