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0.10.08  18:37:52

공유
default_news_ad1

세르게이 붑카의 장대높이뛰기 세계신기록, 26년(실외경기)·21년(실내경기) 만에 깨져

일찍이 장대높이뛰기에서 세르게이 붑카(1963~ )만큼 오랫동안 세계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선수는 없었다. 그는 ‘장대높이뛰기의 전설’이자 ‘신기록 제조기’였다. 그가 장대높이뛰기에서 세운 세계신기록은 20여 년 동안 난공불락이었고 한동안 깨지지 않았던 ‘마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이 기록이 실내경기(2014년)에 이어 실외경기까지 최근 경신되면서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격언이 다시한번 확인되었다.
먼저 깨진 것은 1993년 2월 수립한 6.15m의 실내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프랑스의 르노 라빌레니가 2014년 2월 15일 6.16m를 기록함으로써 21년만에 구기록으로 물러났다. 라빌레니의 기록은 다시 6년만인 2020년 2월 8일 6.17m를 기록한 스웨덴의 아르망 뒤플랑티스에 의해 깨졌다가 일주일만인 2월 15일 6.18m를 뛰어오른 뒤플랑티스에 의해 또다시 경신되었다. 이 기록은 현재 남자 장대높이뛰기의 실내경기 세계신기록이다.
뒤플랑티스는 2020년 9월 17일 이탈리아 로마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세계육상연맹 다이아몬드리그 남자 장대높이뛰기 실외경기에서도 6.15m를 기록, 붑카의 종전 세계신기록(6.14m)마저 26년만에 깨뜨림으로써 명실공히 장대높이뛰기 세계 1인자로 부상했다.

6번 연속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정상 차지하고 35차례 세계신기록 경신

▲ 세르게이 붑카

붑카는 구소련(현 우크라이나의 루한스크)에서 태어났다. 우크라이나어로는 이름이 세르히 나자로비치 붑카이지만 현역 초기 구소련을 대표해 국제경기에 참가했기 때문에 러시아어 이름인 세르게이 붑카로 세상에 알려졌다.
붑카가 세계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20살이던 1983년이었다. 그해 8월 제1회 헬싱키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5.70m의 기록으로 일약 세계 정상에 올랐는데 이것은 1997년까지 6회(1983년, 1987년, 1991년, 1993년, 1995년, 1997년) 연속 세계선수권대회를 거머쥐게될 시발점이었다. 1984년 5월 26일에는 생애 첫 세계신기록인 5.85m를 뛰어넘어 10년 넘게 이어질 독주체제를 채비했다. 한 해 동안 무려 7개의 세계신기록(실내 3회, 실외 4회)을 작성해 ‘신기록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1984년이었다. 붑카는 이후 세계신기록을 연이어 경신하며 장대높이뛰기의 신기록사를 새롭게 써나갔다.
9살 때 처음 폴을 잡고 성장 가도를 달리던 붑카에게 첫 시련이 닥친 것은 연습 중 오른발에 심한 골절상을 입어 의사로부터 선수 생명이 사실상 끝났다는 최후 통보를 받은 1981년(18세)이었다. 하지만 같은 장대높이뛰기 선수였던 형이 “의사에게 속지 말고 자신에게 지지 말라”며 재기를 독려하자 붑카는 깁스한 다리는 어쩔 수 없더라도 상반신 트레이닝이라도 계속하겠다며 병실에서 아령과 역기를 들었다. 그렇게 1년간의 고통이 끝나고 퇴원했을 때 그의 팔뚝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박차고 오를 수 있는 철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다른 선수들보다 수십cm나 긴 폴을 사용하고 그립도 10여cm나 높이 잡았다. 이것은 183cm·80kg의 탄탄한 몸매, 100m를 10초2에 달리는 폭발적인 스피드와 근력을 바탕으로 한 붑카만의 장점이었고 세계기록 경신의 비결이었다.

