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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0.07.06  22:4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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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특별전

스릴러 영화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1899~1980) 감독의 대표작 10편을 상영하는 특별전이 6월 25일부터 7월 16일까지 서울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열리고 있다. 초기작인 ‘레베카’부터 영화사를 수놓은 걸작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이창’(1954), ‘현기증’(1958), ‘싸이코’(1960)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영화 첫 장면만 보아도 단번에 히치콕의 영화임을 알 수 있다”

앨프리드 히치콕(1899~1980)은 독창적 영상 기법을 활용해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 심리를 세련되게 다룬 영상의 마술사다. 2001년 미국영화협회가 “지난 100년간 미국 영화 중 관객의 가슴을 가장 두근거리게 만든 스릴러”를 뽑았을 때 히치콕의 ‘사이코’(1960)가 1위로 오르고 100위 안에 히치콕의 작품이 9편이나 포함될 정도로 히치콕은 미 영화사상 최고의 스릴러 감독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전성기 시절에는 평론가들에게 흥행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 정도로만 인식되었을 뿐 뛰어난 감독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히치콕을 추앙하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히치콕을 수년간 만나 인터뷰하고 그것을 책으로 내면서 평가가 바뀌었다. 트뤼포는 ‘히치콕과의 대화’(1967)에서 “인류사에는 불안의 예술가들이 존재한다. 카프카, 도스토옙스키, 포 그리고 히치콕”이라며 히치콕을 한껏 치켜세웠다. 이후 평론가들은 “현대의 셰익스피어”, “문법 책과 같은 존재”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히치콕의 영화 스타일은 프랑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기 “영화 첫 장면만 보아도 단번에 히치콕의 영화임을 알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독특했다. 실제로 히치콕의 전유물처럼 취급되는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에서 카메오와 맥거핀, 그리고 특유의 촬영 기법이 느껴진다면 히치콕의 영화로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다. 여기에 차가우면서도 성적 매력이 있는 금발의 여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하고 흑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100% 히치콕의 작품이다.
히치콕은 급속도로 발전하는 영화 기술에도 잘 적응했다. 무성영화 감독으로 시작했지만 토키 영화, 컬러 영화, 입체영화가 등장할 때마다 발 빠르게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TV가 안방을 파고들었을 때는 TV시리즈도 제작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일궈냈다. 이 과정에서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쥐락펴락하고 검열 당국을 입맛대로 요리했으며 언론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솜씨 또한 발군이었다.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 심리를 세련되게 다뤄온 영상의 마술사

히치콕은 영국 런던 북동부 끝에 있는 레이턴스턴에서 태어났다. 1913년 성 이그나티우스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가을 런던 시의회가 설립한 항해학교에 입학했으나 1914년 아버지가 숨져 전신회사에 기술자로 입사했다. 곧 판매·홍보 부서로 자리를 옮겨 광고를 기획하고 사보에 삽화를 그리고 글을 썼다. 런던대 분교 골드스미스 칼리지 미술학과에도 입학,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미술을 배웠다. 미술 공부는 그에게 연극과 영화에 눈을 뜨게 해 주어 틈날 때마다 영화관을 찾고 영화 관련 잡지를 탐독했다.
그러던 중 1919년 미국의 패러마운트 영화사의 자회사가 런던에 스튜디오를 열어 히치콕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히치콕은 파트타임으로 입사해 무성영화에 자막을 입히는 등 초보적인 일에 종사하다가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1920년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이후 미술감독, 대본 수정 등에 참여하면서 조감독 역할을 하거나 영화 제작 기술을 배웠다.
그러다가 감독할 기회가 주어져 데뷔작 ‘쾌락의 정원’을 독일(1925.11)과 영국(1927.1)에서 개봉했다. 두 번째 작품 ‘하숙인’(1927.2)은 서스펜스 테크닉을 사용해 관객을 불안감에 빠뜨려 “지금까지 나온 영국 영화 중 최고봉”이라는 호평을 들었다. ‘하숙인’은 히치콕이 잠깐 카메오로 출연한 첫 영화이기도 하다.
1926년 12월 같은 영화사에서 편집자 겸 시나리오 감독으로 활동하는 앨마 레빌과 결혼하고 몇 편의 영화를 더 감독했다. 앨마는 이후 오랫동안 영화의 스토리 선택에서부터 최종 편집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히치콕 영화의 문지기 역할을 하며 수많은 영화에 관여했다. 촬영이 끝날 때마다 히치콕은 매번 앨마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앨마가 고개를 끄덕이면 비로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그 무렵 영화계는 무성영화 시대가 끝나고 유성영화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히치콕 역시 영화에 일부 소리를 넣은 ‘협박’을 감독해 1929년 12월 개봉했다. 1935년 6월 개봉한 ‘39계단’은 맥거핀 기법을 처음 사용했다는 점에서 영화사적 의미가 있다. 이후 히치콕의 영화에서는 관객들이 긴장하며 영화의 흐름을 좆아가다가 결국에는 영화 줄거리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 헛다리를 짚도록 속임수를 쓰는 맥거핀 기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39계단’은 큰 성공을 거둬 히치콕을 영국의 최고 감독으로 끌어올렸다.

