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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1세대 희극인, 최고령 취입 가수, ‘전국노래자랑’의 국민 MC 송해

기사승인 2022.08.08  17: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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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팔꽃 인생' 95년, ‘나의 삶은 딩동댕!’

따듯한 목소리와 웃음으로 한평생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국민 MC 송해(1927~2022).

희극인으로, 가수로, 그리고 기네스북에 오른 ‘전국노래자랑’ 최장수 MC로 오랫동안 국민들에게 사랑받았던 그. 그와 함께 무대에 서지 않은 대한민국 가수가 없고 또한 그의 무대에서 불리지 않은 노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오랜 시간, 국민들과 함께 했다.

서민적인 소탈함과 친근한 미소 못지않게 특유의 따듯한 목소리로 국민들의 마음을 노래로써도 어루만져 준 송해 선생을 추모하는 발길이 지금도 종로 송해길과 대구 달성의 송해기념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글 I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매주 일요일 국민들과 함께 외친, “전국~”,“노래자랑!!”

매주 일요일 국민들을 웃고 울게 했던 ‘국민 MC’. 2022년 6월 8일, 95세를 일기로 별세한 송해(1927.4.27~2022.6.8)는 가수로서도 큰 활약을 했던 원로였다. 또한 송해는 가요 모음집을 비롯해 10장이 넘는 음반을 내며 가수로도 활동했다.

지난 34년 간 KBS 1TV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아 쇼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초대 가수들과 두터운 친분을 나눴던 그. 심지어 그의 무대에 서지 않은 가수가 없고 불리지 않은 노래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평생 떠나온 고향을 그린 ‘유랑 청춘’

송해(본명 송복희)는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이곳 재령평야는 '나무리(南勿里)벌'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신재령에도 나무리벌/물도 많고/땅 좋은 곳...’, 김소월의 시 ‘나무리벌 노래’에서 언급할 만큼 대표적인 곡창지대였다. 실제로 이곳의 쌀은 예로부터 왕실의 진상미(進上米)로 유명했다. ‘나무리’는 ‘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출중했던 송해. 6·25 직전까지 북한 해주예술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던 그는 30년 넘게 진행해 온 ‘전국노래자랑’에서도 노련하게 노래 한 곡조를 구성지게 뽑으며 수준급의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한창 6.25 전쟁 중이었던 1951년, 그는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징집을 피해 일주일만 피신해 있겠다며 떠난 피난길, 그 일주일이 칠십 년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평생의 한이었던 이러한 심정은 그가 2015년에 발표한 노래 ‘유랑 청춘’에도 잘 나타나 있다.

1. 눈물 어린 툇마루에 손 흔들던 어머니/하늘마저 어두워진 나무리 벌판아/길 떠나는 우리 아들 조심하거라/그 소리 아득하니 벌써 칠십 년/보고 싶고 보고 싶은 우리 엄마여.

2. 재 넘어 길 떠나는 유랑 청춘아/어디 가면 그리운 님 다시 만날까/정 주면 이별인데 그 어디 머물까/그 세월 아득하니 벌써 칠십 년/보고 싶고 보고 싶은 우리 어머니. -‘유랑 청춘(오민석 시, 신재동 작곡, 송해 노래)’

이 노래에는 분단 70년에 대한 깊은 회한과 송해 자신의 설움이 담겨있다. 그는 이북에서 배를 타고 바닷길을 건너오면서 바다 해(海) 자를 이름에 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월남한 이후 1955년, 순회 악단인 ‘창공악극단’에서 처음 가수 생활을 시작했는데, 입담을 살려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MC도 그의 몫이 되었다.

▲ 송해 데뷔 27주년 기념공연 포스터와 2011년 전국 순회공연을 했던 ‘나팔꽃 인생 60년 송해 빅쇼’ 실황 DVD. 아래는 직접 출연한 영화 포스터들. ‘단벌 신사’, ‘구혼작전’, ‘송해 1927’

1967년 가수로서 첫 음반 취입, ‘노총각 맘보’, ‘피양 체네’

악극단원으로 시작해 1960년대 후반부터 희극인으로 활동한다. 특히 코미디언 박시명과 콤비를 이루며 명성을 날리던 그가 첫 음반을 취입하며 정식 가수로 데뷔하는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가수 겸 작곡가였던 윤일로가 만든 ‘노총각 맘보’와 '피양 체네(평양 처녀의 평안도 사투리)'가 그것으로 1967년 아세아레코드에서 음반이 발매되었다.

1. 대동강 강변에서 빨래하든 그 체네야/지금은 어드메서 무얼 하고 살고 있니/편지 한 장 못 띄우니 안타까와 죽갔소/이거 정말 죽갔시오 체네야 피양 체네야.

