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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2.01.15  00: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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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밴팅, 당뇨병 치료 세계 최초 성공 100주년
  
당뇨병은 세계 만국의 ‘국민병’이다. 전 세계적으로 당뇨병을 앓고 있는 성인 환자 수는 4억 명을 넘어섰다. 성인 11명 중 1명꼴이다. 우리나라는 더 심각한 수준이다. 현재 30세 이상 국민 7명 중 1명이 당뇨병을 앓고 있다. 65세 이상 인구로 따지면 3명 중 1명이 당뇨병이다. 이 당뇨병 치료가 세계최초로 성공한 건 100년 전인 1922년 1월이다. 당뇨병 치료제 개발의 역사를 알아본다.

‘세계 당뇨병의 날’(11월 14일)은 밴팅의 생일

인슐린은 췌장의 랑게르한스섬에서 분비되는 물질로 인체 세포의 3분의 2가량을 차지하는 지방세포와 근육세포가 포도당을 흡수하도록 도움을 준다. 따라서 랑게르한스섬에 문제가 생겨 인슐린을 제대로 분비하지 못하게 되면 세포는 정상적으로 포도당을 섭취하지 못해 포도당이 혈중에 남아 혈당 농도를 높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콩팥이 혈중에 있는 과량의 포도당을 걸러내지 못해 포도당이 소변에 섞여 나온다. 그래서 붙은 병명이 당분이 많이 섞여 나오는 오줌이라는 뜻의 당뇨병(糖尿病)이다.
랑게르한스섬은 1869년 독일의 파울 랑게르한스가 췌장에서 섬(島)처럼 보이는 특수한 세포 집단을 발견한 것을 다른 과학자가 그 공로를 인정해 명명한 내분비 조직이다. 그런데 당시 랑게르한스는 이 조직이 인슐린을 분비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1889년 독일의 폰 메링과 오스카 민코프스키는 췌장을 떼어낸 개의 소변을 검사해 보니 다량의 당이 포함된 것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췌장을 제거하면 당뇨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05년 영국의 에드워드 샤피셰이퍼는 랑게르한스섬에 어떤 변화가 생기면 당뇨병이 생긴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췌장에 존재하면서 당 대사를 조절하는 물질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샤피셰이퍼는 1916년 이 가상의 물질을 섬이란 뜻의 라틴어 ‘인슐라(insular)’에서 따 ‘인슐린(insuline)’으로 명명했다.
1906년 독일의 내과 의사 게오르크 주엘처는 췌장을 떼어낸 개에게 췌장 추출물을 주사하면 개의 소변에서 배출되는 당의 양이 감소하지만 췌장 추출물 주입을 중지하면 당이 다시 처음 수준으로 상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엘처는 당뇨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실시했으나 부작용이 심해 더 이상 진행하지는 못했다. 췌장에는 혈당을 줄이는 물질인 ‘인슐린’뿐만 아니라 혈당을 증가시키는 물질인 ‘글루카곤’도 포함되어 있어 부작용이 생긴 것인데 주엘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제 마지막 단계는 췌장에서 인슐린을 추출해 임상실험을 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해결한 이가 캐나다의 프레더릭 밴팅(1891~1941)이다.

소의 췌장 추출물로 만든 인슐린으로 임상실험 시작

밴팅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나 1916년 토론토대 의과대를 졸업했다. 1920년 봄 병원을 개업했으나 환자가 없어 무료한 날들을 보내야했다. 그러던 중 1920년 10월 31일 ‘외과학, 산부인과학’ 잡지 11월호에 실린, 췌장의 랑게르한스섬에서 분비되는 물질이 당뇨병과 관계가 있다는 연구논문을 읽게 되었다. 밴팅은 이후 몇 편의 관련 논문을 더 읽고난 뒤 췌장관을 묶어 트립신(췌장에서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의 분비를 막는다면 그 물질을 추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추론했다. 밴팅은 1920년 11월 당뇨병 권위자였던 토론토대 존 매클라우드 교수를 찾아가 자문과 도움을 요청했다. 매클라우드는 1921년 5월 여름휴가를 떠나기에 앞서 개에서 췌장을 끄집어내 당뇨병 개를 만드는 방법과 췌장관을 결찰(잡아매기)하는 방법을 밴팅에게 가르쳐 준 후 실험에 사용할 개 10마리를 제공했다. 대학원생이던 찰스 베스트도 실험 조교로 붙여주었다.

