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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24.07.15  1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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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올림픽 출전사… ‘최초’ 기록들

제33회 올림픽이 2024년 7월 26일부터 8월 11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다. 전 세계 206개국 10,500여 명이 32개 종목, 329개 경기에서 승부를 펼친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하계 올림픽에서 총 287개(금 96·은 91·동 100), 동계 올림픽에서 79개(금 33·은 30·동 16)의 메달을 획득했다. 역대 올림픽에서 한국인이 일궈낸 ‘최초’ 기록들을 소개한다.

①한국인 첫 메달… 손기정·남승룡, 베를린 올림픽(1936년) 금·동메달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손기정은 10대 시절 압록강 건너편 중국 단동의 회사에 출퇴근하기 위해 신의주~압록강 철교~중국 단동에 이르는 20여 리 길을 아침저녁으로 달렸다. 곧 달리기에 소질이 있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퍼져 1932년 양정고보 육상부에 스카우트 되었다. 당시 양정고보를 대표하는 육상 선수는 동갑내기 1년 선배 남승룡이었다. 손기정은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서 여러차례 우승, 마라톤계의 기대주로 부상했다. 1935년 11월 베를린 올림픽 파견 2차 선발 겸 제8회 메이지신궁대회 마라톤에서는 비공신 세계 최고기록(2시간 26분 42초)을 세워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일본의 최고 마라토너로 각광을 받았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본 육상계가 잔꾀를 부린 베를린 올림픽 선발전에서 각각 1위, 3위를 차지해 출전권을 따냈다. 1936년 8월 9일 오후 3시 2분(한국시간 밤 11시 2분), 10만여 명이 운집한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가슴에 일장기를 단 손기정과 남승룡도 27개국 56명의 건각 대열에 섞여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날씨는 섭씨 21∼ 22.3도, 습도 20%로 맑고 건조했다. 경기 초반, 당초 계획대로 하위 그룹에 처져 달리던 손기정은 서서히 속력을 내 6㎞ 지점부터는 1932년 LA 올림픽 우승자 카를로스 자발라(아르헨티나), 미누엘 디아스(포르투갈), 어니스트 하퍼(영국)에 이어 4위로 나섰다. 남승룡은 후반에 강했기 때문에 초반에 무리하지 않고 후반에 역전할 생각으로 뒤에 처져 달렸다.

▲ 손기정이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결승 테이프를 끊고 있다.

손기정은 21㎞ 반환점을 앞둔 지점에서 디아스를 따돌리고 27㎞ 지점에서 하퍼를 제쳤다. 29㎞ 지점에서 손기정에게 선두를 빼앗긴 자발라는 손기정을 따라잡으려고 오버페이스하다가 결국 32㎞ 지점에서 경기를 포기, 손기정만의 외로운 질주가 전개되었다. 함께 출전한 일본 마라톤계의 기대주 역시 경기를 포기했다. 손기정은 10만 관중의 기립 박수와 함성 속에 주경기장에 들어서 트랙을 한 바퀴 돈 뒤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시계는 역대 올림픽 최고기록인 2시간 29분 19초 2를 가리켰다. 100m를 평균 21.23초의 속도로 달려야 하는 기록이었고 올림픽에서 ‘마의 30분벽’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반환점을 돌 때 33위였던 남승룡도 무서운 속도로 앞서가는 선수들을 차례차례 제쳤다. 30㎞ 지점에서는 16위, 34㎞ 지점에서는 6위로 올라서더니 빌헬름 언덕을 넘어설 즈음에는 3위로 치고 올라갔다. 그러나 너무 늦게 스퍼트를 낸 탓에 2위 하퍼(2시간 31분 23초)와의 격차를 좁히지 못해 하퍼보다 19초 뒤진 2시간 31분 42초로 골인했다.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으로 한반도는 한 달 내내 ‘기쁨의 눈물바다’가 되었다. 실패와 좌절, 그리고 그것을 딛고 일어선 불굴의 정신력은 조선 민족에게 삶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②대한민국 첫 출전·메달… 김성집, 런던 올림픽(1948년) 동메달

