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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1.10.12  13: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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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국 기밀 정보 동맹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와 ‘에셜론’

미국의 기밀 정보 공유 동맹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에 한국 등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담은 법안이 2021년 9월 2일 미국 하원 군사위원회를 통과했다. 미 하원 군사위는 중국·러시아로 인해 위협의 지형이 변했다며 정보 공유 대상국을 한국과 일본, 인도, 독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미국의 ‘파이브 아이즈’ 확대 대상국에 우리나라 외에 일본, 인도 등이 포함돼 중국 견제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중국의 반발과 견제도 우려되고 있다. ‘파이브 아이즈’에 대해 알아본다.

비밀 시스템 ‘에셜론’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확인한 건 유럽의회 보고서

1988년 8월, 영국의 주간지 ‘뉴 스테이츠먼’에 탐사보도 전문기자 던컨 캠벨이 쓴 ‘누군가 엿듣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그는 기사에서 “프로젝트415는 1급 비밀 지구감시 시스템이다. 영국에서만 연간 10억 통화를 도청할 수 있다”고 폭로했다. 캠벨은 스파이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가 몇 달 뒤 구속되었다. 함께 기사를 쓴 미국 기자는 영국에서 추방되었다.
1997년 11월 영국의 ‘데일리 텔리그라프’지는 유럽연합 의회의 비밀보고서를 인용해 2차대전 후 구축된 ‘에셜론이 냉전 붕괴 후에도 존속하고 있으며 정부, 기업, 개인의 통신을 무차별적으로 도청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전 세계의 통신정보를 수집·분석·공유하고 분석하는 비밀 시스템 ‘에셜론’의 존재가 유럽의회 보고서를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유럽의회는 산하 에셜론위원회가 1년여에 걸쳐 조사한 끝에 제출한 140쪽의 보고서와 암호체계 강화 등 에셜론 방어책으로 권고한 44개 사항을 2001년 9월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2001년 5월 영국 ‘가디언’지도 유럽의회 보고서를 인용해 “에셜론이 1947년 미국과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앵글로색슨 국가들이 체결한 비밀조약의 일부”라고 보도했다.

▲ 에셜론 본부로 사용되는 영국 요크셔의 ‘멘위드 힐’ 기지

각종 언론 보도와 유럽의회의 에셜론위원회 발표를 종합하면 에셜론의 실체는 이랬다. 에셜론은 냉전시대 초기 공산권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미국의 주도로 창설된 국제정보 감시망이다. 기원은 냉전이 막 태동하던 1946년 3월 미국과 영국의 첩보기관이 서명한 ‘영미안보협정(UKUSA)’이다. 두 나라는 1948년 정보공유를 위한 ‘유쿠사(UKUSA) 협정’도 체결했다.
냉전이 본격화하자 미국은 대소(對蘇) 전략 강화를 위해 통신 감청을 통한 정보 수집, 암호 해독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비밀기관을 창설했다. 1952년 11월 미국 매릴랜드주 포트미드에서 비밀리에 창설된 국가안보국(NSA)이다.
미국과 영국은 1956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세 나라도 끌어들였다. 이로써 5개국 간 군사동맹 및 정보 네트워크를 의미하는 ‘5개의 눈’ 즉 ‘파이브 아이즈(Five Eyes)’가 탄생했다. ‘파이브 아이즈’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호주 가입 사실은 1970년대 후반에야 드러나기 시작했고 뉴질랜드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1980년대 중반에 터져나왔다. 5개국은 공통점이 많았다. 주류 민족이 앵글로색슨의 백인계이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다수가 개신교를 믿었다. 역사적으로는 영국에 뿌리를 두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법률은 영미법을 따르기 때문에 법률상 공조도 용이했다.

‘파이브 아이즈’ 5개 회원국, 전 세계 모든 종류의 통신 정보 수집·분석·공유

5개국 정보기관은 각각 미국의 NSA, 영국의 국가통신본부(GCHQ), 캐나다의 통신보안국(CSE), 호주의 방위통신대(ASD), 뉴질랜드의 국가통신안보국(GCSB)이다. 그들의 정보 수집 네트워크와 분석 시스템에는 1960년대 말 ‘에셜론(ECHELON)’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에셜론 시스템을 개발한 기관은 미국의 국가안보국(NSA)이다. NSA는 미 정보기관 중 인력과 예산 면에서 최대 규모인데도 정확한 실상은 지금까지도 베일에 가려져있다. NSA는 끊임없이 새로운 첩보기술을 개발하고 이 기술을 회원국에 공급했다. 회원국들은 전 세계 모든 종류의 통신 정보를 수집·분석·공유했다.
정보 추출과정 자체는 다소 복잡하긴 했으나 개념도는 단순했다. 도·감청 기지의 슈퍼컴퓨터에 수천 수만 개의 키워드, 전화번호, 팩스번호, 주소 등을 미리 입력해 두면 도·감청으로 확보한 수억~수십억 개의 메시지 가운데 이들 키워드가 포함된 메시지를 찾아내고 이를 숙달된 요원들이 분석·판단하는 것이다.
에셜론 본부는 영국 요크셔의 ‘멘위드 힐’ 기지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 미국이 소련을 감시하기 위해 1956년께 건설한 거대한 골프공 모양의 둥근 구조물이 핵심 시설이다. 기지는 냉전이 끝난 뒤에도 계속 확장되어 지금은 골프공 모양의 구조물이 10여개나 된다. 이곳에서는 각국 첩보위성이 보내는 정보를 저장하고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상공에 떠 있는 상업위성이 중계하는 정보를 취합한다. 냉전시대 에셜론의 주타깃은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었다. 냉전이 끝난 1990년대에는 위성통신과 인터넷을 파고들어 정보를 수집하는 단계로 확대되었다. 오늘날 에셜론은 첩보위성 100여 개를 이용해 전 세계 모든 종류의 통신을 감청하고 있다.

