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박성서 평론] ‘동숙의 노래’ 문주란의 삶과 노래

기사승인 2025.01.14  13:52:00

공유
default_news_ad1
▲ ‘동숙의 노래’로 등장하자 신인여자가수상을 수상하며 스타덤에 오른 신데렐라, 문주란 독집 음반.

국내 여가수 중 최저음을 구사하며
60년간 ‘개성시대’를 질주하다

국내 여가수 중 최저음을 구사한다는 가수 문주란.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여가수들에 대해 한 작곡가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미자는 식물성, 패티김 김상희는 동물성, 그리고 문주란 정훈희는 광물성’이라고. 

그만큼 이 10대 소녀 가수 문주란의 등장은 우리나라 가요계에 없던 새로운 목소리였다. 
국내 여가수 중에서 가장 낮은, 최저음을 구사하는 문주란, 음색의 톤과 무게감이 남다른 만큼 그에 따른 에피소드도 많았다.

1966년 ‘동숙의 노래’로 등장하자마자 신인여자가수상을 수상하며 스타덤에 오른 이 신데렐라는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파격적인 음색만큼이나 숱한 화제를 몰고 왔다. 지금까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적이 없을 정도로 그만의 독특한 음악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 가수 문주란에 대한 몇 가지 에피소드.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데뷔곡이자 대표곡인 ‘동숙의 노래’, 그 이전에 감춰진 노래들

‘1. 너무나도 그 님을 사랑했기에/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놓고/흐느끼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음— 때는 늦으리.

2. 임을 따라 가고픈 마음이건만/그대 따라 못 가는 서러운 이몸/저주받은 운명이 끝나는 순간/임의 품에 안기운 짧은 행복에/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음-- 뜨거운 눈물. -동숙의 노래(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문주란 노래, 1966년)’

1966년에 개봉된 영화 ‘최후 전선 180리’의 주제가로,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한 심정을 절절히 그린 노래다. ‘동숙’은 영화 속 여주인공 이름, 배우 태현실이 ‘동숙’으로 분해 열연했다.

▲ 전성기 시절 문주란 발표 음반들.

동명여중 시절, 부산MBC 아마추어 경연대회 결승에서 우승컵 거머쥐어

어느덧 데뷔 60주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는 가수 문주란, 이 10대 소녀의 등장은 출발부터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가 처음 섰던 무대는 우리나라 최초 상업방송, 부산mbc의 신인가수 등용문 ‘아마추어 스테이지’ 프로그램에서였다.

60년대 초 무렵, 당시 부산mbc 전속가수였던 ‘덕수궁 돌담길’의 가수 진송남씨는 문주란을 이렇게 회고한다.

“어느 날 '아마추어 톱싱거대회' 신청자 중에 교복을 입은 앳띤 소녀가 왔어요. 너무 어려 ‘학생은 곤란하니 나중에 졸업하고 오라’고 돌려보냈죠. 어차피 어려서 방송은 불가할 듯 싶었던 거죠. 그 무렵 신인노래자랑 본선 출전 예심을 당시 전속가수들이 매주 한 사람씩 돌아가며 심사를 봤어요. 1~2백 명씩 한꺼번에 몰려드니 시간 상 몇 소절씩만 무반주로 듣는 게 고작이었지요. 그렇게 예심을 마치고 본선에 진출할 인원이 선정됐는데, 이때 한 청년이 다가와 방금 그 여학생의 오빠라며 노래를 한 번만 들어봐달라고 사정을 해요. 해서 결국 마지못해 노래를 시켰지요”

노래가 시작되는 그 순간, 피아노 반주를 하던 진송남씨의 눈이 커졌다. 

“자그마한 몸집에서 도저히 10대 소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저음의 허스키보이스를 구사하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어요. 다들 깜짝 놀랐죠. 그래서 부랴부랴 이미 선정된 다른 사람을 다음 주에 꼭 출연시켜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자리에 대신 이 여학생을 끼워 넣었죠.”

