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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대구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대구[4]

기사승인 2021.06.09  02: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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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가수 3人3色-남일해, 방운아 그리고 손시향과의 인터뷰

머리, 양복, 구두를 전국에서 제일 잘하는 곳, 대구는 또한 전국 도시 중 막걸리를 가장 많이 마시는 곳이기도 하다. ‘서민의 술’을 즐기는 정 넘치고 전통을 중시하는 곳인 것이다.

대구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일까. 대구는 한국의 3대 도시 중 하나지만 서울, 부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구 출신 가요인이나 노래는 적다. 대구에 세워져있는 대중가요 관련 노래비도 ‘비 나리는 고모령(현인)’, ‘능금 꽃 피는 고향(패티김)’, ‘빨간 마후라(쟈니브라더스)’ 그리고 새롭게 부각된 ‘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정도다. ‘문화도시 대구’라는 명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셈이다.

그러나 한때 대구가 우리나라 가요계의 중심에 서서 우리나라 가요의 흐름을 이끌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 사상 최악의 침체기였다고 평가되는 6.25 한국전쟁 시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적으로 전쟁의 피해를 덜 받았던 탓에 음반 산업과 함께 공연이 꽃피울 수 있었다.
대구를 소재로 하여 전 국민에게 애창됐던 노래들을 살펴보며 ‘대구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대구’, 그리고 ‘노래 속에 나타난 대구사람’의 모습을 살펴본다. 그 네 번 째, 1950~60년대 대구가 낳은 가수 남일해, 방운아 그리고 손시향과의 인터뷰.

글 l 박성서(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가요계 신사 중 신사, ‘마음의 자유천지’의 방운아

▲ 사진 위로부터. 1953년 콩쿠르에서의 방운아(우측에서 세 번 째). / 빅토리레코드사에서 백설희와 함께 음반 취입 중. / 방운아 전성기 시절 가수 현인, 박재란, 권혜경과 함께. 1959년

1950년대 대구는 오리엔트레코드사를 중심으로 대구 출신가수, 혹은 대구를 배경으로 한 인물들이 속속 탄생했다. 신인 발굴 콩쿠르를 통해 신세영에 이어 도미 그리고 방운아, 남일해 등이 이어 등장한 것.

당시 대구 계성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가수 도미(본명 오종수)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모두 고등학생이었다. 방운아(이후 방태원으로 일시 개명)는 경북 경산고, 남일해는 대건고에 재학 중이었다.

방운아의 본명은 방창만. 경북 경산 서상동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경산의 사립학교인 상암초등학교와 창성중학교(지금의 경산중학교) 그리고 경산고등학교를 다녔다. 선생과의 인터뷰는 타계 전인 2005년 2월에 진행되었다.

“어릴 때부터 유성기를 틀어주는 부유한 집의 담 너머로 노래를 배웠는데 당시에는 한번만 들어도 가사와 멜로디를 모조리 외울 정도였죠. 중학교 3학년 때 경산에서 열린 동네 콩쿠르에서 '대동강 달밤'을 불러 1등을 차지했어요.”

그러나 스무 살 차이 나는 형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혀 집과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콩쿠르에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신 멀리 부산이나 대구에서 열리는 콩쿠르에는 줄곧 참가했는데 무엇보다 친구들의 성화가 대단했고 심지어 모든 경비까지 친구들이 대신해주었다.
고등학교 때 빅토리레코드사가 주최한 대구대회에서 또다시 1등을 차지했는데 이때 만난 백영호의 권유로 노래 네 곡을 받아 연습한 뒤 취입을 위해 부산으로 갔다.

“그때는 방음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사람들 활동이 뜸한 통행금지 시간을 이용해 취입했어요. 그런데 한꺼번에 여러 가수가 취입하기 때문에 정해진 녹음시간이 지나도록 내 차례가 오지 않았죠. 그래서 너무 화가 나 아무 말도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지요.”
이후 고3 때인 1953년, 양키시장(교동시장) 부근에서 우연히 작곡가 백영호와 재회한다.
“다시 한 번 취입해보자고 선생이 제의를 해요. 그래서 부산으로 가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던 배, 즉 LST에 있던 댄스홀 '에루시안'에서 녹음했지요. 배였기 때문에 비교적 시간이 넉넉했는데 하필 그때가 '소한'이라 매우 추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때 취입한 '마음의 자유천지'가 빅토리레코드사를 통해 발표되자마자 크게 히트하면서 그는 부산 미도파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된다. 빅토리는 미도파 레코드사의 자회사다.