‘마의 6.0m 벽’을 세계 최초로 뛰어넘은 것은 1985년

붑카가 인간의 한계로 여겨지던 ‘마의 6.0m 벽’을 세계 최초로 뛰어넘은 것은 파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한창이던 1985년 7월 13일이었다. 이후 그에게는 ‘인간새’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붑카는 1983년부터 1997년까지 6번 연속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정상을 차지하고, 35차례(실외기록 17차례, 실내기록 18차례)나 세계신기록을 경신했다. 그러는 사이 “붑카는 점프하지 않는다 그저 하늘을 날 뿐”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세계 장대높이계를 호령했다. 그는 세계신기록을 경신할 때마다 더 높은 기록을 세울 수 있었는데도 자신의 기존 기록에서 1~2㎝만 높혀서 기록을 경신했다. 이 때문에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것은 기록이 어떻든 무조건 신기록만 내면 포상하는 당시 소련의 포상금 정책 때문이었다.
붑카는 세계선수권대회를 6연패나 하면서도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5.90m로 금메달을 땄을 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컨디션 난조로 예선 탈락을 하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아킬레스건 통증으로 경기 직전 기권했다. 은퇴 무대로 삼았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도 예선 탈락했다. 199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7연패에 실패한 그였기에 기량보다는 세월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랜 비상을 끝내고 마침내 날개를 접어야 했다. 그날은 고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장대높이뛰기대회를 끝내고 은퇴식이 열린 2001년 2월 5일이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축사를 통해 “세계는 붑카를 통해 우크라이나를 알게 되었다”고 말해 붑카를 감동시켰다.
현재 여자 장대높이뛰기의 세계신기록은 실외기록(5.06m)과 실내기록(5.01m) 모두 러시아의 옐레나 이신바예바(1982~ )가 보유하고 있다. 한국신기록은 2019년 8월 수립된 5.75m(남자)와 2012년 5월 수립된 4.41m(여자)다.

장대높이뛰기는 ‘육상의 종합선물세트’

장대높이뛰기는 ‘육상의 종합선물세트’로 불린다. 그만큼 다양한 근력이나 순발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장대높이뛰기는 상체와 하체의 협응, 스피드, 민첩성, 근력, 유연성 등 육상 종목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춰야 가능한 종목이다. 단거리 선수의 스피드(도움닫기)가 필요한가 하면 높이뛰기 선수와 멀리뛰기 선수의 도약력(구르기)을 요구한다. 체조 선수와 같은 균형감(공중자세)은 물론 포환·해머·원반·창던지기와 같은 투척 선수의 악력과 마무리 자세(낙하)도 필요하다.
장대높이뛰기 기록은 어느 장대를 썼느냐에 따라 다르다. 20세기 초까지는 골프채의 샤프트로 쓰이던 히커리나무(서양호두나무)나 회초리로 주로 쓰던 물푸레나무가 쓰였다. 하지만 그런 장대들은 탄력이 거의 없어 당시 남자 세계 최고기록은 3.55m에 불과했다. 그 후 등장한 일본산 대나무로 만든 장대는 기록을 4.77m까지 높여주었다. 일본산 대나무를 대신한 알루미늄 장대가 나온 것은 1940년대 중반이었다. 알루미늄 장대는 1960년까지 사용되며 4.88m의 기록을 세워주었다. 오늘날 주로 사용되는 유리섬유나 탄소섬유는 1960년대 초반 등장해 붑카 같은 선수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50년 전 10월, 장훈 선수가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 타율 기록했다.

3085개 안타는 지금도 깨지지 않는 난공불락

1959년 4월 10일,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즈’(현 니혼햄 파이터스)의 장훈(1940~ )이 타석에 들어섰다. 장훈으로서는 프로야구 입단 후 처음 치르는 데뷔전이었다. 가난과 차별, 신체적인 어려움을 참아가며 손꼽아온 감격의 순간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란 이름으로 불리던 장훈은 어려서부터 장애자였다. 네 살 때인 1944년 오른손에 화상을 입어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제외한 세 손가락이 모두 하나로 붙어있었다. 새끼 손가락은 뼈마저 녹아 형체도 없었고, 물건을 쥐고 들어올리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더구나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폭심으로부터 2㎞ 반경 안에 있던 사람에게 주어진 원폭수첩을 지니고 다녀야 했던 원폭 피해자이기도 했다. 큰누나는 피폭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장훈 역시 당장은 괜찮아 보였지만 언제 후유증이 도질지 몰라 마음은 늘 편치 않았다.
오른손을 쓰지 못하면서도 장훈은 어려서부터 몸집이 커 자주 싸움에 휘말렸다. 이런 장훈을 구해준 것은 야구였다. 힘을 쓰지 못하는 오른손을 단련하기 위해 중학시절부터 손에 피가 나도록 타이어를 두들겼다. 학창시절 장훈의 꿈은 고시엔(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출전이었다. 고향 히로시마에서 다니던 고교를 1학기만에 그만두고 멀리 오사카 나니와상고로 전학한 것도 고시엔에 출전할 수 있다는 한가닥 희망 때문이었다.
장훈의 출중한 기량을 익히 알고 있는 프로야구팀이 그를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그는 고시엔 출전을 위해 모든 걸 뒤로 미뤘다. 그러나 나니와상고가 학내 폭력문제로 고시엔 대회 1년 출전금지 처분을 받아 꿈을 1년 연기해야 했고, 금지가 풀린 후에는 코칭 스태프의 차별과 횡포로 고시엔 출전선수 명단에서 빠져 대회에는 결국 출전하지 못했다.
장훈은 야구가 싫어졌다. 다시 주먹세계를 기웃거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때 누군가 장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그의 조국 대한민국이었다. 조국은 재일교포 고교생을 한국으로 불러 한일고교친선야구대회를 열어주었다. 장훈은 자신의 일행을 환영하는 동포들을 보면서 야구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4번 타자

