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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가야소녀는 왜 순장당했나…

기사승인 2012.07.03  08: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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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년 만의 만남, 송현동 순장묘에 담긴 비밀

지난 2007년 창녕 송현동 15호분의 발굴현장, 3~5세기 가야 최고 수장급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 안에서 네 구의 순장인골이 발견되었다. 그 중 가장 온전한 인골은 17세 소녀로 추정되었다. 죽은 이를 위해 산사람을 함께 묻는 잔혹한 고대의 장례풍습 순장, 1500년 전 가 소녀의 순장 인골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 순장인골 복원 모형 '송현'
고대 국가에서 왕의 무덤에 사람을 함께 묻는 풍습인 순장(殉葬)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야에서 마지막으로 행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순장자는 강제로 묻히며 주피장자와 확연한 종속관계라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판단이다. 과연 고대에는 어떤 사람들을 순장의 대상으로 삼았고 왜 그들을 함께 묻어야 했으며, 그들은 어떤 인식체계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2007년 12월 경남 창녕 송현동에 있는 한 고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골 네 구가 발견됐다. 남녀 두 쌍이 한 무덤에서 나왔으나 발굴팀은 신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미 도굴꾼들이 다녀간 뒤였기 때문. 무덤 주인 자리에는 관조차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으며, 남아 있는 인골도 여인으로 추정되는 한 인골을 빼고는 팔다리의 뼈만 남아 있었다. 발굴된 15호분의 인골 분석을 통해 순장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쫓아본다.

1500년 만에 드러낸 송현동 순장묘
경남 창녕군의 송현동 고분군, 목마산 기슭을 따라 형성된 이 고분군은 전체 80여 기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10여 기 정도만 남아 있다. 그만큼 훼손이 심했던 것. 인근의 고분군 지역은 논밭으로 경작돼 훼손이 훨씬 심한 상태였다. 일제강점기 도굴도 성행했던 곳이라 고분의 원래 성격을 파악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실제로 1918년 대규모 도굴이 이뤄졌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2007년 12월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는 놀라운 발굴이 있었다. 특히, 지대한 괸심의 대상이 된 곳은 송현동 고분군 중에서 가장 큰 무덤이었던 15호분. 발굴단을 모두 놀라게 한 인골의 발견은 고분이 조성된 시기인 6세기경, 무려 1500여 년 전의 무덤이다. 이 속에서 발견된 피장자들의 유골은 1500여 년 전의 가야인들이었다. 처음 발견된 인골은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도굴꾼의 소행으로 몸통 부분은 아예 없어지거나 뒤섞여 있었던 것. 인골을 수습해 나가던 발굴단의 눈에 주인의 자리가 보였으나 이미 무덤 주인의 인골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네 사람의 인골이 발견되었고, 이로써 주피장자 한 명과 네 명이 묻힌 순장묘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송현동 15호분 봉분은 도굴 흔적을 제외하고는 처음 그대로였으며, 인골의 배치도 순장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주피장자는 머리를 남쪽으로 두고 매장되었고, 반면 그 발치에 위치한 네 명의 머리 방향은 동쪽이었다. 이렇게 머리 방향이 다른 것은 무덤의 주인과 순장자들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순장자들은 물품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무덤 주인과는 다른 방향으로 안치되었던 것이다. 송현동 15호분의 봉토는 1500년 전 조성 당시 그대로로 추가장이라면 발생했을 교란이 없었고, 인골과 유물의 배치도 추가로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순장 무덤이 확실했다.

구의 인골은 순장자였다

   
▲ 경남 창녕군 송현동의 6세기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17세 소녀 순장자의 두개골
창녕 송현동 15호분의 인골을 수습한 결과, 순장자는 네 명이었다. 처음 네 명의 인골은 가톨릭대학교 의대 응용해부학연구소로 옮겨졌으며, 이곳에서 법의학자들의 정밀 분석이 진행됐다. 뼈에는 신원 확인에 필요한 나이, 성별, 키에 대한 정보가 새겨져 있다. 분석 결과 네 명의 인골은 두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였다. 석실 입구에서부터 여자-남자-여자-남자의 순서로 누워있었던 것이다. 세 구의 인골은 도굴꾼들로 인해 훼손되어 2~30대라는 연령과 성별만이 드러났지만, 북벽에 위치한 온전한 한 구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정보를 내놓았다. 인골 곁에는 금귀고리가 놓여 있었으며, 인골의 넓적다리 뼈를 통해 대략의 키를 추정한 결과 150~160㎝정도의 키를 가졌다. 치아는 다 발달이 되지 못했고, 성장판조차 닫히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 온전한 인골을 10대 가야 소녀라고 결론지었다. 북쪽 인골의 치아는 완전히 자라 있었고, 그렇다면 13세는 넘은 나이였다. 사랑니를 방사선 촬영한 결과 절반 정도밖에 발달되지 않았고, 사랑니의 발달 정도로 보아 10대 후반, 좀 더 좁히면 17세로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판단했다. 송현동 15호분에 묻힌 금귀고리의 인골, 그녀는 아직 채 성인이 되지 못한 17세 가야소녀였다. 그렇다면 17세 소녀와 함께 묻혔던 순장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인골의 DNA 분석 결과 두 번째와 네 번째 순장자는 동일한 어머니 쪽의 조상형을 갖고 있었다. 즉, 17세 소녀와 함께 순장 당했던 두 명의 남자는 적어도 같은 모계 혈통의 형제였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장면을 가능하게 했을까. 한 사람이 죽은 자를 위해 함께 묻혔던 네 명의 순장자, 한 명은 17세 소녀였고 또 다른 두 명의 남자는 같은 모계 혈통이었다. 과연 이런 충격적인 순장 문화는 어디서 비롯된 문화일까.