영화에서 불안감과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가 겁이 많기 때문

▲ 앨프리드 히치콕

이 재능 있고 자신만만한 히치콕을 미 영화계가 가만 놔둘 리 없었다. 히치콕 역시 기다리던 바였다. 히치콕은 1938년 7월 14일, 1년 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작할 미국의 천재적인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과 계약을 체결하고 1939년 3월 미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첫 작품은 영국 작가 대프니듀 모리에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레베카’를 선정했다. 로런스 올리비에와 조앤 폰테인이 주연한 ‘레베카’(1940.3)는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1941년 히치콕에게 최초의 아카데미상(최고 작품상)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감독상만은 이후 5번이나 후보에 올랐는데도 한 번도 타지 못했다.
이후 히치콕은 ‘오명’(1946), ‘올가미’(1948), ‘고백’(1953), ‘다이얼 M을 돌려라’(1954), ‘이창’(1954),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사이코’(1960), ‘새’(1963) 등 대표작을 잇따라 선보였고 1976년 마지막 영화 ‘가족 음모’를 촬영할 때까지 총 53편의 영화를 남겼다.
이 가운데 ‘사이코’(1960.6)는 오늘날 공포 영화의 고전이자 최고의 미국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다만 개봉 당시의 평단 반응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36일 만에 만든 이 ‘저예산 영화’는 미국에서만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수익을 올리며 스릴러물의 흥행 기록을 깼다. 개봉 직후 ‘뉴욕타임스’지에 혹평을 게재한 영화평론가가 영화를 몇 번 더 본 후 히치콕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사이코’에 등장하는 폭력, 섹스, 심리적인 공포 등의 결합은 이후 수많은 모방 작품을 배출했다. 그의 이름에서 따온 ‘히치콕키언(Hitchcockian)’이라는 단어는 공포감과 긴장을 자아내는 ‘서스펜스와 스릴러’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 히치콕은 관객에게 불안감과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겁이 많아 생긴 것이라고 자주 말했다. 5살 때 경찰이 일부러 벌을 준 것 때문에 평생 경찰을 무서워했다. 10대 시절 읽은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에서 느꼈던 공포도 그가 공포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고 훗날 술회했다.
히치콕은 잉그리드 버그먼, 그레이스 켈리, 킴 노백 등 차가운 성적 매력을 지닌 금발의 미인들에게 작업상의 관심 이상으로 호감을 품었다. 평론가들 사이에 ‘오명’(1946)은 “버그먼을 향한 히치콕의 사랑고백”이고 ‘염소자리 아래서’(1949)는 “순전히 버그먼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만든 영화”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다이얼 M을 돌려라’(1954), ‘이창’(1954)에서 호흡을 맞춘 그레이스 켈리 역시 히치콕이 원한 차가운 금발 미녀의 대표 배우였다.
지적인 외모에 우아한 금발의 여배우를 찾는 이유에 대해 “나는 정말 여인 같은 여자, 그러면서도 침실에만 들어가면 창녀가 되는 그런 여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메릴린 먼로처럼 아무 때나 성적 매력을 과시하며 활보하는 스타일의 배우는 경멸했다.
그의 이런 이미지와 달리 가장과 남편으로의 삶은 대체로 평탄했다. 사랑이 넘치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부인도 히치콕 못지않게 재능이 있는 데다 성깔이 있는 인물이어서 공처가를 자처했다.
히치콕은 150kg의 거구이면서도 자신의 영화에 자주 카메오로 출연해 관객에게 영화를 보는 잔재미를 제공했다. 카메오로 자주 출연한 것에 대해 “알다시피 나는 추남이다. 늘어진 턱과 통통한 얼굴, 튀어나온 배는 배우라기보다 코미디언에 가깝다. 내 영화가 아니라면 누가 나를 영화에 출연시켜 주겠는가”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20세기 영화계를 풍미했던 그였지만 세월만은 어쩌지 못해 1980년 4월 29일 타계했다.


