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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19.09.05  15: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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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의거(義擧) 100년… 60대 중반 나이에 日 총독 향해 폭탄 투척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대부분은 20~30대 열혈 청년이었다. 윤봉길·조명하 의사는 의거 당시 각각 24세·23세였고, 이봉창 의사는 32세, 김상옥 의사는 33세, 나석주 의사는 34세였다. 일본 황궁의 정문 앞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 역시 39세였다. 그런데 환갑을 넘은 60대 중반 나이에 목숨을 던진 이가 있었으니 강우규(1855~1920) 의사였다.

▲ 강우규 의사

강우규는 평남 덕천군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누나 집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서당 공부를 했을 뿐 배운 것은 없었지만 어깨너머 한방 지식을 익혀 약간의 의술은 할 수 있었다. 강우규는 30세이던 1885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해 잡화상을 운영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장사꾼으로 평범하게 살았을 강우규의 인생에 새로운 삶을 제시하고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해준 인물은 국권 회복 운동과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1908년 홍원을 방문한, 훗날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될 이동휘였다.
강우규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국이 일제의 총칼 아래 놓이게 되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보고 싶지 않은 물건”이라며 그해 가을 큰아들 가족을 러시아 연해주로 먼저 보내고 자신은 1911년 봄 북간도 두도구로 이주했다. 이후 각지를 유랑하며 한인촌에 소재한 교회에 나가고 한방의술로 환자를 진료했다. 따로 살던 강우규와 아들 가족은 1915년 한곳에 모여 살다가 1917년 북만주 길림성 요하현 벽촌으로 이주했다.

노인동맹단, 단원의 나이를 46세 이상 70세 이하로 제한했지만 70대도 가입

강우규는 독립운동 기지를 염두에 두고 그곳에 신흥동이라는 한인촌을 개척했다. 신흥동은 불과 1년 만에 100여 호로 늘어나 강우규는 그곳에 광동학교를 지어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신흥동은 점차 러시아와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근거지 역할을 하고 강우규의 집은 독립단원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사랑방 구실을 했다.
3·1 운동 소식이 알려진 1919년 3월 4일에는 신흥동 동포들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강우규는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곳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한 달 전 결성한 ‘대한국민 노인동맹단’에 가입하기 위해서였다.
노인동맹단은 실전에 참여하는 청년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단원들의 나이를 46세 이상 70세 이하로 제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70세를 넘는 이도 있었고, 여성도 가세했다. 이후 많은 조선인이 단원으로 가입했다.
노인동맹단은 대표자를 조선총독부에 파견해 독립 의지를 알리는 한편 결사대를 국내에 보내 3·1운동을 확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동휘의 부친인 68세의 이발(이승교)은 물론 74세의 정치윤이 자원하자 40~50대의 단원 3명도 가세했다.
노인동맹단은 그해 5월 이들 5명을 국내로 파견했다. 이들의 품속에는 일본 천황과 조선 총독에게 보내는 서한과 함께 노인동맹단 창립 취지문 수백 장이 숨겨 있었다. 이들은 5월 31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그 순간 이발은 "치욕을 당할 수 없다"며 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일본 사법당국은 고령의 정치윤과 이발을 불기소 처분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려보냈다. 윤여옥(58세)과 안태순(47세)에게는 징역 1년, 차대유(차대륜·59세)에게는 징역 8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강우규 의사, 환갑을 넘은 60대 중반 나이에 목숨 던져

그 무렵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떠나고 후임 총독이 부임한다는 사실이 노인동맹단에 전해졌다. 노인동맹단이 후임 총독을 처단하자고 모의할 때 강우규가 자원해 그 중차대한 임무를 맡았다.
강우규는 러시아인에게 구입한 폭탄을 기저귀 처럼 다리 사이에 차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1919년 6월 14일 원산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거사 자금을 마련하고 23세의 청년 독립운동가 허형을 소개받아 8월 5일 그와 함께 서울로 잠입했다. 지인의 집에서 정세를 살피고 있을 때 사이토 마코토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한다는 사실을 신문에서 보고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 근처의 여인숙에 투숙해 거사를 준비했다.
사이토는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부관연락선 ‘신라환’을 타고 부산으로 건너와 하룻밤을 부산에서 머문 뒤 9월 2일 부산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오후 5시쯤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그 시간 강우규는 폭탄을 허리춤에 찬 채 남대문역 다방에서 사이토가 오기를 기다렸다.
사이토는 기차에서 내린 뒤 호위 경찰과 신문기자들 대동하고 남대문역 광장으로 이동했다. 광장에는 사이토 내외가 타고 갈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이토를 태운 마차가 막 출발하는 순간, 인파 속에서 구경꾼인 체하던 강우규가 허리에 차고 있던 폭탄을 마차 근처로 던졌다.
폭탄은 사이토의 마차에서 7보 가량 떨어진, 총독이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촬영하던 한 사진기자 바로 옆에서 무서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순간 역 광장 일대에는 사방으로 튄 파편에 맞아 여러 사람이 피를 흘리며 나뒹굴었다. 역 광장은 부상자들의 비명 소리로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현장에서 즉사한 사람은 없었지만 경찰, 신문기자, 철도·차량 관계자 등 37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경상자 가운데는 미국인 여성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목표물인 사이토는 혁대에 작은 파편이 튀겨 혼비백산했을 뿐 신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중상자 가운데 일본 경찰 1명은 사건 발생 9일 만인 9월 11일, 일본 신문기자는 11월 1일에 각각 사망했다.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유시 남겨