2. 능라도 실버들에 정을 주던 피양 체네/지금은 시집가서 오마니가 됐갔구나/ 보고픈 건 마찬가지 안타까와 죽갔소/이거 정말 죽갔시오 체네야 피양 체네야. -피양 체네(김문응 작사, 윤일로 작곡, 송해 노래)

음반에 적혀 있는 가사와는 일부 다르게 이북 사투리의 강한 액센트를 넣어 부르는 이 노래의 작사, 작곡가, 가수는 모두 이북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이다. 작사가 김문응은 평안북도 선천, 작곡가 윤일로는 평안북도 양덕, 그리고 송해는 재령으로 모두 이북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반면 ‘노총각 맘보(윤일로 작사, 작곡)’는 코믹한 가사로 되어 있다. ‘세상에 근심 걱정 없는 상팔자/이것이 상팔자 노총각 팔자/장가를 일찍 들면 근심도 많아...’로 시작되는 빠른 템포의 익살스런 노래다.

▲ 송해 발표 음반들. 가수로서, 희극인으로서 여러 장의 음반을 남겼

송해의 애창가요, 노래와 코미디 등 꾸준히 음반 취입

1970년대에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웃음의 파노라마'와 '싱글 벙글쇼'에서 지난해 별세한 코미디언 이순주(1945~2022)와 콤비 플레이를 과시하며, 방송과 쇼무대, 그리고 ‘문화영화’ 등에서 호흡을 맞췄다.

이들은 함께 '노래와 코메디'라는 타이틀로 여러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두 콤비의 유쾌한 말솜씨가 돋보이는 만담과 노래가 번갈아 펼쳐지는 앨범이다. 만담은 노래를 소개하는 용도이기도 했다. 당시 서민들이 코메디'를 듣고 웃으면서 팍팍한 삶을 견뎌냈다.

한 시절을 풍미한 옛가요를 엄선한 ‘송해 애창가요 모음집’도 주목을 받았다. 1980년 ‘짝사랑’, ‘울고 넘는 박달재’, ‘번지 없는 주막’ 등 평소 그가 즐겨 부르던 애창곡을 모아 부른 음반 ‘송해의 가요 산책’을 내놓았다. 1987년에도 ‘백마야 우지 마라’, ‘애수의 소야곡’ 등을 모아 ‘송해 옛 노래 1집’이라는 타이틀의 음반을 발표했다. 이후에도 ‘애창가요 모음집 송해쏭’, ‘송해 아흔 즈음에’ 등 송해의 이름을 건 가요 모음집도 여러 장 발표했다.

외아들의 교통사고로 17년간 맡아온 ‘가로수를 누비며’ 내려놓아

1960·70년대 라디오와 TV, 그리고 쇼무대에서 코미디언으로 맹활약한다. ‘웃으면 복이 와요(MBC)’를 비롯해 ‘고전 유모어 극장(TBC, KBS)’, ‘유머 1번지(KBS)’, ‘코미디 하이웨이(KBS)’ 등에 출연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코미디 활동을 접고 MC로 활약했다.

재치 넘치는 입담으로 인기를 끈 그는 1970년대에 들어선 라디오로 무대를 넓혔다. 능수능란한 화술과 진행, 그리고 정확한 발음을 가진 그는 동양방송(TBC)이 매일 아침 방송하던 교통 정보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의 진행을 맡으면서 큰 인기를 누렸다. ‘가로수를 누비며’는 언론 통폐합 이후 KBS 라디오 서울로 옮겨 계속 방송되었고 1990년부터는 KBS 제2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다. 그러나 아들의 오토바이 교통사고 이후 그 충격으로 한동안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하면서 17년 동안 맡아온 진행자 자리를 내려놓는다. 1986년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외아들은 이 사고로 의식을 잃고 6일 동안 지내다 작별 인사조차 못 한 채 떠났다. 이후 송해는 한남대교로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 '홍도야 우지 마라'의 가수 김영춘(왼쪽), '울고 넘는 박달재'의 가수 박재홍(오른쪽)과 함께. 아래 사진에는 가수 김영춘, 고운봉, 박재홍, 김용만, 블루벨즈의 박일호, 박일남, 개그맨 김병조 등의 모습이 보인다

환갑을 넘겨 맡게 된 ‘전국노래자랑’으로 국민 MC 반열에 올라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실의에 빠진 그에게 다가온 것은 ‘전국노래자랑’이었다. 영화배우 안성기의 형으로도 유명한 안인기 PD가 ‘전국노래자랑’ 프로그램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몇 차례 고사 끝에 결국 1988년 5월, ‘전국노래자랑’을 시작한다.

전국 각지의 명물들이 몰려 노래하며 춤추던 이 ‘전국노래자랑’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노래자랑 무대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상실의 아픔을 치유해 갔다. 첫 방송 때 이미 환갑을 넘겼던 그는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기점으로 비로소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일요일의 남자' 송해가 인사 올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다시 한 번 안녕하세요~“ 전국노래자랑 오프닝 멘트다.

‘전국노래자랑’은 국내를 넘어 외국으로 건너가고 결국 평양에 갔다. 2003년 8월 11일, 모란봉 공원 야외무대에서 ‘평양노래자랑’이 열렸다.

“정말로 감격의 순간 역사의 순간입니다. 저는 평양의 모란봉에서 이렇게 복받치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가 한 멘트다.
“그럼 이것으로 평양노래자랑을 여기서 전부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통일의 한길에서 다시 만납시다. 다시 만납시다!”