순장은 북방에서 유입된 외래문화

   
▲ 부장된 유물과 세구의 순장 부분 인골
죽은 이와 함께 다른 사람을 함께 매장했던 순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부여조에 나온다. 살인순장(殺人殉葬), 즉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의 단위로 헤아린다. 한꺼번에 수백 명을 순장하기도 했다는 충격적인 기록, 도대체 이런 야만적인 문화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매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경북 고령의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 순장 문화의 유래를 짐작해볼 수 있다. 가야 최대 지역 최대 규모의 고분인 지산동 44호분은 주실과 부실을 가운데 두고 부챗살 모양으로 32기의 순장석실이 둘러싸였다. 주피장자 한 사람을 위해 무려 40여 명이나 순장됐던 것이다. 죽어서도 이런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이 고분에서는 출(出)자형 금동관도 함께 출토됐다. 이는 왕이나 지역의 지배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위세품이었고, 특이한 것은 순장묘가 옛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 한반도 전역이 아니라 영남에만 한정된 풍습이었으며, 일정기간 나타났다 사라진 한시적인 풍습이었다. 이는 순장이 생명력이 긴 자생문화가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문화라는 증거가 된다. 금관가야의 지배층 묘역으로 알려진 김해 대성동 고분군 역시 순장묘가 발견돼 일찍부터 순장 풍습이 유입된 곳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 고분군에서는 순장 외에 국내외 고고학계를 뒤흔들 놀랄만한 발굴이 있었다. 지난 1990년 발굴 당시 가야 유물 수천 점이 쏟아져 나왔으며, 이들 유물 중에 고고학계에 큰 충격을 던진 유물이 국내 최초로 발굴되었다. 그것은 청동솥, 이른바 동복이었다. 29호분에서 발굴된 오르도스형 동복은 중국 내몽고자치구 오르도스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북방 기마민족 문화를 대표하는 지요유물이다. 먼 북방 유물이 한반도 남쪽 김해에서 발굴된 것. 함께 발굴된 호형대구 역시 전형적인 북방 기마민족의 유물이었으며, 특히 내몽고의 호형대구는 김해의 것과 같은 틀에서 찍어낸 것처럼 닮아 있다. 이는 금관가야 김해 지역에 북방 문화가 유입됐다는 강력한 증거인 셈이다. 순장은 전통적으로 유목민의 풍습으로 농경사회에서 인구는 곧 노동력이었다. 그래서 순장 문화가 나타날 수 없었고, 스스로 노동력을 손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축 유목민족은 달랐다. 그들은 노동력보다는 빠른 이동이 더 필수저기었기에 순장 문화가 나타날 수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결국 한번도 남쪽 옛 신라와 가야 지역에만 한정돼 나타나는 순장 풍습은 북방 유목문화에서 유입된 외래문화였던 것이다.