1948년 7월 29일, 제14회 올림픽이 세계 59개국 4,0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영국 런던에서 개막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후 2차대전의 발발로 도쿄 올림픽(1940년)과 런던 올림픽(1944년)이 무산되어 12년 만에 치러진 올림픽에 처음 명함을 내민 신생국은 한국을 포함해 15개국이었다. 다만 일본, 독일, 이탈리아는 전범국가였기 때문에 초청받지 못했고, 중국은 국공내전이 한창이어서, 소련은 미국과 냉전이 시작되는 시점이어서 스스로 참가하지 않았다.

▲ 1948년 런던올림픽 역도 경기에서 상상 첫 올림픽 메달(동메달)을 들어올린 김성집.

우리나라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 전의 혼란과 경제난이 심각했으나 축구, 복싱, 역도, 육상, 레슬링, 사이클, 남자농구 등 7개 종목 50명의 선수와 17명의 임원 등 총 67명을 참가시켰다. 문제는 경비였다. 그래서 준비한 게 액면가 100원짜리 올림픽후원권(1947.12 발행) 140만 장이었다. 공채와 복권 성격의 올림픽 후원권에 걸린 1등 상금은 100만 원이었다. 쌀 한 가마니가 8,300원, 소고기 한 근이 260원 하던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다. 선수단은 1948년 6월 21일 종로2가 서울YMCA를 출발해 가두행진으로 서울역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6월 22일 부산을 출발, 일본 후쿠오카를 거쳐 6월 26일 요코하마에서 3만 톤급 대형 여객선     ‘제너럴 맥스’로 갈아타고 중국 상해를 거쳐 7월 2일 홍콩에 도착했다. 유럽행 항공기는 정원 40명의 4발 프로펠러 비행기뿐이어서 선수단은 1진(7.4), 2진(7.7)으로 나누어 출발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항공기가 방콕(태국), 콜카타(인도), 바그다드(이라크), 카이로(이집트), 로마(이탈리아), 암스테르담(네덜란드)을 거쳐야 하는 머나먼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21일 동안 9개국 12개 도시를 거쳐 마지막 2진이 파김치 상태로 런던에 도착한 것은 7월 11일 저녁이었다. 선수단 임원으로 참가한 손기정은 부산에서 맹장 수술을 마치고 홀로 먼 길을 돌아 7월 21일 도착했다. 우리 선수단은 7월 29일 개막식에 손기정 기수를 선두로 당당하게 입장했다. 7월 29일 개막한 올림픽 첫 출전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한다는 게 무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래도 희망까지 접을 수는 없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홍일점인 박봉식이 투원반에서 하위권으로 탈락하고, 남자농구는 2승2패로 8강전에 오르긴 했지만 본선에서 연패를 거듭해 결국 8위에 그쳤다. 레슬링은 2일째 경기에서 4개 체급 모두 패하고, 축구는 멕시코와 첫 경기에서 5-3으로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으나 2회전 경기에서 런던 올림픽 우승팀 스웨덴에게 12-0으로 대패해 탈락했다. 8월 7일의 마라톤은 1년 전 서윤복이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한 터라 좋은 성적을 기대했다. 하지만 서윤복은 27위, 홍종오는 25위, 최윤칠은 레이스 도중 기권해 국민을 안타깝게 했다. 낭보는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날아들었다. 8월 10일 김성집이 역도 미들급(75㎏)에서 동메달을 따내 한국의 올림픽 출전 사상 첫 메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틀 후 한수안도 복싱 플라이급에서 동메달을 획득, 두 번째 태극기를 시상대에 게양시켰다. 한수안은 왼쪽 고막이 터지는 부상을 겪고도 8강전에서 승리하고, 준결승전에서도 우세한 경기를 펼쳤으나 편파 판정에 눈물을 삼켰다. 한국계 미국인 새미 리는 다이빙 10m 플랫폼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8월 14일 막을 내린 런던 올림픽의 종합 순위는 1위 미국, 2위 스웨덴, 3위 프랑스였다. 한국은 59개 참가국 중 공동 32위를 차지했다. 중국과 일본이 참가하지 않은 아시아권에서는 금메달 1개를 딴 인도 다음의 2위였다.

