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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작곡가 겸 세계적인 테너색소폰 연주자 길옥윤의 삶과 사랑

기사승인 2019.11.06  16: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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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월이 가면’에서 ‘이별’까지

‘의사와 음악가’, ‘정도(正道)와 모험’의 기로에서 스스로 힘들고 먼 길을 택한 ‘욕망의 사나이’, 모험을 택해 경계를 넘나들며 천재성을 번뜩이던 자유주의자, 그리고 혼과 열정을 색소폰 리듬으로 승화시켰던 낭만주의자 길옥윤. 미8군쇼 무대에서 부터 음악적 동행자이자 연인이었던 패티김과의 사랑을 넘어선 사랑까지, 길옥윤 선생의 삶과 사랑 그리고 음악세계를 재조명해본다.

글l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세계적인 테너색소폰 연주자 길옥윤 색소폰 연주음반.

혼과 열정을 색소폰 리듬으로 풀어낸 낭만주의자

스물셋에 밀항해 일본에서 한국인임을 떳떳이 밝히며 당당하게 NHK 무대에까지 섰던 인물, 길옥윤이라는 이름은 일본 명 ‘요시아 준(吉屋潤)’의 우리 식 발음이다. 밀항 후 일본영화음악계의 거장 오자와(小澤秀夫)에게 사사받을 당시 얻은 이름으로 일본 소설가 요시아 노보고와 준 이치로의 이름에서 따왔다.

본명 최치정(崔致禎). 1927년 2월 22일 공의(公醫)였던 부친 최경일(崔鏡一)과 모친 김신실(金信實) 사이의 5남 2녀 중 차남으로 평북 영변에서 출생했다.

낙랑의 수도, 평양의 종로소학교와 평양고보를 졸업한 후 부친의 권유에 따라 경성치과전문학교(현 서울대 치대의 전신)에 입학한다. 조부와 부친이 모두 의사인 2대 의사 집안에서 3대째 가업을 잇겠다는 기대가 그만큼 컸으리라. 그러나 정작 길옥윤은 전공은 도외시하고 일찌감치 음악에만 몰두했다.

처음 음악가로의 꿈을 키우게 된 것은 평양고보 시절 나팔수로 활동하면서부터. 이후 대학시절엔 ‘미8군의 대부’라 일컬어지는 김영순(베니김)을 만나면서 미8군쇼단에 입단해 연주생활을 시작, 군예대 등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정작 전공은 뒷전으로 1백 개의 치아를 뽑아야 하는 임상실습의 숫자를 채우지 못해 남들보다 늦게 겨우 졸업했다.

졸업 후 음대로 편입하고자 했지만 부친의 반대로 좌절되자 1950년 일본으로 밀항, 이후 요시노밴드의 일원으로 요코하마의 ‘오아시스 긴자클럽’에서 연주생활을 시작해 3년 뒤에는 자신의 밴드 ‘Crew Cats’를 조직할 만큼 빠르게 실력을 키워나갔다.

특히 50년대, 한일관계가 단절됐던 시절이었지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며 당시 일본인에게도 문턱이 높다는 NHK, 그리고 TBS-TV 방송무대에까지 설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도일 10년만인 60년에 국내 연주회에 초청되면서 첫 귀국, 당시 동경스윙오케스트라를 인솔해와 공연을 펼침으로써 한국 음악인의 자긍심을 한껏 높이기도 했다.

▲ 국내 재즈 보급에 앞장섰던 길옥윤, 박춘석, 엄토미 등 동료 연주인들과 함께. 그리고 1960년대 ‘길옥윤과 동경스윙오케스트라 귀국공연’ 신문광고.