이때 받은 예명이 방운아. 당시 부산에서 활동하던 작사가 야인초(본명 김봉철)가 지어준 것으로 ‘구름 운(雲), 아해 아(兒)’. 즉 '구름 같은 사나이'가 되어 ‘전국 방방곡곡 다니는 가수가 되어라’라는 뜻을 담아 지어진 예명이다. 이후 그는 방태원(方太園)이란 이름으로 잠시 개명해 활동하기도 했다.

“첫 아들 낳고 아들 이름을 지으러 작명가 김봉수씨를 찾아갔어요. 간 김에 내 이름풀이도 함께 부탁했는데 ‘방운아’라는 이름은 명이 짧고 심지어 객사할 운을 가진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방태원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죠. 한창 인기 절정기였던 터라 이름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죠.”

이때가 1959년. 이로부터 3년 정도 방태원이란 예명으로 활동하다가 팬들의 요청에 의해 다시 ‘방운아’로  돌아왔다.

음폭이 넓고 안정된 가창력, 그리고 전혀 연예인 같지 않은 수수한 외모와 성실한 매너, 때문에 동료들은 그를 ‘가요계 신사 중의 신사’로 불렀다.

그는 ‘마음의 자유천지’ 이후 ‘여수야화’, ‘부산행진곡’을 비롯해 많은 영화주제가를 발표한다. ‘인생은 나그네’, ‘한 많은 청춘’, ‘두 남매’, ‘재수와 분이의 노래’ 등이 모두 당시 개봉된 영화주제가들.

“데뷔 당시에는 모두가 어려웠지요. 나 역시 전쟁 등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학업을 가수가 되고난 뒤, 그러니까 1954년도가 돼서야 가까스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으니까... 그 해에 미도파 전속가수가 되었죠.”

필자가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타계 4개월 전인 2005년 2월이었다. 백내장으로 시력이 약해져 안경을 쓰기 시작한지 몇 달 째라고 했다. 또한 두어 달 전부터 한 쪽 성대가 마비되어 메모장을 앞에 두고 어렵게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생생하다. 선생은 이로부터 4개월 뒤인 6월15일, 눈을 감았다. 현재 그의 고향인 경산에 '방운아 노래비/마음의 자유천지'가 세워져 있다.

‘저음의 마법사’로 불리던 고교생 가수, 남일해의 등장

▲ 방운아(방태원) 음반들. ‘마음의 자유천지’, ‘두 남매’, ‘행복의 메아리’, ‘젊은 명동’. 그리고 아래 사진은 필자와 인터뷰 당시 방운아 선생. 2005년 2월.

1958년 대구 대도극장에서 열린 오리엔트 신인 콩쿠르에서는 당시 대건고 3년생인 남일해가 대상을 차지하며 등장한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파워풀한 저음과 넓은 음역을 구사하는 가창력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여담이지만 경상도 억양의 억센 발음은 어쩔 수 없어 노래 취입 시 장애가 되었을 정도로 사투리가 매우 심했다.

“남일해라는 예명은 당시 오리엔트 이병주 선생님과 작사가 반야월, 손로원 선생님 등이 모여 술 마시던 중 지어준 이름입니다. 이 예명의 뜻은 잘 모르겠고...”

불과 열아홉 살이던 고3 때부터 활동을 시작해 현재까지도 여전히 현역으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는 가수 남일해의 회고를 들어보자.