첫 올림픽 출전은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사실 런던 올림픽은 신생국 대한민국이 처음 출전한 올림픽은 아니었다. 1948년 1월 30일부터 10일 동안 열렸던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이미 출전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단 3명뿐인 초미니 선수단으로 노메달에 그쳤지만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곧 정부가 수립될 독립국가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 해방되기 전이라 일본 이름을 달고 출전했지만 한국인이 처음 출전한 올림픽은 손기정보다 4년 앞서 개막한 1932년 LA 올림픽이다. 마라톤과 복싱에서 일본 대표로 3명이 출전해 김은배가 마라톤에서 6위를 기록했다. 동계올림픽 최초 출전은 1936년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개최된 제4회 동계올림픽이다. 스피드스케이팅에 출전한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이 최초의 주인공들이다. 대한민국에 올림픽 사상 첫 메달을 안겨준 김성집은 평생을 스포츠 외길만을 걸어온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 그 자체였다. 휘문고보 시절이던 1936년 일본 역도선수권대회와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했지만 가급적 한국 선수를 배제하려 한 일본체육회의 방해로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김성집은 1943년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휘문고에서 체육교사로 활동하던 중 해방 후 런던 올림픽 출전이 확정되자 운동선수로는 적지 않은 29살의 나이로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도 출전, 올림픽 2회 연속 동메달 획득의 쾌거를 이루고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도 출전해 37세의 노익장을 과시하며 5위에 오르고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후 은퇴해 체육 행정가로 변신했다. 1976년부터 18년간 태릉선수촌장을 맡아 한국 스포츠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는 미·소 간 갈등으로 반쪽 대회가 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빼놓고는 해방 후 열린 하계올림픽에 11번, 아시아경기에 9번이나 선수·감독·임원·부단장·단장 등으로 참가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2011년 처음 제정된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에 손기정과 함께 선정되었다.

③대한민국 첫 금메달… 양정모, 몬트리올 올림픽(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의 폐막을 하루 앞둔 1976년 7월 31일 밤(한국 시각 8월 1일 오전),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62㎏)에 출전한 한국의 양정모 선수와 몽골의 강호 제베그 오이도프가 밀고 당기는 대접전을 벌였다. 오이도프는 1974년, 1975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연거푸 우승,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양정모 역시 1974년 아시안게임에서 오이도프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따낸 적이 있어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양정모는 3라운드 한때 8-6으로 앞서다가 결국 8-10으로 역전패했다. 그런데도 3라운드 9분의 경기가 모두 끝나는 순간, 오이도프는 고개를 숙인 반면 양정모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비록 마지막 경기에서 패하긴 했으나 7차례의 리그전 성적을 종합한 결과 양정모의 벌점이 가장 적고 그 덕분에 금메달이 자기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레슬링 경기는 본선에 오른 모든 선수가 리그전을 벌여 벌점이 가장 적은 선수가 우승하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오이도프는 2차전부터 6차전까지 연전연승했으나 1차전에서 미국의 데이비스에게 판정패를 당해 벌점 3점을 안고 양정모와 대결한 반면, 양정모는 데이비스에게까지 폴승(fall·상대의 양 어깨를 매트에 닿게 하면 KO처럼 경기가 끝남)을 거두며 6차전까지 승승장구해 무벌점 상태에서 대결에 임했다. 따라서 마지막 7차전에서 양정모가 폴패나 벌점이 많은 판정패를 당하지 않으면 금메달은 양정모 차지였다.