■문학동인지 ‘폐허’ 창간 100주년

1919년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식인과 문인들은 비관과 절망과 퇴폐의 병적인 분위기로 빠져들었다. 여기에 19세기 말 서구에서 유행한 세기말적 불안 사조까지 뒤늦게 몰려와 가뜩이나 암담하고 우울한 문학청년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허무와 공허에 사로잡힌 현실 속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건설하고자 했다.

‘폐허’ 동인들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참담하고 암울한 현실 인식

1920년 7월 25일 창간한 문학동인지 ‘폐허’는 그런 의욕의 산물이었다. 폐허 이름은 “옛 것은 멸하고 시대는 변하였다. 내 생명은 폐허로부터 온다”고 한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구에서 따왔다. 창간호(130쪽)에는 김억, 황석우, 염상섭, 오상순, 이광수, 남궁벽, 김일엽, 민태원, 이병도, 나혜석 등 12명이 동인으로 참여했다. 변영로는 2호 동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폐허를 낸 배경에는 황폐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 싹을 심어서 새 꽃을 피우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으나 이런 취지와 달리 동인들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참담하고 암울한 현실 인식이었다. 동인들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점점 더 감상적이고 병적인 낭만주의의 폐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조차 무의미하게 보는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적 투항 의식을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좌절에 빠진 민족을 일으켜 세우려던 애초의 목적은 사라지고 자신과 세계를 저주하는 탄식이 폐허를 뒤덮었다.
작품들에는 세기말적인 데카당스 풍조와 러시아의 근대적 우수문학이 스며들어 감상·허무·우울·퇴폐적인 색채가 농후했다. 생활태도에도 퇴폐적이고 비정상적인 면이 많아 폐허파는 문학적 퇴폐주의와 동의어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폐허는 퇴폐주의, 이상주의, 낭만주의 등 여러 요소가 혼합된 양상을 띠었다. 폐허는 1921년 1월 20일 발행된 2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발간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24년 1월 염상섭의 주도로 ‘폐허이후’를 발간했으나 그것 역시 처음이자 마지막 호여서 전체적으로는 3개 호에 그쳤다.
폐허는 이렇게 단명으로 끝났으나 발간 후 한국 문단이 비로소 뼈대를 갖추게 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위치가 ‘창조’에 못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창간된 문학동인지 ‘창조’가 최남선·이광수의 2인 문단 시대를 극복하며 근대 문학 형성의 주역을 맡은 것은 사실이지만, 동인 대부분이 도쿄에 체류 중인 유학생들이어서 ‘서울 문단’에 직접 참여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문학 최초의 시 동인지는 ‘장미촌’이다. 황석우와 변영로의 주도로 1921년 5월 24일 창간했다. 박종화, 박영희, 변영로, 오상순, 노자영, 정태신, 신태악, 이훈 등도 동인으로 참여했다. 이들 중 변영로·오상순·황석우는 ‘폐허’ 동인이었고, 박종화·박영희·노자영 등은 다음 해에 창간될 ‘백조’ 동인이었다.
‘장미촌’은 1편의 번역시를 포함해 모두 15편의 시가 실린 23쪽의 작은 잡지였으나 낭만주의를 표방해 주목을 끌었다. 폐허와 마찬가지로 퇴폐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성격은 여전했지만 폐허가 사라진 뒤의 황량하고 스산한 빈 자리를 메우려는 듯 제호를 화사하게 지었다. 편집인은 황석우, 발행인은 미국인 선교사 필링스를 내세웠다. 외국인이면 허가를 내기도 쉽고 검열을 받지 않거나 간섭받는 일이 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폐허보다 더욱 이상적인 평화와 안식의 낙원을 세우고자 장미촌에 모인 이들은 제대로 향연을 베풀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졌다. 결국 2호를 내지 못해 ‘폐허’와 곧 나오게 될 ‘백조’ 사이에 자리잡은 간이역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다.