일본에서 활동하며 귀국기념공연 시 발표한 작곡 데뷔곡 ‘내 사랑아’

국내에서 첫 작곡을 발표한 것은 1962년, 가수 현미를 통해 발표한 ‘내 사랑아(뷔너스레코드)’이다. 그의 첫 작곡 데뷔곡이기도 하다. 당시 부친이 타계하자 일시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 귀국기념 음악회를 갖게 되는데 이때 만나 이가 그를 도와주던 무명 색소폰 주자 이봉조씨. 연주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본 그는 본인이 가지고 있던 색소폰을 선물로 건네준다. 아울러 이 무렵 이봉조씨가 미8군가수 현미와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본인이 작곡한 ‘내 사랑아’ 악보를 이 커플에게 선물한다. 바로 이 노래를 현미가 음반으로 취입하게 된 것. 이 노래는 이후 패티김이 취입하면서 크게 히트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국내로 돌아와 활동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 4년 뒤인 66년, 모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일본에서 서둘러 귀국했던 때로 후에 그의 연인이자 음악적 파트너가 되는 가수 패티김를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공교롭게도 당시 패티김 역시 라스베가스에서 활동 중 모친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울로 잠시 돌아온 때였다. 이를 기회로 갑자기 기획된 ‘패티김 귀국공연무대’에서 두 젊은 음악인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 때 길옥윤이 프로포즈를 겸해 가수 패티김에게 건네 준 곡이 바로 ‘사월이 가면’.

▲ 길옥윤 패티김 커플의 결혼식, 그리고 결혼기념 발매 음반.

‘사월이 가면’, 프러포즈를 오선지에 담아 사랑을 건넨 로맨티스트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잠이 들면은 꿈속의 사랑/사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사랑한다면 가지를 말어/날이 갈수록 깊이 정들고/헤어보면은 애절도 해라. -‘사월이 가면(길옥윤 작사, 작곡, 패티김 노래)’

이를 계기로 결국 이들은 각자 음악활동의 주 무대였던 미국과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기로 결심, 음악적 동행을 시작한다.

세간에 화제를 모은 이들의 로맨스는 초호화판 결혼식으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10일,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주례로 가진 워커힐 결혼식장에서 접수를 보았다는 최치갑씨의 증언에 따르면, 하객만도 약 삼천여명 그리고 축의금은 지금 돈으로 약 3억 원에 가까웠다고 회고했다.

이 결혼식에는 이색적인 결혼기념음반 사은품도 등장했다. 음반 앞면에는 이들 만남의 계기가 된 노래 ‘사월이 가면’이, 그리고 뒷면에는 이들의 사랑을 확인시키기라도 하듯 ‘사랑의 세레나데’가 신부 패티김의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이후 이들은 ‘서울의 찬가’ ‘사랑하는 마리아’ ‘하와이 연정’ ‘사랑하는 당신이’ ‘구월의 노래’ ‘람디담디담’ ‘사랑이란 두 글자‘ ’그대 없이는 못살아‘ 등 히트곡들을 잇달아 발표, 60~70년대 최고의 히트 메이커로 부상했다.

이들 스타커플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세간의 관심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갈등 또한 그 못지않아 결국 72년, 이들은 결별한다.

헤어짐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길옥윤의 세 차례에 걸친 사업실패가 가장 큰 이유로 작용했겠지만 그 못지않게 부각된 문제가 바로 성격 차이. 길옥윤씨는 워낙 술을 좋아하는 낙천가인 동시에 즉흥성이 뛰어난 천재 기질을 지녔다면 패티김은 의지가 굳고 계획성이 뛰어난 상반된 성격의 소유자. 자기관리가 철저하기로도 유명한 패티김에 대해 길옥윤은 자신의 자서전, ‘이젠 색소폰을 불수가 없다(조선일보사, 1995년 발행)’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밤에 갑자기 정전이 되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해도 패티김은 침착하게 옷은 물론 양말에 목도리, 심지어 패물까지 모두 찾아 걸치고 나설 수 있는 여성’이라고.

‘사월의 노래’로 시작된 이들의 6년간의 로맨스는 끝내 72년, ‘이별’을 끝으로 결별, 둘 간의 사랑의 역사는 마치 연재소설처럼 대중들에게 노래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별’ vs ‘잊을 수는 없을 거야’,
길옥윤·패티김 커플의 사랑을 넘어선 사랑

▲ 이들이 신혼여행을 겸해 택한 베트남 위문공연, 1967년 비둘기부대 파월장병 위문공연 장면.

