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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기사승인 2019.12.07  14:4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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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한강교 준공 50주년… ‘강남 개발’의 서막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는 대한민국 부의 상징이다. 이 두 구(區)가 서울시로 편입된 것은 1963년 1월 1일. 그렇다고 뭐가 달라진 건 아니고 여전히 논밭으로 이뤄진 시골이었다. 한적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이곳에 상전벽해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66년이었다. 1월 19일, 제3한강교(현재 한남대교)의 착공과 함께 강남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3한강교 준공과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강남 개발’의 신호탄

제3한강교를 세운 이유는 두 가지였다. 넘쳐나는 서울의 인구를 강 건너로 분산하기 위한 것이 첫 번째이고 안보상의 목적이 두 번째였다. 6·25 때 서울시민이 겪어야 했던 피난의 쓰라린 아픔을 또다시 겪지 않으려면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또 하나의 다리가 필요했다. 당시 한강에는 제1한강교(한강대교), 제2한강교(양화대교)와 광진교뿐이었다. 인구 급증에 따른 교통난은 물론 주택난 해결을 위해서도 강남과 강북을 이어줄 다리가 절실했다.
1966년은 ‘강남 신화’가 시작된 첫해였다. 소설가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를 동아일보에 연재한 것도, 조선일보에 ‘강남’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도 1966년이었다. 40살의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취임한 것도 1966년 4월이었다.
서울시가 건설부에 영동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지구 지정을 요청한 것은 1966년 9월이었다. 경부고속도로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강남에 뉴타운 도시를 만들려는 도시행정상의 필요도 있었다. 제3한강교에서 남쪽으로 7.6㎞, 9만2000평에 달하는 고속도로 용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컸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서울시가 자연상태에 있는 지주들의 땅에 길을 내고 공공시설을 만들어 구획을 정리해주는 대신 개발이익의 수혜자가 될 지주들로부터 일정한 토지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식이었다. 제3한강교 건립은 이땅에 ‘땅투기’와 ‘복부인’이란 말을 등장시켰다. 징후는 제3한강교 착공 1년 만에 나타났다. 착공 때만 해도 평당 200~300원에 불과하던 강남 일대의 땅값이 착공 1년 만에 평당 3000~4000원으로 급등한 것이다.
길이 915m, 너비 27m의 제3한강교가 준공된 것은 지금부터 50년 전인 1969년 12월 26일이었다. 영동개발의 주요 계기가 된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7일 준공되었다. 제3한강교의 준공과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제3한강교가 강남 땅값 상승에 불을 붙였다면 경부고속도로는 그 불에 뿌려진 기름이었다. 365만평의 영동 1지구에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된 것은 1968년 봄이었다. 472만평의 영동 2지구는 이보다 4년 늦은 1972년 시작되었다. 허허벌판이던 영동에 도로를 내고 상하수도와 전기시설 등을 설치하는 토지구획 정리사업은 수년간 계속되었다. 강남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반포동, 잠원동, 압구정동, 청담동, 도곡동, 신사동 등이 여기에 속한다.

▲ 제3한강교 개통 후의 모습

서울의 강남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강남특별시

구획정리를 마친 압구정지구, 청담지구, 도곡지구, 신반포지구 등에 건설부가 아파트를 짓겠다고 발표한 것은 1976년 8월. 한동안 땅 파는 소리와 망치 소리가 영동 전역에서 끊이질 않았다. 강남에서 영동지구보다 먼저 개발된 곳은 구반포지구였다. 구반포지구 개발은 소양강 다목점댐 등으로 홍수위험이 사라진 한강 하류의 유수지나 둔치 등의 공유수면을 매립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70년 7월부터 1972년 6월까지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한 결과 지금의 동작대교 남단에 16만 평의 택지가 조성되었다. 주택공사가 이곳에 22~42평 규모의 5~6층 아파트 3700여 호를 지은 것은 1973~1974년이었다. 지금의 구반포다. 영동아파트 단지는 아파트값 프리미엄과 아파트 가수요라는 새로운 현상을 만들고 또 국민의 주생활이 개인주택에서 아파트로 전환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강남 고속터미널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해 영동개발을 촉진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강남 고속터미널은 1976년 4월 착공되어 9월 1일부터 승객을 실어날랐다. 1977년 7월 1일을 기해 강북의 터미널이 모두 폐쇄되면서 고속터미널의 강남시대가 시작되었다.
강남 개발의 또 다른 축은 잠실 개발이었다. 잠실은 오랫동안의 모래 퇴적으로 생겨난 하중도였다. 이곳 역시 다목적댐 건설로 홍수 걱정이 사라지자 1971년 6월부터 공유수면을 매립하는 방식으로 개발을 진행했다. 공유수면 매립지와 국공유 하천부지를 합친 땅은 340만 평이나 되었다.
주택공사가 잠실 1~4단지에 5층 높이의 7.5~17평 아파트 334개동(1만5250가구)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75년 2월이었고, 잠실 5단지에 15층짜리 34~36평의 중형아파트 30동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76년 8월이었다. 입주는 1978년 7월 1~5단지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7.5~36평 아파트 364개동 1만9180가구분을 3년 9개월 만에 완성해 10만 명의 주거단지를 조성한 것은 한국 아파트공사 사상 최대 규모의 공사였다. 세계적으로도 10위권 안에 들었던 대역사였다.
개발이 완료될 당시만 해도 강남은 전 국토의 0.1%에 불과한 서울의 강남이었다. 그러나 점차 땅값이 폭등하고 부와 권력이 집중되면서 강남은 서울의 강남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강남특별시로 신분 상승을 했다.

