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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이끈 선구자

기사승인 2024.03.06  14: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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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승화에 도달해 마음에 떠오른 수많은 환상을 예술로 표현, 새로운 현실을 전달하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다. 예술가는 창의력을 충분히 발휘하면, 환상의 세계에서 다시 승화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는 자유자재의 방법을 찾아낸 사람이다.

차성경 기자 biblecar@

예술가가 대상의 집착에서 자유로운 표현으로 치환시키면 애착이 사랑으로 변하면서, 자유로운 마음의 표현으로 승화된다. 내면의 힘이 응축된 예술작품은 감상자의 마음에 전달되어 불안한 감정들을 승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술품이 예술가와 감상자를 연결하는 감정의 승화라는 놀라운 기재는 예술이 인류문명과 함께 전승되는 강력한 이유다.

▲ 김구림 화백 (사진_오철헌)

각종 장르를 실험하고 도전해온 전위예술가 1세대
김구림 화백의 행보가 화제다. 다양한 전위적인 퍼포먼스로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을 개척해온 김구림 화백은 지난 2월12일까지 MMCA 서울 지하 1층 6, 7전시실에서 개최된 <김구림>展을 성황리에 마쳤다. 1960-70년대 퍼포먼스나 영화 등의 실험미술을 선보이며 오늘날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이끈 선구자인 김구림 화백은 한국 미술계의 이단아로 불린다. 회화, 조각, 판화 등 전통적인 미술장르를 넘어 퍼포먼스, 보디페인팅, 대지미술, 일렉트릭아트부터 단편영화, 무대미술과 의상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고 다양하게 각종 장르를 실험하고 도전해온 김 화백은 195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회화, 판화, 조각, 설치, 비디오아트 등 전방위로 미술작품을 발표했던 그는 한강변 잔디를 태워 생명 순환의 과정을 표현한, 이른바 ‘대지미술’을 국내에서 처음 시도했다.

▲ 1960-70년대 퍼포먼스나 영화 등의 실험미술을 선보이며 오늘날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이끈 선구자인 김구림

1969년에는 국내 첫 실험영화인 ‘1/24초의 의미’를 연출한 데 이어 이듬해 ‘제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 총연출을 맡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판화와 비디오아트를 본격적으로 실험했던 그는 1980년대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작업의 변화를 추구했다. 경계를 허물며 끊임없이 세상과 이야기를 나누는 <음과 양> 시리즈는 세상만물이 모두 음과 양으로 이뤄져 있고 자신은 세상의 것을 작품으로 구현하기에 작품명을 통일했다. 수많은 이미지와 오브제의 조화와 충돌을 통해 본래의 의미를 해체시키고 재조합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낸다. 김구림 화백의 작품은 일찌감치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있었고, 소재나 매체 측면에서도 인위적 혹은 작위적이지 않았다. 그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즉흥성, 우연성, 물성을 통한 탈물성화라는 역발상, 해체의 지향은 문화적·경제적 특권을 누리던 작가들과의 차이를 명료하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 음양(Yin and Yang). 2009

최근 막을 내린 MMCA의 <김구림>展은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작품세계를 아카이브 자료와 함께 총망라했다. 한국전쟁 이후 실존적 문제의식을 다룬 초기회화 작업에서부터 1960~70년대 한국 실험미술 중심에서의 퍼포먼스와 설치작품, 1980년대 중반부터 이어온 <음과 양> 연작, 국외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던 <태양의 죽음>(1964)과 <전자예술>(1969), <1/24초의 의미>(1969),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 <걸레>(1974) 연작 등 주요한 의미를 지닌 엄선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와 별도로 MMCA다원공간에서 1969년 작품을 2023년에 재연하여 그가 직접 연출한 영화, 무용, 음악, 연극을 한데 잇는 대규모 공연을 선보여 극찬을 받기도 했다.


해외 미술계에서 예술성 인정받아 국내 화단서도 재조명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회화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실험미술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김구림 화백. 그러나 그는 정작 해외에서 먼저 그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자의로 그만두긴 했지만 미대를 졸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술계에서는 근본 없는 예술인으로 치부되었기에, 그의 작품은 국내 화단에서 외면당했다. 이에 대해 김구림 화백은 “나는 지금까지 예술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아무도 개인전을 불러주지 않았다. 어느 날 아주 작은 갤러리에서 연락이 왔고, 어렵게 개인전을 할 만큼 힘든 시기였다. 남을 따라하는 것을 싫어했다. 살면서 가장 하고 싶은 게 그림이었고 영화, 무용, 퍼포먼스, 오브제 등의 작업을 하게 되었다”면서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을 때론 화면에, 때론 퍼포먼스로, 때론 영화, 연극, 음악, 무용 등 어떤 매체나 장르를 한계 짓지 않고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 있다면 선택해 표현할 뿐이다”고 부연했다.

▲ 자화상. 2010

김 화백은 1985년 도미 이후 백남준과의 2인전 등으로 이름을 알리며 미국 미술계에서 귀화 권유까지 받을 정도로 명성을 얻었음에도 이를 마다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문화교실과 대학 강사 등을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해외에서는 여전히 그의 예술성은 계속해서 주목을 받았다. 2012년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개최된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 전시회에서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쿠사마 야요이 등과 전시했고,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테이트 라이브러리 스페셜 컬렉션에 ‘김구림 아카이브’가 소장되었는데, 현재까지도 예술가로서 외국 미술관에서 컬렉션으로서는 최초이다. 이처럼 해외 미술계에서 김구림 화백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계속 이어지면서 국내에서도 그의 예술성이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지난 2017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그가 한때 그렇게 염원했던 국내 화단에서도 예술성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김구림 화백은 “현실 속에서 작품에 대한, 부딪혀서 사회가 요구한 바를 반영하며 내가 해야 할 것을 찾는 것이다. 하나의 작품 경향을 되풀이하는 것은 혼이 없고, 정신이 깃들지 않은 것이다”며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작가란 먼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 대한 평가 역시 역사가 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NM

▲ 회화, 조각, 판화 등 전통적인 미술장르를 넘어 퍼포먼스, 보디페인팅, 대지미술, 일렉트릭아트부터 단편영화, 무대미술과 의상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고 다양하게 각종 장르를 실험하고 도전해온 김구림 화백.

차성경 기자 bibleca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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