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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대구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대구[2]

기사승인 2021.02.10  14: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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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메카, 대구

머리, 양복, 구두를 전국에서 제일 잘하는 곳, 대구는 또한 전국 도시 중 막걸리를 가장 많이 마시는 곳이기도 하다. ‘서민의 술’을 즐기는 정 넘치고 전통을 중시하는 곳인 것이다.

대구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일까. 대구는 한국의 3대 도시 중 하나지만 서울, 부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구 출신 가요인이나 노래는 적다. 대구에 세워져있는 대중가요 관련 노래비도 ‘비 나리는 고모령(현인)’, ‘능금 꽃 피는 고향(패티김)’, ‘빨간 마후라(쟈니브라더스)’ 그리고 새롭게 부각된 ‘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정도다. ‘문화도시 대구’라는 명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셈이다.

그러나 한때 대구가 우리나라 가요계의 중심에 서서 우리나라 가요의 흐름을 이끌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 사상 최악의 침체기였다고 평가되는 6.25 한국전쟁 시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적으로 전쟁의 피해를 덜 받았던 탓에 음반 산업과 함께 공연이 꽃피울 수 있었다.

대구를 소재로 하여 전 국민에게 애창됐던 노래들을 살펴보며 ‘대구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대구’, 그리고 ‘노래 속에 나타난 대구사람’의 모습을 살펴본다. 그 두 번 째.

글 l 박성서(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대구 제일극장에서 공연 중인 가수 백난아와 만원사례 봉투

전쟁 당시 공연문화의 꽃을 피우다, 악극, 가극단들의 활동

음반 발매와 함께 공연문화를 꽃피웠던 곳이 대구다. 대구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던 ‘만경관’을 시작으로 대구, 대도, 문화(구 키네마, 현 CGV 대구한일), 송죽. 시민, 자유, 제일극장 등이 있었다. 이 무대들이 곧 대구가수들의 주 활동무대이자 대구 공연문화의 꽃을 피웠던 곳이다. 서울에서 국립극장도 대구로 내려왔다.

전쟁 중이었지만 악극과 가극공연 역시 일 년 내내 끊이지 않았다. 전쟁의 공포와 피란생활의 시름을 잊게 해준 이들 공연은 지금과는 달리 당시 1부 악극, 2부 버라이어티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악극단원은 물론 많은 가수들이 무대에 올랐다. 이러한 공연은 대구를 비롯해 부산, 마산, 진해, 광주, 전주, 이리, 군산, 대전 등으로 이어졌다.

대도회악극단, 무궁화가극단, 반도악극단, 백조가극단, 창공가극단, K.A.S육군 군예대, KPK악단김해송악단, 프린스악극단, 현대가극단, 호화선악극단, 희망가극단 외에도 10여 개 단체의 극단이 활동했다. 이들은 부산,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시민과 피란민들, 상이군인들을 비롯해 UN군 위문공연도 활발히 펼쳐 공연장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피란시절에 펼쳐졌던 주요 공연기록을 살펴보면, 1952년 박시춘악극단이 막을 올린 악극 ‘등잔불 사랑’은 현인, 신카나리아, 황정자, 박단마, 김백희가 출연했고 주제가는 오리엔트를 통해 ‘등잔불 소식’이라는 제목으로 황정자가 취입했다. 박노홍이 조직한 현대가극단은 1951년 3월, ‘두 남매(이사라 원작, 박시춘, 황문평 작곡)’을 무대에 올린데 이어 8월에는 탐정악극 ‘그림자’를 공연했다. 김내성 원작, 황문평 작곡의 이 작품에는 이난영, 신카나리아, 김정구 등이 출연했다.

특히 박노홍이 조직한 희망가극단은 대구극장 전속으로 활동했다. 1953년 3월, 창립 기념 뮤지컬 드라마 ‘하바네라(박노홍 작, 김광 음악)’를 심연옥, 강준희 주연으로 대구극장 무대에 올렸다.