▲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건국 이후 첫 금메달을 딴 레슬링의 양정모(가운데)가 몽골의 오이도프(왼쪽·은메달), 미국의 진 데이비스(오른쪽·동메달)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양정모가 따낸 금메달은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낸 지 40년, 우리나라 대표팀이 1948년 런던 올림픽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 출전한 이후 28년 만에 따낸 대한민국 최초의 금메달이었다. 몬트리올에서 대한민국은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 등 총 6개의 메달을 따냈다. 한국은 몬트리올에서 양정모의 금메달 말고도 유도에서 장은경 선수가 은메달 1개를 보태고 복싱과 레슬링 등에서 동메달 4개를 더해 종합 19위를 차지했다. 역대 최다 메달이었다.

여자배구는 단체-구기종목 사상 첫 동메달

몬트리올에서는 특히 여자배구가 단체종목과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획득해 국민들로부터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국 여자 배구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5위를 하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선 4위를 기록, 메달에 바싹 가까워졌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의 B조 예선 첫 경기 상대는 소련이었다. 그러나 완패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악착같은 플레이 끝에 한 세트를 따냄으로써 졌지만 희망의 불씨가 살아났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풀세트 접전 끝에 강적 쿠바를 3-2로 눌렀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승리였다. 다음은 또 하나의 높은 산 독일이 기다렸다. 이번에도 3-2의 신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준결승전에서 A조 1위인 일본에 3-0으로 완패, 3~4위전으로 밀려났다. 마지막 상대는 헝가리였다. 실력보다 바닥난 체력 때문에 첫 세트를 12-15로 내주었으나 이후 내리 3세트를 따내 대한민국 올림픽 출전 사상 단체전-구기종목에서 첫 메달을 목에 걸었다.

④대한민국 개최 첫 올림픽… 서울올림픽(1988년)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 7년이 지난 1988년 9월 17일, 진한 코발트색의 서울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세계 160개국 1만 3600여 명의 선수단이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 모여 ‘화합과 전진’을 다짐하는 제24회 서울올림픽이 마침내 개막된 것이다. 낮 12시 20분쯤 노태우 대통령이 역사적인 개막 선언을 하고 12시 35분쯤 ‘베를린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이 들고 온 성화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에 빛나는 최종주자 임춘애의 손을 거쳐 점화자에게 건네졌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2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로 올림픽을 치른 스포츠 선진국이 되었다. IOC 산하 세계 167개국 NOC(각국올림픽위원회) 가운데 북한을 비롯 쿠바, 알바니아, 에티오피아 등 7개국이 불참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서울올림픽은 1972년 뮌헨 올림픽 이래 16년 만에 집단적 보이콧 없이 세계가 하나가 된 온전한 대회였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는 대회 직전 인종차별 국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친선 럭비경기를 펼친 뉴질랜드의 참가에 항의하는 아프리카 지역 26개국이 불참하고, 1980년 모스크바 대회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미국, 서독, 일본, 한국 등 67개국이 불참했다. 1984년 LA 대회는 서방 측의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 북한, 쿠바 등 11개국이 불참했다. 서울올림픽은 올림픽 주제곡처럼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너와 내가 하나가 된 단군 이래 최고·최대 행사였다. 소매치기들은 올림픽 기간에 휴업을 결의하는 것으로 동참하고, 자전거에 태극기를 달고 지구를 돌며 한국을 알린 나라사랑도 있었다. 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올림픽 주제곡 ‘손에 손잡고’는 LP 레코드, 카세트 테이프, 콤팩트디스크(CD)를 합쳐 그해에만 전 세계에서 600만 장, 이듬해까지는 800만 장이 팔렸다. 동양인이 부른 노래가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역대 올림픽 주제가 중에서도 최고의 히트곡이었다. 1989년 중국 천안문 사건 때는 시위대 사이에 이 노래가 유행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동독에서는 ‘벽을 넘어서’라는 가사 때문에 금지곡으로 묶였다.