“학창시절에 현인의 ‘나의 줄리엣’, ‘고향 만 리’ 등을 좋아해 종종 친구들 앞에서 부르곤 했지요. 결국 친구들의 권유로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에서 주최한 전국 신인콩쿠르에 참가했어요. 이때 대구에서 활동하던 가수 신세영의 데뷔곡 ‘로맨스 항로’를 불렀던 기억이 나는데 심사위원장을 맡은 이병주 선생이 본상이 아닌 특상을 주기로 하고 부랴부랴 트로피를 새로 주문해 만들어 주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으로 치면, 그랑프리, 즉 대상인 셈이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수가 되기 위해 학교를 마치면 매일 자전거로 30분이 걸리는 대구 남산동에서 칠성동까지 20리, 8킬로미터 거리를 오가며 추월성(본명 한덕민) 선생님께 노래 지도를 받았어요. 기타 반주로 발성법과 악보 보는 법 등을 배웠는데 이것이 결국 가수로 활동하면서 크게 도움이 되었죠.”

본명 정태호. 남일해는 대구에서 건축업을 하는 집안에서 4남1녀 중 둘째로 출생.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형 정상호가 한동안 매니저 일을 봐주었고 서양화가 정강자가 바로 밑 여동생.

대구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스케이트선수로 활동하기도 했고 특히 영화구경 좋아해 극장 출입이 잦았다. 연극배우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등장한 이 유망주는 이병주 작곡의 ‘애상의 블루스’를 대구방송국에서 취입한다. 이 노래는 당시 이병주가 서울에 설립한 대한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되었다. 남일해는 고등학교 졸업 후 닷새 만에 상경했다.

“집안의 반대가 심했어요. 결국 무작정 상경해 서울거리를 돌아다니며 무조건 레코드사를 찾아다녔어요. 그러다가 스카라극장 근처에서 만난 한 선배가수의 추천으로 작곡가 라화랑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죠. 이때부터 ‘비 내리는 부두’를 비롯해 ‘이정표’, ‘핑크 리봉의 카드’, ‘찾아온 산장’, ‘낙엽의 탱고’ 등을 발표했죠.”

이 노래들은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이 무렵은 사교춤이 유행하던 때로 아주 분위기 있는 그의 노래는 카바레나 나이트클럽에서 빠질 수가 없는 레퍼토리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그는 작곡가 길옥윤, 김인배, 이봉조, 한동훈 등 인기 작곡가들과 손잡고 ‘첫사랑 마도로스’, ’빨간 구두 아가씨’, ‘맨발로 뛰어라’, ‘안개 낀 부산항’ 등을 발표하며 1964년, 남녀가수를 통틀어 주어지는 최고 인기가수상을 거머쥔다. 특히 당시의 남일해, 박재란쇼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룬 것은 유명한 일화.

그는 스크린에 진출, 영화배우로도 활동한다. 첫 출연작은 ‘모녀기타’.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은 여주인공 태현실의 상대역. 또한 이 영화에서 태현실의 언니로 출연했던 여배우 주란지와의 로맨스는 한동안 주간지의 톱을 장식하기도 했다. 결국 둘은 우여곡절 끝에 1967년에 결혼했다.

‘모녀기타’에 이어 ‘이정표’, ‘영광의 부르스’, ‘남성금지구역’, ‘순정 산하’ 등에 출연했는데 이 중 ‘이정표’와 ‘영광의 부르스’는 그가 직접 제작까지 했다. 당시 영화 흥행은 어느 정도 되었지만 워낙 제작비가 많이 든 탓에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기도 했다.

이후 81년 6월 LA로 무대를 옮겨 교포들이 많은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까지 공연을 다니다가 1년 6개월 만에 귀국,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을 맡아 약 4년 간 가수들의 권익과 가요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선뜻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관리에 철저한 그는 이미 공인임에도 불구하고 애써 나이를  밝히지 말아달라고 주문할 정도로 여전히 무대에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 남일해 전성기 시절 사진들. 위 좌측부터. 권혜경, 이미자, 강수향과 함께. / ‘나라위한 파월가족 동포애로 도와주자’ 표어 앞에서, 최희준 한명숙, 현미와 함께. / 월간 ‘아리랑’ 주최 베스트10 시상식장에서 한명숙과. / 장병위문공연 중 현미, 한명숙, 오기택과 함

