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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에 대한 열정으로 세계를 정복하다

기사승인 2012.06.11  16: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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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김복현 틈새라면 대표

우리나라 국민의 연간 라면 소비량은 36억 개로, 국민 1인당 매년 75개씩을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250여개 브랜드가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전체 라면시장 규모는 연 2조 6000억원이 넘는다.

   
▲ 틈새라면의 빨계떡은 ‘매운 맛’으로 라면 시장을 장악해온 브랜드다.
라면이 국민들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로 자리 잡은 지도 오래되었다. 다양한 요리법으로 다양한 맛의 라면들은 여전히 계속 출시되고 있다. 수십 개의 종류 속에서도 ‘독보적인 매운 맛’으로 한국인의 입맛을 몇 년째 사로잡고 있는 베스트셀러 라면이 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틈새라면’이다. 

매운 라면의 절대 강자 ‘틈새라면 빨계떡’
‘한국인의 매운 맛’이라는 문구가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 왜 한국인들은 매운 맛에 열광할까? 우리가 매운 음식을 섭취하면 통각세포에서 매운 맛이 인지되고, 뇌에서 이를 없애기 위한 반작용으로 엔돌핀이 분비된다. 이때 분비된 엔돌핀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며, 이런 쾌감은 중독성을 가져온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기분이 우울할 경우 이때의 쾌감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매운 음식이 땡기게 되는 것이다. 특히 매운 맛의 주  원료인 고추에는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는 캡사이신이 다량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섭취하면 땀이 나고 시원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매운 맛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최근엔 시중에 판매되는 라면 중에 가장 매운 라면이 ‘틈새라면빨계떡’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팔도 중앙연구소는 매운맛이 알려진 시판 라면을 대상으로 매운맛을 측정하는 스코빌 지수(SHU)를 산출한 결과 ‘틈새라면빨계떡’이 8557SHU로 가장 높았다고 밝혔다. 팔도의 ‘남자라면’(3019SHU), 오뚜기의 ‘열라면’(2995SHU)이 ‘톱3’에 들었다. 이번 조사결과 틈새라면빨계떡은 2위인 남자라면보다 2.5배 이상 맵고, 매운 라면의 대명사 격인 신라면보다는 6.5배 이상 매운 것으로 분석됐다. 틈새라면 빨계떡은 팔도가 명동의 유명한 라면 맛집 제품을 브랜드화해 2009년 출시했다. 스코빌지수는 1912년 미국의 화학자인 윌버 스코빌이 개발한 지수로 매운맛 측정을 위한 국제규격이다.

명동 건물 틈새 5평 가게에서
‘매운 맛’으로 라면 시장을 장악하다

   
▲ 틈새라면의 역사는 1983년 서울 명동의 건물과 건물 사이 틈새에서 라면가게를 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젊은이들은 유독 술 마실 일이 참 많았습니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최고의 해장음식으로 라면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제대로 된 국물 맛을 내기 위해 6개월 동안 연구개발한 빨계떡이 고객들의 큰 호응을 얻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얻었지요. 이때 차별화된 라면전문점 한 가지로 승부를 보자. 한 우물만 파는 ‘장인’이 되자고 결심하게 되었죠. 라면 한 그릇을 끓여내는 데에도 장인정신이 깃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기도 했고요. 라면은 무조건 몸에 나쁘다는 선입견을 없애고도 싶었습니다.” 라면은 일상식품이다. 전문점에 오지 않고도 쉽게 접할 수 있는데다 조리가 쉬워 맛 차별화가 만만치 않다. 어느 메뉴보다 높은 대중성을 확보한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그만큼 진입장벽이 낮아 맛 차별화나 충성고객 확보가 어렵다. 독특한 조리법이나 소스 없이는 뚜렷한 경쟁력을 지니기 힘들다는 것도 약점이다. 그만그만한 맛을 가진 라면 종류 중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차별화된 맛이 필수다. 명동 한복판에 위치한 틈새 5평에서 시작한 라면가게 ‘틈새라면’의 빨계떡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틈새라면의 빨계떡은 ‘매운 맛’으로 라면 시장을 장악해온 브랜드다. 틈새라면의 역사는 김복현 대표가 지난 1983년 서울 명동의 건물과 건물 사이 틈새에서 라면가게를 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 때부터 분식집을 시작한 김 대표는 해장라면으로 국물에 고춧가루를 푼 매콤하고 시원한 맛을 무기로 한 라면 전문점을 열었다. 이후 틈새라면의 메인 메뉴로 등극한 이 라면은 ‘빨계떡’이라고 불리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동네 분식집이 오직 라면 한 종목에 의지해 190여개 가맹점을 거느린 프랜차이즈 기업으로 뜬 것이다. 이후 로열티와 재료공급만으로 매출액은 20억원 가까이에 이르렀고 GS25의 PB(Private Brand)라면으로 공급돼 라면의 대명사인 신라면을 앞지르기도 했으며 한국 야쿠르트와의 계약으로 매운 라면의 절대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국내 최초로 라면 전문점의 문을 열다
   