1958년 고교 3학년이 된 그에게 프로야구팀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왔다. 파격적인 600만 엔의 계약금을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나선 팀은 주니치 드래건스였다. 주니치는 강팀이면서도 언론사까지 소유하고 있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엔 더없이 좋은 팀이었다. 그러나 장훈은 200만 엔의 계약금을 제시한 도쿄의 ‘도에이 플라이어즈’ 팀에 입단했다. 꿈의 도시 도쿄에서 야구를 시작하고 싶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도쿄의 또 다른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요미우리는 중고교 시절 싸움꾼으로 알려진 장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장훈과 동갑내기이자 ‘영원한 라이벌’ 왕정치는 1200만 엔이라는 거금을 받고 투수로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59년 데뷔전에 장훈이 출전한 것이다.
장훈이 아무리 고교 최고의 강타자였다지만 프로야구의 벽은 역시 높았다. 1959년 4월 10일 프로야구 데뷔전 첫 타석에서 상대투수가 던진 단 3개의 공에 삼진을 당했다. 수비에서도 날아오르는 타구를 잡지 못하고 머리 위로 넘기는 결정적인 실책까지 범했다. 장훈은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서지도 못한 채 교체되었다.
4월 11일의 상대는 전년도 성적 14승 4패를 자랑하는 발군의 투수였다. 그러나 데뷔 두 번째 타석에 나선 장훈의 눈에 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좌중간 2루타였다. 데뷔 첫 안타이자 일본 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인 3085 안타의 시작이었다. 다음 타석에서는 우측 담장을 넘기는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다.
점차 프로야구에 익숙해진 장훈은 맹타를 휘둘렀고 6월 13일 4번 타자가 되었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4번 타자가 탄생한 것이다. 데뷔 첫해 장훈은 13개의 홈런과 57 타점, 0.275의 타율로 신인왕을 수상했다. 왕정치는 투수에서 타자로 막 전업해 성적이 좋지 않았다.
순풍에 돛을 단 듯 1960년 올스타전에 뽑히고 1961년 0.336의 타율로 수위타자가 되었다. 1962년엔 0.333의 타율에 31개의 홈런으로 퍼시픽리그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팀도 일본 시리즈를 석권하는 겹경사를 맞았다. 1967년부터 4년 연속 수위타자가 되는 등 장훈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공이라면 그라운드 어떤 위치와 방향으로도 쳐낸다고 해서 ‘부채타법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록들

1970년은 장훈에게 생애 최고의 해였다. 시즌 초반부터 3할대를 유지하며 톱타자의 위치를 놓치지 않더니 마침내 일본 프로야구사상 전인미답의 최고타율을 기록한 것이다. 10월 18일 장훈은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5타수 4안타를 터뜨려 타율을 0.3834로 끌어올렸다. 그 전까지 일본 프로야구 최고타율은 19년 전 기록된 0.3831이었다. 장훈의 타율을 관리하려는 감독의 배려로 시즌 마지막 세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아 장훈의 최고타율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던 장훈의 기록은 1985년 센트럴리그 한신팀의 미국 선수 랜디 바스에 의해 15년 만에 깨졌다. 장훈이 소속된 퍼시픽리그에서는 1994년 스즈키 이치로가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 24년 동안 철옹성이었다.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장훈은 같은 팀 왕정치와 호흡을 맞춰 그해 요미우리에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1980년 1월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했다가 그해 5월 28일 대망의 3000 안타를 기록한 뒤 1981년 10월 31일 23년간의 선수생활을 뒤로한 채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의 기록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통산 2752 경기에 출전해 통산타율 0.319에 수위타자 7차례, 504 홈런과 1676 타점을 기록했고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3085개의 안타를 쳤다. 특히 3085 안타, 504 홈런, 319 도루는 당시 미국의 메이저리그에서도 단 한 명만 보유할 정도로 달성하기 힘든 대기록이었다.
일부에서는 일본에서 활약하다가 2001년 미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시애틀 매리너스의 스즈키 이치로가 2009년 4월 17일 3086번째 안타를 쳐 장훈의 3085개 기록을 깼다고 주장하지만 스즈키의 기록은 일본에서의 1278 안타와 미국에서의 1808 안타를 합친 것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만 3085 안타를 수립한 장훈의 기록과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NM

▲ 현역 시절의 장훈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저작권자 © 뉴스메이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실시간 뉴스

전국 뉴스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