창녕 송현동 고분의 주인은 누구인가

   
▲ 1500년 전 순장된 소녀의 '송현' 복원도
17세 소녀가 15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창년 송현리 15호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경주 대릉원의 황남대총은 국내 최대의 고분으로 5세기 신라의 고분이다. 두 개의 봉분을 연이은 이곳에서도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큰 목곽 안에 왕족인 60대 남자가 안치돼 있고, 관 밖에 15세 여성으로 밝혀져진 순장자가 묻혀 있었다. 함께 출토된 5만여 점의 유물은 이 60대 지배자의 위상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으며, 특히 화려한 금장신구들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5세기 신라는 신흥강자로 그동안 팽팽한 세력을 윶하던 가야 세력들을 하나하나 포섭하던 시기였다. 이런 신라의 확장은 진흥황대 절정에 달했고, 561년 진흥왕은 창녕에 척경비를 세웠다. 이제 창녕은 강력한 세력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 들게 되었고, 바로 창녕 지역에 존재하던 가야가 비사벌가야, 혹은 비화가야였다. 신라는 가야를 직접 통치하는 대신 토착지배 세력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정책을 펼쳤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출자형 금동관이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출자형 금동관은 전형적인 신라 양식으로 이와 똑같은 금동관이 순장 고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지역 유력자의 이 금동관은 신라 왕실에서 하사한 위세품이었던 것이다. 이는 경주 지배집단이 새로이 신라 영역에 속하는 지역을 직접 통치할 체제를 아직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직접 지배보다는 기존의 지배세력을 이용하고 반대급부로 위세품을 하사했던 것. 지역의 지배세력은 당연히 정치력, 경제력을 갖추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형 고분까지 조성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창녕의 비화가야는 낙동강, 황강을 끼고 있어 교통과 교역의 전략적 요충지로 당연히 지배자의 세력 또한 막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17세 소녀를 비롯해 다른 세 명의 순장자를 거느렸던 창녕 송현동 고분의 주인 역시 강력한 지역 통치자였음을 알 수 있다.

가야 ‘순장 인골’ 비밀 풀렸다
지난 2009년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경남 창녕 송현동 15호분에서 출토된 1500년 전 고대 순장 인골의 인체복원 모형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했다. 이 17세 여인의 생김새는 턱뼈가 짧고 목이 긴 미인형이다. 또, 팔이 짧고 허리는 21.5인치로 현대인(평균 26인치)에 비해 가늘며 거의 8등신에 속한다. 발굴 당시 135㎝의 길이로 누워 있던 순장인골은 법의학의 키 산출공식에 따라 152㎝ 안팎으로 추정, 모든 뼈를 복제해 자세를 맞춘 키는 151.5㎝이다. 여기에 근육과 피부를 복원하고 머리카락을 심은 최종 키는 153.5㎝이다. 팔이 짧으나 허리는 21.5인치로 현대인(평균 26인치)에 비해 가늘며 거의 8등신에 속한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인체 복원모형은 발굴된 뼈대를 다지털화하고 복제 뼈를 만들어 조립한 다음 인체 통계학 자료를 바탕으로 근육과 피부를 복원하는 과정을 거쳐 실리콘 전신상으로 만들어졌다. 뼈에 남아있는 의학적 증거들을 통해 CT촬영, 3D 스캔, 디지털 복원 등의 기법이 사용됐으며, 마무리 작업은 영화에서 사용되는 최신 특수기법이 이용됐다. 그 결과 이 가야 소녀는 나이는 17세 안팎으로 출산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뒤통수뼈에서 확인된 다공성뼈과다증은 빈혈의 증거이며, 치아 상태에서는 충치를 앓았음을 알 수 있다. 정강이와 종아리뼈에서 무릎을 많이 꿇은 생활을 했음이 밝혀져 소녀의 신분은 6세기 가야지방에 살았던 시녀였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모시던 권력자가 세상을 떠나자 강제로 죽임을 당한 뒤 함께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녀의 사인이 중독 또는 질식사였다는 것이다.

왕과 함께 묻혔던 순장자들은 비천한 신분?
송현동 15호분의 순장자들은 기존의 가설처럼 전쟁 포로나 미천한 계급의 노비가 아닌 죽은이의 가장 측근의 인물들로 ‘리스트’로 선별되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순장 유골과 부장되어 있는 철제관식이나 마구류, 무기류, 금제장신구들은 순장자가 관리, 마부, 호위무사, 시종 등의 주변인들이었음을 알려준다. 즉, 순장된 사람들은 중간계급 이상의 신분이 낮지 않았던 가야인들이었던 것이다. 좀 더 정확한 단서를 얻기 위해 순장자들의 인골에 축적되어 있는 음식의 기록을 통해 생전 식생활 분석, 식생활 수준을 알아보았다. 인골 수습 당시, 발굴팀은 인골의 형태와 누운 자세를 주의 깊게 살폈다. 인골들은 매장 당시 그대로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간격이었다. 이들은 생매장이 아니라 죽은 후에 묻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죽은 이를 위해 주변의 이들을 죽여 함께 묻은 것일까? 현세의 삶은 죽어서 저승에서도 지속된다. 이것은 가야인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래서 실생활에 필요한 유품들과 측근 사람들까지 죄다 무덤 속으로 안고 들어갔던 것이다. 고대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던 순장의 풍습은 가야권을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순장의 폐지는 어떤 국가 혹은 지배집단의 권력의 강도가 약해짐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한 단계 더 성숙한 국가로 성장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참고. ‘한국사를 바꿀 14가지 거짓과 진실’) NM


 

신세영 기자 ssy@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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