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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1.06.09  02: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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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의 독립군 전사가 이국 땅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자유시 참변’ 100주년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시작된 러시아 적군(볼셰비키 군대)과 백군(반혁명 군대) 간의 내전은 1920년 무렵 사실상 적군의 승리로 끝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혁명이 안착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러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열강의 군대도 1920년 여름까지 대부분 러시아에서 철수해 시베리아 지역은 그럭저럭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만은 극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그대로 눌러앉아 있어 볼셰비키 혁명 세력에게는 여전히 골칫거리였다. 분통이 터졌지만 힘이 열세였던 탓에 일본이 스스로 물러나 주기만을 기다리며 전략상 완충지대 역할을 해줄 ‘원동공화국(극동공화국)’을 1920년 4월 수립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최대 비극 사건

그 무렵 러시아의 극동 지역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한인 독립군 부대가 있었다. 이들은 레닌의 볼셰비키 정권이 그동안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 지지와 성원을 보내온 터라 러시아 적군 편에 가담해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한인 무장부대 중 대표적인 부대는 한인보병자유대대와 니항(尼港)부대였다.
한인보병자유대대는 원동공화국 정규 부대 소속으로 편성되었다가 1920년 9월 독립하긴 했지만 사실상 러시아 적군의 정규군이나 다름없었다. 부대 지휘자 오하묵은 러시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차대전에도 러시아군으로 참전했던 귀화 러시아인이었다. 이와 달리 니항부대는 박일리아가 이끄는 순수 항일 빨치산 부대였다.
그 무렵 러시아 적군은 원동공화국 내 아무르 주의 알렉세예프스크를 함락하고 도시 이름을 자유를 뜻하는 스보보드니(자유시)로 바꾸어 해방구를 선포해 놓고 있었다. 니항부대가 연해주에서 일본군에 쫓겨 자유시로 들어오자 이미 그곳에 터를 잡고 있던 오하묵이 일방적으로 한인보병자유대대에 편입시켰다.
그러던 중 1921년 1월 두 부대의 지위가 역전되는 일이 벌어졌다. 원동공화국 정부가 이동휘 등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니항부대를 사할린의용대로 확대 개편하고 한인보병자유대대 등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 부대들을 사할린의용대의 지휘를 받도록 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는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각각 한인 사회주의 정당의 대표성을 주장하며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한인보병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파, 사할린의용대는 이동휘의 상해파와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 참변이 일어난 자유시(스보보드니) 위치

만주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 부대가 국경을 건너 러시아 땅에 도착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1920년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로 일본군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었으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1921년 1월 흑룡강을 넘어 러시아령 이만으로 들어온 것이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등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이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이동휘와 원동공화국 정부 사이에 이뤄진 사전 교섭의 결과였다.
원동공화국 정부는 이들 독립군 부대를 이만에서 자유시로 이동하도록 했다. 이 조치에 의심을 품고 북만주로 되돌아간 김좌진 부대 등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독립군 부대는 자유시로 이동했다. 이미 자유시에는 동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김표돌의 이만부대, 최니콜라이의 다반부대 등 한인 빨치산 부대들도 집결해 있어 1921년 3월경 한인 부대의 총병력은 3,000여 명을 헤아렸다.