은방울악극단은 1951년, 박시춘, 신카나리아, 남인수 주연으로 ‘송아지 우는 마을’을 공연했고 영화감독 김화랑·가수 신카나리아 부부가 설립한 ‘호화선악극단’은 1953년 ‘굳세어라 금순아’를 무대에 올린다. 주인공역은 황해가 맡았고 주선태, 전칠성, 왕숙랑, 백설희 등이 출연했다.

프린스가극단의 ‘아라비안나이트’에는 김정구와 이예성이, 남국성악단의 음악극 ‘향수의 가희’에서는 토미악단과 함께 당시 최고의 라이벌인 남인수와 현인이 함께 무대에 올라 노래 대결을 펼쳤다. 전옥이 이끌던 백조가극단의 대표작 ‘눈 내리는 밤’에는 윤부길, 황금심, 고복수, 고향선, 송달협이 특별 출연했고 ‘성웅 이순신’에는 남인수, 김정구, 송달협, 현인, 박단마, 신카나리아, 장세정, 이난영 등이 출연했다. 당시 백조가극단에는 고복수, 고향선, 백년설, 윤부길, 황금심 등이 특별 출연했는데 윤부길의 코미디쇼 ‘요절복통 춘향전’은 피란의 시름을 잊게 해주었다. 그밖에 KAS악극단은 1952년 ‘합창’을 공연했는데 이종철, 황정자, 황해, 백년설이 특별 출연했다.

전쟁 속에서 꽃 피운 예술, ‘향촌동 시대’를 열다

▲ 대구극장 전속 희망가극단의 창립공연, 뮤지컬 드라마 ‘하바네라’에서 주연을 맡은 가수 심연옥. 1953년

앞서 거론했듯, 전쟁의 포탄을 피해 대구 향촌동으로 모여들었던 예술가들과 함께 당시 국립극장이 대구문화극장(현 CGV대구한일극장)에 자리 잡았다.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대구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많은 예술인들이 교류했다. 대구로 피란 온 국립극장은 순수공연작품을 100여 편 공연했다.

‘이 시기 사람들에게 극장은 전쟁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 상처를 달래기 위한 공간이었다. 1951년 1.4후퇴와 함께 대구로 내려온 수많은 피란민들과 예술단체 가운데 극단 신협도 있었다. 신협은 대구의 키네마극장을 중심으로 ‘원술랑’을 비롯해 ‘자명고’, ‘마의 태자’, ‘맹진사댁 경사’ 등 작품을 올려 갈 곳 잃은 피란민들을 위로했다.

북한을 탈출한 예술가들이 조직한 신극협회는 공연을 통해 북한의 실정을 알리기도 했다. 대구 출신의 연출가 홍혜성은 불교극 ‘팔상록’과 ‘거연’ 등을 공연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문인극 ‘고향사람들’도 이 무렵 대구에서 공연됐다. 또 홍금좌, 청춘극장, 고려, 신생극장, 아랑 등도 활발하게 공연했고 가극단의 활동도 활발했다. (이필동/대구연극사, 소화, 2005년)’

‘그즈음 전쟁으로 인해 새로 생긴 육군중앙극장은 2군사령부 정훈부의 대민 봉사활동을 위해 대구공회당(현 대구콘서트하우스)을 인수해 영화관으로 사용했다. 그곳에서는 미군부대에서 빌려온 16밀리 영화필름으로 변사(무성영화의 해설자)가 등장하는 영화가 상영되었다. 관객의 구미에 맞도록 적당히 편집한 이들 영화는 객석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고 눈물바다를 만들기도 했다. (김대한/힘들었던 시절 서민들의 휴식처, 대구문화, 2002년 4월호)’

▲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열린 전국경연예술제에 참가한 백조가극단의 ‘율곡과 그 어머니’ 단원들과 연기상을 수상한 가수 겸 배우 원희옥(좌측), 1953년