폐허’ 2년 뒤 창간한 문예지 ‘백조’… 시에서는 낭만주의, 소설에서는 자연주의 경향

▲ ‘폐허’ 창간호 표지

‘장미촌’ 발간 후 새로운 문학지와 사상지를 창간하기로 뜻을 모은 문학청년들이 있었다. 휘문의숙 출신의 홍사용과 박종화, 배재학당 출신의 박영희와 나도향이었다. 그들은 ‘흑조(黑潮)’라는 제목의 사상지에 앞서 ‘백조(白潮)’라는 이름의 문예지를 먼저 발간하기로 했다. 뒤이어 소설 ‘빈처’로 각광을 받은 현진건, 고향인 대구에서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서울로 피신해온 이상화, 감상적인 노자영, 인기 화가 안석주가 동인으로 참여했다. 이광수는 2호, 방정환과 김기진은 3호 동인으로 참여했다.
1922년 1월 9일 창간한 ‘백조’의 자금은 홍사용의 6촌형 홍사중과 김덕기가 댔다. 편집인은 홍사용, 발행인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아펜젤러가 맡았다. 화려한 제호와 필진, 143쪽의 외형, 안석주가 그린 여인을 담은 표지화까지 곁들인 창간호는 그 시기에 나온 잡지답지 않게 호화스럽고 낭만적이었다.
‘백조’에는 시와 소설이 함께 실렸으나 대체로 시 분야의 활동이 활발했다. 주요 작품들로는 시 분야에서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3호), 박영희의 ‘꿈의 나라로’(2호), 박종화의 ‘흑방비곡’(2호)과 ‘사의 예찬’(3호), 홍사용의 ‘봄은 가더이다’(2호)와 ‘나는 왕이로소이다’(3호)가 있다. 소설 분야에서는 나도향의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3호), ‘여이발사’(3호), 현진건의 ‘할머니의 죽음’(3호), 박종화의 ‘목매는 여자’(3호) 등을 들 수 있다.
‘백조’의 문학적 경향을 흔히 낭만주의로 분류하지만 그것은 시 분야에 국한된 것이고 소설에서는 당시 유행하는 자연주의적 성격이 짙었다. 시는 병적이고 퇴폐적인 경향이 짙게 묻어나는 애수, 비탄, 자포자기 등을 주제로 삼은 유미주의와 낭만주의 경향을 보였다. 격월간을 목표로 했으나 발간이 순조롭지 못해 미국인 여성 보이스를 발행인으로 한 2호(1922.5)와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인 페루페로오를 발행인으로 내세운 3호(1923.9)만 내고 종간했다. 사상지 ‘흑조’는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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