이때가 63, 4년 무렵이었는데 결국 이 10대 소녀는 주말 장원을 거쳐, 월말대회, 연말 최종결선까지 올라 ‘보고 싶은 얼굴(현미 노래)’을 부르며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 소녀가 바로 당시 동래여중을 다니던 문필연, 바로 문주란씨다. 특히 가슴을 훑는 듯 구사하는 저음이 매력적이었다고 진송남씨는 회고한다.

나이와 작은 체구를 뛰어넘는 폭발적인 가창력의 주인공, 필연의 노래에 대한 집념은 예서 멈추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부산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유금춘(본명 김원출, 2005년 타계)씨를 찾아가 노래 지도와 함께 첫 취입도 한다. 

동래여중 시절, 문필연이라는 본명으로 발매된 음반도 있다. 부산에 있는 심포니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되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작곡가 유금춘씨가 생전에 가진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1964년도였어요, 당시엔 연습실이 따로 없어 주란이네 집에서 연습을 시켜야 했어요. 그런데 부친이 워낙 완고해 출타 후에야 겨우 연습시킬 수 있었고 그때마다 동생 준호가 망을 보았어요. 얼마 후 내가 전속으로 있던 부산 오메가레코드사에서 두 곡을 취입, 녹음까지 마쳤는데 정작 음반으로 제작되지 못했죠. 이러한 목소리는 절대 음반이 팔리지 않는다며 박상석 사장이 극구 반대를 했던 거죠.”

결국 문주란의 가창력이 그냥 묻히는 것을 아깝게 여긴 작곡가 유금춘은 1965년, 직접 레코드사를 설립한다. 바로 심포니레코드사다. 이 심포니는 단 한 장의 음반만을 출시하는데 이 음반에 담긴 노래가 문주란이 부른 ‘남자는 모두 그런가요(유금춘 작사, 작곡)’다, ‘문필연’이라는 본명으로 발표되었다. 가수 문주란이 본명으로 발표한 유일한 노래이기도 하다.

이듬해 문필연은 상경, 이름을 ‘문주란’으로 바꾼 후 ‘동숙의 노래’를 히트시키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렇게 상황이 급변하자 오메가에서는 뒤늦게 부랴부랴 문주란의 목소리로 취입된 첫 노래 ‘내 사랑아 안녕’과 ‘크리스틴 킬러’를 서둘러 출시한다. 물론 이때 가수 이름을 ‘문주란’으로 바꿔 출시했다. 

▲ (위) 동래여중 시절 문필연 양의 첫 취입곡 ‘남자는 모두 그런가요’ 수록 음반. (아래) 녹음한 지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된 ‘내 사랑아 안녕/크리스틴 킬러’ 수록 음반.

영국과 소련, 두 나라를 뒤흔든 이중 스파이 ‘크리스틴 킬러’소재로 노래

문주란이 첫 취입한 노래 ‘크리스틴 킬러’는 당시 정치 스캔들을 일으킨 영국 여성 크리스틴 킬러를 소재로 한 노래다,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문주란의 무거운 저음이 그야말로 압권이다.

‘크리스틴 킬러 그대가 어릴 때부터/사랑했네 사랑했네/만디보다 너를 사랑하기에 사랑하기에/꽃과 캔디를 보내겠네/그대를 올드 베일리에서 보았을 때부터/매일 그대 생각이네/크리스틴 킬러 그대가 어릴 때부터/사랑했네 사랑했네. -크리스틴 킬러(유금춘 작사, 작곡, 문주란 노래, 1966년 발표)’

1960년대 격동의 냉전 시대, 영국과 소련 두 나라의 정계를 뒤흔들며 이중 스파이로 몰렸던 매력적인 외모의 여성, 크리스틴 킬러(Christine Keeler, 1942년 2월 22일 ~ 2017년 12월 4일)의 이름을 차용, 그의 삶을 소재로 노래했다.

녹음한 지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이러한 일화에서처럼 그의 지독한 허스키 음색은 오히려 금기시되기도 했다. 

▲ 작곡가 박춘석과 문주란. 영화 주제가 ‘타인들’, ‘파란 이별의 글씨’, ‘내 몫까지 살아주’ 음반.