피난 시절 삶의 터전, ‘제2고향’으로 기억되는 정 많은 도시 대구

▲ 1950~60년대 대구 키네마극장, 문화극장 등에서 펼쳐진 공연 전단지

3년 넘게 이어진 전쟁으로 온통 삶의 지도가 바뀐 국민들. 대구가 당시 피란민의 거점이었던 만큼 자연스럽게 많은 예술인의 못자리가 되어준 도시이기도 했다. 1950~60년대 싱잉스타 나애심(羅愛心, 1930년~2017년)을 통해 전쟁 당시 대구 사정을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나애심(본명 전봉선)은 당대의 ‘글래머 스타’이자 ‘멋쟁이의 대명사’로도 유명한 가수 겸 배우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미사의 종’ 등을 작곡한 전오승이 그녀의 오빠이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나애심은 진남포여고를 졸업한 뒤 스무 살 때에 잠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게 된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고 그다음 날 그녀는 당시 정동방송국(현 KBS, 당시에는 ‘대적방송국’이라고도 부름) 소속 ‘HLKA 경음악단’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던 오빠를 찾아 단신 월남을 한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1‧4 후퇴 때 서울로 피란 온 나머지 가족들과 가까스로 상봉한 뒤 함께 남쪽으로 향한다.

“당시 오빠 전오승을 비롯해 방송국 경음악단에서 활동하던 박춘석, 최상룡 등 연주인 여덟 명의 가족들, 총 80여 명과 함께 남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피란민 행렬에 합류했어요. 먹을 것이 없어 한 끼 걸러 한 끼씩 동냥을 하며 죽음의 사선을 넘던 그 25일간의 일들은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메어지죠.”

그런 고생 끝에 닿아 정착한 곳이 대구였다. 이곳에서 나애심은 종군작가단 소속의 작곡가 김동진을 단장으로 해서 이북 출신 예술인들이 구성한 꽃초롱오페라단의 단원으로 입단한다. 이렇게 무대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후라이보이’ 곽규석(MC), 구민(성우), 현미(가수), 그리고 훗날 ‘이시스터즈’의 리더가 될 이정자 등과 함께 오페라 ‘아리아’의 무대에 서기도 했다. 또 함께 피란생활을 하던 이경희, 미스코리아 출신의 김미정 같은 영화배우들, 그리고 막내 동생이자 가수인 전봉옥과 ‘아리랑시스터즈’를 결성해 활동했다.

아리랑시스터즈는 일반 무대뿐만 아니라 미 8군에서도 공연을 했다. 영어는 한 마디도 몰랐지만 미군부대 공연을 갈 때마다 손짓발짓해 가며 군인 식량이나 양주, 담배, 초콜릿, DDT 등을 얻어 와 양키시장에서 현금으로 바꿔 생활해야 했을 만큼 절박한 시절이었다.

오리엔트에서 나온 나애심의 첫 음반은 이런 시기의 결실이었다. 전오승 작곡의 ‘밤의 탱고’, ‘정든 님’ 같은 블루스 계열의 곡들이었다. 녹음과 방음 시설이 워낙 열악했던 탓에 어렵게 작업을 끝낸 후 확인해 보면 기차의 기적소리, “재치국 사이소!” 같은 주변 소음들이 함께 녹음되어 있기 일쑤였다. 때문에 몇 번이고 재녹음을 하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나애심의 회고에 등장하는 가수 현미의 당시 모습은 어떠했을까.

 "내가 현미를 처음 보았을 때가 김백봉, 후라이보이 곽규석(MC), 구민(성우)씨 등과 함께 '을지문덕'을 공연했을 때였어요. 이 때 무용수로 갓 입단한 현미가 너무 어려서 가슴에 양말 등을 구겨 넣어 만든, 속칭 '뻥브라'를 한 채 무대에 올라 춤을 추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듯 현미는 1938년 평양 박구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평양 정의여중 재학시절 1.4후퇴를 맞아 가족들과 함께 얼어붙은 대동강, 임진강, 한강을 건너 대구에서 피난생활을 시작했다. 징집을 피해 부친과 오빠가 외부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를 비롯해 남은 가족들의 몫이었다. 열네 살의 현미와 두 살 아래 남동생 김명순(일명 뽀빠이)은 대구 염매시장에서 떡 장사를 했다. '아이스께끼 통'을 들고 시장 주변을 돌다가 미군부대 주변에서 깡통을 주워 팔기도 했다. 산이나 들에 떨어진 낙하산을 가져다 여자속옷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대가족의 생계를 도맡은 어머니를 그나마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다고 회고하는 현미는 그 시절 임시로 문을 연 연합중학교 2학년 때 김백봉무용연구소에 들어갔다가 꽃초롱오페라단의 단원이 된다. 어린 현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희망가극단의 뒤풀이 막간 가수로 들어가 전국 공연 길에 오르며 본격적인 연예활동을 시작한다.