“독일인의 정확성, 미국인의 기업가 정신, 일본인의 친절이 합쳐진 행사”

경기 진행도 깔끔했다. 1030개 종목 경기의 정시 진행률도 역대 최고인 97.2%를 기록, ‘코리안 타임’의 부정적 이미지도 씻어냈다. 서울올림픽이 아니었으면 늦어졌을 소련, 동독, 헝가리, 폴란드 등과의 공산권 교류도 올림픽 덕에 빨라졌다. 하늘도 도왔는지 태풍의 계절에 태풍이 없었고 북한의 테러가 없었으며 역대 올림픽 때마다 불거진 소송도 없었다. 한 외국 언론은 “독일인의 정확성과 미국인의 기업가 정신과 일본인의 친절이 합쳐진 행사”였다고 서울올림픽을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가 어떻게 올림픽과 같은 큰 행사를 치를 수 있는가를 보여준 능력시험장”이라고 치켜세웠다. 한 외국인은 “경제 기적에 이어 정치 기적 그리고 제3의 기적을 이뤄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경기 결과에서도 한국은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16일 동안 열전을 벌인 결과 금 12, 은 10, 동 11개로 세계 스포츠 강대국을 물리치고 4위를 기록했다. 홈그라운드의 텃세를 감안하더라도 세계 올림픽사를 새로 쓸 만한 놀라운 성적이었다. 소련, 동독, 미국은 각각 금메달 55개, 37개, 36개로 1~3위에 랭크되었다. 중국은 금 5개로 11위, 일본은 금 4개로 14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여자핸드볼이 금메달을 따고 복싱, 유도, 탁구, 레슬링에서 각각 2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양궁은 금메달 4개 중 3개를 휩쓸었다. 특히 김수녕은 여자 개인전과 단체전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어 한국 스포츠 사상 최초로 올림픽 2관왕이 되었다. 김수녕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인전에서는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단체전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8년 만에 출전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단체전 금메달을 따내 한국의 올림픽 출전 사상 혼자 4개의 금메달을 포함해 모두 6개의 메달을 목에 건 유일한 선수로 한동안 기록되었다. 다만 사격의 진종오가 올림픽 3연속 우승(2008 베이징~2016 리우)으로 통산 금 4·은 2개를 획득하면서 최다관왕 기록은 두 사람이 공동으로 갖고 있다.

⑤비인기-동계 종목 첫 금메달

하계 올림픽에선 1976년 양정모가 레슬링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나 동계 올림픽에선 좀처럼 메달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동계올림픽에서 첫 메달이 나온 것은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에서 열린 제16회 대회였다.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에서 김윤만이 은메달을 차지, 한국 사상 첫 동계올림픽 메달의 주인공이 되었다. 뒤이어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쇼트트랙에서 한국의 동계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이 나왔다. 김기훈이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금메달을 일궈낸 것이다. 한국이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에서도 1위에 오름으로써 김기훈은 한국 동계올림픽 사상 첫 2관왕에 올랐다. 이후 쇼트트랙은 한국의 독무대가 되었고 한국은 쇼트트랙 왕국을 건설했다. 마라톤에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내 손기정의 한(恨)을 풀어주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이른바 신세대들이 우리가 도저히 넘지 못할 것 같은 비인기 종목에서 금메달 소식을 전해주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박태환은 수영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장미란은 역도에서 세계신기록을 들어 올렸다. 양학선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체조 역사상 첫 금메달을 땄다. 특히 동계 올림픽에서 괄목한 성과가 있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선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의 여왕이 되었고 모태범은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금메달을 땄다. 이상화 역시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데 이어,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내 우리나라 스피드스케이팅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윤성빈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켈레톤에서 금메달을 따내 종목 이름도 모르던 우리 국민에게 색다른 기쁨을 전해주었다. NM

▲ 서울올림픽 개막식 모습.

박지연 기자 riz38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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