잇달아 발표하는 드라마 주제가, 영화주제가로 스타덤에 올라

가요계의 신데렐라로 부상한 그는 계속해서 당시 최고의 히트 메이커, 작곡가 박춘석과 손잡고 드라마 주제가 ‘타인들’을 비롯해 많은 드라마, 영화 주제가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신봉승 원작의 MBC 라디오 드라마 ‘타인들’의 주제가 역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 당신과 나는 남남으로 만났다가/상처만 남겨놓고 남남으로 돌아섰다/호수의 백조처럼 내가 가는데/사랑을 막아놓고 발길을 묶어놓고/진종일 진종일 비가 나린다.

2. 당신과 나는 남남으로 만났다가/마음만 주고받고 남남으로 돌아섰다/흐르는 구름처럼 내가 가는데/발길을 묶이고 사랑은 막혔어도/백조는 목이 메어 울지 못한다. -타인들(신봉승 작사, 박춘석 작곡, 문주란 노래, 1966년)’

이 무렵 문주란은 ‘내 몫까지 살아주’, ‘낙조’, ‘돌지 않는 풍차’, ‘파란 이별의 글씨’ 등 드라마, 영화 주제가로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돌지 않는 풍차’ 역시 60년대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동명의 영화 주제가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노래다. ‘얄개전’으로 유명한 극작가 조흔파가 쓴 노랫말에 작곡가 박시춘이 곡을 붙였다.

‘1. 사랑도 했다 미워도 했다/그러나 말은 없었다/소낙비 사랑에는 마음껏 웃고/미움이 서릴 때면 몸부림을 치면서/말없이 살아온 그 오랜 세월은/아-- 돌지 않는 풍차여.

2. 울기도 했다 웃기도 했다/그래도 한은 없었다/눈물이 흐를 때는 조용히 울고/웃음이 피어나면 너털웃음 속에서/말없이 지나온 기나긴 세월은/아-- 돌지 않는 풍차여. -돌지 않은 풍차(조흔파 작사, 박시춘 작곡, 문주란 노래, 1967년)’

▲ ‘주란꽃’ 음반과 1982년 동경음악제 세계대회에셔 최우수 가창상을 수상한 ‘먼 별’ 수록 음반.

열아홉 살의 음독사건의 시련 딛고 ‘주란꽃’으로 화려하게 컴백

가수 문주란에 대한 또 하나의 미스터리는 열아홉 살 나이에 벌인 음독자살사건이다. 1969년 2월 15일 설날 이틀 전. 을지로 6가에서 언니 둘과 자취하던 문주란은 치사량에 가까운 극약을 복용하는 사건으로 연예면의 톱을 장식한다. 다행히 의식을 회복해 목숨은 건지지만 이로 인해 문주란은 각가지 소문과 루머에 휩싸이며 가수 활동을 지장 받을 정도로 시련을 겪었다. 

이 사건에 대해 그동안 몇 가지 해명이 있었던 듯하지만 정작 보다 솔직한 얘기는 언젠가 본인이 직접 털어놓아야 할 과제인 듯하다. 이 무렵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발표한 노래가 ‘주란꽃’이다. 

‘1. 내 너와 떠나던 날 저 하늘도 흐렸고/다시 만날 기약 없이 머나먼 길 떠나왔네/길가의 한 송이 외로운 꽃처럼 내 이름은 주란꽃/내 다시 피어나서 옛날 같이 살고 싶어/꿈길 속에 피워보는 한 송이 주란꽃.

2. 이제는 돌아와서 옛날 일을 생각하니/어리석었던 지난 날 한숨 속에 덧없어라/길가의 한 송이 외로운 꽃처럼 내 이름은 주란꽃/내 다시 돌아와서 눈물 없던 어린 시절/꿈길 속에 피워보는 한 송이 주란꽃. -주란꽃(하중희 작사, 서동민 작곡. 문주란 노래, 1969년)’

문주란, 제주에서 자생하는 꽃. 한국 유일의 자생군락지 제주 토끼섬은 천연기념물 1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작사가 전우 씨가 ‘바람 많은 제주에서 아름다운 자태로 피어나는 주란꽃처럼 굳세게 살아라’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이다.