▲ 2001년 프랜차이즈를 시작해 미국, 베트남, 태국 등 지금까지 오픈한 가맹점만도 190여 곳에 이르며, 지난 2004년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종주국인 일본 라면집을 제치고 아시아 최고의 라면집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술 먹는 날이 많아졌고, 술 먹은 다음날엔 예외 없이 라면에 고춧가루를 넣어 해장을 했습니다. 횟수가 많아지면서 점차 다양한 고춧가루를 넣어보기 시작했고, 나중엔 몇 가지 고춧가루를 섞기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기가 막힌 국물 맛을 발견했다. 그 국물로 라면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시식시키니 한결같이 반응이 좋았어요.” 명동 건물과 건물 사이 틈새 5평에서 라면가게를 시작해 국내 라면시장에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던 신라면을 넘어서는 실적을 거둬냈던 틈새라면의 김복현 대표. 그가 명동 3평짜리 매장에 분식집을 연 건 19살 때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데 이어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까지 돌아가셨다. 축구선수 한답시고 공부와는 담을 쌓았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마땅히 정 붙일 곳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빚더미에 집마저 없어지고 온 식구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 때 이미 결혼해 살림을 차려 나갔던 둘째 누나가 4남 3녀중 다섯째였던 김 대표를 불렀고, 그는 그렇게 둘째 누나와 함께 분식집을 시작했다. 2년 여간 분식집을 운영하다, 우연히 지금의 틈새라면을 있게 한 ‘빨계떡’을 개발해냈다. 김 대표는 누나를 설득해 바로 ‘라면전문점’으로 방향을 틀었다. 1983년, 틈새라면은 그렇게 시작됐다.

‘된다’는 믿음 하나로 라면 전문점 시작,
세계가 인정한 아시아 최고의 라면집 되다

“라면은 마진율이 높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넓지 않은 장소에서 적은 인원으로도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음식점에 비해 창업비용이 덜 든다는 장점이 있어요. IMF 직후 창업 붐이 일면서 우후죽순으로 프랜차이즈가 생겨나더군요. 저는 이를 경계했습니다. 반짝 붐을 일으켰다 사라지는 고만고만한 외식업체로 평가절하되는 것은 26년 간 실전 경험을 거친 틈새라면의 자존심에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김복현 대표가 라면 전문점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라면은 한 끼 식사가 아니라 김밥이나 샌드위치 등과 함께 먹는 분식 정도로만 여겨졌다. 라면만 파는 가게가 될 리가 없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실제로 처음 1년 여간은 매출액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된다’는 믿음하나로 버티고 또 버텼다. 1년을 버틴 후엔 대박이 찾아왔다. 입소문이 무섭게 나면서 수십 미터씩 손님이 줄지어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본점 성공은 프랜차이즈업으로 이어졌다. 2001년 프랜차이즈를 시작해 미국, 베트남, 태국 등 해외 지점까지 포함하여 지금까지 오픈한 가맹점만도 190여 곳에 이르며, 지난 2004년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종주국인 일본 라면집을 제치고 아시아 최고의 라면집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는 한국 야쿠르트와 계약하고 틈새라면 빨계떡을 생산, 라면시장의 강자로 우뚝 섰다.