‘하숙생(최희준)’의 작곡가 김호길 또한 한국전쟁 이후에도 대구에 머물면서 미군들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동촌 비행장에 나가 연주를 했다. “군용잠바를 입고 대구 동촌비행장에 도착한 마릴린 먼로를 보기 위해 내외신 기자들과 UN군이 가득 몰려들었지요. 먼로가 군복을 하나둘 벗어던지며 공연을 펼치는 내내 울려 퍼지던 환호와 함성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합니다.” 그의 회고다.

‘정(조용필)’, ‘서산갯마을(조미미)’의 작곡가 김학송과 ‘산 너머 남촌에는’의 가수 박재란도 대구에서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이 둘의 데뷔곡 ‘코스모스 사랑’은 대구방송국 경음악단장이던 김학송이 군예대원으로 활동하던 가수 박재란을 발탁해 취입시킨 노래다.

특히 박재란은 대구와의 인연이 각별하다. 본명 이영숙. 어릴 때부터 백난아의 ‘망향초 사랑’ 등 유행가를 곧잘 부르던 그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무대 활동을 적극 권유한 인물이 당시 인천경찰악대장 박태준. 대구 출생으로 ‘가을밤’, ‘오빠생각’, ‘동무생각’ 등의 작곡가인 박태준의 추천으로 군예대(KAS) 3기생으로 발탁되면서 대구에서 첫 무대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수양아버지로 삼게 되는 박태준으로 부터 받은 예명이 바로 박재란.

한편 이 시기에는 작곡가 김희갑도 대구로 피란 와 대성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당시 한창 기타 배우기에 열중하던 이 고등학생이 훗날 대한민국의 국민 작곡가 반열에 오를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사진 위) 피란시절 대구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한 ‘노래하는 스타’ 나애심, (사진 아래) 대구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한 박재란. (사진 우측) 대구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미8군쇼 시절의 가수 현미

대구가 낳은 음악 전문 출판사 ‘세광’

▲ 대구 군예대 시절 동촌비행장에 있는 미군클럽에서 연주활동을 했던 작곡가 김호길, 대구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한 작곡가 겸 기타리스트 김희갑. (사진 아래) 1953년 대구에서 ‘수문당’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세광출판사가 1950~60년대에 발행한 포켓판 대중가요집

음악 전문 출판사로 유명한 세광은 원래 수문당이라는 이름으로 1953년 대구에서 출발했다. 초창기에는 손으로 악보를 필사하던 수준이었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는 음표와 기호표를 주물로 제작해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세광출판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음악서적 전문 출판과 함께 세광음악학원도 병설해 가요계 인재들을 양성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숱한 전쟁가요와 더불어 우리 국민들은 그 어려운 시기를 견뎌 냈고, 또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대중음악의 맥을 이어 나갔다는 점에서 대구는 매우 의미 있는 문화적 거점도시였다. 전쟁으로 삶의 지도가 온통 바뀌어버린 대한민국에, 전쟁으로도 막지 못할 예술 혼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의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현재 대중문화의 중심은 서울로 옮겨졌지만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대중음악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대구는 우리 대중문화에서 매우 소중한 곳이다. 한 시대를 읽는 사회상이 마디마디 노랫가락에 실려 골목마다 넘치는 도시였던 것이다. (계속) NM

[참고자료]
단행본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박성서, 책이 있는 풍경, 2010년), ‘大邱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大邱’(한국가요작가협회보 가요마을, 2005년 겨울호).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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