이 노래를 시작으로 문주란은 ‘별빛 속의 연가’, ‘젊은 초원’, ‘이슬비’를 비롯해 ‘공항의 이별’, ‘공항대합실’, ‘공항에 부는 바람’ 등 이른바 ‘공항 시리즈’로 다시 인기와 활기를 되찾는다.

▲ 동아방송 50주년 기념식장에서 가수 문주란, 우리나라 최초의 DJ 최동욱과 필자.


동경음악제세계대회에서 ‘먼 별’로 최우수 가창상 수상

아울러 1982년에는 동경국제가요제(동경음악제세계대회)에서 ‘먼 별’로 최우수 가창상을 수상했다.
 
‘꿈아 끝나버린 사랑 하늘가에 지는 별처럼/그 허무하게 지는 한줄기 사랑이여/아 내 곁에서 멀리 사라지는 당신의 마음/잡을 수 없는 먼 별이여/당신 곁에 있어도 당신의 그 사랑은/아득히 닿지 않는 머나먼 곳에 있네/차라리 미련 없이 잊을 수 있다면/꿈아 사랑하는 맘 별빛처럼 영원하듯이/당신만이 나의 사는 보람/당신 곁에 있어도 당신의 그 사랑은/아득히 닿지 않는 머나먼 곳에 있네/차라리 미련 없이 잊을 수 있다면/꿈아 사랑하는 맘 별빛처럼 영원하듯이/당신만이 나의 사는 보람/당신만이 나의 사는 보람. -먼 별(박춘석 작사, 우수익 작곡, 문주란 노래 1982년)’

매력적인 저음의 가수 문주란은 89년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를 통해 여성적인 목소리를 구사, 변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다시 두문불출, 한동안 대중들 앞에 나타나지 않아 팬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문주란 씨는 경기도 가평 북한강 강가에 '문주란의 뮤즈 카페' 문을 열었다. 이곳은 지난 2010년 별세한 작곡가 박춘석 선생이 투병 중 유일하게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작곡가 박춘석은 한마디로 천재 작곡가였다.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개인 최다인 1152곡이 등록되어 있다. 작곡가 박춘석의 이름 뒤에는 항상 '사단(師團)'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어떤 가수도 박춘석 씨와 손잡으면 성공한다'라는 등식까지 화제가 되었는데 이러한 명성은 일본으로까지 이어져 일본 톱 가수 미소라 히바리에게 ‘뜨내기 주점(風酒場, かぜさかば)’를 취입시켜, 외국인 최초로 신곡을 써준 인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만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16년간 병원 외에 단 한 차례 외출했는데, 그곳이 바로 문주란 씨가 운영하는 뮤즈 카페였을 정도로 문주란은 그의 소중한 애제자였다. 

필자가 작사가 정두수 선생과 카페를 방문했던 2011년, 그때까지도 스승이 마지막 앉았던 자리에 그가 평소 즐기던 담배와 술병이 놓여 있었다.

"저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 못돼요. 너무 어린 나이에 연예계 활동을 시작해 잘 적응 못하는 면도 있는 것 같고... 그러나 멋모르고 시작했던 노래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그래서 주말에 한 차례씩 무대에 오르죠.” 당시 문주란 씨가 들려준 말이다.

문주란, 외떡잎식물로 제주 해안의 모래땅에서 자생하는 꽃. 독신으로 산 지 어느덧 70여 년, 최근에도 여전히 무대에 오르는 그의 모습은 비바람 속 모래땅에서 꿋꿋이 자라는 한 떨기 주란꽃의 생명력과 닮아 보였다. NM

[참고] ‘그 시절 그 가수 그 노래 이야기/문주란 편(박성서, 월간 전원생활 2010년 6월호)’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저작권자 © 뉴스메이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실시간 뉴스

전국 뉴스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