일경은 사건 직후 남대문역을 에워싸고 범인 색출에 나섰지만 범인은 이미 유유히 사라진 뒤였다. 범인이 설마 환갑이 지난 노인이라고 차마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우규는 아무도 자신을 체포하지 않아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후 강우규는 이집 저집 숨어다니다가 뒤늦게 노인이 범인이라고 파악한 일경의 탐문 수사로 9월 17일 종로구 누하동에서 체포되었다. 그를 체포한 경찰은 애국지사 탄압으로 악명이 높은 김태석이었다. 비록 거사는 강우규가 단독으로 기획하고 준비하고 결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8명도 혐의자로 체포되었다. 이 중 최자남·허형·오태영 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2월 25일 1심 판결 결과 강우규 사형, 최자남 징역 3년, 허형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오태영은 증거가 충분치 않아 무죄를 선고받았다. 1심 판결 후 허형은 공소(항소)하지 않았으나 최자남은 공소를 제기했다. 강우규 역시 공소를 제기했는데 이는 최자남을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4월 26일의 선고 공판 결과는 1심 재판부의 형량과 동일했다. 강우규는 고등법원에 다시 상고했으나 5월 27일 기각되어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일에 마지막 순간의 심경을 묻는 일본 검사에게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라는 유시를 남겼다. 의거 현장인 옛 서울역사 앞에는 2011년 9월 강우규의 동상이 세워졌다.
참고로 의사, 열사, 지사의 차이를 알아본다. ‘의사(義士)’는 무기를 들고 나라를 위해 뜻을 펼치다 순국하신 분으로 안중근·이봉창·윤봉길 의사 등이 해당한다. ‘열사(烈士)’는 무기 없이 맨몸으로 저항하다 돌아가신 분으로 유관순 열사가 대표적이다. ‘지사(志士)’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노력하는 분으로 안창호 지사 등이다.


■1930년대 천재화가 이인성의 야외갤러리 개관

키르기스스탄을 공식방문했던 이낙연 국무총리가 7월 18일 애국지사 허위(許蔿·1855〜1908) 선생의 후손들을 만났다. 허위 선생은 1908년 의병투쟁으로 일제에 의해 으로 뿔뿔이 흩어져 해방된 조국의 보살 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대구가 낳은 천재화가 이인성의 작품과 이야기를 테마로 한 야외갤러리가 2019년 8월 21일 대구에서 개관했다. 갤러리에는 2020년 3월 30일까지 이인성 생전 사진인 ‘삼덕동 아틀리에’, ‘이인성 스토리’ 2점과 ‘사과나무’, ‘계산성당’, ‘가을어느날’ 등 이인성의 작품 18점이 선보인다.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서양화를 거론할 때 이인성(1912~1950)을 비껴갈 수는 없다. 그는 10대 때 성취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입선과 특선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20대 초반에 일본 화단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23살에 선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거머쥠으로써 단박에 조선 화단의 대표 주자로 부상했다. 이런 그에게 ‘선전 최대의 감격’, ‘근대 화단의 귀재’, ‘한국의 고갱’ 등의 찬사가 쏟아졌다.
이인성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1928년 3월, 16살의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집안이 가난한 탓에 중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대신 디자인 인쇄를 다루는 대구미술사에서 생계를 꾸리며 그림을 배웠다. 대구미술사는 도쿄에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대구에서 수채화가로 활동하던 서동진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이인성은 16살이던 1928년 10월 개벽사가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출품한 수채화 ‘촌락의 풍경’이 특선을 차지해 화가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1929년 8월에는 선전에 수채화 ‘그늘’을 출품해 스승 서동진과 나란히 입선하면서 등단했다. 1930년 5월 ‘겨울 어느 날’로 선전에서 또다시 입선하고 1931년 5월 ‘세모가경’이 처음 특선에 뽑혀 이인성은 서서히 대구 화단의 자부심으로 떠올랐다.
이인성은 대구여고보 교장이자 고미술 수집가이던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193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낮에는 크레용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인성은 일본에서 서구 미술의 후기인상주의 기법을 익혀 조선의 향토적 서정주의로 승화·토착화시키며 나름의 주체적 화풍으로 소화했다. 그는 일본에서도 빠짐없이 각종 전람회에 출품해 특선이나 입선을 차지했다.
1932년 선전에서는 ‘카이유’가 특선을 하고 일본의 제국미술원전람회(제전)에서는 ‘여름 어느 날’이 입선을 했다. 1933년에도 선전에서 특선을 하고 일본의 제전에서는 입선했다. 1934년 5월의 선전에서는 ‘가을 어느 날’이 특선하고 1935년 전일본수채화회전에서는 ‘아리랑 고개’가 최고상을 차지했다. 이렇듯 이인성은 일본에서도 ‘조선의 천재 소년’으로 불리며 각종 상을 휩쓸고 아사히신문과 요미우리신문이 근황을 전할 정도로 관심과 주목을 끌었다.