▲ 프레더릭 밴팅

밴팅은 개의 췌장관을 결찰한 후 방치해 두었다가 췌장 조직에서 원하는 물질을 추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가설은 맞지 않았다. 췌장관을 잡아맨 지 수주가 지나도 물질을 추출할 상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밴팅은 조교와 함께 계속 실험을 했으나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21년 7월 30일, 개에서 췌장을 제거해 당뇨병 개를 만든 뒤 췌장을 갈아 만든 췌장 추출물을 주사해 혈당이 저하되는 것을 확인했다.
문제는 장기 치료에 필요한 인슐린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소와 돼지의 췌장에서도 인슐린을 추출해 더 많은 양의 인슐린을 확보했다. 다행히 독성은 없었다. 1921년 9월 실험에 동참한 매클라우드는 1916년 샤피셰이퍼가 명명한 ‘인슐린(insuline)’에서 ‘e’를 제거하고 ‘인슐린(insulin)’이라고 개명했다.
밴팅과 베스트가 소의 췌장 추출물로 만든 인슐린으로 임상실험에 들어간 것은 1922년 1월 11일이었다. 환자는 2년 전 당뇨병 진단을 받은 13세 소년 레너드 톰슨이었다. 소의 췌장 추출액을 약하게 희석한 첫 번째 주사를 소년에게 놓자 소년의 혈당이 감소했다. 그러나 인슐린이 아직은 불순해 지속적으로 주사하지는 못했다. 다행히 다른 연구자가 좀 더 순수한 췌장 추출물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밴팅과 조교는 1월 23일 정제한 추출물을 다시 소년에게 주사하기 시작했고 소년의 소변에서 검출되는 포도당의 양이 감소했다. 이로써 인류 역사 이래 불치병으로 여겨온 당뇨병을 치료하는 길이 열렸다. 소년은 당뇨 합병증인 폐렴으로 죽기 전까지 13년을 더 살았다. 이후 1922년 2월까지 6명의 환자가 같은 치료를 받았고 결과는 모두 비슷했다. 뒤이어 베스트 조교가 기존에 정제한 추출물보다 더 많은 양과 순도를 가진 추출물을 제조하는 데 성공했다. 그 덕에 토론토대는 1922년 8월 대량생산을 시작하고 미국의 제약회사에 미국 내 판매를 허용했다.
밴팅과 매클라우드는 1923년 10월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로써 밴팅은 노벨 생리의학상 역사상 최연소 수상이자 연구 착수 후 가장 빨리 인정받은 업적이라는 두 가지 기록을 세웠다. 오늘날 세계 당뇨병의 날은 11월 14일이다. 세계보건기구와 세계당뇨병연맹이 당뇨병 퇴치를 위해 프레더릭 밴팅의 생일을 당뇨병의 날로 제정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평화선’ 선포 70주년

1952년 새해가 되자 일본의 어민들은 4월 28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날은 1951년 9월 8일 일본과 연합국이 체결한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되는 날이었는데 조약이 발효되면 지난 7년 동안 일본 어민의 족쇄로 작용해온 이른바 ‘맥아더 라인’이 폐지되기 때문이었다.