독립군의 항일 의지 꺾어놓고 볼셰비키 이미지 바꿔놓아

원동공화국의 지원 덕에 자유시에서 주도권을 쥔 사할린의용대는 북간도 독립군 부대와 시베리아 빨치산 부대를 포함한 모든 조선인 부대를 자유시로부터 서북쪽 70마일에 위치한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한인보병자유대대만은 이를 거부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 사할린의용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의 지위가 또다시 역전되는 일이 벌어졌다. 코민테른 결정에 따라 원동공화국 내 이르쿠츠크에 설치(1921.1)한 동양비서부의 슈미야츠키 부장이 만주 독립군 부대들과 한인 빨치산 부대들을 통합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군대인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창설하기로 하고 그 전 단계로 1921년 4월 러시아인 갈란다라시윌린을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 의장으로, 오하묵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오하묵은 1921년 4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결정을 사할린의용대에 전달하면서 모든 한인부대들은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할린의용대가 따르지 않았다. 1921년 5월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자 갈란다라시윌린 의장과 오하묵 부사령관이 600여 명의 고려혁명군정의회 군대를 이끌고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했다.
이 역전 현상에 홍범도의 한국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은 자유시로 이동해 고려혁명군정의회 소속으로 들어갔다. 반면 김표돌의 이만부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등은 고려혁명군정의회에 합류하지 않고 사할린의용대와 함께 행동했다. 그러자 갈란다라시윌린과 오하묵은 사할린의용대 등을 무장해제하기로 결정하고 1921년 6월 28일 총공격을 감행했다. 공격 지점은 자유시 중심부에서 3㎞ 떨어진,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통과하는 수라세프카역 부근이었다.
당시 고려혁명군정의회 소속 군대는 정규 군사훈련을 받은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승패는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고려혁명군정의회에 가담한 우리 독립군 부대는 이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사할린의용대 등은 ‘자유시 참변’(혹은 흑하 사변)으로 불리는 이 참극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사할린의용대는 뒤편으로 퇴각해 제야강을 건너 도망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많은 익사자를 냈다.
이 사건은 경위도 복잡하고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도 일치하지 않아 정확한 실상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에서는 사망 36명, 행방불명 59명, 포로 864명이라고 주장한 반면 만주의 항일단체들이 연명한 성토문에는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세력이 크게 위축된 것은 물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둘러싸고 고려공산당 내분이 격화되었다. 코민테른은 이후 소련(러시아) 내에서 한인들의 독자적인 조직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지휘 체계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소련에서의 자생적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막을 내렸다. 이르쿠츠크파는 군권을 차지하려고 외세의 힘을 빌려 아군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인들끼리 벌인 군권 쟁탈전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자원한 수백 명의 독립군 전사들이 이국땅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자유시 참변’은 독립군의 항일 의지를 무참히 꺾어놓았고 독립군의 지원 세력으로 알고 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현재 러시아 아무르주의 스보보드니 외곽 소벳스키 마을에는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오석(烏石) 빗돌이 서 있다. 앞면 왼쪽에는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이란 문구가 한글로 쓰여 있고 가운데와 오른쪽엔 한자와 아라비아 숫자로 ‘西歷(서력) 1921. 06. 28’과 ‘黑江(흑강) 自由市事件(자유시사건) 獨立軍殉絶地(독립군순절지)’라고 각각 새겨놓았다. 아래쪽에는 러시아어로 ‘1921년 이 땅에서 희생된 한인 빨치산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

 

50년 전 대만의 유엔 축출과 중국의 유엔 가입 과정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국제 무대에서 대만 역할 확대에 힘을 쏟으면서 대만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5월 24일 개최되는 제74차 세계보건총회(WHA) 연례회의에 대만을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시켜 달라고 세계보건기구(WHO)에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에 앞서 5월 초 열린 G7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대만의 세계보건기구(WHO)와 WHA(세계보건총회) 참여를 지지한다는 내용을 공동성명에 포함시켰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하나의 중국’ 원칙은 유엔 결의 2758호와 WHA 관련 결의에서 확인한 기본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유엔 결의 2758호는 1971년 중국이 유엔에서 유일하게 합법적 권리를 가진다고 결정함으로써 중화민국(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한 결정이다. 1971년 10월 중국의 유엔 가입과 대만의 유엔 축출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졌는지를 살펴본다.

중국, 1950년부터 유엔 가입 시도했으나 번번이 미국에 가로막혀

모택동의 공산당이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한 오랜 국공내전에서 승리함에 따라 장개석은 대만으로 쫓겨나고 모택동의 중화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49년 10월 1일 수립되었다. 그러나 유엔이 인정하는 중국 정부는 공산당 정부가 아니라 미국의 지지를 받는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였다.