패티김이 누구인가. 무대에서 마이크를 빼내 손에 들고 부르기 시작한 한국 최초의 가수라 불리는 패티김은 유독 이 ‘최초’라는 수식어가 이름 앞에 많이 붙는 가수다. 한일수교를 맺기 전인 60년, 일본 NHK 방송무대에 섰던 한국가수 1호이기도 했고 한때 대중음악에만큼은 유독 문턱이 높았던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30주년 기념공연을 가진 데 이어 85년 서울시향과의 팝 콘서트, 아울러 1989년에는 한국가수 최초로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가졌다.

“특히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활동할 때는 동양 여가수라는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 키 커 보이려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고 굽 높은 구두에 헤어스타일까지 높게 치장했죠. 또 앉기도 어려울 만큼 꽉 죄는 드레스로 섹시라인을 강조했어요.”

이러한 자기 관리가 우리나라 가수들로부터 ‘가장 닮고 싶은 가수’로 꼽히는 이유인 동시에 이전 ‘딴따라’ 칭호에서 오늘날 ‘스타’의 지위로 부상한 배경이기도 할 것이다.

앞서 거론한대로 가수 패티김의 전성기는 작곡가 길옥윤씨를 만나면서부터다. 또한 당시 발표곡 대부분이 길옥윤 작곡의 노래들이다.

‘사월이 가면’으로 시작된 이들의 로맨스는 결국 6년 뒤인 72년, 결별을 선언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 무렵 하와이로 건너갔던 길옥윤은 ‘잊을 수는 없을 거야’라는 제목의 악보를 패티김에게 보내는데 악보를 훑어보던 패티김이 제목을 ‘이별’로 바꾸는 게 노래의 느낌을 더 절실하게 해줄 것으로 판단, 제목을 바꿔 취입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냉정한 사람이지만/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때로는 보고파 지겠지/둥근달을 쳐다보며는/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지난날을 후회할 거야/산을 넘고 멀리 멀리 헤어 졌건만/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냉정한 사람이지만/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이별(길옥윤 작사, 작곡, 패티김 노래)’

이들은 이혼 발표 다음해인 73년, 동경국제가요제에 함께 참가, '사랑은 영원히'로 동상을 수상하는 무대를 끝으로 패티김은 미국으로, 그리고 길옥윤은 또다시 일본에 남게 된다.

‘빛과 그림자(최희준)’ ‘첫사랑의 언덕(박형준)’, ‘내일은 해가 뜬다(쟈니리)’ 등으로 국내 활동기간 동안 히트메이커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 길옥윤, 그러나 이혼과 사업 실패의 참담함 속에서 일본으로 돌아와 침체일로를 걸었던 당시 그가 찾아낸 한줄기 빛이 바로 '당신은 모르실거야'를 시작으로 일약 신데렐라로 부상, 길옥윤의 제2전성기를 이끈 가수 혜은이다. 그의 음악인생에 있어 제3악장이 펼쳐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길옥윤, 혜은이 콤비는 76년 '당신은 모르실거야'를 시작으로 이듬 해 발표한 '당신만을 사랑해'로 MBC 주최 제1회 서울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동시에 10대가수가요제 최고인기가수상, 제13회 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상 등 그 해에 중요한 상을 모두 휩쓸었다.

'당신만을 사랑해', ‘제3한강교’, ‘진짜진짜 좋아해’, ‘새벽비’, ‘뛰뛰빵빵’, ‘감수광(이상 혜은이)’, ‘나성에 가면(세샘트리오)’, ‘향수에 젖어서(지은아)’ 등 히트 행진을 이어갔고 이러한 음악적 성공에 힘입어 다시 국내에 돌아온 그는 연주와 작곡 외에도 많은 활동을 시작한다.

▲ 전성기 시절 패티김 발표음반들.

태양음향 설립, 한국음악저작권협회장, JAZZ클럽 회장을 비롯해 후학 양성에 힘써

81년 ‘관악기 연주자의 치열과 교합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경희대 대학원 석사학위를 취득한데 이어 82년 ‘길옥윤 시화전(미도파화랑)’ 개최, 작곡가 박춘석씨와 태양음향 공동 설립, 한국JAZZ클럽 회장, 그리고 서울예대 실용음악과 주임교수로 후학에 힘쓰기도 했다.