■지미 호파는 美 노동운동의 전설… 최근 개봉 영화 ‘아이리시맨’은 그의 삶과 실종 이야기

70대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신작 ‘아이리시맨(The Irishman)’이 최근 개봉되었다. 아일랜드 출신 청부 살인 업자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 니로)의 시점에서 미제 사건으로 남은 미국 트럭 노조 위원장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을 재구성했다. 호파를 소재로 한 영화는 과거에도 2편이나 상영되었는데 또 한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호파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수 편의 영화로 제작되는 것일까.

미국의 대공황기는 미국 노동운동의 전성기

1929년 대공황이 미국에 엄습했을 때 루스벨트 정부는 기업과 노동자 사이의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더 이상 기업의 편에 서지 않았다. 대공황의 원인을 소비 부족에서, 또 소비 부족의 원인을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착취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삶이 윤택해야 소비가 늘고, 소비가 늘어야 기업의 상품이 팔려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당시 루스벨트의 생각이었다. 이는 뉴딜 정책의 골간이었다. 이 때문에 대공황기가 미국 노동운동의 전성기를 가져왔다는 게 미국 학계의 정설이다.
노조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을 보장하고 기업의 부당 노동행위를 명시한 ‘와그너법’(1935년)이 법제화된 것도 대공황기였다. 이 때문에 대공황기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 노사 갈등이 첨예했다.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1934년과 1937년은 노사 분쟁이 가장 많았던 해로 기록되고 있다.
1933년에 폐지된 금주법도 노사 분쟁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마피아는 조직의 젖줄 역할을 했던 금주법이 폐지되자 새로운 돈벌이가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 곳이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노동조합이었다. 대공황기를 틈타 팽창하던 노조는 조합원들로부터 수백 수천만 달러의 조합비를 거두고 있어 마피에게 노조만큼 좋은 먹잇감도 없었다. 노조 입장에서도 기업과 구사대를 상대로 한 싸움에 마피아를 동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피아는 쓸 만한 파트너였다. 이처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노조와 마피아는 기업을 상대로 살인, 방화, 약탈,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때부터 '노조와 범죄 조직은 하나’라는 극도의 노조 혐오증이 생겼다.

호파의 활동 무대는 ‘국제트럭운전사조합’

지미 호파(1913~1975)는 바로 그런 시기에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미국 노동운동의 전설이다. 호파는 인디애나주 소도시 브라질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대 후반 창고 일꾼으로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고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3년 20살 나이로 트럭운전 노동자 파업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그의 활동 무대는 1930년 결성된 팀스터스 즉 ‘국제트럭운전사조합(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s·IBT)’이었다. 호파는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해 1946년 지부장을 거쳐 1952년 전국 부위원장으로 부상했다. 그 사이 팀스터스의 조합원수도 급증했다. 출범 당시 10만 명 안팎이었던 조합원은 1950년대 초반 10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50년대 들어 미 정부는 조직 범죄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1956년 팀스터스와 마피아가 연계된 비합법적 활동이 드러나자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이 지휘하는 노동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의 변호사이자 케네디 의원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는 팀스터스 위원장이 수십만 달러의 노조 자금을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을 밝혀내 1957년 감옥으로 보냈다.
호파가 그 틈을 타 1957년 새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로버트 케네디는 새 위원장 호파의 뒤까지 캐면서 호파와 케네디가(家)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다. 위원회는 1957년 호파까지 기소했으나 배심원들의 혐의 불인정으로 1라운드는 호파의 승리로 끝났다.
이런 와중에도 호파는 노조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협상력을 바탕으로 노조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미국에 노동조합이 생긴 이래 숱한 노조 지도자가 명멸했지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도자는 소수에 불과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만 전체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기 보다는 자기 조합의 이익만을 우선했다.
문제는 도덕성이 없는 노동운동은 권력에 탄압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호파가 간과했다는 것이다. 도덕성은 노동운동가가 각별히 주의해야 할 덕목이었는데도 호파는 목적 달성을 위해 ‘도덕’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멍에를 벗어던졌다. 결국 범죄조직과 결탁하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목숨을 건 마피아와의 거래, 불리한 기사를 쓰는 기자에 대한 협박, 심지어 살인과 방화까지도 서슴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다.