영화배우 제인 폰다, 마틴 루터 킹 목사, 교황, 테레사 수녀 등도 감청해

오늘날 에셜론의 폐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안보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경쟁국들의 통신까지 마구 도감청하고 자국 국민을 상대로도 이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러리스트, 마약 거래, 정치·외교 정보를 수집하는 게 본연의 임무인데도 기업과 국제무역에까지 감청을 서슴지 않고 있다. 특히 미국의 NSA는 자국 내 CIA, FBI, DIA 등 정보기관으로부터 건네받은 내국인 감시명단을 이용해 급진 정치그룹으로부터 반정부 시위에 가담한 일반 시민까지 감시하고 있어 그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확인된 바에 따르면 미국 내 유명 연예인인 제인 폰다, 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들어 있었다.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를 비롯해 교황, 테레사 수녀, 국제사면위원회, 그린피스 등까지 폭넓게 감청했다.
에셜론은 경쟁국가의 자원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거부하는 국가의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도 사용되었다. 1995년 미국의 보잉사와 유럽의 에어버스사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경쟁이 붙었을 때 에어버스사의 입찰 가격이 미 NSA의 에셜론에 도청당해 결국 미국의 보잉사가 1998년 60억 달러의 항공기 판매 계약을 성사시킨 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1991년 한국이 캐나다와 ‘캔두 원자로 건설’을 협상할 때 캐나다의 통신보안국(CSE)이 한국 대사관과 외무부 사이의 모든 통신을 도청한 사실은 1998년 2월 캐나다의 '파이낸셜 포스트'지가 캐나다 통신보안국(CSE) 소속 한 작전 담당요원의 폭로를 보도하면서 드러났다.
에셜론의 부정적 측면은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의 정보 획득·공유체계의 불법성을 폭로한 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중앙정보국(CIA)과 NSA에서 4년간 IT 전문 요원으로 근무하며 개인 정보감시와 정보 보안업무를 담당했던 스노든은 “누구라도 도청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리에서 일했다”면서 “당신이나 당신의 회계사, 연방검사, 심지어는 대통령도 개인 명의의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면 도청이 가능했다”고 폭로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스노든이 유출한 기밀 문건을 토대로 2013년 10월 “미국 NSA가 최소 35개국 정상급의 통화를 엿들었다”고 폭로했다. 이로써 NSA가 테러 위협을 명분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했다는 의혹을 넘어 우방국 정상들까지 광범위하게 감시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호왕 ‘유행성 출혈열’ 병원체 발견

해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족집게 예언해온 글로벌 학술정보 분석기업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가 칼 존슨 미국 뉴멕시코대 명예객원교수와 함께 한탄바이러스의 발견과 신증후군출혈열(HFRS)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이 유력시 된다”고 9월 23일 발표했다. 클래리베이트는 지난 2002년부터 생리의학·물리학·화학·경제학 분야에서 논문이 다른 학자의 논문에 2000회 이상 인용된 상위 0.01%의 우수 연구자들을 노벨상 수상 후보로 선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후보로 지목한 연구자 376명 중 59명(16%)이 실제로 노벨상을 받았다.

갑자기 세포핵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황금빛 바이러스 무리가 눈에 띄어

1976년 4월 30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 ‘유행성 출혈열 병원·면역체 규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크게 실렸다. 세계 예방의학계와 미생물학계가 반 세기 동안 매달렸으나 아무도 풀지 못한 괴질의 정체를 한국인 의학자가 마침내 밝혀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화제의 주인공은 이호왕(1928~ ) 박사였다.
그는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나 함흥의과대학(5년제)에서 의학도의 길을 걷다가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월남했다. 서울대 의과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한 뒤에는 1955년 미국 미네소타대로 유학을 떠나 대학원 과정을 다시 밟고 1959년 '일본 뇌염 바이러스의 원숭이에서의 면역전기'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서울대 의과대 교수로 부임한 그는 수년간 일본 뇌염을 연구했으나 일본 학자에게 선수를 빼앗겨 새로운 연구과제를 찾았다. 훗날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될 신증후군출혈열(유행성출혈열)이라는 원인 모를 괴질이었다. 유행성출혈열은 세계 전 지역에 퍼져 있는 질병으로, 학계에 처음 보고된 것은 1913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이것이 집단으로 발병한 것은 1940년이었다. 당시 소련·만주 국경에서 대치하고 있던 일본군과 소련군 양 진영에서 수 천명이 한꺼번에 발병해 수백 명의 목숨이 희생된 것이다. 1951년 여름에는 6·25가 한창이던 철의 삼각지에 주둔한 미군에게 집단적으로 발병해 수년 동안 총 2000여 명이 감염되고 8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 이호왕 박사