▲ 이른바 ‘알바니아안(案)’이 통과되자 유엔 총회에 참석한 중국의 외교부 부부장 교관화(喬冠華)가 머리를 쳐들고 크게 웃고 있다.(1971.10.25.)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1950년부터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다”고 천명하면서 “대만은 중국의 영토이므로 대만 정부 대표를 즉각 유엔에서 쫓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정부 대표를 유엔 주재 중국의 유일한 합법대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번번이 미국에 가로막혀 실현되지 못했다. 덕분에 대만은 유엔에서의 지위를 온전하게 유지했다.
1950년 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하자는 ‘소련안’과, 중국을 유엔에 가입시키자는 ‘인도안’이 별개로 유엔에 상정되었으나 두 안 모두 미국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첫 실패 후에도 중국의 유엔 가입안은 매년 총회에 상정되었고 결과는 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1961년 알바니아를 비롯 10여 개국이 중국의 유엔 가입과 대만의 유엔 축출이 동시에 이뤄지도록 하는 이른바 ‘알바니아안’을 유엔에 상정했다.
미국은 전과 같은 대처로는 중국의 유엔 가입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중국의 유엔 가입을 “유엔 회원국 3분의 2 이상의 의결을 얻어야 한다”는 ‘중요사항’으로 지정해 유엔 총회에서 통과시켰다. ‘중요사항’ 지정은 진입 장벽을 과반수 의결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결로 높인 맞불작전이었으나 이것이 효력을 유지하려면 매년 총회의 의결을 거쳐야 했다. 그 무렵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다수 국가들이 유엔에 속속 가입함에 따라 유엔의 세력 판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중국이 이들 국가들과 관계를 긴밀히 하면서 영향력도 함께 커졌다.
문제는 대만의 축출이었다. 미국은 그 동안의 관계를 생각해 최소한의 저지 노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하려면 3분의 2 이상의 의결이 필요하다”는 이른바 ‘역중요사항 지정안’이었다. 물론 유엔의 총회를 거쳐야 했다.

대만 대표, 패배 예상하고 투표 시작되기도 전에 대회장 떠나

미국의 집요한 방해로 좀처럼 성사될 것 같지 않던 중국의 유엔 가입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미국 측의 ‘중요사항’ 지정안이 66대 52로 여전히 찬성표가 많긴 했지만 ‘알바니아안’도 사상 처음으로 51대 49로 다수 지지표를 얻었다. 아직 3분의 2 의결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과반수의 의결이 주는 상징성은 컸다.
그런 가운데 1971년 들어 중국 외교사에 중대 변화가 생겼다. 그해 4월 미국의 탁구 대표팀이 중국을 방문하고 6월 10일 닉슨 대통령이 대 중국 금수조치를 해제함으로써 미·중 간에 화해 무드가 새롭게 조성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6월 11일 리비아가 대만과의 우호관계를 청산하고 중국을 승인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대만 63개국, 중국 62개국이던 수교국가 수가 하루 만에 역전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미국도 중국과의 화해를 선택한 마당에 굳이 중국의 유엔 가입을 적극적으로 막을 생각이 없었다.
이런 제반의 문제를 결정할 유엔 총회가 열린 것은 1971년 10월 25일이었다. 중국의 유엔 가입과 대만의 유엔 축출이 동시에 이뤄지도록 하는 ‘알바니아안’과, “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하려면 3분의 2 이상의 의결이 필요하다”는 ‘역중요사항 지정안’ 중 어느 것을 먼저 표결에 붙일 것인가를 정하는 표결에서 유엔 총회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단지 순서를 정한 표결이었으나 미국은 마치 본경기에서 이기기라도 한 듯 고무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역중요사항 지정안’은 찬성 55, 반대 59, 기권 15, 불참 2로 부결되었다.
다음 순서인 ‘알바니아안’ 의결에 앞서 미국의 조지 부시 유엔 대표는 알바니아 결의안을 중국 가입과 대만 축출로 분리표결하자고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절차상 합당치 않다는 말리크 총회 의장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러자 패배를 예상한 대만 대표는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유엔 탈퇴를 선언하고 총총히 대회장을 떠났다.

미국 이중 플레이 펼쳐

알바니아안은 찬성 76, 반대 35, 기권 17표라는 압도적 다수로 회원국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 통과되었다. 중국이 가입을 시도한 지 22년 만에 유엔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대만의 의석 유지를 위한 미국의 노력도 완전히 좌절되었다. 알바니아안이 가결된 순간 회의장에는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성으로 가득찼고 심지어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 유엔에 가입하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우리를 지지해준 대만이 축출되고 적성국인 중국이 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심각하게 우려할 상황이었지만 미국으로서는 굳이 패배랄 것도 없었다. 표결이 진행되고 있는 순간에도 키신저 특사가 북경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은 이중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서방 측으로서는 미국이 실리를 좇는 마당에 중국의 유엔 가입을 반대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이미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과의 친교가 더 절실했다.
중국의 유엔 가입이 확정된 그날 밤, 대만 국기는 유엔본부 앞 게양대에서 끌어내려졌다. 중국의 유엔 대표단은 처음 참석한 11월 15일의 총회 연설에서 미국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한국에 관한 유엔의 모든 결의를 무효화시키고 언커크(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를 해체해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대변하며 기세를 올렸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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