일본 어민 수시로 우리 영해 침범하고 조업 일삼아

‘맥아더 라인’은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일본 어민들이 본토 주변의 정해진 선을 벗어나 조업하지 못하도록 1945년 9월 27일 미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 주변에 선포한 조업 한계선이었다. 독도 주변으로도 12해리 이내에는 진입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은 맥아더 라인의 폐지와 우리의 동해 진출을 학수고대했다.
그렇다고 일본 어민들이 맥아더 라인을 곧이곧대로 준수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앞선 장비와 기술을 이용해 수시로 맥아더 라인을 벗어나 우리 영해를 침범했다. 당시 일본은 첨단장비를 갖춘 어선을 1,000여 척, 200만t이나 보유하고 있어 주로 무동력선에다 총선박 규모가 10만t에 불과한 우리 어선을 압도했다.
일본 어선은 독도 근처는 물론 제주도 연안과 흑산도 근해에까지 수시로 몰려와 조업을 일삼았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 나포된 일본 어선 수는 1947년 9척, 1948년 18척, 1949년 10척, 1950년 9척, 1951년 37척으로 총 82척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맥아더 라인까지 폐기되면 우리의 어업이 고사하는 것은 물론 독도까지 일본이 지배하겠다고 나설 것이 뻔해 우리로서는 어떻게든 막아야 할 입장이었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후에도 맥아더 라인의 존속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물론 미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이승만 평화선’ 지도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초강경책을 들고 나왔다. 1952년 1월 18일, 한국의 해안에서 평균 60마일(약 97km) 이내의 자연자원과 수산물 등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주장한 ‘대한민국 인접해양에 대한 대통령의 주권선언’을 선포한 것이다. 주권선언과 함께 우리 해안에서 50~100해리 범위가 경계선으로 획정되었다. 당연히 독도도 그 안에 포함되었다. 이 대통령의 해양 주권선언은 독도를 ‘다케시마’로 부르며 자국의 영토임을 강변하는 일본의 주장에 쐐기를 박기 위한 목적이 1차적이었지만, 북한의 연안 침투를 방어하고 세계 각국의 전관수역이 확대되는 추세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까지 감안한 쾌도난마식의 선언이었다.
1952년 당시 자국의 바다를 획정해 영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나라는 미국과 중남미 등 몇 개국이 전부였을 뿐 아시아에서는 어느 나라도 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의 해양 주권선언은 국제법상으로도 혜안이 돋보이는 선언이었다. 반면 일본 어민들에게는 맥아더 라인이 폐기되어도 한국의 새로운 해양 주권선언에 의해 또다시 한국 연안 진출이 막혀버린다는 점에서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다급해진 일본은 1월 24일 반박 성명을 냈다. 1월 28일에는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며 우리 측에 공식적으로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미국과 대만 등 국제여론도 부정적으로 기울자 이 대통령은 2월 8일 “한일 양국의 충돌을 막는 평화 유지에 선언의 목적이 있다”고 해명하며 명칭을 ‘평화선’으로 바꿔 불렀다. 하지만 일본은 ‘이승만 라인’ 혹은 ‘이 라인’으로 부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평화선 선포 후 일본 어선의 침범조업은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효력을 발생하자 다시 극성을 부렸다.

이승만의 외교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쾌거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8일 “선포 수역에서 조업하는 외국 어선은 국적을 불문하고 나포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일본은 1952년 9월 ‘ABC라인(일본경비구역선)’을 선포하는 것으로 맞불작전을 펼쳤다. 1952년 9월 27일에는 당시 유엔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가 중공군과 북한군의 잠입을 막고 전시 밀수출입을 봉쇄하기 위해 한반도 주변에 해상방위선 즉 ‘클라크 라인’을 설정했다. 이 선의 안쪽 수역이 평화선의 안쪽 수역과 거의 겹치다 보니 결과적으로 클라크 라인은 평화선 선포를 간접적으로 지원한 셈이 되었다.
평화선을 국내법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가 제정한 어업자원보호법은 1953년 12월 1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로써 평화선이 법적 효력을 얻게 되었고, 평화선 내에서 외국 선박의 불법어로 행위를 엄격히 단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수산회가 펴낸 ‘일한어업대책운동사’에는 1947년 2월부터 1964년까지 총 313척의 일본 어선이 나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126척만 송환되고 나머지는 한국이 압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과정에서 1953년 2월 4일 제주도 부근에서 불법 조업 중이던 일본 어선 선장이 우리 경비정의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정부는 압류 선박을 국내에 유상불하하거나 수산계 학교와 연구기관 등에 무상공여했다.
성능이 우수한 일부 선박은 우리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였다. 일본 어선을 되돌려주지 않고 우리가 활용한 것을 두고 논란이 적지 않았으나 어쨌든 압류 어선은 변변한 어선 하나 없는 우리나라 수산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평화선 선포는 6·25라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쾌거였으나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12월 비준서 교환과 함께 사실상 소멸되었다. 평화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던 날 우리 국민은 “얻은 것은 돈이요, 잃은 것은 평화선”이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NM

▲ 나포된 일본 어선이 제주항에 정박되어 있다.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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