유엔군사령부는 급히 ‘출혈열 연구센터’를 설치하고 미국에서 200여 명의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그중에는 197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할 대니얼 가이듀섹과 바루크 블럼버그, 1954년 노벨의학상 수상자인 존 엔더스도 있었다. 다양한 연구자들이 1965년까지 15년 동안 한국에 상주하며 40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연구비를 쏟아부었지만 정체는커녕 병원체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미국은 결국 연구소의 문을 닫았으나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1968년까지 일본 주둔 의학연구소에 연구진을 머물게 해 서울을 왕래하며 출혈열에 대한 연구를 관장케 했다. 이호왕은 미 육군성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1969년 여름부터 연구원들과 함께 휴전선 일대를 누비며 등줄쥐, 갈밭쥐 등의 들쥐와 두더지, 살쾡이 등을 닥치는 대로 채집했다. 당시 미군의 연구결과는 병원체 바이러스의 숙주가 들쥐일 것이라는 기존의 실증 위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농민과 군인들에게서는 여전히 매년 2000~3000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있었고 연구원 중에도 3명이 사경을 해매기도 했다.
연구팀은 장기에서 병원체를 분리하기 위해 해마다 숙주로 추정되는 수백 마리의 들쥐를 해부하고 조직배양을 시도했으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연구가 답보상태에 빠져 있던 1973년 이호왕은 서울대를 떠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고려대로 자리를 옮겼다. 지속적으로 이호왕의 연구를 지원해 오던 미군 당국은 마냥 기다릴 수 없어 1976년 봄을 최종 시한으로 통보했다.

평생 두 개의 바이러스 발견은 기적에 가까워

초조해하던 이호왕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1975년 연말이었다. 어느날 자신을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10년간 출혈열을 연구해온 학자”라고 소개한 사람으로부터 소책자 한권이 배달되었는데 책에는 “출혈열 병원체는 곰팡이이며 들쥐의 폐장에서 발견된다”는 가설이 적혀있었다. 이호왕은 믿기지 않았지만 그동안 수많은 학자가 들쥐의 장기를 해부하고 실험할 때, 출혈열로 이상이 생긴 다른 장기와 달리 폐 부분 만은 멀쩡해 실험대상에서 제외해온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이호왕은 이평우 조교에게 등줄쥐의 폐 조직을 검사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등줄쥐의 폐 조직을 형광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처럼 세포핵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황금빛 바이러스 무리가 눈에 띄는 것이었다. 1975년 12월 20일이었다. 마침내 출혈열 병원체가 베일을 벗고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호왕은 처음 환자가 발생하고 등줄쥐가 채집된 한탄강에서 이름을 따 병원체 이름을 ‘한탄 바이러스’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호도 ‘한탄’으로 지었다. 그러나 이 첫 발견은 겨우 단서를 잡은 것일 뿐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호왕 연구팀은 1976년 봄까지 등줄쥐 3000마리를 검사해 그 중 6마리의 폐에서 특이한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이 사실이 1976년 4월 말 도하 각 신문에 보도된 것이다.
이후 3~4년 동안 이호왕 연구팀의 연구 결과를 인정하게 된 전 세계의 학계는 연구를 입증하는 논문들을 쏟아냈다. 이호왕은 1980년 집쥐도 출혈열의 숙주임을 밝혀내 평생 하나의 바이러스를 발견하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데 둘이나 밝혀내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병원체는 ‘서울 바이러스’로 명명되었다. 병명은 한동안 '한국형 출혈열', '유행성 출혈열'로 불리다가 1982년 WHO에 의해 ‘신증후군출혈열’로 공식 통일되었다.
이호왕은 1978년 유행성 출혈열의 진단방법을 완성한 뒤 1980년부터 녹십자사와 공동으로 예방주사 연구에 착수했다. 1990년 마침내 개발을 완료한 이호왕과 녹십자는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 유럽에 특허를 출원한 뒤 1990년 9월 20일 국립보건안전원의 국가검정을 끝내고 9월 21일 ‘한타박스’라는 이름의 백신으로 전국 의료계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이호왕은 유행성 출혈열의 바이러스 발견, 진단방법과 백신 개발까지 이 병의 퇴치에 필요한 일련의 과정을 혼자서 모두 수행한 인물이 되었다.
의약개발사에서 바이러스를 발견한 사람이 면역체까지 발견해낸 경우가 극히 드문데 이호왕이 그 드문 인물에 속하게 된 것이다. 이호왕에게는 한동안 ‘한국의 노벨의학상 후보 제1호’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으나 그 시절 노벨상 수상을 뒷받침하기에는 우리의 국력이 너무 부족했다. 그랬던 그가 마침내 노벨 생리학상 후보에 오른 것이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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