평양 방문 당시 송해 선생이 흐린 대동강을 내려다보며 불렀던 ‘한 많은 대동강’, 대동강과 모란봉 을밀대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유독 떨렸다.

2022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MC로 활약했던 ‘전국노래자랑’으로, 역대 현역 방송인 사상 최장수한 최연장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2022년 5월 23일 기네스북의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가 그것.

‘나팔꽃 인생 60년 송해 빅쇼’로 최고령 단독 콘서트 펼쳐

MC, 코미디언, 가수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송해는 국내 ‘최고령 단독 콘서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80대 중반이던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첫 단독 공연인 ‘나팔꽃 인생 60년 송해 빅쇼’로 전국 순회공연을 했다. ‘나팔꽃 인생’은 직접 발표한 노래 제목으로 이 무대에서 그는 이 외에도 10여 곡의 노래를 열창했다. 2년간 18개 지역에서 40회의 공연을 펼쳐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당시 그는 “제 노래가 듣기엔 좋진 않아도 나름대로 열심히는 부른다"며 "그간 살아오면서 고난의 순간을 만나면 노래로 풀었고 노래를 음미하며 살아왔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2015년에 신곡 ‘유랑 청춘’을, 이듬해에는 '내 인생 딩동댕'을 발표했다. 이처럼 노래와 꾸준한 인연을 이어오던 송해는 국내 ‘최고령 취입 음반’이라는 기록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2018년 7월, 91세의 나이에 취입한 ‘딴따라’가 그것. 아울러 이듬해인 2019년 11월에는 ‘내 고향 갈 때까지’를 발표, 자신의 최고령 음반 취입 기록을 다시 경신했다.

‘발을 뻗으면 닿을 것 같고/소리 지르면 들릴 것도 같은데/칠십 년이 흘러가도 돌아갈 수 없구나’...라며 지금은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 종로 송해길에 세워진 송해 흉상과 대구 달성에 세워진 송해기념관. 이곳에는 지금도 추모 발길이 이어지고 있

송해가요제, 그리고 송해길...

30년 넘게 노래 경연 프로그램을 진행해 온 그의 이름을 딴 가요제도 있었다. 2017년 가수의 꿈을 갖고 있지만 어려운 환경에 있거나 기회가 없어 데뷔하지 못하는 지망생들을 위해 '송해 가요제'를 개최했다.

당시 그는 “가요 1백년사의 기쁨과 슬픔을 전하고, 여러 가수가 가요제 행사를 통해 더 알려지고 새롭게 조화를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소감을 밝혔었다. 이듬해에는 '송해 전국 주부 대박 가요제'도 열어 주부들을 응원하기도 했다.
대표곡 ‘나팔꽃 인생’은 서울 종로 송해길에 세워져 있는 송해 동상에도 이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일요일의 남자 송해 쏭/동서나 남북 없이 발길 닿는 대로/바람에 구름 가듯 떠도니/세월이 몇 해이던가
묻지마라 내 가는 길을/구수한 사투리에 이 마음이 머물면/나팔꽃 같은 내 인생 풍악 소리 드높이고/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우리 함께 노래 불러요. -‘나팔꽃 인생(김병걸 작사, 신대성 작곡, 송해 노래)’.

송해의 95년 인생은 딩동댕!!

2016년, 서울 종로2가 낙원동 골목에 조성된 송해길, 240미터 남짓한 이곳엔 송해가 생전 출근했던 ‘원로연예상록회’ 사무실, 즐겨 찾던 식당과 양복점 등이 밀집해 있다. 이 길에는 송해의 흉상이 두 개 세워져 있다. 파고다 건물 앞에, 그리고 종로3가 지하철역 5번 출구 앞이다. 파고다 건물 앞 흉상에는 ‘딴따라’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강산이 좋다 사람이 좋다/풍악따라 걸어온 길/바람 속에 청춘이 간다/인생이 이거라고 이거라고/어느 누가 말할 수 있나/아 오늘은 어디에서/임자 없는 내 노래를 불러보나/가진 건 없어도 행복한 인생/나는 나는 나는 딴따라/만남이 좋다 친구가 좋다. -‘딴따라(김병걸 작사, 노영준 작곡, 송해 노래)’

평소 ‘석여사(부인 석옥이)의 묘지 곁에 영면하겠다’는 그의 뜻에 따라 아내의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에 잠들어 있다. 이곳 옥연지에는 송해공원과 송해기념관이 세워져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송해 선생의 미소와 목소리엔 서민적인 소탈함 못지않게 특유의 따듯함이 있어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을 가졌다. 송해 선생이 있었기에 국민들이 어려웠던 시절에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일평생 연예인으로 살았지만 항상 서민들 속에 있었던 그는 늘 삶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곁으로 찾아가는 우리 시대의 가족만큼이나 친근한, 큰 어른이었다.

▲ ‘원로연예상록회’ 사무실에서 필자, 그리고 '초가삼간', '처녀 농군'의 가수 최정자 귀국 인터뷰 당시 송해 선생과 함께, 2019년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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