라면 100년 브랜드를 꿈꾸다

   
▲ 5평 자리 라면가게에서 한국 야쿠르트와 계약을 하고,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자사 제품을 공급해 판매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라면 장사는 이미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난 100년 브랜드를 꿈꾼다. 많은 프랜차이즈가 일시적인 호황과 언론 플레이를 통해 단기순익을 얻기 위한 경영방침을 많이 선호한다. 물론 틈새라면도 한 때 이슈가 되어 주식 상장 이야기까지 나왔었지만, 끝내 50개 점포만 있어도 끝까지 가겠다는 고집으로 주식이 아닌 100년 브랜드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왔다.” 틈새라면이 성공을 거두면서 김 대표는 사회의 소외된 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 스스로가 성북구 하월곡동 홀몸 노인들에게 라면 100상자를 기부하기도 했고, 아름다운 재단이 모자가정을 지원하려고 만든 음식점 컨설팅도 직접 했다. 노인들을 위한 ‘틈새 쉼터’를 만들기 위해 서울 근교에 땅 1천여 평도 구입해뒀다. 평소 친구들에게 노인 쉼터를 만들겠다고 술김에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지난 2004년 김 대표 자신도 병원에서 간암 수술을 받고 난 뒤부터는 부쩍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끝내 50개 점포만 있어도 끝까지 가겠다는 고집으로 주식이 아닌 브랜드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왔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두 형님도 병환으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셨어요. 아쉬움과 두려움이 깃든 눈빛을 봤는데 잊을 수가 없었어요. 편안하게 죽는 일은 정말 큰 복이지요. 누구나 늙고 병들어 죽기 전에 편안한 쉼터를 가질 권리가 있잖아요?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아서는 책임감 있게 살아야 합니다.” 지난 5월 틈새라면의 김복현 대표는 우리의 곁을 떠났다. 8년 전인 2004년 간암 판정을 받았으나 초기에 발견되어 아무 문제없이 사회에 복귀하여 틈새라면 문화를 이끌어 왔던 그였다. 지난 2010년 재발 당시에도 가족의 사랑으로 이식 수술에 성공, 다시 업무에 복귀한 후 틈새라면의 재도약에 열정을 보였으나 합병에 의한 병세로 결국 숨을 거둔 것. 명동 5평 매장에서 시작해 한국의 라면 프랜차이즈계에 큰 별이었던 김복현 대표. 5평 자리 라면가게에서 한국 야쿠르트와 계약을 하고,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자사 제품을 공급해 판매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라면 장사는 이미 큰 성공을 거두었다. 더 나아가 라면을 통해 김 대표는 ‘사람 장사’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에 찾아온 조문객들의 표정과 언행, 이야기 속에는 김복현 사장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많은 이들이 흘렸던 애도의 눈물, 훈훈한 뒷이야기, 평소 김복현 대표가 강조했던 “라면 장사가 라면을 파는 게 아니라 문화를 판다”는 이야기는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틈새문화, 10대에서부터 라면집 주인아저씨, 30대, 40대, 50대까지 각계각층에서 조문객들이 찾아왔다. 평소 김복현 사장이 라면 하나로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사랑해왔던 덕분이었다. 대한민국 라면 프랜차이즈계의 큰 획을 그은 김복현 대표. 틈새라면을 통해 번 돈을 틈새라면 고객들에게 돌려주고자 했던 김복현 대표. 경기도 양평에 ‘틈새 쉼터’를 만들겠다는 그의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그의 뜻을 가슴으로부터 이해하고, 이어갈 사람들이 있기에 ‘100년 브랜드’를 소망했던 김복현 대표의 바람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NM
 

황태일 기자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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