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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의 항명! 사실 아니다

기사승인 2021.07.04  13:5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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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출동 중인 한 국가의 해군 최고지휘관을 체포·구금하고 삭탈관직 후 종군시켰던 사례는 세계 해전사를 통해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세계사적인 일이 1597년 정유재란 시기에 조선에서 일어났다. 조선 조정은 도대체 이순신이 어떠한 죄를 지었기에 ‘적과 대치하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을 체포하여 처벌하고 백의종군을 시켰을까?’

차성경 기자 biblecar@

당시 조선 조정에서 이순신 장군의 죄에 대해 적시한  바에 따르면, 이순신의 가장 큰 죄는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배신한 죄’였다. 이는 정유재란 시기 제때에 군사를 출전시키지 않아 1597년 1월 부산에 쳐들어 온 적장 가토군을 미리 막지 못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 고광섭 교수

최근 이순신 사후 현재까지도 정유재란 직전 이순신이 선조의 출전명령을 받고도 ‘출전하지 않았던 사유를 들어 선조의 명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내려오는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록을 사실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이순신은 선조의 출전명령을 거역하지도 않았다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논문은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것으로 관련 학계는 물론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저자는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모교에서 오랜 기간 항법 교수로 재직하다 대령으로 예편 후 현재 국립목포해양대학교 해군사관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고광섭 교수이다. 고 교수는 장기간의 연구 끝에 얻은 연구 결과를  2021년 한국해군과학기술학회 논문지 3월호에 게재하였다. 

발표된 논문에서 고 교수는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 장군의 항명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동안 고 교수는 명량해전 이후 이충무공이 체류했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된 안편도라는 섬이 ‘현재의 신안군 안좌도임’을 논문으로 밝힌 바 있다. 또 실체가 불분명했던 절이도해전(1598년 7월 19일 고흥 거금도 해역에서 교전)을 시뮬레이션을 통해 재현시켜 ‘절이도해전은 조선수군이 학익진 전술로 왜 수군전선  50여척을 격파한 대해전’이었음을 논문으로 제시하기도 하는 등 항법공학자로서 새로운 시각과 융합적 사고로 숨겨진 이순신의 발자취를 찾는데 주력해 왔다.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로서 공의 흔적을 찾고 공의 정신을 전파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고광섭 교수를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Q. 이순신이 선조의 출전명령을 받고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았다고 전해 내려오는 기존의 근거는 무엇인가.
A. 이순신이 심문이나 고문을 당하면서 이를 주도하는 인사들과 상호 주고받은 구술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순신이 선조의 출전명령을 받고도 출전하지 않은 핵심적인 이유에 대하여는 이순신 사후 60여년 지나 완성된 선조수정실록의 1597년 2월 1일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핵심 내용은 이중 간첩 요시라가 조선 조정에 제공한 가토군의 침공 일시 및 가토 동선을 토대로 국왕 선조가 황신을 통해 이순신에게 출전명령을 전달하였으나 이순신이 출전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에는 황신으로부터 국왕 선조의 출전명령을 전달받은 이순신이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을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출전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의 내용은 오늘날까지도 이순신이 선조의 출전명령에도 불구하고 출전하지 않은 이유로 대중에게 인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순신이 선조의 출전명령을 거역했다고 회자되기도 한다.

Q. 이 연구를 수행하게 된 동기나 배경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
A. 오늘날까지도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이 선조의 출전명령을 거역했다는 핵심적인 근거 자료는 이순신 사후 60여년 지나 완성된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록이다. 이 기록의 내용에 대해 이순신이 부당한 국왕의 출전명령을 거부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비겁한 장수로 보여질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더욱이 절대 군주시대에 왜적이 침공하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전방의 군 지휘관이 군 통수권자의 출전명령을 거부할 수 있느냐는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또 종종 군 지휘관들이나 이순신 연구자 등 일각에서도 ‘정유재란 직전 이순신 장군이  전시에 군 통수권자인 선조의 출전 명령을 실제로 거부했을까?’ 라는 합리적 의심을 갖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도 정유재란 초기 왜군 침공 전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았던 이유나 배경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나 공개적인 발표 또는 토론 등은 활성화 되지 못했다. 매우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한다. 본인이 이순신이 전시에 국군통수권자인 국왕의 출전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진 데 대해 합리적 의문을 가졌던 시기는 해군사관학교 생도시절 충무공 이순신 강의를 들으면서부터다. 해사를 졸업한 이후에도 이 의문은 언젠가는 풀어보아야 할 남겨둔 연구 과제로 생각하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전역 후 집중적으로 이순신 해전과 전략 연구를 하면서 이 연구를 하게 되었다.