“노동계의 대통령” “노조원의 우상”으로 불리면서도 부패와 독직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해

▲ 지미 호파를 표지로 실은 ‘라이프’지(1959년 5월 18일자)

호파에게 진짜 위기가 찾아온 것은 케네디 형제와 결탁한 AFL-CIO(미국 산별노조총연맹)가 팀스터스를 연맹에서 추방하고, 1961년 케네디 형제가 각각 대통령과 법무장관이 되고나서였다. 이 과정에서 오고 간 신경전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온다. 로버트 케네디가 호파를 가리켜 “미국의 최대 적”이라고 비난하며 마피아와의 연루설을 끊임없이 제기하자 호파는 “이봐, 애송이, 트럭 몰아봤어? 노동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 말하지 마. 스타가 되고 싶으면 차라리 국회의사당 지붕 위에서 떨어지는 것이 나을 거야.”라고 면전에서 독설을 퍼부었다는 일화다.
호파는 케네디 형제와 신경전을 벌이는 중에도 조직확대 사업에 더욱 매진하고 1964년 북미 도로상의 모든 트럭 기사들을 포괄하는 단일의 ‘전국화물기본협정’을 타결지었다. 이는 미국 노동조합 사상 최대 업적 중 하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호파는 “노동계의 대통령”, “노조원의 우상”으로 불렸으나 부패와 독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호파를 변호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마피아와의 결탁은 사실이지만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의 결탁은 눈감아주고 왜 호파에게만 문제를 뒤집어씌우냐는 항변이었다. 공금 유용에 대해서도 마피아든 누구든 거래를 잘해 노조원의 연금을 키워 조합원에게 혜택을 돌려준다면 그것이 최선 아니냐며 반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호파는 연금 운영면에서도 발군이었다.
그러나 호파에게는 결정적인 권력이 없었다. 결국 1964년 대배심 매수시도 혐의로 8년형을, 마피아 지도자들에게 노조 연금을 불법대출한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합계 13년형을 선고받은 호파는 항소했지만 실패해 1967년 3월 펜실베이니아의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직전 자신의 오랜 동료이자 부위원장인 프랭크 피츠시먼스를 위원장 권한대행으로 임명했으나 피츠시먼스는 호파가 수감되자 호파와 거리를 두고 호파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
그러던 중 호파는 ‘향후 10년 동안 노조활동을 하지 말라’는 닉슨 대통령의 타협안을 받아들여 1971년 12월, 수감 5년만에 석방되었다. 호파는 이 금지조항을 뒤집으려고 소송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과거 심복이었던 새 위원장과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식당 지하 주차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1975년 7월 30일, 갑자기 호파가 실종되었다. 2명의 마피아 조직원을 디트로이트의 한 식당에서 만나겠다며 집을 나섰다가 식당 지하 주차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호파의 승용차를 주차장에서 발견했으나 호파의 흔적이나 호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줄 단서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후에도 몇 년 동안 FBI 등의 수사가 있었으나 별 다른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지목한 유력한 용의자는 두 그룹이었다. 하나는 실종된 날 만나기로 한 2명의 마피아 조직원이고, 다른 하나는 팀스터스 간부들이었다. 하지만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해 두 그룹 모두 옭아매지는 못했다. 이후 실종과 사인을 둘러싼 각종 추측만 난무할 뿐 어느 것 하나 밝혀진 것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파는 법적으로는 1982년 7월 30일 사망 처리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호파의 아들인 제임스 호파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팀스터스의 위원장을 오랫동안 역임했다는 것이다. 아들 호파는 1998년 선거에서 처음 위원장으로 당선된 후 2001년, 2006년, 2011년, 2016년 선거에서도 승리해 5연임에 성공했다.
호파의 삶이 워낙에 극적이고 실종도 미스터리여서 호파와 팀스터스를 소재로 삼은 영화가 미국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알려진 영화 중 첫째는 노먼 주이슨 감독의 ‘F.I.S.T.’(1978년)다. 실베스터 스탤론이 영화 ‘로키’ 이후로 처음 주연을 맡은 영화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B급 영화로 평가받지만 미국 노동조합운동의 어두운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탁월하다는 평가도 있다. 영화 ‘호파’(1992년)도 호파의 삶에 대한 영화다. 대니 드비토가 감독하고 잭 니콜슨이 주연을 맡았으나 평은 그저 그랬고 흥행도 별로였다. NM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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