아울러 1984년에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 12대회장으로 취임하여 작가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했다. 84년 LA올림픽 당시 ‘아리랑’을 테마로 한 즉흥변주곡을 색소폰으로 화려하게 연주, 각국에서 모여든  관중들을 감동시켰을 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실력자였던 그는 90년대 들어 남태평양의 산호섬, 마샬공화국 초청으로 ‘Mashal island Forever(마샬이여 영원하라)’를 작곡해 선사, 현재 마샬공화국 국가만큼이나 사랑받고 있기도 하다. 88서울올림픽 주제가로 발표된 ‘아침의 나라에서(김연자 노래)’도 그의 작품.

특히 한국 민요의 세 마치 장단과 '뱃노래'의 가락이 일본 민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역사적, 학술적 연구의 성과는 1993년, 일본 NHK-TV가 ‘뱃노래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영되었다.

이렇듯 음악적 완성을 하나둘씩 이뤄갈 무렵 안타깝게도 골수암 판정을 받는다. 그 스스로도 ‘인생 60이면 음악적으로도 과거시험에 합격했을 나이’라며 한껏 의욕을 보였던 터라 암 투병소식은 더욱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길옥윤 이별콘서트’를 통해 21년만에 패티김과 재회

▲ 전성기 시절 길옥윤과 패티김 발표음반들.

길옥윤 선생이 대중들 앞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 1994년 6월18일, SBS-TV의 ‘길옥윤 의 이별콘서트’를 통해서다. 골수암으로 투병 중인 그를 위해 마련된 무대였다. 투병 중이던 그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진행된 콘서트 무대에 파경 이후 길옥윤의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았던 패티김이 등장했다. 결별한 지 21년만의 재회였다. 무대는 사뭇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찬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헤어진 것은 몸이었지 마음이 아니었어요." 패티김이 무대에서 했던 이 말에는 둘의 변함없는 애정과 사죄의 뜻이 담겨 있었다. ‘길옥윤의 이별콘서트’의 피날레, 역시 ‘이별’이었다.

패티김과의 사랑을 넘어선 사랑, 한일 간의 음악적 가교, 우리나라 재즈사에 미친 지대한 업적, 이 모든 공적을 뒤로 한 채 그는 1995년 3월 17일 눈을 감았다.

유족으로는 패티김과의 사이에서의 정아, 1979년 12월 28일 재혼한 전연란(全蓮蘭)여사와의 사이에 딸 안리가 있다.

음악에의 욕망 하나로 현해탄을 건너며 스스로 원하는 길만을 가겠다고 고집했던 욕망의 사나이, 길옥윤. 타계 후 미발표인 채 남겨진 악보들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이 미발표 악보 중에는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서울의 찬가’의 연작으로 만든 ‘부산의 찬가’ 악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미발표곡 중 ‘인형의 눈물’과 ‘머나먼 나라’는 패티김의 목소리로 길옥윤 추모음반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들 유작과 미발표작들의 저작권 권리는 모두 타인의 명의로 양도되어 있다. 많은 이들에 의해 애창되었던 그가 남긴 주옥같은 노래들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장까지 지낸 인물의 후일담으로는 한편 씁쓸한 단면이기도 하다.

‘인생이 뜻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 말은 그가 82년 9월에 제작한 음반 ‘길옥윤/어깨 너머 되돌아보는 그 세월이 아쉬워도’의 서문 첫 구절이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끝맺는다.
‘...詩(노래)와 酒(술)과 浪漫(로망)의 어제는 아름다웠었다. 1980년 11월, 길옥윤.’
....................
[註]이 글 속에 모두 옮기지 못했지만 길옥윤 선생에 대한 많은 일화를 들려준 동생, 최치갑(崔致甲)님께 감사드린다. 외모 또한 길옥윤씨를 고스란히 빼닮은 최치갑님은 현재 부산 음악인들에겐 널리 알려진 인물로 서울대 치대를 졸업 후 부산에서 조은치과 원장으로 재직하며 색소폰 연주자로, 재즈평론가로도 활동했다. 현재는 건강이 좋지 않아 부산에서 요양 중이다. 빠른 쾌유를 빈다.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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