‘검은 장갑’, '이별의 종착역‘ 의 미남, 미성의 가수 손시향

▲ 전성기 시절 발표한 남일해 음반들

‘검은 장갑’, '이별의 종착역‘ 등 주로 스탠다드 팝 스타일의 노래를 구사하던 미성의 가수 손시향. 활동 당시 무려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을 정도라고 알려진 그는 50년대 미8군쇼 무대에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이후 일반무대에 등장하면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본명 손용호. 1938년 대구에서 1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는데 바로 밑의 여동생이 미스코리아 출신배우 손미희자.

손시향은 주로 작곡가 손석우와 콤비를 이뤄 많은 노래를 발표했다. ‘검은 장갑’, '거리를 떠나', '사랑이여 안녕', '사랑의 자장가', ‘이별의 종착역’ 등.

미남, 미성 가수의 대명사로 뭇 여성들을 설레게 했던 손시향은 영화배우 강신성일과 대구 경북고 동기동창. 함께 기타를 배우던 단짝이었다.
강신성일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혔듯 배우가 된 계기가 바로 가수 손시향으로 부터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입시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며 삼수생의 길을 걸게 된 강신성일이 어느 날 학원을 가던 도중 우연히 길에서 인기가수가 된 손시향과 마주친다. 이미 톱 가수가 되어있는 손시향과 겨우 악수만을 나눈 뒤 주위 스타들과 함께 바쁘게 사라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급기야 그는 입시학원으로 가던 발걸음을 연기학원으로 돌린다. 이후 강신성일 역시 ‘로맨스 파파’ 등에 출연하면서 스타의 길을 걸게 된다.

손시향이 출연한 영화들은 ‘이별의 종착역’과 ‘심야의 부르스’ 그리고 ‘비 오는 날의 오후 세시’ 등. 동시에 여러 영화주제가를 발표했다. 영화 '이별의 종착역'의 주제가를 비롯해 '고바우'의 주제가인 '인생을 즐겁게'와 '촌색시'의 주제가인 '조용하고 싶네', 그리고 ‘비 오는 날의 오후 세시’ 등.

그가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영화는 ‘심야의 부르스’.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극중에 등장하는 남성 4중창단 ‘블루벨즈’의 멤버. 영화 속 '블루벨즈'의 멤버는 손시향을 비롯해 박일호, 현양 그리고 김성배. 말하자면 솔로가수로 이미 대중들에게 친숙했던 가수들이 쿼텟으로 분장해 등장한 것.

▲ 손시향 발표 음반들. 그리고 작곡가 박춘석의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있는 미8군쇼 시절의 가수 손시향

손시향은 '검은 장갑' '이별의 종착역' 등으로 이미 최고 인기를 누리던 톱스타였고 박일호(본명 박응호)는 1958년 '메아리 사랑'으로 데뷔, 역시 '비 내리는 일요일'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솔로가수. 또한 서울대 음대 출신의 현양(본명 정운화)과 드러머 출신 김성배 또한 각각 솔로로 활동하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강행된 야간촬영에서 '꿈속의 사랑(현인 노래)'을 함께 부르는 것으로 마지막 촬영을 끝낸 바로 그날 아침, 손시향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이 영화 출연을 끝으로 61년 6월, 활동 무대를 미국으로 옮긴 손시향은 미국을 비롯해 유럽, 남미 등으로 공연을 다녔고 그 해, 스웨덴 여성인 마리스와 결혼했다.

이후 미국 마이애미에 정착, 'Lee Sohn'이란 이름으로 앨범 'at the PLACE PIGALLE'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음반은 당시 플로리다의 마이애미 비치에 있던 그의 집에서 직접 취입했다. 이후 1970년에 잠시 귀국, '손시향 귀국 기념 제1집/나는 믿지 않는다'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 마리스와의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 손시향은 지난 2005년 필자와의 통화에서 미스코리아 출신 여동생 손미희자를 비롯해 가족 모두 마이애미에 거주하며 마이애미의 한인회장으로 재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계속) NM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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