Q. 연구 결과의 핵심은 무엇인가? 
A. 첫째로는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록에 적시된 이중 간첩 요시라가 조선 조정에 제공했다는 적장 가토의 부산 도착시기, 적의 동선 및 출전명령 전달자 등 주요 내용이 선조실록 기록 분석 결과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록에는 이중 간첩 요시라가 가토의 동선과 침공 날짜를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황신이 이순신에게 국왕의 출전 명령을 전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논문에 상세하게 밝힌 바 있지만, ‘요시라’라는 이중 간첩이 조선 조정과 군 부대를 드나들고 조선의 관리들과 군 지휘관을 수시로 접촉하고 왜군의 정보를 전해준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요시라는 가토군이 이미 대마도를 떠나 부산해역으로 침공 중이던 1597년 1월 13일에도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황신을 경상도 의령에서 만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요시라는 황신을 만난 자리에서 ‘가토군이 대마도에서 출병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거짓말을 한 것이다(이 내용은 1월 15일 황신이 올린 장계 내용으로 선조실록 1월 23일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선조수정실록 2월 1일 기록에는 한산도에 있는 이순신에게 선조의 출전명령을 전달한 사람이 황신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한산도에 간 사람은 도원수 권율이라는 사실이 황신이 쓴 장계에서 밝혀진다(황신은 1월 15일 올린 장계에서 1월 13일 권율이 한산도 이순신을 만나러 갔다고 보고했다.).
둘째로는  선조와 이순신 간에 주고받은 출전명령과 답신 등에 관한 기록분석 등을 통해 이순신이 선조의 출전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입장이나 상황이 아니었음을 밝혔다. 선조실록 1596년 12월 5일 기록에 따르면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전상황에 대한 지시를 하였고, 또 12월 28일에는 이순신으로부터 온 비밀문서를 보고 받았다. 이는 분석 결과 이순신의 출전허락 요청 장계 내용으로 선조수정실록 1597년 1월 1일 기록에서 확인된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일 내용에는 선조가 출전을 허락하면서 경상우병사 육군 지휘관인 김응서와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협력을 특별히 당부하며 합동작전을 주문하였다. 이 출전 명령을 체찰사 이원익에게 조치하라고 하였고, 체찰사 이원익의 지휘를 받는 도원수 권율에 의하여 1월 14일 한산도에 있는 이순신에게 전달되었다. 이때는 이미 왜군이 부산해역에 진입했거나 진입 중인 시점이었다. 1월 2일 선조의 출전 명령이 한양에서 한산도까지 당시의 교통편 고려시 1주일 정도임을 감안할 때 지연되어 이순신에게 전달되었고, 이순신은 선조의 출전명령을 받기 전에 출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이순신을 죽음 직전에서 구출한 정탁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정탁은 그의 상소문에서 ‘변방의 장수들이 한 번 움직이려고 하면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되고, 장군 스스로는 제 마음대로 못하는데, 왜적들이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조정에서 비밀히 내린 분부가 제때에 곧바로 전해졌는지도 모를 일’ 이라고 적시했듯이 선조가 1월 2일 내린 선조의 출전명령이 제때에 한산도 이순신에게 정상적으로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연구 결과에서 보듯이 선조의 출전명령은 가토군 침공 전에 이순신에게 정상적인 기간에 전달되지 못했다. 가토 침공 전 선조의 출전명령을 전달받지 못한 시점에서 이순신의 출전은 거행될 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선조의 출전명령을 받고도 이유를 대거나 핑계를 대고 출전하지 않았거나 출전을 거역할 상황이 아니었다.
셋째로는 1월 14일 선조의 출전명령을 전달 받은 후 이순신의 군사행동에 대한 검토를 통해  가토군 침공 전보다도 오히려 작전환경이 어려운 상항에서도 부산으로 출전할 만큼 왜군에 대한 공격의지가 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순신이 2월 10일 개시한 합동작전이 어떤 상황에서 실시되었는지는 의미가 크다. 적이 1597년 1월 13일 적선 200여 척이 부산 다대포에 정박했다는 정보가 1597년 1월 21일 처음으로 조정에 보고된 후, 이순신의 탄핵이 논의되고 2월 6일 이순신을 체포하라는 선조의 명령이 하달된 상황에서 이순신은 체포 명령이 떨어진 사실도 모른 채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함께 2월 10일 부산으로 출전하여 합동작전을 개시하였다. 특히 이 시기는 이미 왜군이 대대적으로 침공한 후여서 안골포 및  거제도 등지의 기존의 왜군 세력이 가토군 침공 전보다도 강화되고 부산으로 출병시 배후에 적의 협공이 우려되었음에도 출병한 것이다. 1월 14일 선조의 출전명령을 전달 받은 후 이순신의 군사행동이 전개된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정유재란 시기 선조의 출전명령을 이순신이 거부했다거나 이순신이 항명 했다’고 알려진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Q. 연구 중 힘들었던 점이나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 있다면.
A. 사실 연구 과정에서의 힘든 점보다는 연구 후 연구 결과에 대한 후속 조치 문제에 고민이 많았다. 왜냐하면 연구 결과가 현재까지 대부분의 이순신 연구자 및 역사가들의 인식이나 대중들에게 알려진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록’을 뒤집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많은 생각 끝에 이 연구 결과를 결국 한국해군과학기술학회지 3월호 논문지에 게재하기로 결정하였다. 연구 과정에서 이순신 생존시의 선조실록 기록과 이순신 사후 작성된 징비록, 이충무공행록, 이충무공 전서  및  선조수정실록 내용에 대한  펙트 체크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군사를 출전시키지 않은 이유가 기록된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록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확인한 것과 이순신의 출전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이순신의 장계와 연계한 선조의 출전허락 과정 및 선조의 출전명령 전달 과정을 체계적으로 입증한 것은 큰 보람이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본 연구는 저자가 청년기부터 가졌던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전쟁 중 군 통수권자인 선조의 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적의 침공을 앞둔 시점에서 출전을 왜 하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 의구심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연구하는 기간이 길었고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뿐 아니라 연구 결과를 공개하는 데 대한 심한 압박감도 있었으나 충무공 이순신 항로 탐사단 교수님 및 해군 선후배님들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연구 결과가 논문으로 공개된 후 전국의 이순신 연구가와 군 선후배님들로 부터 많은 격려가 있었다. 어떤 연구 결과라도 완벽할 수는 없다. 이 연구 결과에 이어 더욱 발전된 연구를 기대하며, 지금까지 알려진 정유재란 시기 ‘선조의 출전명령에 대하여 이순신이 출전을 거역했다거나 이순신이 항명했다’는 인식이 재고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NM

 

차성경 기자 bibleca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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