‘근대 화단의 귀재’, ‘한국의 고갱’ 등 찬사 쏟아져

▲ 이인성

그런데 1934년의 선전 특선작인 ‘가을 어느 날’은 훗날 ‘향토색 미술’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이인성은 “조선의 정체성을 찾겠다”며 붉은 대지 위에 핀 시든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햇볕에 그을린 상반신을 드러낸 여인과 소녀를 그렸다.
강렬한 색채로 조선의 풍광과 조선 사람의 생활상을 그린 ‘가을 어느 날’에 대한 미술계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전통 회화의 연면한 흐름을 부정한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향토색 시도를 조선 회화의 전통과 연결해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화가의 향토색이 순수한 민족주의의 발로인지 아니면 식민지 조선을 반라의 여성으로 표상되는 미개한 땅으로 규정하려 한 총독부의 입맛에 맞춘 건지는 아직도 논란거리다. 
이인성은 일본에서 귀국한 1935년 5월, 선전에서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아 촉망받는 신예에서 우리 화단의 정점으로 급부상했다. ‘경주의 산곡에서’는 1998년 2월 ‘월간미술’지가 미술평론가 13명에게 의뢰해 선정한 ‘한국 근대 유화 베스트 10’에 김관호의 ‘해질 녘’과 함께 공동 1위로 선정될 만큼 우리 미술사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인성은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대구 남산병원 원장의 딸과 1935년 6월 결혼했다. 결혼 덕에 넓은 아틀리에를 병원 3층에 마련하고 11월 1일 이비시야 백화점 2층에서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1936년에는 대구 최초로 양화연구소를 개설하고 제15회 선전에서 총독부상을 차지했다. 이렇게 선전 제10회(1931)부터 15회(1936)까지 6회 연속 특선의 실력을 인정받자 1937년 제16회 선전 때는 새로 신설된 추천작가 제도에 의해 동양화가 김은호와 함께 25세 나이로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 무렵 이인성은 손기정, 최승희와 더불어 1930년대 조선의 자부심이었고 식민지 화단의 별이자 아이콘이었다. 신문들은 ‘조선의 보물’이니 ‘화단의 중진’이니 하면서 이인성을 부추기는 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화가로는 절정기 보냈지만 개인사에는 불행 겹쳐

이인성은 1937년 순수 예술다방을 표방한 ‘아르스’를 대구에 열었다. 예술인들이 차를 마시고 토론도 할 수 있는 살롱 같은 곳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100호짜리 2폭으로 된 대작 ‘한정’을 걸어놓았다. 그런데 1937년 10월 28일 김부돌이라는 사람이 그 그림을 칼로 찢었다. 이인성은 그 칼을 빼앗아 김부돌의 얼굴을 찔렀다. 이인성이 이미 추천작가가 되어 선전에서 수상할 자격이 없는데도 김부돌은 이인성이 선전에서 수상 소식을 전해주지 않자 화업을 게을리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그림에 더욱 정진하라는 뜻에서 일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사건은 김부돌의 진심을 알게 된 이인성이 악수를 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인성은 이처럼 화가로서는 절정기를 보냈지만 개인사에는 불행이 겹쳤다. 1939년부터 1940년 어린 아들과 딸이 죽더니 1942년에는 부인까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인성은 충격에 빠져 술로 시름을 달랬다. 결국 주벽이 심해졌다. 1944년 재혼했으나 이번에는 부인이 이듬해 딸을 낳은 뒤 가출, 또다시 파경을 맞았다.
1945년 해방 후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중 미술 교사로 부임하고 1947년 6월 세 번째 결혼을 한 뒤에는 안정을 찾았다. 1948년 6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고 1949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의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활약했다.
문제는 술이었다. 1950년 11월 3일 밤, 서울 굴레방다리 근처의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북아현동 집으로 가던 길에 경찰과 시비를 벌인 후 집으로 돌아왔다가 집까지 찾아온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쓰러져 이튿날 아침 38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뒀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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